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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청준 선생 별세




<당신들의 천국> <서편제>의 작가 이청준(사진)씨가 31일 새벽 4시께 세상을 떠났다.

향년 69. 2006년 여름 폐암 판정을 받은 이씨는 지난 6월 중순 병세가 악화돼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고인은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울대 독어독문학과를 나왔으며, 65년 <사상계>에 단편 <퇴원>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67년 <병신과 머저리>로 제12회 동인문학상을, 69년 <매잡이>로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신인상을 받으며 유망 작가로 주목받았다.
 
그 뒤 40여년의 문학인생 동안 대표작인 <당신들의 천국>을 비롯해 <이어도> <잔인한 도시> <낮은 데로 임하소서> <축제> 등의 중·장편과 <소문의 벽> <남도 사람> <벌레 이야기> 등의 소설집을 냈다.

4·19 세대의 시대정신에 입각한 권력과 자유의 문제, 원초적 고향에 대한 신화적 탐구를 거쳐 늙음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생래적 문제까지 쉼없이 천착해 온 고인은 ‘근대 소설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문적인 지성을 보인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은 특히 김수용 감독의 <병신과 머저리>에서부터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 이창동 감독의 <밀양>까지 많은 영화의 영감이 됐다. 정부는 고인이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문화예술인에게 추는 최고 권위의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기로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남경자씨와 외동딸 은지씨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에 차려졌으며, 장례는 문인장(장례위원장 김병익)으로 치러진다.

발인은 2일 아침 8시, 장지는 전남 장흥군 회진면 진목리 갯나들이다. (02)3410-6914.

김일주 기자 pearl@hani.co.kr


이청준과 어머니 / 오태진 수석 논설위원


1954년 이청준이 고향 장흥을 떠나 도회지 중학교로 유학가기 전날 이청준 모자는 개펄로 나갔다.

홀어머니는 몹시도 가난했지만 아들을 맡아 줄 친척집에 빈손으로 보낼 순 없었다. 모자는 막막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한나절 게를 잡았다.

이튿날 이청준이 긴 버스길 끝에 친척집에 닿자 게들은 상해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친척집 누님이 코를 막고 게자루를 쓰레기통에 버렸을 때 이청준은 자신이 버려진 듯 비참한 마음이었다.

궁색스런 게자루와 거기 함께 담겨 버려진 어머니의 정한(情恨)은 두고두고 이청준의 삶과 문학의 숨은 씨앗이 됐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깊은 삶의 비의(悲意)와 문학의 자양(滋養)을 얻었고 당신의 삶을 빌린 글들을 쓰면서 많은 것을 깨우쳤다"고 했다.

이청준 문학의 출발점은 고향, 어머니, 불우한 유년이 뭉쳐진 원죄의식이었다. 축축하게 젖은 옷을 입은 듯 남루한 원죄의식, 그 모든 것을 끌어안은 상징이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가난에 치여 집까지 팔았지만 그 사실을 고향에 다니러 온 고교생 이청준에게 숨겼다.

어머니는 주인 허락을 얻어 내 집인 양 아들에게 밥을 해먹이고 하룻밤 잠까지 재워 보냈다. 어머니는 신새벽 눈 쌓인 산길을 걸어 아들을 읍내까지 배웅하고 돌아선다. 눈길엔 모자가 걸어왔던 발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어머니는 아들의 목소리와 온기가 밴 아들의 발자국만 밟고 온다. 마을 어귀에 선 어머니는 갈 곳이 없다. 집이 없다.
 
이청준은 그 황망한 어머니의 사연을 십몇 년 뒤에야 알게 된다. 단편 '눈길'에 쓴 자신의 얘기다. 어머니는 아흔 넘겨 치매를 앓았다. 아들 이름도 잊은 채 "손님 오셨구마, 우리집엔 빈방도 많으니께 편히 쉬었다 가시요" 하곤 했다.

이청준이 전한 "몸이라는 완벽한 감옥에 갇혀 계신 어머니" 얘기는 정진규가 시 '눈물'로 썼다.

1996년 어머니를 보내드린 뒤 이청준은 임권택에게 어머니 상을 치르며 겪은 일화들을 얘기했다. 임권택은 그걸 영화로 만들자 했고 두 사람이 함께 소설과 영화로 쓰고 찍은 작품이 '축제'다. 이청준은 "내 소설의 기둥은 어머니"라고 했다.

"소설을 쓰게 해주는 힘과 인연이 어머니에게서 비롯된다"고 했다. 어머니는 이청준이 영원히 말리지 못한 젖은 옷 한 벌, 그의 정신의 피륙이었다. 그가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나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니께 돌아왔습니다'(조병화 '꿈의 귀향').


