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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제국(蒙古帝國) 제3회; 고려조북벌(高麗朝北伐) 시도

 

I. 대후세적영향[對後世的影響; Impact on future generations]

 

I-1. 긍정적 전망 [正面的看法; Positive View ]

몽고제국의 전성시기(鼎盛時期)에 동아(東亞)로부터 중아, 서아, 동구[中亞、西亞、東歐]에 이르는 미증유(未曾有)의 거대한 제국의 통치이었다. 몽고제국의 건립은 동서방의 문화, 기술교류를 가속화하였고, 다민족의 문화교류를 촉진시켰다. 첫번째로 그리고 유일하게 사주지로(紗綢之路)가 오로지 제국 하나에 의하여 관리를 받았으며, 동서방의 상업과 무역의 왕래로 하여금 기타 분열시기에 비하여 훨씬 용이하였다.

 

I-2. 부정적 의견과 이에 관련된 반론 [負面的看法與相關異議; Negative views and related objections]

 

성길사한은 일찍이 “청천아래(青天之下)에 모두 몽고인의 목장을 만들겠다’고 몽상(夢想)을 하였다. 대단히 많은 고대문헌이 모두 기록하기를, 몽고의 확장과정중에 무수한 고대문명이 훼멸[毀滅; Destroy]됨을 만났고, 무수한 성시[城市; City]가 파괴되었고, R. J. Rummel 계산에 의하면, 몽고제국이 침입하여 3000만인이 피살(被殺)당했고, 몽고제국이 서방으로 확장과정 중 2,000만인이 도살[屠殺; Massacre]당하였다: 전체 아주의 인구분포 또한 중대변화를 발생시켰다.

David Nicole이 Mongol Warlords에 쓰기를: “공포와 대규모의 몰살은 몽고인이 여러번 시행하고 연습했던 전술이다.” 이사란세계의 동반부[伊斯蘭世界的東半部; Eastern half of the Islamic world]는 공포의 사망과 몰살을 경험하였다. 1219년부터 1260년까지 대학살과 기아으로 파사[波斯; Persia]의 총인구가 1200만에서 110만으로 내려왔다!

중아하중지구와 대호라산[中亞河中地區和大呼羅珊: Central Asia and Greater Khorasan]에 있는 희랍-파극특리아왕국시기[自希腊—巴克特利亚王国时期; Since the time of the Greek-Bactrian kingdom]에 건립(建立)된 수리관개계통[水利灌溉系統; Water conservancy irrigation system established during the Kingdom of Bactria]을 철저히 파괴하였고, 동시에 무수한 양전(良田)이 황폐되어 사막을 이루었고; 서아에서는 아잡덕제국과 고파비륜시기[阿卡德帝國和古巴比倫時; Akkadian Empire and Babylonian Time]에 건설한 수리관개계통[水利灌溉系統; Water Conservancy Irrigation System]이 철저히 파괴되고, 대량의 양전[良; Good land]이 황무지(荒蕪地)로 변했다.

통계에 의하면 서아지구경지면적(西亞地區的耕地面積)은 몽고인침입 이전의 60%가 지금까지 회복을 못하였다. 중아, 서아와 동구는 최소한 70개 도시를 몽고군이 몰살시켰고, 어떤 도시는 여러차례 학살을 당하였고, 그지역 사람들에게 거대한 재난과 고통의 기억을 일으켰다. 역사학자들이 견적하기를, 흉아리왕국[匈牙利王國; Kingdom of Hungary(1241-1243)]은 당시 200만인구중 절반이 몽고침입으로 사망하였다. 기보라사[基輔羅斯; Kievan Rus]는 거의 모든 도시가 파괴되었고, 투항자는 노예가 되었고, 대부분은 가혹한 노역으로 빨리 사망하였고, 포로는 몽고군에 가입시켜 계속 서정(西征)을 하였다.

