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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14.


잔칫집 가는 길


[중앙일보]
입력 2006.09.20 17:56 / 수정 2006.09.20 17:56


농부 찍으려 안양 들판 헤메다 의관 갖춘 어르신들 행렬 포착

초여름의 어느 일요일, 나는 집 툇마루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맑고 파랗고 높았다. 집에서 보내기에는 날씨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판에는 빛의 향연이 펼쳐져 있을 것이고, 좋은 사진거리가 널려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 도시락을 부탁했다. 한 달이면 두세 번씩 카메라를 메고 들판을 헤매는 아들을 어머니는 말리지 않았다. "몸조심 하고, 깡패 조심하고, 해 떨어지기 전에 집에 들어오너라"고 말할 뿐이었다. 나는 도시보다 자연 속에서 사진 찍는 것이 좋았다. 50년대는 서울 근교가 전부 시골이었다. 영등포만 벗어나도, 신촌만 벗어나도 인적조차 드문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근교를 벗어나서 멀리 나가보기도 했다. 하지만 멀다고 해 봐야 수원, 오산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 날도 멀리까지 나갔다. 영등포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안양까지 가서 들판을 가로지르는 신작로를 걸었다. 들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찍고 싶었기 때문이다.

햇살이 점점 따가워지기 시작했다. 몇 장 찍다보니 어느 듯 점심시간이 되었다. 개울에 손을 씻고 그늘에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그 때 신작로 저 멀리 두루마기에 갓을 쓴 어른들이 나타났다. 열 분이 넘어보였다. 의관을 갖춰 입은 걸로 봐서 이웃마을 잔치에 가는 것이 분명했다. 서울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도시락을 덮고, 카메라를 들었다. 신작로 한복판에 서서 어른들을 향해 거리를 측정했다. 하지만 앵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좀 더 높은 곳에서 내려찍으면 훨씬 좋을 것 같았다. 아까 신작로를 걷다가 고장 나서 서 있던 트럭이 생각났다. 어른들을 뒤로하고 1km쯤 되는 그 곳까지 내달렸다. 다행히 트럭은 아직 그대로 있었다. 땀을 훔치고 숨을 고르며 트럭 위로 올라갔다. 앵글이 훨씬 좋았다.

카메라 파인더를 들여다봤다. 녹색 들판 사이로 하얗게 빛나는 신작로가 곧게 뚫려 있고, 포플러 이파리가 햇살에 반짝였다. 이윽고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어른들이 장중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잘 연출된 연극의 한 장면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맨 앞에 선 어른이 트럭 아래까지 접근했을 때 셔터를 눌렀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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