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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l 내 그리운 곳 강릉

2017.02.24 18:25

정관호*63 Views:492

내 그리운 곳 강릉(江陵)

서론
 

내가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강릉에서 살았던 때는 대단히 오래전이었고, 또 비교적 짧았던 기간이었다. 그런데 나는 항상 그곳을 잊지 못한다. 게다가 이 먼 나라에 와서 산지 오래되었기에 생각이 떠올라도 쉽게 갈 수 없었다. 얼마 전 내가 강릉에서 살았다는 말을 하였더니 WM께서 반색을 하면서 고향사람을 만난 듯이 얘기를 하여서 내가 한번 강릉 이야기를 쓸 마음이 생겼다.
  강릉은 내 고향이 아니고 연고지도 아니었다. 내가 어렸을 때 일제말기에 서울주민에게 소개(疏開)를 시켰을 때 아버지 친구 분이 아버지에게 자기 살던 곳으로 오라고 하여서 우리 세 식구가 갔다고 들었다. 그 분의 성함이 김인봉씨라고 기억하며, 아마 강릉의 유지였던 모양이고 또 그 집이 부유하였다고 생각한다. 소개란 이차대전 말기에 미군의 폭격에 대비하여 서울의 인구를 지방으로 분산시키는 일제시절의 정책이었다.

 
이사 전야
 

강릉으로 떠나기 전 내가 일곱 살 때 1943년 여름까지 한강에서 멀지 않은 남쪽에 위치했던 흑석정(黑石町)에 살았다 . 그때 나는 그 근방에 있던 중앙유치원에 다녔다. 그때 유치원 원장이 임영신 여사였고 해방 후 바로 그 자리에 중앙대학을 설립하였던 유명인사였다. 일제시절에 여성지도자였고, 해방 후 제2대 국회의원이었던 유명한 분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평생주붕(平生酒朋) 즉 술벗이신 변영로 선생님댁과 가까이 살았는데 그 집 기억은 없지만 아들 셋이 있었고, 그들 이름은 갑수, 문수, 천수로 연년생이여, 막내아들 천수와 내가 동갑이었고, 내가 천수와 다투면 문수는 천수편이었고, 갑수는 내편이었다. 우리는 주로 메뚜기 잡으며 놀았다.
  유치원에는 남자와 여자가 반반씩 되었는데 그 중에 이쁜 여자애가 둘이 있었는데, 어느 날 나는 혼자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운동장 한 구석에 큰 짚더미가 있고 그 한편에 조그만 문이 있어서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남자생도가 쾅하고 문을 닫아서 나는 열려고 하고 그는 밖에서 밀고 하는 동안 그 예쁜 여자생도가 그 악동을 밀고서 문을 열어주었다. 다행이었는데 나는 고맙단 말도 못했다.
우리 집 앞에는 넓은 마당을 가진 큰 집이 있었고, 마당에는 큰 개 두 마리가 뛰어다녔다. 그 반대편 즉 우리 집 앞 소로 길은 서쪽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나 혼자 다니며 메뚜기를 잡고 놀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부터 동서남북으로 표시할 방향을 말하려고 한다. 물론 원래 어렸을 적이라 방향은 몰랐지만 해가 뜨고 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지표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해가 뜰 때 학교에 가거나 밖에 나가서 놀고, 해가 질 때쯤 어머니가 부르셔서 집안에 들어와 저녁 먹고 자는 게 일과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절 생각할 때 나 살았던 곳에서 해가 어느 방향에서 뜨고 어느 방향으로 졌는가를 지금 새삼스럽게 따져보니 오래전 일을 회상할 때 한결 가까워진 감이 생긴다.