그 인구의 대략 반은 몽고침입으로 죽었다. 그외, Colin McEvedy의 세계인구사지도집《世界人口史地圖集; Atlas of World Population History 》(1978)에서 계산하기를, 아국구주부분의 인구[俄國歐洲部分的人口; The population of the European part of Russia]는 750만에서 700만으로 하강하였고, 중국지구의 인구는 몽고침입의 70년간 현저히 하강하여 몽고침입이전 (1200년)에 중국; 금조, 서하, 남송, 대리국[金朝、西夏、南宋、大理國]을 포함한 인구는 대락 14,400만, 혹시 그 이상일 수도 있었는데, 1278년에 이르러 (1279년에 완전점령) 오로지 7,000만인 뿐이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오늘날 다른 계산법이 있어서, 다른 의견이 있으니, 인구수의 극적인 하강은 인구통계의 불완전과 대규모의 생략 그리고 몽고군이 전파한 전염병의 영향일 것이라고 믿는다.

통계에 의하면, 서아지구의 경지면적이 몽고인침입이전의 60%가 지금까지 회복되지 못하였다. 중아, 서아, 동구에서 최소 70도시는 몽고군에 의하여 몰살을 당했다. 역사학자들이 견적하기를, 흉아리왕국[匈牙利王國; Kingdom of Hungary(1241年—1242年)]은 당시 200만인구중 반이 몽고침입으로 죽었다. 기보러사[基輔羅斯; Kievan Rus]의 거의 모든 도시는 최훼[摧毀; Destroy]되고, 투항자는 노예가 되고, 그들 대부분은 심한 노역으로 빨리 사망하였고, 전쟁포로는 곧 몽고부대에 가입시켜 서정(西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몽원사학가 걸극 위택불덕[蒙元史學家 傑克·威澤弗德; Mongolian Yuan Historian, Jack Weatherford]이 지적하기를, 성길사한은 민중이 자유롭게 자신과 몽고인의 관한 최악과 최난의 소문을 전파하도록 윤허하였다. 당시 그는 이러한 공포를 전파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병사의 극악한 행위를 통하였을 뿐 아니라, 문인의 붓으로도 이렇게 통할 수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몽고인이 이러한 선전적기구(宣傳的機器)를 조종하여 전쟁중에 사망자수를 자주 과장시켜서 공포를 퍼뜨리는 의도를 조종하였다.

그는 또한 지적하기를: 「비록 몽고군대의 관행이 일종의 미증유의 살육이며, 또한 살인을 일종의 정책으로 취급하였고, 이는 긍정적이며, 분명히 그들은 돌이켜 사망이 공포를 제조하는 일종의 사고방식이 되었을뿐 아니라, 또한 그들은 일종의 중대한 영향을 가졌고, 또한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고 두렵게 하는 방식이며, 이 시대의보편적관례(那個時代的普通慣例)에서 다 이탈(脫離)

몽고인은 엄한 형벌과 고문을 실시했을 뿐 아니라, 지체를 자르거나 [斷肢毀體; Mutilation]거나 폐인(廢人)을 만들었다. 이 시대에 전쟁은 통상 일종의 공포적형태로 진행하였고, 또한 같은 시대의 기타 통치자들은 공개고문을 통하여, 혹은 팔다리를 절단하는 방식을 듣게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첵략을 사용하여, 민중에게 공포와 경계(驚悸)를 주입하였고…중국으로부터 구주에 이르러, 문명세계의 통치자와 종교영수들은 이러한 사람을 놀라고 두렵게 하는 수단에 의존하여서, 공포를 통하여 자기의 민중을 통치하고, 놀랍고 두렵게 함을 통하여 적인의 신심(信心)에 이러한 충격을 주었다.

 

동시대 문명군대의 공포행위[同時代文明軍隊的恐怖行為]와 더불어 비교하자면, 몽고인은 흉맹(兇猛)과 잔인적행위(殘忍的行為)를 통하여 공포를 이르켰을 뿐 아니라, 이리하여 그들은 쾌속하고 유효한 정복을 하고, 그들에게 부인(富人)과 권세자(權勢者)의 생명을 완전히 경시(輕視)하여, 공포를 일으켰다;공포의 소문 전파를 비교하여 보면, 처음 몽고인에 투항한 성시(城市)에게 관대하고 인자하게 대접하였고, 이리하여 그 성시의 거주민은 천진하게 몽고인의 능력을 의심하였다.

