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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13.


봉은사 가는 길

[중앙일보] 입력 2006.09.19

여배우 모델 촬영대회 갔다가 밭일 하고 귀가하는 모자 찍어

나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 중반에 사진에 입문했다. 10대 소년의 시선은 순수했다. 지금도 그때 찍은 사진들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래서 이야기의 진행을 잠시 멈추고 그 시절 사진을 몇 장 보여드리고자 한다. 50년대는 어쩌면 우리에겐 잊어버리고 싶은 세월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를 돌아봐야 현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미래도 내다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사진들은 모두 고교 재학 시절 개인전에 발표했던 작품들이다.

대한사진예술연구회는 55년 7월 10일 야외 촬영대회를 열었다. 틈만 나면 카메라를 메고 다닐 때였으니 그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장소는 뚝섬 백사장. 처음 참가하는 촬영대회라 마음이 설렜다. 동대문에서 전차를 타고 왕십리를 거쳐 뚝섬으로 향했다. 뚝섬은 머나먼 '시외'였다.

주최 측은 여자 배우 서너 명을 모델로 동원했고, 강사를 초빙해 사진촬영 실기를 강의하기도 했다. 수백 명의 사진작가들이 모델 주변에 몰려 촬영 경쟁을 벌였다. 교복 입은 학생은 나 혼자였다.

오후가 되자 맑았던 날씨가 서서히 흐려지더니 바람까지 불기 시작했다. 백사장의 나룻배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여자 모델은 별로 신통해 보이질 않았다. 다른 사진거리를 찾아봤지만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나룻배를 타고 강남으로 넘어 갔다. 백사장을 가로지르고 산을 넘어 봉은사를 찾았다. 그 때의 봉은사는 고요한 산사(山寺)였다.

절을 한 바퀴 돌며 사진을 찍고는 다시 배를 타기 위해 산을 넘는 중이었다. 그때 마침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낙과 아이가 눈에 띄었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카메라를 들고 그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셔터를 눌러댔다. 비탈엔 소나무가 서 있고 멀리 강변에는 포플러나무가 강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귀로(歸路.아래사진)'라는 제목으로 출품한 이 사진은 290여 점의 작품 중에서 특선으로 뽑혔다. 언론은 "독특한 모티브의 발견이며, 그 내용이 생생하고 노련하다"고 과분한 평가를 해줬다.

이 사진을 찍은 장소는 어디쯤 될까. 곰곰 생각해보니 지금의 서울 삼성동 경기고 교문 부근이었다. 50년 전 서울 강남은 이런 모습이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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