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04 08:40
인천 포로 수용소에서 만난 친구
민 공 기
LA 를 출발한지 열두 시간 후 나의 비행기는 인천국제공항 착륙태세에 들어 갔다. 창문 밖으로 흘러가는 흰 구름 사이로 푸른 바다가 보이고 저 멀리 인천 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에 올 때 마다 이 시점에서 나는 언제나 60여 년 전 이곳 월미도에 있었던 인천 포로수용소 생각이 난다. 그곳에서 있었던 나의 중학교 때 한 친구와의 만남을.
1950 년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한 UN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압록강을 향하여 북진 중이었다. UN 군 총사령관이었던 Douglas MacArthur가 “Home by Christmas “ 라고 장담했고 중공군은 아직 참전하기 전 그 때였다.
3 개월간 공산치하 서울에서 해방된 나는 10 월초에 통역장교 모집에 응시 합격해서 명동성당에 설치된 “UN 군 연락 장교 교육대”에 입대하였다. 동기 생은 태반이 서울 시내 각 대학생들이었고 중고등학교 선생님들도 있었다. 11 월초 임관하기도 전에 나는 한 30 명의 동기생들과 같이 월미도에 있는 인천 포로수용소로 파견되었다. 서부전선을 북진했던 UN군의 포로가 된 많은 인민군을 진남포에서 배로 인천 포로 수용소를 거처서 더 큰 거제도 수용소로 이동했는데 이곳 인천에서 우선 성명, 계급, 소속부대, 투항 장소 등에 관한 신문을 받게 되었다. 이 일을 담당할 미군 M.P. 부대를 통역 지원하는 것이 우리들의 임무였다.
어느 날 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국군부대의 경비망속에 새로 도착한 수백명의 포로 대열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11 월인데도 벌써 영하 가 되는 추위인데 포로들은 아직도 인민군 여름 군복을 입고 있었다. 추위에 대한 방한 책으로 얇은 여름군복에 짚이나 거적을 넣었기 때문에 포로의 등 이 꼽추모양으로 돌출되어있었다. 포로들의 대열은 누런 흙탕 물에 물 드린 “꼽추” 군단의 행진이었다. 그 대열이 내 옆을 지나 갈 때 갑자기 “공기 야 !" 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수백명 사이에서 또 다시 내 이름을 부르고 손을 흔드는 포로를 발견했을 때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나하고 소학 교, 중학교 (6 년제 ) 동기생이었던 김종식이 아닌가 !
김종식은 소학교 때부터 나하고 각별한 친구였다. 평안북도 신안주가 고향인 김군은 해방 전 1943 년에 내가 다니던 서울 교동국민하교 졸업반에 전학 왔 고, 다음 해 같이 경기중학에 입학했다. 중학 2 학년 때 해방되자 남북한에 미 군. 소련군이 진주 하고 분단된 후에 종식은 서울에 혼자 남게 되었다. 가족 의 재정원조가 끊어진 종식은 가정교사를 하면서 중학을 졸업하고 서울대상 과 대학에 입학했었다. 우리 집에도 자주 놀러 왔었고 나의 어머니를 친 어머 니 같이 가까이 모시든 종식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소식이 끊어졌는 데 지금 반년 만에 이곳 포로 수용소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대열이 내 옆을 지나갈 때 종식이가 소리쳤다. “ 나 3 대대 2 중대야 ! “
곧 달려가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포로 수용소 안에서는 오로지 경비 부 대 소속원만이 출입이 가능했다.
‘어떻게 그를 도와 줄 수 있을까 ?’ 생각하던 중에 갑자기 몇 일전에 경비소 대장을 하고 있는 또 한 명의 교동국민학교 동창생을 만났던 것이 생각났다. 남정국이란 이름의 이 친구는 중학에 진학을 하지 않고 해방 후 국방경비대 에 입대를 해서 하사관으로 이곳 경비소대장을 하고 있었다. 남정국은 다행 이 김종식을 잘 기억하고 있었고 곧 종식이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수용소 안 에서 돈으로 사용되는 담배를 계속 차입해 주었다.
포로 심사가 끝난 얼마 후 남정국이 종식의 편지를 전해 주었다. 얼마 후 거제도로 이동할 것 같은데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기약 없는 희망이 적혀 있었다. 이것이 인천에서 받은 종식의 마지막 소식이었다.
그 후 2 년 반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 동안 나는 지리산, 동해안에 주둔한 국군 11 사단, 육군본부를 거쳐서 1953 년 초에는 진해에서 육군 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 해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으로 2만 7천 명의 반공 포로가 석방되었는데 이 중의 나의 친구 김종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석방된 종식이가 동래온천에 있 는 중학 때 선배 집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곧 진해에서 달려갔다. 석 방은 되었어도 신원증명서가 없었다. 당시 신원증명서가 없는 20 대는 부산 거리에서 신병훈련소로 직행하기 마련이었다. 나는 종식에게 통역장교 로 입 대 할 것을 권유하고 국방부에 있는 친구의 도움으로 신원증명서와 통역장교 지원서를 준비해 주었다.
1953 년 7 월 드디어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3 년 만에 한국전쟁은 끝났다.
이 무렵에 종식이는 통역장교 시험에 합격 입대했다.
나는 7 월에 제대하고 8 월 말에 부산항을 떠나 미국유학 길에 떠났다.
휴전 후 육군대위로 제대하고 상과 대학에 복학 졸업한 종식이는 충주비료를 시작으로 실업계에 투신 후 재벌기업계열의 사장으로 활약했다.
