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의 후예도 세월이 지나면 이런 기막힌 이얘기로 전락하게 되는가 봄니다. 어덯게 역사적 문화재를 보존해야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이얘기 인데 현재로는 뾰죽한 수가 없고 영국에서 진행되는 방법을 생각해 보자는 이얘기 임니다. 충무공 살던 옛집이 경매에 나오고, 그분의 유물이 후손들에 의해 시장에 경매에 나온 답니다. |
2014.02.25 18:23
2014.02.25 19:09
현재의 상황으로서는 문화재라고 지정해놓고 유물 유산보호를
관리하는 후손에게 그 보존경비까지 강제로 떼마기는 상황을 만들어논 국민 전체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
그러니 일본점령하에서 후손들이 일본, 구라파사람들한테 마구 문화재를 시장에서 파라버렷는데,
그들만 나무랄 수도 없는게 아니요?
중국 구라파 등 모든 문화재도 똑같은 수란을 당해 세계박물관에 모두 흐터져있는게 아닌가함.
한때는 에집트의 미라를 모두 발굴해서 연료로 팔아 먹엇다고 합디다.
에집트 미라는 헌겁과 기름으로 잘 둘러싸서 연료감으로 적격이엿다고 합디다.
2014.02.25 19:44
Once on our site, probably you remember,
Jo Seung-ja nim(*65) introduced
"The Rape of Europa" - written in 1994 and
released as a documentary in 2007.
Some reason, the documentary came to my
mind, but not to compare with your presentation,
Minn sunbaenim.
Here's the short version of "The Rape of Europa(2007)";
http://www.youtube.com/watch?v=8wdXZuP0ObY
And
if you have time - for Full Documentary;
http://www.youtube.com/watch?v=w2f123Y2WXk
And this is what wikipedia says about;
http://en.wikipedia.org/wiki/The_Rape_of_Europa
2014.02.26 01:13
동영상 잘보았습니다.
늦게남아 종중에서 경매를 통해 다시 찾을수있어서 다행입니다.
제 개인생각으로는 종부(종손)의 개인 소유보다는 종중이 소유
그종중을 대표하는 사람이 종손이 되는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화재 보존 차원에서 영국의 Nationalist fund같이 우리나라
에서도 그 활동이 더 활발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민선생! 그곳의 가뭄은 이제좀 해갈이 되었는지요? 규정
2014.02.26 03:43
국내에 살고 있으면서 이런 일들이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孫이 끊어지지 않더라도, 또한 宗親會에서 힘을 모은다고 해도 고택 내지 문화재급 유산 관리가 힘에 벅찰 것으로 생각됩니다.
충실히 일을 한다해도 경제적으로 개인 힘으로는 기본생활을 하면서 이런 관리를 하기란 어려운 일이지요.
영국이 Nationlalist fund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고 있는지, 위 동영상에서 성북동의 고택과 같이 시민들이 관리하는 것들이
후손들의 힘으로 하는 것보다는 그 관리가 이어져내려갈 가능성이 더 크게 보입니다.
박근혜정부 대선 공약중, 복지공약들도 집권 1년이 된 現今 그 실현 가능성이 가깝지 않게 보이는데, 국가 차원의 문화재 관리가 언제 정착될른지요.
후손들이 소유주라고하여 재산권 행사를 할 수있는 문제점도 고려하여 입법부에서 문화재 관리에 대한 법안이 확립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큰 일 일어났을 때 당황하지 말고 평소에 국민의 관심과 힘을 모아 이런 것 하나하나를 게을리 하지않고 잘 統治하는 것이 국가의 원동력임을 생각합니다.
2014.02.26 19:27
1.
난중일기
여기 사진에 보이는 노트들을 총칭해서 난중일기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이순신장군이 전쟁중에 매일 간단하게
친필로 쓴 일기책인게 틀림없지요.
옛날에 이 한문 일기를 한글로 번역한것을 사둔게 있는데 근 반세기가 지낫고 종이도 나뻐 노랏게된것이 저희집에 굴러 다니지요.
고등학교 2 학년에 겨울 방학때 (그게 1958 ?) 기차를 타고 무슨 생각이 들엇는지, 온양인가 하는 동네를 눈이 싸인 시골길을 걸어 현충사라는 데를 눈길 따라 찾어 간기억이있지요. 그때는 관광오는 사람도 없을때..
집에 찾어가니 집은 평법한 한식집이드군요. 집관리하시는 분이 "학생이 이런데 혼 자 찾어 왓다" 고 반갑게 대해주시면서
많은 유물을 설합에서 꺼내 보여 주시드군요.
기억나는 유물은 일기책 (소위 난중일기) , 제키 정도가 되는 무척 큰 칼, 또 장개석 총통이 글을 써서 보냇다고 벽에 걸린 족자를 보여주시드군요.
족자 쓴분 이름은 중국총통 인 張中正 (장개석의 호) 이라고 썻든걸 뚜렷이 기억하지요. 중국 총통이 보내왓다고 얘기 하시드군요.
저를 맞아주신 그분이 여기 소개되는 마지막 종손의 아버지 인지?
그 당시 이 한지로 된 일기가 국가의 중요한 문화재라는 것도 몰랏고 ..
이건 그 집안 종손들이 수백년 보관해온 것이니,
그분의 재산인건 틀립없는데, 국가가 사서 박물관에 보관햇다면 이런 문제가 생기질 않엇을뗀데!
또 그분 집안에 家寶이니 기증도 않하고
팔지도 않는 데서 문제가 생긴 것인지..