  여기서 서울시내로 어머니 따라 갔던 일이 큰 경험이었다. 우리집 앞길은 남북으로 향했는데, 거기서 북쪽으로 가자면 왼편에 내가 다니던 유치원이 있었다. 계속 가다가 오르막길이 되다가 언덕머리에서 길이 좌회전하게 되는데 거기서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이 길은 한강과 나란히 서쪽으로 완만히 내리막길로 가는데, 길 좌우에 큰 나무가 줄지어 섰고, 양쪽으로 과일 파는 행상인, 점치는 사람, 기타 여러 가지 업종에 종사하던 사람들로 제법 북적거렸다. 거기서 대로로 나오면 대로 왼편에는 노량진 전차종점이 있었고 전차를 타면 우측 즉 북쪽으로 가서 한강 철교를 건너서 서울 시내로 들어간다.
  어머니 따라서 시내에 친척집에 몇번 갔던 일이 있었다. 한 번은 화신상회(화신백화점)에 들렀는데 사람이 많았고, 거기서 아버지를 만났고, 어머니와 이야기 하시다가 아버지는 다른 곳으로 나가셨다. 아버지는 들락날락하실 때 걸음이 대단히 빨라서 아버지처럼 빨리 걷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집에 올 때에는 전차에서 잠이 든 적이 많았다. 어머니가 ‘춘호야’하고 부르는 소리에 깨면 전차는 한강철교를 지나고 있었다. 기억나는 일은 전차가 한강을 건넜던 철교위로 달릴 때 갑자기 덜컹덜컹하는 큰 소리와 진동이 생기면 곧 종점에 거의 다 왔다는 의미이다. 노량진 종점역에서 내려 언덕길로 올라갔다가 그 정점에서 우회전하여 우측에 있는 유치원을 지나면 흑석동 집에 온다.
  어느 날 어머니는 날 보고 “우리 곧 강릉으로 이사간다.”고 하셨다. 그때 이차대전 말기였기에 미군 폭격으로 일본 동경이 불바다가 되어서 서울에도 폭격이 임박하다고 하여서 지방으로 소개(일어로 쇼까이)하라고 정부에서 발령을 내렸는데, 강릉에 계신 선친 친구인 “김인봉”씨가 권유하여 그 멀고 먼 낯선 고장으로 가게 된 연유이다.
  그 후 어느날 오후에 우리 세 식구가 경성역에서 기차에 탔다. 창문 밖으로 보니, 아버지를 위시하여 여러 사람이 있었는데, 그 중 둘째 아저씨가 ‘정석’고종형에게 한참 무언지 지시하는 걸 보았고 얼마 후에 아버지는 그들의 인사를 받으면서 기차에 올라오셨고 기차는 ‘뚜’하는 소리를 내며 떠나기 시작했다.
나는 창밖 구경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고, 멀지 않아서 잠이 들었다. 내가 잠이 들은 사이에 원산역에서 중앙선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갈아 탔 기에 나는 원산역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춘호야, 일어나 저거 보아라.”하시는 어머니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 달리던 기차 창밖을 보니 오른쪽에는 외금강 비경이 펼쳐졌다.
어머니는, “춘호야, 저건 코끼리 같다. 저건 원숭이 같다, 또 저건 스님같다…”하며 끝없이 내게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셨다. 정신없이 기기묘묘한 외금강 바위들을 보았고, 다음에 왼편으로 돌려보니 아! 거기에는 해금강의 동해바다물이 넘실거리고 있지 않는가! 이 넘실그렸던 동해 물결 기억은 내게 영구히 남았다. 이 기차의 종점역인 양양역에서 우리는 내려 버스를 타고 강릉버스정거장까지 왔다.