투항후 많은 성시는 충순(忠順)하게 복종하다가 일단 몽고인이 그들의 국가를 떠나면, 그들은 곧 반란을 일으켰다. 몽고인은 소수의 관원에게 관리진행을 하도록 남겼고, 아울러 당연히 몽고주력부태는 재차 그길로 돌아오지 않을걸로 생각했다.

이러한 성시에 대하여 몽고인은 무자비하였다: 그들은 신속하게 반란지역에 돌아와서 철저히 그들을 파멸하였다. 이렇게 철저히 파멸당한 성시는 재차 반란을 할 도리가 없었다.

 

II. 몽고제국과 흑사병( 蒙古帝國和黑死病)

 

통상 알려진 바에 의하면, 1346년 몽고흠찰한국군대가 흑해항구성시잡법[黑海港口城市卡法; Black Sea Port City Kaffa], 또는 우역극법, 현오극난성시 비오다서아[又譯克法,現烏克蘭城市費奧多西亞; Also Kefa, now the Ukrainian city of Feodosia]에 공격할 때, 앓던 쥐에 전염되어 죽은 사람시체를 포석기[拋石機; a stone thrower]를 사용하여 성내(城內)로 던졌고, 이리하여 서방사회에 기록이래 제1차세균전(第一次細菌戰)이었다. 서역[鼠疫; Plague or Pest; 흑사병]는 원래 중아(中亞)가 원산지였으며, 그 휴대자는 토발서[土撥鼠; Ground hog]이었다.

몽고제국의 전서역(前鼠疫)은 일찍이 여러차례 중국으로 전입되었고, 그 이유로 비록 중국이 이미 지역적 서역전염이 있었지만, 오로지 중국의학[中醫; Chinese Medicine]에서는 서역과 더불어 반복 투쟁중 점차 경험을 누적하였으며, 구주인은 전부터 한번도 서역에 접촉한 적이 없었다.

잡법의 일개 열나아상인[熱那亞商人; Genoese Merchant]이 병균을 가진 도조[跳蚤; Fleas 즉 벼룩]를 무의식적으로 갖고 이대리의 열나공화국[意大利的熱那亞共和國; Republic of Genoa, Italy]에 이르러 이에 이 서역이 구주에 광범위하게 전파되어서, 최종 1348 - 1349년까지 2,000만인의 사망을 일으켰고, 인간의 색이 변하는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이 되어 서역환자는 피하유혈[皮下淤血; Subcutaneous congestion]을 일으켜 전신이 흑색이 되어 죽었다. 여기에 또한 서역에 관한 이론은 사주지로상의 상인이 이 세균을 갖고 중동에 이른 연후 다시 구주로 전파하였다는 설명이다.

1348년에서 1349년까지 흑사병으로 당시 구주(歐洲)에서 3분지1의 인구를 잃었고, 대인적관심적인문주의[對人的關心的人文主義隨之覺醒; The humanism of caring for people awakens]가 따라서 각성(覺醒)하였다.. 구주인문주의문학적제일부대표작[歐洲人文主義文學的第一部代表作: The first masterpiece of European humanistic literature]《십일담; 十日談; Decameron》은 박가구[薄伽丘; Boccaccio]가 흑사병이 범람창궐하던 시기를 그렸고, 1348년에 발생한 의대리[意大利: Italy]의 두려운 온역[瘟疫; Plague]을 묘술(描述)하였다. 구주는 이리하여 문예부흥의 서광을 맞이하였다.

 

Black death [鼠疫; 흑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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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came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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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대각국적영향[對各國的影響:Impact on countries]

몽고제국은 동, 중, 서아와 동구[東、中、西亞和東歐]에 걸친 거대한 강역(疆域; 지역)이었다. 몽고제국이 쇠패(衰敗)한 후 전몽고흠찰한국[前蒙古欽察汗國屬國; Dependent State of the former Mongolian Qincha Khanate]의 막사과공국[莫斯科公國; Principality of Moscow]는 일어나서 흠찰한국의 상당한 일부의 토지를 점령하고 후에 유명한 아라사제국[俄羅斯帝國; Russian Empire]이 되었다.