또 결혼도 못하고 혼자 살다 돌어가신 분들,
대가 끊인 집안의 유물은 어덯게 합니까..
물에 들어간 앞다리 기둥의 예:
2014.02.27 01:26
민선생!
해갈을 넘어 홍수우려가 된다니 세상만사 요지경속 종잡을수 없는데
이요상한 기후의 변화도 다 지구 온난화가 원인이 아닌지?
간송 전형필선생에대한 우리문화재사랑에 대한 수많은 에피소드가
있는데 여기말한 훈민정음 해례본(원본으로 여기고 국보 70호)도
1942년 경북 안동에서 이 해례본을 그당시 집 10채값을 주고 사서
6.25 피난시절에는 이 훈민정음 만큼은 늘상 품에 간직하고 밤에는
벼개삼아서 간직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간송미술관에는 국보 12개가 있다는데 개인소장으로는 제일 많은
숫자라 생각되며 간송선생같으신분이 있어 우리 문화재를 이만큼
이라도 보전할수있다고 생각하며 그분의 애국심과 문화재를 아끼는
혜안에 머리숙일뿐입니다. 규정
2014.02.27 06:03
여러 애국자들의 노력으로 문화재가 보관되어 있다는 일,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민경탁 선생님 가지고 계신 난중일기 한자를 한글로 번역한 자료도 매우 귀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구 온난화로 세계 각곳의 기후변동으로 이변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건축은 곳곳마다 전례에따른 기후를 표준으로 하지말고 여러 기후에 대비한 안전한 집을 지어야 할 것같군요.
2014.02.27 14:14
김성심 선배님,
작년인가 1956 년 졸업하신 선배 김익창 선생님이 "사선을 넘어서" 란 책을 쓰셧는데, 그책은 바로 현대판 난중일기지요.
여기에 몇번으로 나누어 전재한적이 있지요. 그분은 신의주에서 태어 나셔서, 삼팔선을 몰래 넘어와, 서울의대 예과때 전쟁이 나서
해군 위생병 하사관, 미군 통역병, 북한 침투 첩보대로 배속되엇다 흥남 철수로 배타고 나온 이후, 학교졸업후 미국에 와서 정신과 공부
여기 대학 입상 정신과 교수 하신분이지요, 한국 역사의 생생한 증언이엿고, 한국에서도 책을 구할수잇을지 모르겟읍니다.
불행히 임진왜란 당시 한문이 통용되든 시대라 일본과 10 여년간 계속된 전쟁속에 서민이 격은 얘기는
지금 전해 네려오는 책이 없읍이 안타깝습니다.
김선배님이 57년에 학교 나오셧다고 여기 홈피에 적혀져서
혹시나 해서 같은 동기 정진묵 (ENT) 선배님한테 전화올리니,
구수한 얘기가 나와 근 30분 얘기를 들엇지요. 정선배는 중국일주 공자 묘지 까지 찾어가는중국 횡단 여행을 제가 마련햇는데 그때 접선햇지요.
선생님 동기에는 6.25 남침때 인민군 탱크부대 출신으로 남한에 네려왓다 북으로 후퇴 못하고(?)
남한에 떨어져 남한에서 의사하시든 아버지를 찾아 ...
결국 서울 의대 같은 반으로 졸업하시고, 전력 때문인지 미국 못오시고, 카나다서 트레인 받고 ...
한국 사람이면 모를 사람이 없는 영화게 출신 김지미 여사한테 장가드신 분이 있다는둥. 이종구 선배님?
또 한분 제가 모신 같은 반 졸업하신 선배는 57 년 졸업하신 이하길 "중령" 이신데, 월남전에 한국 해병대 3000 을 1965 년에 월남에 보내는데,
그때 차출돼서 제가 모시고 일년 근무햇지요. 저는 학교 졸업한지 6 개월만에 인턴도 않하고 전쟁터에가서 선배들에게 이거 저거 주서 배웟지요.
이 선배님은 지금은 미국 오셔서 로스안제레스에서 침술로 개업하시고 계시고,
또 쉬카코에 사시는 동기이신 김일훈 선생님은 우루무치에서 서안에 이르는 Silk road 여행에서 뵈엇지요.
책을 여러권 쓰셧지요.
김선생님 세대는 살아있는 "亂中日記" 책이 틀림없읍니다.
너무 늦기전에 그동안 보고 들으신 생생한 역사를 글 로 자주 써서 놓으시길 바람니다.
저는 누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 완전히 골프나 음악에 도취하는것 마냥 빠져들어가는 약점(?)이 있읍니다.
황대감:
일기예보에 들으니, 태평양 북쪽에 계속 고기압대가 형성되어 찬 바람이 칼리포니아 쪽으로 오지 않아 몇년 가믐이 계속된다고 합니다.
작년에 아리조나에 갔드니 그 사막에 커다란 나무 화석들이 줄비한 Petrified forest Nat. Park 를 갓엇는데, 한때는 그 곳이 밀림이엿다니, 지구의 기후가 계속 바뀌는게 틀림없고, 가믐으로 킬리 포니아 전체가 다시 사막으로 되는 건지?
어디서 읽으니 지금 시베리아 얼은 땅에 기온이 올라가서 비옥한 농토로 변해간다니,
빅토를 안 마냥 언제 인가는 쏘련으로 다시 이민가야 할날이 올찌?
여기서 멀지 않은 곳 Sequoia Nat park 에 갔든니 2000-3000 년 수명의 집채같은 덩치의 적송들이 즐비하든데, 그런 나무 많이 심어 놓으면 지상의 탄산까스 다 흡수 할수도 있을 텐데.. 근 몃십년 내에 나무 들이 더 빨리 크고있다고 합디다. 지구의 온도는 몇만년 주기로 계속 변한다는데,
지금 우리가 기온이 올라가는 주기에 사는 모양.