 
대정정(大正町) 다섯집 동네
 

거기서 “대정정”이란 몇 집 안 되는 언덕위에 지은 집으로 들어왔다. 그 집 앞에는 남대천이 흐르고 그 뒤에는 조금 높은 곳에 집이 네채나 있어 우리집까지 모두 합쳐 다섯집이었다. 어머니는 신기하다는 듯 이사전에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꿈에, “너희는 이제 다섯집 동네로 갈거다.”하셨던 말씀대로되었다.
이 집은 기역자 구조로 되어서 남쪽편으로는 방이 둘, 동쪽편으로도 방이 둘로, 양익(兩翼: Two wings, i.e. South and East Wings)이 있었고, 그 연결부위가 공동 부엌이었다. 대청마루는 없고 그저 툇마루가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먼저와서 남향익에 들어왔는데, 얼마후 다른 편에 “윤영”네 가족이 동향익으로 들어왔다. 윤영이는 어린 아들의 이름인데 나보다 서너살 어렸고, 두 딸이 있었는데, 큰 딸은 나보다 두세 살쯤 위였는데 이름이 혜숙이고, 그 다음은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영숙이가 있었다. 혜숙이는 얼굴이 희고, 눈은 가늘고 항상 웃음을 띄우고 나를 데리고 잘 놀았다. 그런데 영숙이는 억척스럽고 나와 자주 싸우면 혜숙이는 항상 내편이어서 동생 영숙이를 나무랐다.
  이곳에 온지 얼마 안된 어느날 아버지 어머니 나 이렇게 세식구는 우리가 올 때에 내렸던 버스 정거장에 갔다. 문을 열고 사무실에 들어가보니 그 안에 사람들이 많이 줄지어 기다리다가 표를 사고 있었는데 어머니도 표를 사신 후 우리 모두 그 반대편에 있는 문으로 나갔다.
거기에는 버스 한대가 있었고 어머니는 그 안에 들어가서 운전수 뒷자리에 앉으신 후 창문을 열고 내게, “춘호야, 아버지하고 잘 있거라.”하셨는데, 나는 멍하니 어머니만 바라보고 있으려니 조금 있다가 버스는 천천히 떠나기 시작했다. 흙먼지 풍기며 천천히 오르막길을 오른 후 내리막길로 가 버린 듯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래도 나는 꼼짝하지않고 멍하니 서있는데, 아버지가, “춘호야, 이제 집에 가자.”하시는 소리에 아버지 손잡고 집으로 돌아오니, 집에서 윤영어머니가 아버지께, “춘호어머니 잘 가셨어요?”하니, 아버지는 “네”하고 날 데리고 빈방으로 들어오셨다. 태어난지 처음으로 어머니에게서 떨어졌다.
  그 날 저녁 때 윤영어머니는 밥상을 들고 우리 방에 내려 놓았고 아버지와 나는 저녁을 먹었다. 그 다음날 아침에도 밥상을 우리방에 갖다 놓아서 우리는 아침도 그렇게 먹었다. 아버지는 그 후 나가셨고 나는 혼자 있다가 점심 때 혜숙이가 집에 와서 날 부르면 그 방에 가서 그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혜숙이가 앞장서고 나와 영숙이는 뒤따라서 집 밖에 들판으로 나가서 서쪽 산기슭까지 가서 풀 뽑고 꽃 따고 하며 놀았다.
그러다가 저녁 때가 되면 아버지가 오셔서 전날같이 식사하여서 이렇게 같은 생활이 반복되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어머니 생각만 하였지만 그러나 저러나 어머니는 오시지 않았고 매일 혜숙이 따라 놀게 되어서 어머니 생각도 점차 잊었다.
  어느날 혼자서 마당에 있었는데 무엇때문인지 내가 남대천으로 눈을 돌리니까 거기에 아버지가 날보고 계시다가 내게 손짓을 하시는데 무슨 뜻인지 몰라서 서서 보고만 있으니까 아버지가 조금 가까이 오셔서, “춘호야, 네가 저 왼쪽으로 가서 작은 길로 내려서 이리 와라.”하셔서 그렇게 하여 아래에 있는 남대천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거기서 아버지를 따라 좁은 길로 이리가고 저리갔는데 기억나는 건 주로 논 사이에 난 논뚝길을 걸어다녔다. 어디쯤 가니까 어느 주막집 같은 곳 방으로 들어가서 소반이 나오는데 아버지는 약주를 드시고 나는 부침개를 먹었다. 파전을 먹고 또 먹고 하는데, 어떤 분이 들어오시더니 아버지와 마주 앉으셔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파전을 계속 먹는 걸 보고, “이걸 많이 먹으면 장사가 된다.”하던 말씀이 기억난다.