막사과공국통치자는 몽고흠찰한국시대에 일찍이 몽골에 의하여 멀리서 지배받았던 불랍기미이대공[弗拉基米爾大公; Grand Duke Vladimir]이었고, 아울러 몽고를 대표하여 세금을 거두고, 머리를 들어 올려 보았으니, 몽고인은 그들이 점령한 영토를 거의 시찰하지 아니하였다. 오늘날 세계 최대국가 아라사의 대부분 영토는 당시의 몽고제국의 일부분이었다.

또 한 구아주의철학가특로별자과이[歐亞主義哲學家特魯別茨科伊; Another Eurasian philosopher Trubetskoy]는 그의 경전저작논아라사문화 중적도란성분[論俄羅斯文化中的圖蘭成份; On Turan Elements in Russian Culture]에서 아라사제국이 객산과 아사특납한[喀山與阿斯特拉罕; Kazan and Astrakhan]의 소멸후 강국(強國)을 이루었다고 지적하였다.

중세기에 이사란교중의 격진교파아살신파[中世紀伊斯蘭教中的激進教派阿薩辛派; The Assassins, the radical sect of Islam in the Middle Ages]는 몽가한[蒙哥汗; Mongohan]을 암살하였기에, 몽고제국과 싸웠고, 최후에 경교[景教; Nestorianism]의 영향을 깊이 받은 욱열올[旭烈兀; Hulagu]은 멸망하고, 이 교파가 암살을 진행함으로써 공포통치시대로 진행하였다.

구주에서는 몽고철기가 수십성을 떨어뜨리고, 많은 국가를 점령하여, 구주군주(歐洲君主)들은 십분 공황에 떨었고 후 19세기에 황화일설[“黃禍”一說; “Yellow Peril”]이란 용어가 생겨서, 몇가지 기술에 의하면 동아지역 황인종은 위협을 갖고 온다고 지적하는데, 이는 13-14세기의 몽고제국시기로 소급하여 쓰고 있음을 의미한다.

 

일본은 몽고군이 침입을 진행하여서 전국범위로 경제와 군사를 개편하려는 중압(重壓)아래에서 , 전국의 자원사용은 한계에 도달하였다. 일본의 막부(幕府)는 국정의 권력을 천황(天皇)에게 주지 않고 계속 통치하였다. 그들은 그후 한동안 계속 구주(九州)의 방위를 강화하였고, 허다한 군사시설이 여러해 후에 유효하였다. 전후 화폐경제영향(貨幣經濟影響)을 받아서, 막부는 원병에 대항한 관병(官兵)에게 줄 은상(恩賞)이 없어서, 국내모순이 악화되었고, 최후로 제호천황(醍醐天皇)이 겸창막부(鎌倉幕府)를 없앴다.

 

Russian Empire

Russian Empire | History, Facts, Flag, Expansion, & Map | Britannica

 

IV. 고려우왕(高麗禑王)의 요동출정 시도(遼東出征試圖)

 

조선반도(朝鮮半島)에서는 고려왕조(高麗王朝)가 몽고제국군대의 정벌을 누차 받아서 결국 귀순(歸順)하여 부용국[附庸國; Vassal states]의 하나가 되었다. 몽고인이 건립한 원조(元朝)는 한인주원장(漢人朱元璋)에게 멸망당했고, 한인은 몽고인통치에서 벗어나, 새 왕조, 명조(明朝)를 건립하였다. 몽고에 대한 고려국왕의 충성은 접수될 수없어서, 장군이성계(將軍李成桂)에게 명제국(明帝國)을 정벌하라고 하였다. 무슨 의미인지? 하기에 설명을 참조

그러나 명제국에 친근한 이성계는 압록강부근에서 군사를 돌이켜 조정에 돌아와서 병변(兵變)을 하여 고려국을 없애고 친명적조선왕조(親明的朝鮮王朝)를 세웠다.