법을 만들어 정확히 계산해서 자기가 배설한 탄산까스는 모두 나무를 심어 흡수하게 만들어 놓든지, 덜 배설하든지 하면 문제 조금은 해결가능?
결국은 기름값, 에너지 값 올려 그 돈으로 식목, 대체 에너지개발, 등등으로 해결하는 수 밖에..
저는 금년에 심어놀 100 여구루 나무로 제가 만들어 놓는 탄산까스 모두 흡수할 예정이요! ㅎ ㅎ
Dr. Bang,
작년말 베르린에서 일주일 묵고, 동구라파 10 여일 돌기회가 잇어 히틀러시대 독일국민이 잘못선택한 지도자를 밀고 따라다니다
엄청난 범죄를 지엇다는 얘기를 여러번 들엇지요. 특히 아우스비츠 수용소 견학하고 인간이 동물과 큰 차이 없다는 것도 실감햇지요.
비엔나에서는 Gustav Klimt, Lucien Freud (S. Freud의 손자), Picasso 특별 그림 전시회를 볼기회가 있엇는데,
Lucien Freud 그림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인간의 처절한 감정을 잘 표현햇읍디다. 인간이 참으로 희한한 동물이란것을 다시 실감.
Lucien Freud는 유태인으로 대부분의 가족들을 히틀어 수용소에서 독가스로 처형당해 일엇고 할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드 (정신분석의 시조, 비엔나에서 개업하다 는 영국으로 도망갔고)
전쟁이후 가족들이 다 처형당해 없어진후 살아 남은 사람으로 어떤 그림응 그림을 그리겟읍니까?
그분의 자화상이 아래 있고 그분의 인물화들은 구글이 모여 놧군요.
이분 그림들은 그림으로 남긴 이차대전 "난중일기"가 아니겟읍니까?
2014.02.28 02:25
김익창 선배선생님의 저서: [사선을 넘어서]는 교보문고 광화문지점에 전화하였더니 그곳에는 단 1권 재고가 있다고 하여 예약해놓았습니다.
내일 가서 구입하여 읽으려고 합니다.
이곳에 커멘트 글이라도 올리시지 못하시게 김선배님께서 불편하신지, 아쉽습니다. 되도록 불편이 적게 생활하시게 되면 좋겠습니다.
이종구 선생님은 캐나다에서 교수로 계시다가 한국에 오신지 오래 되셨습니다. 울산의대 아산병원(서울소재)에 심장내과 교수로 계시다가 현재도 개인클리닉을 하시고 계십니다.우리 57졸업, 11기 동문회장을 여러해 맡아서 봉사하고 계십니다.
이하길 선생님은 최근 몇년동안 서울에서 늦게까지 어느 병원에 근무하시면서 우리 동기 동문회 일을 많이 하시고 동문들과 여행도 하시고 하다가 2012년 4월 20일에 작고하셨습니다.
김일훈 선생님은 오래전에는 한국의 의사신문 등에 연재글을 오래동안 기고하시기도 하셨습니다. 학창시절부터 영어도 잘 하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정진묵 선생님은 졸업후 미국으로 가신 후 한번 서울에서 동기동문회가 있을 때 오시어 만나뵈었지요.
해마다 있는 함춘미술전에 2010년에는 서예 두점을 출품하셨습니다.
2010년 함춘미술전 출품
2014.02.28 09:57
김선배님이 올려주신
정진묵 선배님 글 인터넷에서 찾아 번역해 올림니다
당 나라때 시성 이태백의 시군요.
첫번째 시, 혼자 달밤에 고행생각하는 심정과
두번째시는 찾아봐야 알겟읍니다.
제가가진 竹簡서체 ( 종이가 생기기전 땅에서 발굴한 한나라시대 나무나 대나무에 쓴 글씨)
자료 보내드리고 교신을 재개 하자고 언약을 햇지요
靜夜思(정야사) 唐 李白
床前明月光 (상전명월광) : 침대 앞에 밝은 달빛
疑是地上霜 (의시지상상) : 혹시 땅에 내린 서리인가 의심해 본다.
擧頭望明月 (거두망명월) : 머리 들어 밝은 달 바라보고는
低頭思故鄕 (저두사고향) : 고개 숙여 고향을 생각한다.
이왕 생각난김에 언제 들어본 이순신 장군에 한시 여기 보탬니다.
水國秋光暮
驚寒雁陳高
憂心輾轉夜
殘月照弓刀
이 바다에
추위에 놀란 기러기 떼 높이 날아간다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드는 밤
새벽달빛이 활과 칼에 반사되어 온다.
2014.02.28 10:55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백의 글씨
출처: 위키백과
이백(701-762) 唐나라 시인.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
두보(杜甫)는 詩聖이라 불리고, 이백은 詩仙이라 불리어 자유분망하고 스케일이 큰 시들을 단숨에 지었다고 합니다.
강물속에 비치는 달을 잡으려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을만큼 술을 즐겨 달과 대작하며 자연을 즐기고 시를 지었답니다.