  그후에도 가끔 아버지가 날 데리고 이곳 저곳 다니셨다. 어느날 우리는 강릉 광장에 가설된 곡마단에 들어갔다. 이렇게 신기한 광경은 처음 보았다. 여자들은 짧은 치마를 입고 입술은 빨갛게 칠했는데 이렇게 이쁜 여자를 처음 보았고 그들은 말을 타고 돌다가 후에는 일어서서 말등위에 서서 빨리 돌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남자가 나오더니 입속에서 활활타는 불을 갖고 놀다가 그걸 입속으로 넣으니, 입속에서 입밖으로 불이 나왔고, 컵에 든 물을 마시더니, 입안으로부터 종이를 당겨 끄집어내는데 반쯤 불탄 종이가 연달아 나왔다. 거기서 유성기에서 나오는 음악소리가 요란했고 이렇게 재미있는 건 평생 처음 보았다. 매일 곡마단 구경만하고 싶었다..
  어머니 서울 가신지도 오래되었다. 한달은 넘은 듯하고, 아마 두 석달쯤 된듯하였다. 아버지는 가끔 혼자서 화를 내시고 “왜 이리 오래 걸리냐.?” 하시며, 혼자서 말씀하셨던 걸 몇 번 들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충격적인 말씀을 내게 하셨다. “춘호야, 네 어머니 영 오지 않으니 차라리 아주 쫓아버리고, 우리 둘이서만 살자.”하고 내 의견(?)을 물어보셨다. 아니, 어머니 없이 전혀 재미라고는 없는 아버지하고 어떻게 살지? 이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완전히 무언으로 반대를 표시하였더니, 내 눈치를 보시던 아버지는 내 생각을 아신 듯, “그래 그럼 우선 쫓아내는 건 중단하고 좀 더 기다리자.”하셔서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했다.
 < 이는 나중에 안 사실인데, 흑석정 집을 팔지 못하고 이사하였기에 어머니가 상경하셔서 파는 데 시일이 많이 걸렸다는 이야기다. 어머니 생각도 거의 잊을 때쯤 어느날 집에 들어오니, 운영어머니가 내게 반갑게, “춘호야, 어머니 오셨다.”하는 소리에 갑자기 안도감이 생겼고 그래도 나는 뛰어가지 않고 침착하게 걸어서 들어가니, 어머니가 아버지와 무슨 말씀을 나누시다가, 날보시고, “춘호야, 잘 있었니?” 하시는데, 나는 멀찌감치 서서 멀뚱거리며 보고만 있으니, 어머니가, “저게 벌써 날 잊었나? 어서 이리 온.”하여서 어머니에게 가까이 갔다. 이제야 우리 세식구가 사는것같이 살게 되었다.
  얼마 후 어머니가 내게, “너 멀지 않아 학교에 들어갈테니까 구술시험 준비 좀 하자.” 하신 후, 곧장 내게 물어보셨다. “네 이름이 뭐야?” 나는 곧장, “나 춘호야.” 어머니, “너 존대를 써서 ‘정춘호입니다’하고 대답해야 된다.” 나는 그런가하고 곧 잊었다. 다음 날 갑자기 어머니는 또 다시 내게, “네 이름이 뭐야?” 그래서 나는 곧, “나 정춘호야.” 갑자기 어머니 얼굴이 무서워지더니, “이놈아, 존대를 써, 존대를. 이러다가는 소학교에도 못 들어가겠다.”
나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혼이 나서 얼떨떨해졌다. 그 후 구술시험(지금말로 면접)을 보았는지 안했는지는 기억에 없고, 강릉 중앙소학교 운동장에 모여서 우리 신입생이 일렬로 걸어서 교실로 들어갔다. 맞은편에는 칠판앞에 선생님이 서계시고 왼편에는 창문이 있고, 오른편 복도에는 학부형이 서서 창문을 통해 우리를 보고 있어서 나는 그쪽을 돌아다보니 학부형틈에 아버지가 서서계셔서 안심이 되었고, 조금 있다가 다시 아버지쪽으로 머리를 돌려보니 아버지는 내가 자꾸만 머리를 돌려 자신을 보기에, 칠판쪽으로 회전을 하시는 모양을 보였는데, 또 그 의미를 모르고 아버지만 처다 보니 나중에는 아주 무서운 눈으로 나를 내려보셔서 그만 아버지 보는 걸 포기했다.
이리하여 아마 그게 1944년 초봄이었다고 믿는다. 또 얼마 안되어서 우리는 대정정에서 5리 남짓한 홍제정 집으로 이사를 갔다.