나는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자주 일본, 한국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우리 둘은 자주 만났다. 중학때 친구들과 식사를 같이하고, golf 를 즐기고 학창시절 이야기로 옛날을 회상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암암리에 약속이나 한 듯 인천 포로 수용소에서의 만남 은 이야기 하지 않았다. 나는 종식에게 그의 생애에서 가장 고통스러웠을 체 험의 한 토막을 상기 시켜주고 싶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해서 인민군이 되었을까 ? 강제로 인민의용군에 징용되었나 ? 홀 어머니가 계신 이북 고향에 대한 망향 심인가 ?
순간적인 판단 하나가 남.북으로 영원히 분단시키는 그런 시대였다.
이북 태생, 서울에서의 학창시절, 인민군 포로, 한국군 장교, 친구들과 golf 를 즐기던 businessman. 파란 많던 김종식의 생애는 어쩌면 우리 세대가 겪었던 50 년대 한국의 가혹한 정치현실의 상징인지도 모른다.
종식이는 1997 년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 비행기는 지금 인천 공항에 착륙했습니다.” Touch down 의 가벼운 충격에 나는 멀고 먼 옛날 60 여년 전 추억의 세계에서 깨어난다.
2014년10월 (이 글에 나오는 사람이름은 가명임.) |
2016.08.04 11:34
2016.08.04 13:42
6.25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민주주의 국가를 믿었던 사람들과 공산국가를 믿었던 사람들이
마치 한 mixer안에서 섞이듣이 살었지만, 이상하게도 결국은 각각헤어져 나와서 자가가 믿는곳으로
떨어져 나간것 같군요.
결국 줄을 잘섰던 사람들, 잘 못섰던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 운명의 길을 간것이지요.
다행히도 종식씨는 일직 깨닳은 바있어서 반공포로의 길을 택해서 그런대로 잘 살었던것 같습니다.
공산주의 이론의 교묘한 매력과 그들의 설득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속아서 넘어갔지요.
이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채 순간적 공산주의의 유혹으로 잘못된 길을 택했지만,
과연 누구가 그당시에 정확한 판단을 내릴수 있었을가 의문입니다.
결국은 재수 좋은 사람과 재수 나뻤던 사람들이 아니였을가 합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이 이런 기로에 서서 둘중의 하나를 택해야되게 만든게 누구의 잘못일가?
누구를 탓해야되나?
2016.08.04 23:19
어려운 시기에 아슬아슬한 어떻게 보면 행운의 인생 이었네요.
18 세기는 온 세상의 문명 국가 들이 커다란 변화를 하기 시작 하는 시기였습니다.
왕의 권력이 백성에게 넘어 가기 시작했고 백성들이 편하게 살고 배불리 먹게 하는 방법을 찿는
지혜를 강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염불 같은 종교, 인성을 기르는 학문에서서좀더 실용적인 과학을 장려하고 산업을 발달 시키려 했습니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빨리 효과적으로 실시한 나라는 강국이 되고, 19세기의 제국주의를 주도하게 됩니다.
우리조상들도 일찌기 17-18세기에 실학을 주장하고 개혁을 논했습니다.
1776년 미국이 독립한 해에 영조가 죽고, 정조가 등극합니다.
그는 실학파를 등용 개혁을 계획했습니다. 이것은 일본의 명치유신보다 적어도 60년이상 앞선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1800년에 죽고 그이듬해에 실학자들은 천주교를 빌미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 집니다.
그이후의 세도정치는 조선을 약소국으로 전락시키고 지금의 우리의 고초의의원인이 되고있습니다.
다 조상 탓이지요.
2016.08.05 02:15
민선배님의 compelling story들 Dr. Zhivago 영화보듯
감명깊게 읽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It is indeed too painful for the old generation people to relive
what some of us went through.
I couldn't help feeling my eyes warming up and welling up.
Medically speaking, an average person with an average emotional reserve
often cannot handle the tidal wave of emotion arising from the recollection
of the nightmarish past memories without experiencing sudden collapse or a heart attack.
다시말해서 자칫하면 Dr. Zhivago의 가슴을 움켜 쥐고 심장마비로 길에서 쓸어지는 신세가 되는것이지요.
I honestly believe your friend consciously and unconsciously knew it, and the Holocaust survivors know it.
That is why, I believe, they didn't want to talk about the past involving the most unbearable segment.
2016.08.05 05:57
Maybe, it might have been better if all the people involved in this story opened their hearts,
and talked about the failures, mistakes, misjudgements, and shames.
Their life might have been much lighter and brighter.
We all should have lived without fear of such things. But we are so shy and timid.
Keeping all these unhappy things inside and staying silent may not be a good thing.
If Mr. Kim could said, "I was crazy and stupid to have gotten into the damn communist stuff....",
it could have been a good relief and nobody could have argued about the mishap.
So often, "자존심" can be a very bad thing. We see such things all the time.
Retrospectively, in my surgeon's point of view,
anything bad should have been exposed and dealt with once for all, like a surgical excision.
If they could have done that, Mr. Jong-Sik Kim might not have died of heart attack.
Ridiculously easy to say, now, after everything is all over,
The foresight tends to be poor and limited but the hindsight is always good.
감동 스러운 이야기 입니다.
선배님들 이나 저희 세대는 고통 스럽고 힘들었던 시절을 겪었지요.
지금 뒤돌아 보면 어찌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