***이태백 하면 생각나는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 '의 동요는 작시 작곡자 불명으로 口傳으로 내려오는 동요라고 합니다.
곡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의 것과도 동일하고 따라부르기 쉬움.
http://blog.daum.net/jc21th/17781000
http://www.youtube.com/watch?v=Ow8jaL92sP8
2014.02.28 11:33
김선생님이 소개하신 李白의 詩 上陽臺 확데해놧읍니다
처음 듣는 얘기 입니다
陽臺는 그 당시 *도교사원 이엇고 그 곳에 올라가서 (上)가서 쓴시 같음, * 정정
山高水長,物象千萬,非有老筆,清壯可窮 그 다음엔 글은 "十八日 上陽臺 書 太白"
"18일날 양대에 올라가서 태박이 썻다" 는 애기 같은데
길이는 28 cm 넓이 38.1 cm
이게 중국의 국보정도되는 유물같은데 지금은 대만 고궁박물원에 있다고 썻놧군요.
오른족 꼭대기 唐李白上陽臺 쓴글은 틀림없이 송나라 휘종이 쓴 글이고, 그분의 글씨체가 독특해서 수금체라고도 하는데, 이게 송나라 황실 소장으로 네려오다 청나라 왕실 소장이 됏다가 (건융황제 도장이 찍엿으니)
또 민국 말기 난장 판에 몰래 시중에 흘러 나왓다가 다시 장씨라는 분 손에 들어갔다가
중앙 국무원에 헌납햇다가, 1958 년 대만 고궁박물원 소장이 되엇다고 쓴것 갔읍니다.
이런거 전문 하는 사람은 도장 보고 누가 수장햇던물건인지 다 아는 모양이지요
다행이 이순신 난중일기 책은 종가 집을 한번도 않 떠나갓으니,
중국사람 보단 더 파란 만장이 덜한건지??
아래 애기는 제가 얼른 짐작 해석해보면
司馬承禎 이란 도사가 전서와 그림에 능한분이엿는데 이백의 시를 무척 좋아햇든 분.
이분이 임금의 명을 받아 陽臺 란 궁을 건축햇는데, 거기에는 산수화 한폭이 걸려있고 이태백이 이곳을 찾앗을적에는 벌써
司馬承禎이란 분은 돌아가고
그림한폭 거기에 걸려있어 그 그림 감상문을 16자의 시로 써 놓은것 같아요.
在北宋的《宣和畫譜》中無記錄 이란 애기는 북송때 이 글씨가 언급이 안돼다고 하니 누가
원본을 복사햇는지도 모른다는 얘기 같지요. 중국에 복사 가짜가 하도 많어
진짜도 가짜로 몰리기도 하고,
가짜가 진짜로 둔갑도 하고, 요지경 속이지요
아래는 인용문들:
王正鵬:[唐]李白《上陽臺》書法存疑
||
[唐]李白《上陽臺》書法存疑
王正鵬(土家族)/文
盛唐時期大詩人、書法家李白,在天寶三年(744年)與大詩人杜甫、高適同游王屋山陽臺宮,李白是為了尋訪仰慕己久的道士司馬承禎(該道士是第一個稱讚李白的人,道士精通道術,擅寫小篆書法、繪畫。李白曾在開元十二年“724年”出遊江陵時,曾得到司馬承禎的稱讚,後司馬承禎命帝命建陽臺宮。),到陽臺宮後,才知道道士司馬承禎已仙逝了,無緣相見。只見宮中留有司馬承禎的繪畫山水壁畫一幅,此畫高一十六尺,長九十五尺,畫仙鶴、雲氣、山形、澗壑、人物等。李白目睹司馬承禎其繪畫,隨在此畫上題了自詠四言詩《上陽臺》。
李白四言詩《上陽臺》書法,內容“山高水長,物象千萬,非有老筆,清壯可窮。 十八日,上陽臺書,太白。”,為紙本水墨,縱28.5釐米,橫38.1釐米,5行,共25字。據傳是唯一傳世的書法真跡。該書法用筆縱放自如,快健流暢,於蒼勁中見挺秀,意態萬萬。結體亦參參跌宕,顧盼有情,奇趣無窮。
筆者存疑:王屋山上陽臺宮司馬承禎所繪山水壁畫,是司馬承禎直接在建築物體上直接作畫,筆者認為李白也是直接在建築物上直接寫自詠四言詩《上陽臺》,李白《上陽臺》書法不應是紙本。若王屋山有司馬承禎的山水壁畫,也應被人挖去了李白《上陽臺》書法部分,筆者認為此書法應是後人臨摹,可能是晚唐楊凝式臨摹李白《上陽臺》作品。在北宋的《宣和畫譜》中無記錄,至清代安岐《墨緣匯觀》、內府的《石渠寶笈·初篇》才有著錄,這是不合常理的記載。
上陽臺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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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8 13:29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ohoja&logNo=50130958158
김익창56 선배선생님의 저서 표지입니다.
2014.03.01 11:59
김선생님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함니다
지금쯤은 영어본 (우리 애를이 읽을수있는) 도 미국서 나왓을검니다.
1. 임진왜란 책소개
이책은 미국사람이 쓴 책인데 일본 사료도 정리해서 우리가 모르는 많은 사료를 포함.
저는 사서 친구들도 주고햇는데
정작 다읽지는 못햇는데, 한국 사람이라면 꼭 일어 볼만한 역사책.
값은 19.76 불 포케트북. (amazon.com으로)
정장본은 ? $ 35
책첫머리에있는 간단란 전쟁 일지를 추려 보면
2014.03.01 19:02
During the second Japanese invasion and Siege of Jinju(1593),
70,000 nearly all the Jinju citizens were sacrificed.
One of them was, as you might know, Nongae.
Nongae( poem )
- by Byun Young-ro;
http://jinjuhighschool.com/index.php?mid=free_board&page=26&document_srl=923
FYI;
Jinju City - today;
http://youtube.com/watch?v=Cj0-65aGfS8
2014.03.01 20:06
It appears Joseon navy soldiers were so scared of fighting and won't advance except the commander ship.
