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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회 동아일보-신동아 논픽션 공모 우수작

판문점  (연속 #1/7)

 

작가 - 김일홍

 

그옛날 문산과 개성을 잇던 의주로의 한적한 주막거리 널문리가 이제는 겨레의 한과 바람이 함께 서린 곳이 되어버렸다. 휴전선 약 250km의 유일한 창구로 민족의 아픔을 해결하려는 장이기도 하고 아직도 휴전협정 위반 사항을 풀기 위해 설전을 벌이는, 긴장이 도사리고 있는 대좌(對座)의 자리이기도 하다. 서울과 평양을 달리던 철마(鐵馬)는 지금 쉬고 있다. 남쪽에서 올라가다 단절된 역이 문산역이고, 북쪽의 경의선을 타고 내려오다 단절된 역이 바로 청교역이다. 그 사이가 겨우 27.3km, 걸어도 반나절이면 이를 거리를 사반세기가 넘도록 국토와 민족과 역사를 이토록 가슴 아프게 단절해놓을 수 있을까.

 

임진강 철교를 지나 한적한 널문리를 돌아 조금 올라가면 널문리 다리가 나오는데, 사천(沙川) 위에 놓인 볼품없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인상적이다. 취적교(吹笛橋)라는 낭만적인 이름의 다리를 다시 하나 건너면 오른쪽으로 다섯 봉우리가 솟은 오관산이 보인다. 왼쪽으로는 철쭉꽃으로 유명한 진봉산이 있고 그 사이를 지나면 인삼 향이 물씬 풍기는 고도 동개성(東開城)으로 불리는 청교역에 이른다.

 

예부터 개성상인들이 장삿길 떠날 때 이곳에서 가족과 기약 없는 이별에 울고, 돌아올 때 이곳에서 아낙과 다시 만나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이산과 상봉의 현장이다. 그래서 이곳을 옛 사람들은 눈물들(淚原)이라고 불렀다. 아득한 고려 때부터 약초가 자라고 소쩍새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던 평화의 마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아온 우리 겨레의 삶터, 이제 널문리 콩밭은 전세계에 노출된 분단의 전시장이 되어버렸다.

 

1970년 3월. 아직 겨울의 냉기가 미처 가시지 않은 초봄, 늦추위 속에서도 봄은 찾아든다. 잿빛 하늘엔 한기가 서려 때 아닌 눈이 내릴 것만 같다. 나는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빈 사무실로 돌아와 햇볕이 스며드는 창가를 등받이로 두 발을 책상위에 걸치고 오수를 즐기려는데 양지(경비) 전화가 요란스레 울린다. 유엔군사령부 홍보담당관의 ‘전화통지문’이었다.

 

“네! 말씀하세요.” 나는 볼펜을 잡고 메모지에 전화통지문을 쓸 자세를 취했다.

 

수신 : 중앙정보부 부장

참조 : S 국장

제목 : 판문점 군사정전회담

 

1970년 3월13일 오전 10시48분 경기도 연천지역 비무장지대 안에 침투해 들어온 북한군 무장공비 세 명과 한국군 수색대의 교전 끝에 공비 두 명을 사살하고 기관단총 두 정, 배낭 석 점을 노획, 한 명은 북상 도주한 사건이었다. 나는 전화통지문 내용을 타자 치고 나서 결재 고무인을 찍고 결재판에 넣어 팀장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판문점에서 열리는 군사정전회담은 유엔군과 북한이 맺은 정전협정에 따른 것이다. 한국은 이들의 놀이에서 빠졌다. 정전협상 당시 한국은 ‘통일할 때까지 끝장을 보자’며 협정 체결을 반대했다. 그러나 전쟁의 불리함을 잘 알고 있던 북한은 교묘하게 ‘평화’를 앞세워 휴전협상을 제의했다. 유엔군은 공산주의자들의 끈질긴 전략전술에 말려들었고, 2년 17일간의 협상 끝에 판문점이 탄생했다. 결국 유엔군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전쟁에는 이기고 협상에는 졌다”는 말을 남겨야 했다.