 
홍제정(洪濟町) 집
 

아마 흑석정 집을 판 돈으로 이 집을 사셨던 모양이다. 조그만 일자(一字)집이며, 부엌 다음에 안방, 그 다음에 건넌방이 있었고, 두 방 앞에는 툇마루가 있었다. 우리 세식구는 안방을 썼고, 숙명고 다녔던 순이 누나가 오거나 셋째 누나가 조카애를 데리고오면 건넌방을 썼다 .집앞에는 길이 있었고 그래도 대정정 집과는 달리 문과 담이 있었다.
그 길 왼쪽 즉 남쪽으로 가면 학교로 가고, 읍내로도 가며, 또 경포대로도 갔다. 그러니 오른쪽 길은 북쪽으로 향했으며 그리고 가면 동네는 끝났고 또 거기에 주민이 피신하도록 큰 방공호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해 여름에 오대산 대화재가 생겼다. 오대산이 우리집에서 서편으로 한 50리 떨어졌다고 믿는다. 우리집 마당에서 정면으로 보이는데, 낮에는 보이지 않다가 밤만 되면 붉으스름한 불길이 보였고 낮이 되면 멀리서 연기가 보였으며 산불이 몇 달 계속되었다. 그때 소학교는 5년제로 기억하였고, 오학년 즉 마지막 학년에 그곳으로 수학여행을 간다고 들었다. 이사 간 후에도 지름길로 홍재정 집에서 대정정 윤영네에 몇번 놀러 간 기억이 난다.
  학교에서는 나는 산술시간에 암산(暗算)을 잘 해서 내가 손들고 맞추는 일이 많으니까 옆에 앉은 애들이 내게 가르쳐달라고 해도 가르쳐주지 않고 나만 맞추고 있었는데 , 나중에는 그 애들이 내게 토막연필을 주며 내게 물어볼 때에만 답을 가르쳐 주어서 한동안 집에 올때에는 토막연필 몇개씩 갖고 와서 보관하였다.
  이사 온 후 어느날 밤이었다. 나는 어머니따라 옆집 사람들과 함께 그네 타는 구경을 갔다. 달이 밝았다는 생각이 든다. 길에서 벗어나 조금 올라가니까 평지가 있고 그네는 머리 위에 있는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이 큰 나무는 좀 떨어져 있었고 그 중 크고 긴 가지가 뻗쳐서 거기에 긴 그넷줄을 맬수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그네를 타겠다고 별르고 오셨다. 소녀시절에 자라던 집에서 그네를 타셨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남보다 먼저 그네에 오르고 다리를 굽혔다 폈다 하시는데 이 긴 그네 줄은 별로 움직이지 않았고, 거기에 많은 남녀들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그렇게 어기죽거리니까 여기저기서 불평하는 소리가 점점 많아졌다.
마침내 어떤 여자가 오더니 어머니를 내리게 하고 자기가 그 그네를 빼앗은 후 그걸 갖고 거기서 조금 떨어진 높은 바위위로 올라간 후 그네를 타고 나는 제비같이 잽싸게 내려와서 반대방향으로 까마득하게 올라갔다가 다시 바위쪽으로 후진하면 이번에는 그 높은 바위보다 훨씬 높게 오르면서 계속하여 전진과 후진을 한동안 하다가 바위에 내려오면, 다른 선수가 그 뒤를 잇는데 모두 재주가 비상했고 그 후 나는 이렇게 잘 타는 그네놀이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런 후 이게 단오 놀이였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중요한 곳(Landmark pavilion)을 뺄 수없다. 바로 경포대(鏡浦臺)이었다. 내 기억으로 대정정에서 아버지와 몇달동안 지낼 때 아버지 친구 두어분과 함께 경포대를 처음으로 찾아갔다고 믿는다. 가다보면 우측에 큰 경포호가 있고, 좌측 길에서 높게 위치한 큰 대가 있고, 천장은 넓은데 비교적 낮다. 거기서 그분들은 술을 마셨고, 나는 안주를 먹었다. 그 대는 바닥은 나무였겠고, 담벼락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이 없지만 두 곳을 본 기억은 또렷하다.
첫째 남쪽 경포호에는 가운데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언젠가 내게 그 바위는 홍장암(紅粧岩)이라고 하셨고, 지금까지 분명한 기억이 있다. 그때 날씨가 좀 추웠는데 그곳 여자분이 서넛, 혹은 네댓명이 물속에 들어가서 물이 가슴가까이 차 오르는데 무얼 잡고 있었던 모습이었다. 그들 몸 앞에는 물속에 잠긴 바구니같은 걸 계속 들고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 아마 새우를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머리를 돌려 동쪽 바다를 바라보면, 경호와 동해 사이가 긴 모래사장(沙場)으로 격리되어 있었는데, 나는 한번도 그곳 바닷가까지 가지 못했지만, 호수-모래사장-바다의 천하절경은 어린 내 기억에 영구히 남았다.