No wonder why the whole country was taken over.
이순신 승리의 원인은 그의 지리적지식과 그지방 해류의 정확한 지식을 가졋다는 것이외에 모두가 열악한 조건이엿든것 같음. 병사들도 뒷전으로 슬슬 도망갈 궁리만 하고 지희관이 제일 앞에가는 한심한 군대..
그러니까 나중이 지회관이 전쟁에서 참화를 당할수밖에 없는 전쟁이 되엇는가 봄.
정진묵 선배님 얘기에 의하면 이순신이 죽지 않고 살아 남어 온양에서 몰래 살다가 돌아가셧다는 이얘기를 고증해서 그분 친구 분이 책을 냇다는데, 이런 얘기는 처음들어 봅니다. 황대감 혹시 그런 소리 들어 보셧는지?
This is an excerpt from Wikipedia.
"In the diary (most probably from 난중일기), "Commandship was alone in the enemy formation. Only my ship fired cannons and arrows. All the other ships didn't advanced, so I couldn't assurance future things. All officers were seeking for run, as they knew this battle was facing massive forces with small. Ship of Kim Eok-chu (김억추), the Officer of Jeolla Right erea was at 1 majang(2~3km) away."
Floating in the water and moving towards the Koreans along the current was a body with the ornate armor of a Japanese daimyo. The body was hauled aboard by Admiral Yi's men and identified as Kurushima Michifusa, the commander of the vanguard units of the Japanese fleet and the brother of the late Kurushima Michiyuki, killed in 1592 by Admiral Yi at the Dangpo Battle. Yi ordered Kurushima's head cut off and posted on the mast of his flagship. At the sight of their commander's head, Japanese morale dropped.[11] After that, Finally Ahn Wi (안위) overcome fear and joined the battle, and then other ships except Kim Eok-Chu's ship were also joined."
명량대첩
鳴梁大捷
Battle of Myeongn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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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October 26, 1597 (September 16 according to Chinese Lunisolar Calendar, September 13 according to Korean Lunisolar Calendar)
Location
Myeongnyang Strait, near Jindo Island
Result
Decisive Korean victory
Belligerents
Fleet of Toyotomi Hideyoshi
Commanders and leaders
Japaese Navy
Todo Takatora
Katō Yoshiaki
Mori Takamasa
Kurushima Michifusa †
Hata Nobutoki †
Kan Masakake †
Joseon navy
Yi Sun-sin
Kim Eok-chu
Strength
Japan
133 warships
at least 200 logistical ships
Joseon
13 Panokseon.
Casualties and losses
Japan
31 ships destroyed
Joseon
No ships lost, at least 2 killed and 3 wounded on boarded of Yi Sun-sin
In the Battle of Myeongnyang, on October 26, 1597, the Joseon Admiral Yi Sun-sin fought the Japanese navy in the Myeongnyang Strait, near Jindo Island, off the southwest point of the Korean peninsula. With 13 ships remaining from Won Gyun's disastrous defeat at the Battle of Chilchonryang, Admiral Yi held the strait against a fleet of
133 Japanese warships and at least 200 logistical support ships. Many Japanese warships were sunk or disabled during the battle and the Japanese were forced to retreat. Given the disparity in numbers, the battle is regarded as one of Admiral Yi's most remarkable victories.
Background
Due to Japanese intrigue taking advantage of the fractious politics of the Joseon Dynasty court, Admiral Yi Sunsin was impeached and almost put to death. Yi was instead tortured and demoted to the rank of a common soldier.
Yi's rival, Admiral Won Gyun, took command of the Joseon fleet, which under Yi's careful management had grown
from 63 heavy warships to 166.
Won Gyun was an incompetent military commander who immediately began squandering the Joseon Navy's strength through ill-conceived maneuvers against the Japanese naval base at Pusan. In the Battle of Chilchonryang, the
Japanese navy, with Todo Takatora in overall command, outmaneuvered the Korean navy and virtually wiped it
out. Soon afterwards, the Japanese reinforced their garrisons in Pusan and various forts in the southern coast of
Korea, and began the second invasion.
With the Joseon Navy taken out of the scene, the Japanese believed that they now had access to the Yellow Sea
and could resupply their troops through this sea route as they advanced northward. In the 1592 campaigns,
Admiral Yi prevented the Japanese from resupplying their troops in this manner and kept their ships holed up at their main bases in Pusan Harbor.
Battle
Admiral Yi Sun-sin was hastily reinstated as Supreme Commander of the Regional Navies after Won Gyun was
killed at the Battle of Chilchonryang. Yi only had 12 panokseon ships at his disposal, which had been saved by Bae Seol, a Joseon officer who escaped early in the Battle of Chilchonryang. At that time, King Seonjo, who judged that the Joseon navy had lost its power and would never be restored again, sent a letter to abolish the navy and join the ground forces under General Gwon Yul. Admiral Yi famously responded with a letter written "...I still have twelve battle ships...and I am still alive, the enemy shall never be safe in the Western Sea." Later, one more ship joined with Yi and his small fleet numbered 13. Although Yi only found 100 sailors initially, some of the survivors of Chilchonryang flocked to him, and he had at least 1,500 sailors and marines by the end of September.