임권택 감독이 기억하는 작가 이청준 / 이후남 기자


작가 이청준의 문학은 8편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중 세 편을 함께 만든 임권택 감독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서편제’(1993년)와 ‘천년학’(2007년)은 남도사람을 주제로 한 연작 단편 가운데 각각 ‘서편제’와 ‘소리의 빛’ 그리고 ‘선학동 나그네’가 원작이다.

임 감독은 70년대 말 잡지에 발표된 단편‘서편제’를 읽고 감동한 순간부터 영화화를 꿈꿨다고 돌이킨 바 있다.오정해·김명곤 주연의 영화 ‘서편제’는 당대 한국영화 흥행신기록을 세우면서 우리 소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중앙일보 지면을 통해 두 사람이 나눈 대담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삶 가운데 아픔, 고뇌가 쌓이고 맺힌 것이 한입니다.

그러나 맺힌 것만 있으면 그것은 원한입니다. 그것을 끌어 안으면서 푸는 것이 진정한 한의 미학이고, 소리이며, 예술 아니겠어요.

”한 많은 인간에 대한 애정, 즉 휴머니즘은 두 사람의 작품 세계에 꾸준히 이어지는 공통분모이기도 하다.‘서편제’로 맺어진 두 사람의 인연은 세 살의 나이 차와 관계없이 작품은 물론이고 허물없는 우정으로 이어졌다.

영화 ‘축제’(96년)는 치매를 앓던 노모를 여의고 난 작가의 심경을 역시나 노모를 모시고 사는 감독과 주고받으면서 시작됐다.

영화와 소설이 나란히 진행되는 유례없는 공동작업이었다. 임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에서 작가는 원작뿐만 아니라 각본도 직접 맡아 촬영현장을 내내 함께 누볐다.

작가의 고향은 전남 장흥, 감독은 전남 장성이다. 두 사람의 대화에는 작품에 대한 진지한 논의 외에도 은근한 유머가 흘렀다.

임 감독이 특유의 어눌한 말투로 상대의 고향을 낮춰 짐짓 농을 던지면, 작가는 은발이되 마치 소년 같은 명랑함으로 이를 받곤 했다.

영화‘천년학’의 주요 장면은 작가의 고향인 장흥에 주막집 세트를 지어 촬영했다. 소설에서 묘사된 대로, 학이 날개를 펼칠 듯한 산자락과 물을 끼고 있는 곳이다.

이청준의 부음이 전해진 31일 임 감독은 “나는 이미 잃어버린 고향을, 그의 작품 속에서 만나곤 했다”고 말했다.

이웃사촌이기도 한 벗을 보내는 마음을 그는 일일이 토로하지 않았다. 감독은 “아쉽고, 원통하고, 아깝다. 할 말이 없다”며 영화 ‘축제’의 말미에 나오는 만가(輓歌)로 심경을 대신하고자 했다. “이 작가가 어머니를 보내던 마음이나, 이 작가를 보내는 마음이나 같은 마음”이라고 했다.


타계한 작가 이청준 / 이 에스더 기자


“창작의 고통은 천형(天刑)”이라던 고 이청준 선생. 그 천형을 기꺼이 짊어지며 수많은 작품을 써 낸 고인은 마지막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이청준 작품집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열림원)가 출간됐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문단은 이내 시름에 빠졌다. 그가 서너 달쯤 전부터 폐암과 투병을 계속해왔다는 소식이 작품집 출간과 함께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몸은 힘들지만 마음의 목소리는 ‘빨리 소설책을 내라’라고 재촉했다”고 털어놨다. “항암제 주사 맞고 한 주 쉬고, 또 주사 맞고 두 주 쉬기를 네 차례 되풀이한 끝에 나온 책”이라는 것이다. 그때 그는 폐암 2기였다.

이청준은 일찍이 “창작의 고통은 천형(天刑)”이라 일렀다. 그 천형을 이겨내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다만 소설을 썼다. 잠깐 한눈판 적도 없었다. 부지런히 소설을 썼고, 또 썼다. 그렇게 쓴 소설이 200편이 넘는다.

마지막 가는 길까지도 이청준은 소설가였다.

◇바닷가의 문학소년=이청준은 1939년 다도해 푸른 뱃길이 내려다 보이는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어려웠고 형제는 많았다. 5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났지만, 그가 여섯 살 때 막내 동생과 맏형은 홍역과 폐결핵을 앓다 차례로 세상을 떴다.
 
이태 뒤인 46년엔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그 뒤로 생계는 고스란히 어머니가 떠맡았다. 맏형은 문학청년이었다. 책이 많았고 꼬박꼬박 일기를 썼다.