  그 후 홍제정에 살 때 경포대를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을 따라 여러번 왔다. 어머니는 그곳이 우리집에서 십리가 채 못되고, 칠리 쯤 된다고 하셨다. 한번은 화가 묵고선생 가족과 함께 갔는데 그 부인이 배가 아프다고 도중에 길가에 한동안 앉았던 일도 있있고, 그후 묵로선생이 그곳에 유명한 벚꽃이 만발하여 경포대가 파묻힐 정도의 벚꽃 동양화를 그려 우리에게 선사한 적도 있었다.
  강릉 눈은 대단하였다. 폭설이 내리면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초가위에 집 한채가 올라 앉은 형태”라고 하셨다. 홍제정으로 간 겨울, 그러니까 강릉에서 두번째 맞이한 겨울에도 눈이 여전히 많이 내렸다. 나는 이미 학교를 혼자 다녔는데 집에 올 때쯤 눈이 워낙 많아서 길과 밭이 구별이 안되어서 그만 길을 잃고 여기저기 바라만 보면서 우둑커니 서 있었는데 마침 날 찾아나오신 어머니를 만나서 집에 올 수 있었다.
홍제정에 온 다음해 봄 그러니까 강릉에 온지 3년째 되던 늦은 봄이었다. 그때 마을에 무서운 돌림병이 돌고 있으며 주로 어린 아이나 젊은이들이 걸려서 사망률이 높았다. 어느날 나는 몸이 아프고 열이 오르는데 나날이 더 심해졌고, 나중에는 한밤중에 의식까지 잃을 정도가 되었다. 그곳에 병원이 있을리 없고 세브란스 출신의 의사 한분이 읍내에서 개업을 하고 계셨고, 그분 따님과 셋째 누나는 동경여의전 동기이기에 우리에게 친절히 해 주셨다.
  하도 급해서 아버지에게 나를 보시라고 하고 어머니는 한밤중에 집밖으로 나와서 그 의원으로 뛰어가시며 관세음보살 염을 계속하셨고, 거기서 그 의사선생님과 함께 집에 오셨다. 나는 얼마후에 정신이 들어서 깨어보니 아버지가 나를 내려다 보고 계셨기에 어머니를 찾으니까 곧 의사선생님과 함께 오신다고 하신 후 곧 두 분이 들어오셨다. 그때에는 나는 정신도 들고 열도 이미 떨어졌다. 그래서 주사 맞고 약도 먹고 다시 잤다. 그 후부터 나는 점차 회복이 되었는데 한동안 너무 탈진을 하여서 안방에서 건넌방까지 잘 걷지도 어려울 정도였다.
이 병을 그 당시 ‘뇌척수막염’이라고 부르고, 그후 혜화국민학교 시절에는 ‘뇌염’이라고 했고, 최근에는 ‘수막염이라고 부른다. 학명으로는 Cerebrospinal meningitis, (Japanese) Encephalitis, Meningitis 혹은 Myelitis이었겠지. 그후 여러달동안 학교에 가지않고 집에서 쉬고 있었고, 처음에는 방에만 있다가, 다음에는 마당에 나갔고, 다음에는 문밖까지 나갔고, 그후에는 점차 동네로 나가서 애들하고 놀 정도가 되었지만 아직 학교에는 가지 않다가 여름방학이 되었고 순이누나도 서울서 귀가하였다.
  어느날 그러니까 그 날이 바로 1945년 8월 15일이었다. 나는 밖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오니 순이누나가 날보고, “춘호야, 일본이 항복했단다.”하여서 나는의아해서, “그럼 미군이 우리를 죽여?”하니, 누나는 웃으면서, “아냐, 우리나라는 독립한단다.”하여서 나는 혼돈이 되었다. 학교에서 듣기를, “만약 일본이 지면 미군이 들어와서 우리를 모두 죽인다.”던 말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그런지 조금 후에 요란한 소리가 집밖에서 들려서 보니, 이곳에서 흰옷을 입은 젊은 사람떼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강릉 읍내로 달려가고, 그 뒤로는 노인과 여인들이 따라가기 시작하였다. 이 광경은 내가 August 14, 2015 SNUMA 홈페이지에 자세히 써서 올렸다.
  그 후 며칠 안되서 동네 젊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찾아 집에 와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수십명씩 찾아와서 할 수없이 빈 학교교실에서 영어를 가르치셨고 또 어느날 여학교에서 찾아와서 어머니보고 가사선생님이 되어서 여학생들에게 편물을 가르쳐달라고 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한 우리집이었다. 하지만 멀지 않아 아버지는 상경하셨고, 9월초 혹은 중순쯤 어머니, 누나와 나는 아버지가 올라가신 서울로 강릉 버스정거장에서 영구히 강릉을 떠났다. 이 꿈결같던 어린시절의 추억을 뒤에 남기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곳에서 아버지는 학교에서 혹은 청년 단체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시고, 어머니는 가사 선생님이 되어서 살았어도 편안하고 좋은 인생이었을텐데, 하는 공상도 해본다.
여기에 Images를 실을 재료가 없었다. 그곳에서 살았던 사진 한 장조차 없었기에 할수없이 내가 생각나는대로 긁적거려서, 흑석정, 대정정, 홍제정 그리고 강릉 버스 정거장 위치를 그려 보았다.