After studying numerous arenas for his last stand with the Japanese navy, Admiral Yi decided on the
Myeongnyang Strait. It had very strong currents that flowed at approximately 10 knots, first in one direction,
then in the opposite direction, in three hour intervals. Admiral Yi realized he could use this unique condition as a
force multiplier. The narrowness of the strait would prevent the Joseon fleet from being flanked by the numerically superior enemy fleet, and the roughness of the tide prevented the Japanese from effectively enveloping them. By
using the shadows of the surrounding hillsides, Yi would be able to establish a visibility advantage for his fleet. And finally, the strait was sufficiently narrow that steel wire could be strategically tightened across its whole width.
His ships were docked in the Byeokpajin about late August in the lunar calendar. From that time, Japanese ships
were detected in nearly every mild days. Belows are from his diary(date written in the lunar calendar).
Day 3~6 September: Bad weathers.
Day 7: Sunny. After wind calm, Japanese attacked twice, at noon and night.
Day 8: Sunny.
Day 9: Sunny. Detected and chased Japanese ships.
Day 10: Sunny. Japanese ships were detected and ran away.
Day 11: Sunny.
Day 12~14: Bad weathers
On the morning of 26 October(17 September in the lunar calendar), the huge Japanese Fleet attacked. He described as "As About 200 enemy ships were flowing, I promised with my men and moved to intercept the enemy. And about 130 ships were surrounded our fleet." in his diary. And the Battle began.
Using double salvo cannon fire, the Koreans threw a barrage which quickly began damaging Japanese vessels. In the shadow of the hillsides, Yi's ships were difficult to target. The Joseon ships had flat bottoms that provided more stable and accurate cannon firing platforms than the Japanese ships, which had keel bottoms. But from beginning to mid-time, only commandship fought in the battle. other 12 ships were in backfront of the field, didn't fight and waited for time to ran away. In the diary, "Commandship was alone in the enemy formation. Only my ship fired cannons and arrows. All the other ships didn't advanced, so I couldn't assurance future things. All officers were seeking for run, as they knew this battle was facing massive forces with small. Ship of Kim Eok-chu (김억추), the Officer of Jeolla Right erea was at 1 majang(2~3km) away."
Floating in the water and moving towards the Koreans along the current was a body with the ornate armor of a Japanese daimyo. The body was hauled aboard by Admiral Yi's men and identified as Kurushima Michifusa, the commander of the vanguard units of the Japanese fleet and the brother of the late Kurushima Michiyuki, killed in 1592 by Admiral Yi at the Dangpo Battle. Yi ordered Kurushima's head cut off and posted on the mast of his flagship. At the sight of their commander's head, Japanese morale dropped.[11] After that, Finally Ahn Wi (안위) overcome fear and joined the battle, and then other ships except Kim Eok-Chu's ship were also joined.
The tide soon shifted and the Japanese ships began to drift backwards and collide with each other. In the confusion, Admiral Yi ordered his ships to advance and press the attack, destroying ships out of all proportion to their relative numbers. The dense formation of Japanese ships crowded in the narrow strait made a perfect target for Joseon cannon fire. The strong tides prevented those in the water from swimming to shore, and many Japanese sailors who abandoned sinking or damaged ships drowned. After the Japanese lost 31 warships, their fleet was no longer combat effective, and thus they retreated.[citation needed](General Yi only reported the number of complete destroyed ships to the government during the war)[citation needed]
This victory prevented the Japanese from entering the Yellow Sea and resupplying their army, which had recently fought against Joseon and Chinese armies in the Battle of Jiksan (Cheonan) and was headed towards the capital city of Hanseong (Seoul). With their supplies and reinforcements cut off via the sea route, the Japanese had to halt their advance and begin a general retreat.[12]
Aftermath
The immediate results of the battle were a shock to the Japanese command. Without being resupplied or reinforced, the morale of the Japanese soldiers declined. Joseon and Chinese armies were able to regroup and push the Japanese back to their network of fortresses on the southeastern coast of Korea.
The victory also freed up the Chinese navy to join Admiral Yi in early 1598. After the destruction of most of the Joseon fleet at Chilchonryang, the Ming kept their navy stationed at important port cities to guard against possible Japanese naval attacks. The victory at Myeongnyang convinced the Ming government that they could ease security at their major ports and mobilize a fleet to Joseon's aid.
The Japanese navy was heavily damaged (31 battleships destroyed). As previously mentioned, Kurushima was killed, and Todo Takatora (the hero of Chilchonryang) was wounded[citation needed] .The Japanese navy retreated to Busan to refit and would not be in fighting condition for several months[citation needed], providing time for the Koreans to rebuild their fleet and the Chinese to bring naval reinforcements.
2014.03.03 06:22
민선생!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노량해전에서의 생존설은 인터넷을 열면 금방
찾을수 있는것인데(남천우 교수) 현금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역사에
나와있는 사실에 입각 물론 분명히 정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역사에 이 불출세의 영웅이 조선조 제일 우둔한 왕밑에 있었
다는것은 불운이었으며 생존설과 더불어 자살설도 있는데 이사람의
견해로는 그중에서도 만일의 가능성을 생각하면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생존설은 그때의 정황과 이순신장군의 인격,인품으로 보건대 납득할수
없는 설이라고 이사람은 굳게 믿습니다. 규정
2014.03.03 18:53
선조:
아직까지는 선조라는 임금이 한번 실수를 해서 이순신을 감옥에 넣은 정도로 알고있엇는데,
남교수 이야기로 선조시대에 사색당쟁이 시작됏고 선조가 반대파를 공격하는 상소문을 올리게해서,
그것을 이용해 자기의 반대파도 제거하고, 선조는 사람도 무척 처형햇고..