어린 이청준은 맏형이 책 행간에 적어둔 짤막한 소회와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찾아내 읽었다. 이 은밀한 독서 체험으로 소년은 문학에 눈을 떴다.

54년 고향의 초등학교를 마친 이청준은 광주서중에 합격하면서 집을 떠나 친척집에 몸을 맡긴다. 더부살이 형편에 마땅한 선물 전하기가 버거웠던 어머니는 갯벌에 나가 온종일 잡은 바닷게 한 자루를 그의 손에 들려 보낸다.

광주까지 가는 길에 게는 모두 곯아 쓰레기통 신세가 되고 만다. 그는 이 ‘게 자루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친척 누님이 코를 막고 당장 그 상한 게 자루를 쓰레기통에 내다 버렸을 때, 나는 마치 그 쓰레기통 속으로 자신이 통째로 내던져 버려진 듯 비참한 심사가 되었다.’

◇한글세대를 대표하다=60년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독문과에 진학한 그는 신입생 때 4·19를 겪고, 2학년 때 5·16을 지켜봤다.

그 시절 이청준과 함께 문학을 시작했던 이들이 이른바 ‘한글 세대’다.고(故) 김현(1942∼90)을 비롯하여 김병익·김주연·김치수 등 소위 ‘문학과 지성 1세대’와 문학적 동지로서 평생을 함께했다.

특히 문리대 동급생 김현과는 30년 넘도록 막역한 사이였다. 문단에선 아직도 김현이 이청준을 “이가, 이 촌놈아”라 부르곤 했던 일화를 꺼내들곤 한다.그러나 그들도 이청준의 개인사를 속속들이 알지 못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64년, 변변한 거처가 없던 이청준은 문리대 본관에 밤마다 숨어 들어가 잠을 청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궁핍을 입에 담지 않았다. 김현도 “나는 그가 그의 글 속에 피력한 과거 외에는 그의 과거를 거의 모른다”고 토로한 바 있다.

대학 졸업반이던 65년, 그는 월간 ‘사상계’ 신인 문학상에  ‘퇴원’이 당선 하면서 등단했다.

졸업과 동시에 ‘사상계’에 입사했고, 그해 단편 ‘병신과 머저리’를 발표했다. ‘병신과 머저리’의 원고료로 그는 마지막 남았던 형의 장례비를 치렀다.

그 뒤 장편 『당신들의 천국』이 큰 성공을 거두고 78년 발표한 중편 ‘잔인한 도시’로 이상문학상을 받으면서 이청준은 김승옥과 함께 한글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우뚝 섰다.

◇가난, 그리고 어머니=이청준의 문학세계를 이루는 두 산맥이 있다. 가난과 어머니다. 그리고 이 두 산맥이 맞닿는 곳에, 한국 현대소설 사상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히는 『눈길』(1977)이 있다.

까까머리 고등학생 이청준이 광주에서 유학하던 시절. 그의 형이 가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어머니는 집을 팔았다. 소식을 듣고 곧바로 귀향했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고향집에서 아들에게 밥을 먹이고 잠을 재웠다.

새 주인에게 사정해 하루만 집을 빌린 것이다. 어머니는 꼭두 새벽에 눈 쌓인 비탈길을 걸어 아들을 읍내까지 배웅하고 돌아갔다. 혼자 돌아가는 눈길에 아들의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목소리며 온기가 느껴지는 그 흔적을 따라 밟으며 마을로 돌아갔다. 오목오목 디뎌둔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며….어린 나이부터 객지를 떠돌던 그에게 어머니는 차라리 신앙이었다.

그의 호 ‘미백(未白)’은 ‘아직 희지 않다’라는 뜻이다. 여기엔 일찍 서리가 내려앉은 백발을 노모 앞에서 보이기 민망한 자식의 마음이 담겨 있다. 96년 치매를 앓던 어머니 김금례 여사가 95세를 일기로 돌아가시자 그는 이를 소재로 삼은 장편 『축제』를 쓰기도 했다.

끝으로 김현과의 일화를 하나 적는다. 70년대 얘기다. 그때 김현은 이청준에게 이렇게 농을 쳤다.“이가 너 인제 소설 그만 쓰고 죽어버려라. 여기서 더 욕심 내봐야 되 지도 않을 노릇! 이쯤에서 만족하고 그만 끝내버려! 하지만 그전에 내 술 한 잔 사줄 테니 공연히 혼자서 끙끙대지 말고 지금 반포치킨으로 달려와!”

이제 18년 만에 다시 만난 두 친구, 저승 어느 선술집에 함께 앉아 거나하게 회포를 풀고 있겠다.


Text and Photos from Internet,Webpage by Kyu Hwang,August 1,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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