 
Drawing

흑석정
 

이곳에서 1943년 여름까지 한 3년쯤 살았고, 시내로 나가자면 북쪽으로 가면 왼편에 중앙 유치원이 있고, 좀 더 오르막길로 가면 정상에 올라 좌회전하여 서행하여 내리막 길로 갈 때 왼편에 상인들과 점치는 사람들이 있고, 좀 더 내려가면 우측 한강가에 큰 나무 서너 그루가 있어 거기에 매단 그네에서 애들이 놀고, 또 거기에 참외, 수박을 팔고 강가에 노들나루터가 있었다. 지금도 아득하게 그곳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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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정
 

우리 집 마당에서 남대천을 바라보던 곳이 남쪽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우리는 집에서 동쪽으로 난 길로 내려오면 강릉광장이 나오고 여기에 사람들이 모이고 대단히 활발한 장소였다. 나 혼자서 가끔 온적도 있었는데, 해방 직후에 유달리 이곳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어떤 건물 속에서 사람들을 잡아다 때리는 소리가 들렸고, 고함소리와 신음소리를 밖에서 까지 들었는데, 아마 친일했던 사람을 고문했던 것이 아닌가도 생각했다. 서쪽 뚝길로 가다보면 작으마한 산이 나오는데 거기서 혜숙, 영숙 자매와 놀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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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정
 

우리집 오른 편에 ‘긴따로’네 집이었고, 왼편에는 아주 큰 집이 있고, 문밖에 큰 길이 남북으로 향했고, 북쪽은 산이었고 남쪽에는 강릉읍내로 향한 길이었다. 어머니는 집 뒤에 시금치, 옥수수를 심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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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버스정거장
 

내 생각에 이 버스정류장에서부터 큰 길이 시작하여 원주와 서울로 갔다. 그 말은 여기서 부터 읍내에는 사람만 다니는 소로길 뿐이었다. 그 당시 강릉에 차가 있을리 없있으니까. 내게는 버스종점에서 슬픈 일을 두번 경험했다. 첫번째는 1943년 늦은 여름에 어머니와 잠시지만 이별했고, 두번째는 10년 후 1953년 12월 말에 부산 완월동 시외버스종점에서 아버지가 근무하셨던 아동자선병원을 병환으로 사직하시고, 대구 누님집으로 떠날 때, 병원 직원들이 하직인사차 나왔다. 그들 몇 분은 추운 날 아침에 버스가 떠날 때까지 기다리는데 아버지는 그들에게 들어가라고 자꾸 권하여서 그들은 할수 없이 먼저 떠났다. 그후 대구에서 두달도 안되어서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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鏡浦湖 강원도지정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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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호와 홍장암

코스안내 | 경포호·가시연습지 생태관광


 

실제로 여러번 이곳에 왔다. 경포대 안에서 경포호를 바라보면 새우잡던 여인들이 추운 가을날 물속에 서서 통바리같은 걸로 새우를 잡았고, 또 저 멀리 동해 푸른 물을 바라볼 때 그 앞에 백사장도 보았지만 거기까진 못갔다. 그런데 이 스케취(?)는 내가 엉성하게 그려서 SNUMA.NET 에 Feb 25, 2017 처음 올렸는데, 그때 사용했던 Photobucket에서 삭제를 당해서 다시 Flickr을 사용하여 같은 곳에 교정하여 올렸다. 여기에 “경포호 강원도 지정문화재”를 Google에서 좋은 Image를 찾아서 실었는데, 뜻밖에 내가 엉성하기 짝이 없게 그렸던 것이 여기에 다른 Images속에 끼어있었다. 그래서 내가 이것을 여기에 다시 싣는다. 내가 그린 이것도 "경포호 강원도 지정문화재 영상"에 포함 됬단 말인가? 믿을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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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호 지도
 