아직도 기억하고 사실은 일본이 쳐들어 올테니 군비 확장하자는 이율곡이 주장하는데
선조가 반대파의 손을 들어 주어 그 계획을 묵살한것이 라든지,
전쟁준비를 반대한것, 이순신을 감옥에다 넣어서 조선해군을 박살 낸일, 모두가 아는 사실을 최소화 시키려면
전쟁의 오래갈 영웅을 만들지 않어야 햇고...
그러니니 이순신이 민중에 영웅이 된후 임금이 자기의 입지를 생각해
김일성이 자기의 실수를 최소화하려고 박헌영 죽인거나 비슷한 일이 올것을 예감햇다는것은
그분의 지헤를 존경하는것으로 볼수도 있지 않을까함.
선조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다시 개죽엄을 당하는 일을 피하는 길은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는 수 박에는 없엇을 것이고..
처음 안사실은
전사한후 장례를 80 일간 미룬 다는건 이해가 않감니다.
이분이 전사한후 일주일 내에 일본군이 다 철수햇다는데,
시신을 땅에 묻지 않고 80 일간 방치 햇다?
이류가 알려젓는지 모를겟읍니다.
어디서 읽은 바로는 중국에서 이순신를 자기네 장군으로 모셔 갈려고 햇다는 얘기도 들엇지요.
결국은 선조의 무능으로 중국도 상당한 피해를 입엇으니,
중국이 이순신으로 하여금 선조를 갈아치우려고 햇을 지도 모를 일이고 (이 얘기도 읽엇지요)
책: "이순신은 전사하지 않았다"
조선 최고의 명장 이순신의 해전과 임진왜란을 상세하게 재조명하며, 이순신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새로운 관점에서 살펴보는 책이다.
잘 알려져 있는 이순신의 탁월한 자질과 전과를 보다 타당성 있게 정리하며, 당시의 국왕이었던 선조의 개인적인 자질 및 행적과 연관시켜 이순신 죽음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저자는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숨진 것으로 알려져 왔던 이순신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뒤집으며, 이순신이 선조에게 헛된 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 해전에서의 죽음을 위장하고 살아남았다고 주장한다.
이순신의 생존설을 주장을 뒷받침하는 과학적인 논리와 역사적 사료를 함께 제시하였다
저자 남천우
저서 (총 9권)1932 서울 성북동 출생. 1950-1957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1950-1955 공군입대, 대위제대. 1960-1967 미국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 물리학 박사. 1967-1982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대표저서 및 논문으로는 '석불사', '유물의 재발견', '이순신은 전사하지 않았다', '평역 이순신 자서전', '거북선 구조에 대한 재검토' 등이 있으며 그밖에 '석굴암', '신라종', '첨성대', '경주의 월성' 등에 대한 '역사학보' 발표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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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의 재발견학고재1997.12.31
이순신(역비의책 18)
역사비평사1994.05.25
목차
책을 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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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임진년 전해까지의 세상
1. 이순신의 약력
2. 정여립의 역옥사건
3. 선조의 불공정한 통치가 가져온 동서붕당의 발생
4. 전쟁전야의 적막
-
제2장 왜란의 발발
1. 왜란의 발발
2. 조선 수군의 병력과 배치
3. 조선 군선의 제도 - 판옥선과 거북선
-
제3장 이순신이 남긴 역사자료
1.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된 이순신
2. 이순신의 일기 초본
3. 이순신의 장계 초본
4. 이순신의 일기(1)
5. 선조의 유서
6. 이순신의 장계(1)
-
제4장 첫해의 해전
1. 옥포해전의 승리 - 장계(2)
2. 당포해전의 승리 - 장계(3)
3. 반격을 위한 왜군의 준비
4. 견내량해전의 승리 - 장계(4))
5. 견내량해전의 호칭문제
6. 부산해전의 승리 - 장계(5)
7. 이순신의 해전과 임진왜란
-
제5장 그 후의 4년
1. 왜군의 서울 철수
2. 강화교섭
3. 이순신의 그후 활동
-
제6장 재란의 발발
1. 수군의 대치상태
2. 선조의 발악
3. 이순신의 투옥
4. 원균의 패전
-
제7장 재란 때의 이순신
1. 이순신의 재등장
2. 마지막 해의 활동
-
제8장 이순신은 전사하지 않았다
1. 원균패망과 이순신 승전이 가져온 선조의 궁색한 입장
2. 이순신 자진 전사설에 관한 기록
3. 살아서 은둔하였을 가능성
4. 이순신은 16년 후에 죽었다
-
후기
이순신은 전사하지 않았다
-
『이순신은 전사하지 않았다』는 물리학도인 저자가 근 20년간에 걸쳐 연구해온 개인적 관심과 추적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물리학도로서 일생을 살아오면서 한편으로 저자는 '석굴암', '신라종', '첨성대' 와 같은 역사적 유물들에 얽힌 비밀과 사연을 추적하는 작업을 계속해왔고, 학계에서 인정받는 저서도 몇 권 펴낸 바 있다. 그렇듯이 이 책 『이순신은 전사하지 않았다』에서 저자는 조선 역사 최고의 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숨진 것으로 지금껏 알려져 왔던 사실을 전면적으로 뒤집는 새로운 역사적 논거를 과학적인 논리와 근거로서 제시하고 있다.
-
▶ 『이순신은 전사하지 않았다』의 주요 내용
-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세 가지 중요한 주제는 다음과 같다.
우선 첫 번째로는 이순신의 탁월한 자질과 전과에 관한 것이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통설이 되고 상식이 되어 있지만, 정밀하고 타당성 있게 정리된 것은 많지 않다.
