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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고갱

2017.11.12 08:42

노영일*68 Views:193



고 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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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때 스위스 사는 세째 딸이 손주들을 데리고 놀러 왔다. 마침 시카고 미술관에서 고갱 특별전을 해서 함께 구경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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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제목은 “Gauguin, Artist as Alchemist”였다. 왜 고갱을 연금술사 같은 화가라고 했을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연금술사는 하찮은 금속들을 도가니에 넣어 섞어서 귀중한 금속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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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Eugene Henry Paul Gauguin)은 1848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르 나시오날 이라는 신문의 정치부 편집장이었던 아버지 클로비 고갱과 페루혈통의 어머니 알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1848년 2월 프랑스혁명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클로비는 가족을 데리고 처가가 있는 페루 리마에 이주하여 신문사를 차리기로 계획 하고 페루로 떠난다. 그러나 그는 여객선 안에서 심장마비를 이르켜 사망한다. 그래서 폴 고갱은 1849-1854년 까지 리마에서 가난하고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다.

1854년 할아버지의 유산이 있는 프랑스의 오를레앙으로 다시 이주하여 어머니의 삯바느질로 어렵게 살았다. 그는 선박의 견습도선사가 되어 상선을 타고 남미, 북극등 지구촌 여러곳을 여행하였다. 1871년 인도에 있을때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다. 그는1872년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와 어머니 친구인 구스타프 아로자의 소개로 증권거래소 점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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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덴마크 여성인 메테 소피 가트와 결혼하여 경제적으로 윤택해 졌고 에밀 (1874), 알린 (1877), 클로비 (1879), 장 르네 (1881), 폴 (1883) 5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 무렵 그림에 흥미를 갖기 시작해 인상파 작품을 수집하고 주말마다 화실에 나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1876년 처음 살롱에 출품하여 피사로와 교분을 갖고 1880년 제 5회 인상파전을 계기로 단골멤버가 되었다. 1882년 주식시장의 붕괴로 직업을 잃고 35세에 전업화가가 되어 세잔느, 기요맹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의 나이가 35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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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서 막내 손녀와 함께.

생활이 어려워 지자 싸구려 동내인 루앵으로 이사하고 아내와 자주 다투다가 코펜하겐으로 이주하였으나 결국 처자를 그곳에 남겨두고 파리로 돌아왔다. 1886년 도시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브리타뉴의 퐁타방(Pont-Aven)으로 이사한다. 이곳에서 인상파의 외광묘사 (外光描寫) 를 버리고 고갱 특유의 장식적 화법을 개발하였고 토기, 도자기제작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평면적 채색으로 장식적인 그림을 그렸다. 원근법을 무시한 화면 분할 방식에 원색의 과감한 채색으로 현실과 상상을 접목한 탈인상주의는 인상파의 종말을 고하였고 그래서 그는 최후의 인상주의 화가로 불려진다. 이 시기의 작품은 후일 세뤼지에, 드니, 보나르 등 나비파 (Nabis 波)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마티스의 야수주의(Fauvism), 뭉크와 독일의 표현주의 (Exprssionism), 피카소의 입체주의(Cubism), 르동의 상징주의(Symbolism), 나아가 추상주의 (Abstractionism) 등 20세기 미술의 모험시대를 여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그는 근대회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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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와 고갱이 같은 소재로 그린 그림.

토기에서 비롯된 원시적인 관심은 1887년 파나마를 거쳐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 섬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나 향수병에 걸려 다음해 파리로 돌아왔다. 이때 작품은 원시주의 미술로 파리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이때 고흐, 로트렉과 알게 되고 고흐와 친해져 고흐의 동생 테오가 마련해준 남프랑스 아를 의 노란집에서 함께 살았다.

그러나 고흐와는 서로 다른 예술적 견해로 종종 충돌하였고 고흐가 귀를 자르는 사건이 있은후 다시 브리타뉴 퐁타방으로 돌아 갔다. 거기서 황색의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을 그렸다. 그리고 이때 조각, 판화, 도기, 제작에 전념하였다. 파리 아방 가르드 화단의 주목을 받았고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많은 작품을 선보였다. 이 전시회에서 아시아와 남태평양의 이국적인 풍물에 열광하였고 문명사회에 대한 혐오감과 원시 생활에 대한 동경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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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그의 작품들을 팔아 여행자금을 마련하여 코펜하겐에 들러 가족을 만나보고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났다. 약 2개월의 항해끝에 타히티의 파페에떼 항구에 도착하였다. 서양의 문명을 떠나 소박하고 순수한 자연의 예술을 추구하고 원시인들과 똑 같은 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수단으로 그림을 그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파페에떼는 식민지 지배자들과 술주정뱅이 백인들로 오염된곳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타이에아 섬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켰다.