여기에 문제가 된 부분을 다시 해석해보면; “고려왕의 충성은 몽고의 몰락을 받아드릴 수없어서, 장군이성계에게 명제국을 정벌하라고 하였다?”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아래에서 논하겠다.

<原文> 在朝鮮半島,高麗王朝在蒙古帝國軍隊屢次大舉征伐後,歸順於蒙古,成為附庸國之一。蒙古人建立的元朝被漢人朱元璋滅亡後, 漢人脫離蒙古人統治,建立了新的王朝──明朝。忠於蒙古的高麗國王無法接受,遂派出將軍李成桂征伐明帝國。但是親近明帝國的李成桂從鴨綠江附近舉師回朝,兵變推翻高麗國,建立親明的朝鮮王朝。

 

IV. 최영(崔瑩)장군의 북벌(北伐)시도와 이성계(李成桂)장군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에 관하여

 

상기의 중국문헌 開放文學에서 인용한 고 려왕조의 친원(親元)정책과 반명(反明)정책에 대한 설명이다. 즉 “고려왕의 충성은 몽고의 몰락을 받아드릴 수없어서, 장군이성계에게 명제국을 정벌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여기에 위키백과에서 나온 자세한 설명을 인용하겠다.

<원문>

1388년, 명나라 홍무제 주원장의 요구로 “철령[鐵嶺; Tieling[을 따라 이어진 북쪽과 동쪽과 서쪽은 원래 개원로(開元路)에서 관할하던 군민(軍民)이 소속해 있던 곳이니, 중국인·여진인(女眞人)·달달인(達達人)·고려인(高麗人)을 그대로 요동(遼東)에 소속시켜야 된다.”라는 친서(親書)가 전해졌다. 철령 이북의 고려 영토를 원나라 영토였다는 이유로 반환하라는 이같은 요구가 이르자 명나라와의 실력 대결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고려는 1369년에 공민왕(恭愍王)부터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어왔는데, 우왕 때의 친원정책 이후 명나라는 무리한 세공(歲貢)을 요구하고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절하는 등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기 일수였다. 요동은 남만주 요하[遼河; Liaohe]의 동쪽 지방으로, 1360~70년대 초에 고려는 이 지역의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이곳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에게까지 통치 영역을 넓히고자 세 차례 출정해 일정한 성과를 거둔 적이 있었다.

1388년은 우왕(禑王)의 심복인 최영이 이성계를 끌어들여 친위 혁명을 이룩했다. 우왕의 왕권을 위협하던 집권세력인 이인임, 임견미, 염흥방, 도길부 등이 제거되고, 우왕의 왕권을 지지하는 최영이 이성계와 더불어 연합정권을 수립했다.

이후 명(明)의 무리한 철령위(鐵嶺衛) 요구가 이어지자 우왕과 최영은 요동정벌을 단행하게 된다. 우왕은 서경(西京, 평양)에 머물면서 전국에서 5만 여명의 군사를 징발하고 압록강에 부교를 만들어, 최영은 팔도 도통사(八道 都統使),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左軍 都統使),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右軍 都統使)로 삼아 요동정벌군을 구성하였다. 조민수의 휘하에는 서경도원수 심덕부, 양광도도원수 왕안덕, 경상도상원수 박위, 조전원수 최공철 등이 소속되었고, 이성계의 휘하에는 안주도원수 정지, 안주도상원수 지용기, 조전원수 배극렴, 이지란(이두란), 이화 등이 소속되었다.