다시 정리를 해서 이순신의 전과를 살펴보면, 임진년에는 조선의 육군과 수군이 모두 패주하였을 때, 이순신은 4천 명의 전라좌도 수군으로 홀로 적의 수군을 거의 모두 섬멸하였으며, 여러 차례의 해전을 통하여 그해에 죽인 적병의 수는 실로 10만 명에 달한다.
5년 후인 정유년에는 선조가 이순신을 옥에 가두고 조선 수군을 원균에게 맡김으로써 명실공히 선조의 수군답게 만들어 놓았지만, 그로 인하여 3만 명의 조선 수군은 전멸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순신은 또 다시 패잔수군 2천 명으로 10만 병력의 적의 함대를 명량해협 서북쪽 큰 바다에서 단 한번의 해전으로 패배시켰으며, 이 해전에서 적병 2만7천 명 이상을 죽였다.
이와 같은 승리로 이순신은 해상을 통하여 쳐들어오는 적의 진격로 또는 수송로를 차단하였다.
때문에 이후부터 적은 모든 수송을 험준한 산을 넘으면서 육로로만 하여야 했으므로 결과적으로 병력의 보충이나 교대, 보급품의 수송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반면에 아군에게는 식량 조달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또 의병의 활동을 용이하게 해주었으므로, 패전하던 전국을 승전으로 바꾸는 밑거름이 되었다.
-
다음으로 이 책에서는 당시의 국왕이었던 선조의 개인적인 자질과 행적이 지니는 비중 문제를 다루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선조는 당시의 중요 사건에 골고루 지배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이것은 이순신과의 관련을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문제이다.
선조는 심하게 피해망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러한 성격은 광폭하고 범죄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하여 충성스럽고 유능한 많은 인사들이 희생되는 비참한 사건들이 이어져 갔다.
선조가 저지른 역사적 범죄의 예를 들어보면, 선조는 우선 자신에게 비판적인 신하들을 모조리 없애기 위하여
정여립 사건을 조작하여 천여 명을 죽였다.
다음으로 그는 신하들 상호간에 서로 모함하는 상소문을 조장, 유도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무고한 신하들을 자주 죽였으므로, 신하들은 무리를 이루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게 되어 동인과 서인, 그리고 남인과 북인 등의 붕당으로 갈라졌으며, 마침내는 혈원에 얽혀서 그후 수백년 동안 계속하여 치열하게 싸우는 당쟁으로 발전하였다.
붕당은 선조 8년에 처음으로 생기며, 선조 이후의 당쟁은 무리를 이루면서 치열하게 싸우므로 그 이전까지 있었던 단편적인 사건들, 곧 사화와는 크게 구별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가장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주제는 이순신의 죽음에 관한 의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본래 이순신이 전사하였다는 정설 이외에도 자살설에 해당하는 견해가 그동안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제기하는 견해는 이른바 이순신의 생존설, 곧 그가 당시의 해전에서 죽지 아니하고 살아남았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러한 견해는 비록 거칠고 난폭한 허구처럼 보일 것이지만, 상당한 과학적 근거와 자료적 신빙성을 갖춘 상태에서 이순신 생존설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를 두고 혹자는 영웅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에서 그러한 범상한 통념을 초월하여 항상 주어진 최선의 길을 걸었던 이순신에 대하여 더 깊게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당시 이순신에게는 세 갈래의 갈림길이 주어져 있었다.
첫 번째 길은 잠시 동안 영웅대접을 받는 듯하다가 곧바로 선조에게 잡혀서 죽는 길이었고,
두 번째의 길은 싸움터에서 일부러 죽는 길이었으며,
세 번째의 길은 죽음을 위장하여 살아남는 길이었다. 그런데 앞의 두 길은 모두 헛되게 죽는 길이었으며, 그 길은 저자가 생각하기에 이순신이 당시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 아니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책속으로
▶ 저자 후기 가운데서
나는 이 책에서 이분이 이순신의 전사현장에 대해 "송희립 등도 알지 못했다"라고 적은 것에 대해 지나치게 조심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순신이 죽지 않았음을 감추는 동시에 그 비밀계획에 송희립 등이 개입하지 않았음을 말하여 그들을 보호하려 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그 전기에는 16년 후에 산소를 이장한 사실과 더불어 45년 후에 이순신이 '충무공'의 시호를 받은 사실도 적혀 있는 것이므로 그 전기를 발표할 무렵에는 이미 지나간 비밀에 대해 조바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분의 전기가 이순신의 전사 직후에는 하지도 않았던 설명을, 그것도 그것이 허위 사실임을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내용의 설명을, 45년 후에 추가한 셈이다.
그러면 그는 왜 그렇게 적은 것일까?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것은 그러한 기사를 통해 이순신이 전사하지 않았음이 언젠가는 알려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장례가 80일이나 지나서 치러진 일, 시신도 없었을 텐데 그 무덤이 16년 후에 이장되었다는 기사, 등도 그러하다.
무덤이 어디에 있다고만 적으면 되는 일이 아닌가? 이순신의 가족들이 그가 살아남았음을 크게 기뻐하였을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들은 그가 지혜롭게 살아남았음을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부득이 당시의 사회를 속일 수밖에 없었지만 떳떳하였으므로 영원히 역사를 속일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아니 이것은 결국 살아 있던 이순신의 지시에 따른 것이며, 그가 그렇게 지시한 것은 모든 국민이 자신이 겪은 고통을 이해하고 함께 기뻐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는 진정 큰 영웅이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자신에게 영웅답지 않다고 말하지 않을까 하여 조바심이나 하는 소인배는 아니었던 것이다.
어디엔가 그의 영혼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생존 사실이 알려진 데 대해 기뻐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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