가난과 고독에 시달리다 파리로 돌아가 가족들과 재회 하기를 갈망했다. 1893년 파리로 돌아와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세인의 호기심은 끌었으나 사업적으로는 실패하였다. 책을 쓰고 목판을 만들어 자기의 작품을 소개 하였지만 깊은 좌절감만 느꼈다. 그의 가족들도 그에게 냉담했다. 그러나 파리 전람회에서의 그의 작품은 피카소등 젊은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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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그는 다시 타히티 섬으로 돌아왔다. 타히티에 돌아온 그는 병마에 시달리고 처절한 패배감으로 우울증에 걸겨 자살을 시도 했다. 이때 마지막 유언 처럼 그린 그림이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D’ou venons nous, Que sommes nous, Ou allons nous)라는 그림이었다. 검푸른 색조가 바탕색을 이루는 폭 4미터에 달하는 벽화양식의 이 거대한그림 좌측 상단부에는 노란색 바탕 위에 세가지의 물음이 프랑스어로 적혀있다. 원죄를 짓고 태어난 인간은 탄생과 동시에 사형선고를 받는다. 다만 사형일자와 사형 방법을 모를 뿐이다. 사는동안 희로애락 (喜怒哀樂), 생로병사 (生老病死)의 번뇌를 거치며 어떤사람은 좀 더 행복하게, 어떤사람은 좀 더 불행하게 살지만 결국 모두 죽는다. 한폭의 그림같이 짧은 인생을 열두명의 인물을 등장시켜 탄생에서 부터 삶과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운명을 단계적으로 서술한 이 대작은 고갱 예술을 철학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작품으로 고갱의 인생관, 세계관, 우주관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갱예술을 이해하는 열쇠를 주고 있는 작품이다. 병들고 가난하고 정신적인 고통마저 극심했던 고갱이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회화 공간에을 통해 표현한것이 이작품의 본질이다. 하지만 보이는 것을 보는 대로 그리는 것이 화가의 사명이었던 시대에 생각하는것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이작품은 미술사에 일대 변혁을 일으킨 기념비적 작품으로 여겨 지고 있다. 1903년 그는 심장마비로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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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의 예술은 길고 긴 여행과 불안한 삶의 연속에서 만들어 졌다. 가난이 주는 현실의 불안은 죽는 날까지 그를 따라 다녔고 생활의 불안함에서 오는 삶의 고뇌는 그의 작품을 지배하고 있었다. 물감 살 돈이 없어 자조하던 고갱은 “고통이 천재성을 고무 하는 것은 사실이나 고통이 너무 심하면 천재성은 완전히 소멸되고 말 것이다.” 라고 내뱉듯이 말했다. 고갱이 사망한지 1년후 1904년, 파리에 온 젊은 영국인 작가 썸머셋 몸 (Somerset Maugham) 은 고갱의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을 느낀다. 그는 1917년 타히티를 직접 방문하고 고갱의 흔적을 찾아 다녔다. 오두막집 문짝에 그려놓은 그림을 헐값에 구입해 영국으로 가져 온다. 그는 “달과 6펜스” (The moon and six pence 1921) 라는 소설을 써서 문명을 떠나 자연으로 돌아갔다는 고갱의 전설을 확립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작품중 인물인 챨스 스트릭랜드의 이야기는 몇가지 유사한 점만 빼면 고갱의 생애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400프랑을 주고산 고갱의 문짝그림이 1962년 1만 7천 달라에 팔렸다. 요즘은 얼마가 나갈까?

말년에 고갱은 돈이 없어 자신의 그림을 먹을것과 맞바꾸곤 했는데 마을의 중국인 식품점 주인은 그렇게 얻은 고갱의 데쌍을 포장지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타히티의 백인들중에는 고갱이 그려준 초상화를 못마땅하게 생각해 다락에 쳐박아 두었다가 훗날 화상에게 처분하거나 아예 그림 선물을 거절한 사람도 있었다 한다. 고갱의 사후에 그 그림들이 얼마나 막대한 가치가 될줄은 그들도 고갱자신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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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목각에 석고로 만든 꽃다발을 붙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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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은 단순한 화가가 아니다. 그는 점토, 나무, 종이, 페인트 등 여러 메디아와 그림, 판화, 도자기, 목각, 가구, 등 여러 형태 (Format) 로 예술의 세계를 넓혔다.

그는 지구촌 방방곡곡을 돌아 다니며 그리스의 조각, 이집트의 프레스코화, 자바와 앙코르의 부조, 페르시아의 양탄자, 일본의 판화, 잉카의 토기, 타히티의 문신등 인류문명의 수많은 유산들을 모아 마치 연금술사 (Alchemist)들이 평범한 금속들을 도가니에 넣어 섞어 귀중한 금속을 만들어 내듯 그의 예술과 생애를 만들어 갔다.

후기: 본문의 일부는 전문가들의 글에서 발췌하여 편집한 것임을 밝혀둔다.

2017년 11월  시카고에서  노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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