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고1 때 아버지와 함께 간 경주에서 찍은 사진. 썩은 고목으로 멸망한 신라 왕국의 이미지를 표현했다. |
고교 1학년 여름,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경주로 여행을 갔다. 처음으로 둘이서만 떠나는 여행이었다. 카메라를 챙기며 마음이 한껏 설렜다. 하지만 엄한 아버지와 단 둘이서 며칠 밤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두렵기도 했다.
당시 경주는 서울에서 가기엔 너무나 먼 관광지였다. 기차의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터널을 지날 때마다 기관차가 내뿜는 연기가 객실로 밀려들어 사람들의 얼굴은 점점 까매졌다.
처음 본 경주는 황량했다. 가장 유명한 유적이라는 불국사는 허물어지고 있었다. 석탑들도 무너진 채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천년 도읍지의 영광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쓸쓸한 정경이 오히려 표현하기 힘든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는 포석정, 들판에 홀로 서 있는 첨성대는 강렬한 느낌으로 어린 나의 감성을 뒤흔들었다.
아버지를 바라봤다. 집에서는 그렇게 무섭기만 했는데 멀리 나오니 정이 많고 따뜻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우리 부자(父子)의 머리 위에는 별이 쏟아질 듯 빛났고 은하수가 하늘 길게 흘렀다. 찬란했던 그 밤하늘은 경주 여행에서 본 어떤 모습보다 뚜렷하게 내 기억에 남아 있다.
74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특집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다시 경주를 찾았다. 그 사이 경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발길 닿는 곳마다 새로 지은 시멘트 한옥 건물들이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베이지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대통령의 취향이라고 했다. 참담하고 실망스러웠다. 아버지와 같이 다니면서 본 내 마음속의 고색창연한 경주는 사라지고 없었다.
첫 여행으로부터 30년이 지난 85년, 나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경주를 소개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본 경주의 그 매혹적인 모습을 세계인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요즘도 나는 가끔 경주에 간다. 추운 겨울이나 비 오는 날이면 무엇에 끌린 듯 기차에 오른다. 갈 때마다 경주는 세상 어느 곳보다 따뜻하게 날 맞아준다. 아버지의 추억과 함께.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there was a father-son relationship, strictly defined by the old Korean customs.
It is seldom a friendly or close relationship.
But once or twice, there came a time when father and son became friends for a short while.
Hee-Joong Kim is talking about one of such occasions.
I had such occasions too when my father was felt to be a warmer person than I thought.
But it was so short and never persisted.
Nothing much I or my father could have done.
Sadly, it was just the fateful generation thing that couldn't be overcome.
But there is still something I can do.
Yes, I do not want the same thing happen between me and my children !!
Having been a son under our father, it's very hard to change my attitude.
But I will have to change it as much as I can.
When I am gone, there should be no traces of Confucious doctrine left in my remaining families.
I will take the whole damn thing to my grave for the last time from my famili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