 

당시 나는 판문점에 출입하는 중앙정보부 보안담당 요원이었다. 판문점에 출입하는 각 신문사와 방송사 기자, 외신기자들의 신변안전과 보안업무, 북한 기자들로부터 첩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띠고 판문점에 출입하고 있었다.

 

판문점은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는 적과 적이 만나는 장소다. 적과 적이 만나는 장소는 전쟁터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판문점에는 스릴도 있고, 폭력도 있다. 남과 북 기자들이 서로 거짓 미소를 짓는가 하면,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공작도 심심찮게 일어나는 곳이었다.

 

어느 날 내가 회담장 창틀에 매달려 험악한 분위기의 회담장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옆에 있는 북한 기자가 취재수첩에 뭔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호기심이 동해 슬그머니 수첩을 훔쳐보았더니, 깨알같은 글씨로 ‘우’자와 ‘적’자로 구분해서 양측의 발언을 적고 있었다. 나는 북한 기자의 팔꿈치를 툭 쳤다.

 

“‘우’는 뭐고, ‘적’은 뭐야?”

“동무는 판문점에 들락거리면서 그것도 몰라?”

북한 기자가 실눈을 뜨며 내게 면박을 준다.

“그래 모른다.” 나는 빈정거렸다.

“‘우’는 주체의 조국이고, ‘적’은 미제국주의의 앞잡이인 남반부지.”

“기자 동무, 그래서 지금 우리는 적인가?”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적이지.”

 

한국측 기자들은 양측 발언을 ‘남’과 ‘북’으로 적는다. ‘남’과 ‘북’이 사실이라면 ‘우’와 ‘적’은 현실이다. 똑같은 대상을 두고도 남북 기자들의 취재수첩에서부터 이렇듯 판이하게 기록되는데, 남북회담에서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판문점 회담시에는 항시 군용 ‘쌕 버스’가 나온다. 판문점 취재단인 각 신문사, 방송사, 외신 기자들이 출발지인 중앙청 내 문공부 뜰 앞 느티나무 밑으로 삼삼오오 모여 판문점행 쌕 버스를 기다리며 잡담을 하곤 한다. 판문점에는 민간인이나 민간 차량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팀장과 나는 두 대의 버스에 각각 나눠 타고 출입기자들에게 판문점 내에서의 보안사항 및 북한 기자들과 접촉할 때 주의할 점과 취득한 첩보는 보고할 것을 주문한다. 그리고 출입기자 명단에 기재된 이름과 소속을 확인하고 숫자가 맞으면 쌕 버스는 회담장으로 출발한다. 관광객에게는 신기함과 두려움이 숨어 있는 판문점이지만, 이 코스를 자주 다니는 기자들은 별 관심없이 비스듬히 누워 모자란 잠을 청한다.

 

덜컹거리는 차의 움직임 소리가 요란하게 반복되면 임진강 철교에 들어선 것이다. 판문점에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다. 임진강 한복판에 앙상하게 남은 교각이 서 있다. 6·25전쟁 때 폭격으로 폭파된 철교의 잔해로 쓰라린 과거를 지닌 교각이다. 산비둘기들이 교각 틈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그 밑으로 흙탕물이 꽤나 거세게 흐른다.

 

이곳이야말로 휴전 직전 막바지 전투에서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가 이데올로기라는 미명하에 피를 흘린 곳이다. 지금도 전쟁의 흔적이 여기저기 깔려있다. 주인 모를 고분과 남북으로 달리던 철마가 산허리에 쓰러져 있고, 탄흔에 녹슨 어느 병사의 철모가 아무렇게나 누워 있다. 벌건 철모 사이로 피어난 보라색 바이올렛은 병사의 못다 피운 젊은 꿈을 아쉬워하듯 살며시 얼굴을 내밀고 웃음꽃을 피운다.

