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English
                 

Life [김희중 Essay] 경주 여행

2014.10.23 18:29

운영자 Views:1317

[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8.


경주 여행


[중앙일보]
입력 2006.09.12


고1 때 아버지와 단 둘이 첫 관광 - 74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특집 취재


필자가 고1 때 아버지와 함께 간 경주에서 찍은 사진. 썩은 고목으로 멸망한 신라 왕국의 이미지를 표현했다.
아버지는 사냥을 즐겼다. 1950년대만 해도 서울 근교에서 꿩이나 산토끼 같은 야생동물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눈도 많이 내렸다. 겨울이 되면 아버지는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산과 들을 누볐다. 나도 따라다녔다. "탕!" 소리가 난 뒤 아버지를 쫓아가 보면 하얀 눈 위에 새빨간 피를 흘리는 꿩이 떨어져 있곤 했다. 꿩을 여러 마리 잡으면 동네 중국집에 부탁해 탕수육과 만두를 만들어 먹었다. 아버지는 나한테도 콩알만한 납탄이 발사되는 공기총을 마련해 주었다. 전깃줄에 앉아 있는 참새들이 주 표적이었다.

고교 1학년 여름,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경주로 여행을 갔다. 처음으로 둘이서만 떠나는 여행이었다. 카메라를 챙기며 마음이 한껏 설렜다. 하지만 엄한 아버지와 단 둘이서 며칠 밤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두렵기도 했다.

당시 경주는 서울에서 가기엔 너무나 먼 관광지였다. 기차의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터널을 지날 때마다 기관차가 내뿜는 연기가 객실로 밀려들어 사람들의 얼굴은 점점 까매졌다.

처음 본 경주는 황량했다. 가장 유명한 유적이라는 불국사는 허물어지고 있었다. 석탑들도 무너진 채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천년 도읍지의 영광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쓸쓸한 정경이 오히려 표현하기 힘든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는 포석정, 들판에 홀로 서 있는 첨성대는 강렬한 느낌으로 어린 나의 감성을 뒤흔들었다.

저녁을 먹고 불국사역 앞 가게의 마루에 앉았다. 참외를 깎아 먹으며 아버지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백제의 석공 아사달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삼국통일을 이룩한 화랑을 거쳐 이차돈의 순교에까지 이어졌다. 현장교육이었다.

아버지를 바라봤다. 집에서는 그렇게 무섭기만 했는데 멀리 나오니 정이 많고 따뜻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우리 부자(父子)의 머리 위에는 별이 쏟아질 듯 빛났고 은하수가 하늘 길게 흘렀다. 찬란했던 그 밤하늘은 경주 여행에서 본 어떤 모습보다 뚜렷하게 내 기억에 남아 있다.

74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특집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다시 경주를 찾았다. 그 사이 경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발길 닿는 곳마다 새로 지은 시멘트 한옥 건물들이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베이지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대통령의 취향이라고 했다. 참담하고 실망스러웠다. 아버지와 같이 다니면서 본 내 마음속의 고색창연한 경주는 사라지고 없었다.

첫 여행으로부터 30년이 지난 85년, 나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경주를 소개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본 경주의 그 매혹적인 모습을 세계인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요즘도 나는 가끔 경주에 간다. 추운 겨울이나 비 오는 날이면 무엇에 끌린 듯 기차에 오른다. 갈 때마다 경주는 세상 어느 곳보다 따뜻하게 날 맞아준다. 아버지의 추억과 함께.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No. Subject Date Author Last Update Views
Notice How to write your comments onto a webpage [2] 2016.07.06 운영자 2016.11.20 18193
Notice How to Upload Pictures in webpages 2016.07.06 운영자 2018.10.19 32343
Notice How to use Rich Text Editor [3] 2016.06.28 운영자 2018.10.19 5919
Notice How to Write a Webpage 2016.06.28 운영자 2020.12.23 43838
280 [김희중 Essay] 자살 기도 2014.12.06 운영자 2014.12.06 1101
279 [김희중 Essay] 뉴욕의 노숙자 [2] 2014.12.06 운영자 2014.12.06 1201
278 세이버제트 전투기 이야기 : 용문 길에서 [2] 2014.12.03 정관호*63 2014.12.03 2139
277 문화 생활 하기 [5] 2014.11.30 이건일*68 2014.11.30 1725
276 [김희중 Essay] 유학을 떠나다 2014.11.24 운영자 2014.11.24 1206
275 [김희중 Essay] 첫사랑 [2] 2014.11.24 운영자 2014.11.24 1258
274 Mrs. Late Dr. Jae Do Lee ('64) 소식 [7] 2014.11.17 조승자-65 Mrs. 2014.11.17 1333
273 [김희중 Essay] 봉은사 가는 길 [2] 2014.11.16 운영자 2014.11.16 1999
272 [김희중 Essay] 잔칫집 가는 길 [6] 2014.11.16 운영자 2014.11.16 1297
271 Amazing Encounter - "What goes around, comes around" [1] 2014.11.16 Rover 2014.11.16 1079
270 [동영상]훌륭한 엄마 이야기 [7] 2014.11.15 황규정*65 2014.11.15 1395
269 나의 캘리포니아 생활 [2] 2014.11.08 이건일*68 2014.11.08 1712
268 [김희중 Essay] '인간가족'전 [3] 2014.11.05 운영자 2014.11.05 1873
267 [김희중 Essay] 낙제생 [1] 2014.11.05 운영자 2014.11.05 1156
266 [김희중 Essay] 첫 개인전 [1] 2014.10.27 운영자 2014.10.27 1245
265 [김희중 Essay] 집 뒷마당 암실 [1] 2014.10.27 운영자 2014.10.27 2350
» [김희중 Essay] 경주 여행 [2] 2014.10.23 운영자 2014.10.23 1317
263 [김희중 Essay] 거울 속의 나 [2] 2014.10.23 운영자 2014.10.23 1292
262 [김희중 Essay] '매직 박스' - 운명의 첫 카메라 [1] 2014.10.21 운영자 2014.10.21 1389
261 [김희중 Essay] 두 번의 결혼, 이혼 [3] 2014.10.21 운영자 2014.10.21 14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