이 경포호 지도에서 경포호 좌하부에 경포대 가는 길 펜션이라고 쓴 글자가 나오며 이 길이 호수가에 닿는 곳에 0표가 있으니 여기에 경포대가 위치하였다. 그런데 내가 방문했던 경포대는 행인의 소롯길가에 아주 가까이 있었는데, 내가 2010년 귀국방문시에 잠시 들렸던 경포대는 아주 높직히 서 있었고, 대단히 크고 화려하니 그 옛날 경포대를 허물고 새로 지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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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묵로 이용우(墨鷺 李用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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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홍제정 집으로 이사 간지 얼마 안되어서 서울서 아버지 친구 묵로 이용우선생이 자기 부인과 함께 우리를 따라 오셔서 며칠간 우리 건넌방에 체류하다가 바로 그 근방에 이사를 가서 우리 떠날 때까지 계속사셨다.
게다가 자기 여동생이 보영이란 딸 하나까지 데리고 왔는데 보영이는 나보다 한살 위였지만, 둘이서 놀면 내가 대장노릇을 하였고, 보영이는 항상 내말을 들었다. 내가 보영이에게 ‘실뜨기’를 가르쳐줬다.
  묵로선생은 아버지와 아주 친한 분이었는데, 어느날 우리 두 가족이 함께 경포대를 갔는데 거기서 그 분 부인이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길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한동안 쉬니 나아졌다고 해서 결국 모두 경포대를 갈수 있었다.
아마 우리가 여러번 경포대에 갔다고 믿는다. 어느날 묵로선생이 만발한 벚꽃이 경포대를 둘러싸고 있는 그림을 그렸는데 나는 흥미롭게 보면서 온갖 붉은 색의 꽃을 예상하였다.
  그런데 그분은 잠시 눈을 지긋이 감고 한동안 명상 하신 후 영감이 떠오를때부터 그리는데 이는 붓쥔 손이 슬슬 떨리면서 계속적으로 움직여서 훌륭한 경포대의 벚꼿그림이 완성되었고 그것을 우리에게 선사하였으며, 내가 기대했는 오색그림이 아닌 흑백의 묵화였고, 가끔 손님이 와서 그 그림을 보면 모두 크게 감탄하였다.
그후 우리가 서울로 간 후에도 보영어머니는 가끔 우리집에 오셨다. 그런데 물론 육이오 동란 때 그 그림 역시 없어졌다.
  내가 혹시 그분이 그린 그 벚꽃그림을 발견할 수 없을까하고 인터넷검색을 찾아 묵로 이용우선생난에 들어가서 읽어보니, 경포대 그림은 찾을 수 없었지만, 그분 약력에 “1945년에는 소개령으로 강릉에 칩거하며, 강릉사범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하기도 했으며,”를 찾아 반가웠다.
  그런데 내 기억에는 그 분은1944년에 강릉에 오셨다고 믿는다. 우리가 홍제정으로 이사간게 1944년 초였으며, 1945년 여름에 해방되어서 서울로 왔다. 그러니 그분이 강릉에 오신 직후에 사범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다가 우리보다 늦게 상경하셨던 모양이다.
벚꽃 그림을 찾을 수 없으나, 그와 비슷한 그림 한편을 올리는데 여기에 색을 넣었지만 경포대 그림은 완전한 흑백그림이었고, 내 기억에 있던 그림과 비슷하다.
그분께서는 1952년에 전주의 어느 셋발에서 작고하셨다. 예술가는 항상 가난한 인생을 가졌기에.



 
추가사항: 南門洞(남문동)과 大正町(대정정)
 

강릉군 남일리면에 속한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남문외리와 북성리면의 산황리 일부를 합해 대정정(大正町)이라 하여 군내면(郡內面)에 편입시켰다.
1916년 군내면이 강릉면이 되었고, 1931년 4월 1일 강릉면이 읍으로 승격하여 강릉읍에 편입되었다. 1946년 10월 일본식 동명 변경 때 남문동(南門洞)이라 명칭을 변경하였다.
1983년 성남동과 합쳐서 중앙동이라 개칭하였고, 명주동, 성남동, 성내동, 임당동, 금학동, 용강동과 더불어 행정동인 중앙동의 관할이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묵로 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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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옛 사진 6매
 

마지막으로 옛 강릉 사진을 강릉문화원 사진전시품에서 흥미있는 사진 6매를 여기에 싣는데 1930년도에 촬영한 사진이니 일제시절에 찍었던 사진들이다. 내가 오기 13년 전 사진이니 그 때 싱황이라고 믿는다. 기억나는 건 어시장에서 어떤 창고같은 건물내에서 무지무지하게 큰 생선을 몇명이서 잡고 있었는데 “마구로”라고 불렀고, 영어로는 Tuna이며 우리말로 참치다.

 
강릉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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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정

내가 처음 일년간 살았던 대정정이지만 이 사진이 내 눈에 친밀하게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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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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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읍 어시장

이곳은 어머니 따라 자주 갔었고, 기억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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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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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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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n Ho Chung - February 2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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