 

두 번째 철문을 통과하면 남방한계선인 비무장지대가 나온다. 차창 프레임 속에 대성동의 태극기가 눈에 들어왔다가 사라진다. 차가 판문점 쪽으로 돌아서면 멀리 북쪽 기정동의 인공기가 철탑에 걸려 펄럭이는 것이 보인다. 판문점에 들어가기 직전 미군 에드번스 캠프에 들러 커피를 한잔하며 유엔군사령부 홍보담당관의 간략한 회담 브리핑을 듣고 판문점으로 들어가는 것이 관례다.

 

버스가 시간에 맞춰 군사정전회담장 앞뜰에 도착하면, 북한 기자들은 벌써 뜰에 나와 늑대처럼 어슬렁거리고 있다. 낯익은 기자를 보면 서로 반갑다고 악수를 하거나 심지어 포옹하는 이들도 있다. 판문점 뜰에는 오늘 회담의 주요 내용인 무장공비 침투사건의 증거로 유엔사에서 마련한 전시물이 놓여 있다. 한국군으로 위장한 무장공비의 사살 모습 사진이며 공비들이 소지했던 기관단총, 카메라, 망원렌즈, 배낭, 농구화, 담배, 찐쌀, 미숫가루, 약품 등등. 회의장 테이블 위에는 철책이 아니라 마이크 선을 분단선 삼아 늘어놓았다. 마이크 선을 가운데 두고 양쪽 대표들은 무표정하게 대좌하고 있다.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가공의 선을 넘지 않는다. 분노와 흥분이 밀려오면 목청을 높여 욕을 하거나 일어서서 삿대질을 한다. 이런 행동은 거의 북한 몫이다. 그러나 회담장 안에서 아무리 격앙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와도 남북 기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양지바른 곳에 모여 앉아 잡담을 나눈다. 서로 지껄이다 보면 상대방의 약점을 건드려 신경을 곤두세우는 경우도 있다. 허점을 이용해 상대방의 약을 올리는 행동은 대개 한국측 기자들의 몫이다.

 

“여보, 당신 가슴에 달고 있는 게 뭐요?”

“보믄 모르간.”

“당신들이야 알겠지만 우리야 알 수 있나?”

“그 뭐, 알믄서 와 그래.”

“글쎄, 그게 단군 할아버지면 몰라도 왜 그렇게 살이 쪘어!”

“똑똑히 보라무나, 보면서도 몰라?”

“그래 똑똑히 보자, 네 할아버지냐?”

“이거 와이래! 도발적 언동 삼가라우.”

“말하기 거북해? 이름도 못 대는 주제에 그건 뭘 하러 달고 다녀?”

“이거이 눈깔에 뵈는 게 없는 기가?”

 

앉아 있던 북한 기자가 벌떡 일어나 주먹을 쥐고 공격적인 자세로 돌변한다. 남한 기자는 모른 체하며 한술 더 떠다 그친다. 여기서 물러서면 북한 기자의 주먹 공세에 밀리는 것이 되므로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일 게다.

 

“그런데 그게 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던데, 너희들 계급 표시냐?”

“그거야 뭐 취미대로 다는 거지, 이상할 것 없수다.”

“허! 수령님을 취미대로 단다…. 그럼 그 흉상도 취미거리로군!”
“뭐야!”
“괜찮아, 들은 동무 없으니까. 그래도 말조심은 해야 하지 않아?”


북한 기자의 당황하는 얼굴 표정에 대화는 끝난다. 김일성 배지라고 부르는 김일성 ‘초상휘장’은 1970년 김정일 의 지시로 북한 주민에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김일성 ‘초상휘장’을 가슴에 달고 다니는 것은 그들의 심장 속에 김 일성이 살아 숨쉰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음계속: 이수근 탈출사건 특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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