요동 출정은 본래 이성계의 본의와 소원은 아니지만 출정군은 5월 24일(음력 4월 18일) 평양을 출발하여 6월 11일(음력 5월 7일)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진주하였다. 때마침 큰 비를 만나 강물이 범람하고 사졸(士卒) 중 환자가 발생하게 되자, 이성계는 군사를 더 이상 진군시키지 않고 좌군 도통사(左軍 都統使) 조민수(曺敏修)와 상의, 요동까지는 많은 강을 건너야 하는데 장마철이라 군량의 운반이 곤란하다는 등 4가지 불가론을 왕께 올리며 회군을 청하였다. 이후 다시 한 번 간해 정 출병을 할 것이면 가을에 하자는 의견을 냈으나 우왕과 최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성계와 조민수는 다시 회군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지만, 평양에 있던 우왕과 팔도 도통사(八道 都統使) 최영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과섭찰리사 김완을 보내 속히 진군(進軍)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이성계 등은 또 한 번 평양에 사람을 보내어 회군시킬 것을 청하고 허락을 구하였으나 평양에서는 역시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이 이에 이르자 이성계는 마침내 회군의 뜻을 결심하고 드디어 6월 26일(음력 5월 22일) 회군하였다.

돌연한 회군에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서 송도(松都, 개경)로 급히 귀경하여, 이성계군에 반격해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황에도 불구하고 이성계와 조민수의 선발대를 격파하고, 이후 조민수의 본대까지 격파하는 활약을 보였으나, 결국 전력의 압도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성계,조민수 군에게 체포되었다.

고려군 최영은 회군 9일 만인 7월 4일(음력 6월 1일)에 개경에 당도한 이성계와 조민수에게 잡혀 고봉현(高峰縣, 고양)에 귀양 갔으며, 그 해 12월에 개경으로 압송돼 처형되었고, 우왕은 강화도로 추방됐다가 역시 1년뒤 아들 창왕과 함께 처형당하게 된다.”

 

나의 이해는 다음과 같다.

원조멸망元朝滅亡)연도: 1368년

요동출정(遼東出征)연도 ; 1388년 내지 1389년

우선 나는 철영(鐵嶺)과 위화도(威化島)의 위치를 지도에서 찾았다.

중국문헌 개방문학에서: 고려왕의 충성은 몽고의 몰락을 받아드릴 수없어서, 장군이성계에게 명제국을 정벌하라고 하였다.

이는 어불성설이다. 원이 망하여 몽고고원으로 달아나 버린게 1368년인데, 고려 우왕과 최영장군이 원나라를 다시 복구하자고 명나라를 정벌했단 말인가? 개방문학에서 근거없는 소리를 하였다.

여기에 위키백과의 내용이다: 명나라가 고려와 사이가 나빠서 여러가지 제약을 주었고, 게다가 예전부터 고려인이 살았던 “철령(鐵嶺)을 따라 이어진 북쪽과 동쪽과 서쪽”을 명나라 영토로 반환하라고 하였기에, 우왕과 최영장군은 친원(親元)정책이 아니라, 반명(反明)정책으로 요동정벌하여 아직 안정되지 못한 명제국군과 싸우려고 했다고 믿는다. 물론 고려군이 명군과 할 전투에서 얼마나 승산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게다고 충성심이 전혀 없는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끌었던 군이 무슨 싸움을 제대로 하였겠는가? 큰 의문이다.

그런데 나의 빈약한 논리로 보면, 그 옛날 우리조상 고구려가 신라의 간계(奸計)로 당에게 패하여 멸망(AD 668)한지 700여년간 그 누가 잃어버린 고구려 강토를 회복하자는 말이나 생각을 하였겠는가? 한번 해 볼만한 의거(義擧)였다. 하지만 고려의 반역자(叛逆者) 이성계를 대장으로 삼았으니, 일은 처음부터 틀려버렸다. 이성계는 감히 압록강을 건너지도 못하고 위화도에서 꿈틀거리며, 조민수와 역적모의(逆賊謀議)를 끝내고 겨우 돌아왔다. 그런데 철영[鐵嶺: Tieling]을 찾아보니 이는 Liaoning(遼寧省)보다 북쪽에 있었으니, 만주의 일부였고, 잃어버린 고구려 옛땅의 일부분이었다. 한번 기회를 엿보았지만 애석하게도 시작도 못하고 끝냈다.

나로서는 오로지 우왕과 최영장군의 의기에 감동할 뿐이다.

 

Maps 鐵嶺(Tie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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威化島(Wihwa-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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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n Ho Chung - Jan 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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