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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김희중 Essay] 첫사랑

2014.11.24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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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15.


첫사랑


[중앙일보]
입력 2006.09.21

두 살 많은 불문학도에 반해 - 14년 지나서야 "사랑했어요"

필자(左)가 1958년 11월에 연 두 번째 개인전에 찾아온 그녀.
고교 시절, 나는 친구들처럼 여학생의 꽁무니를 쫓아다니지는 않았다. 하지만 첫사랑은 찾아왔다. 여동생을 만나기 위해 들른 서울 종로의 빵집 고려당에서 그녀를 처음 봤다. 그녀는 여동생 친구의 언니였다.

첫눈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아름답고 기품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보다 두 살이나 많은 이화여대 불문과 학생이었다. 서울에서 큰 병원을 하는 집안의 딸이었고, 승마와 무용을 즐기는 멋쟁이였다.

다시 만날 기회를 엿보던 중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그녀를 초청하기로 했다. 여동생을 구슬려 초청장을 보냈다. 전시회를 준비하는 동안 그녀가 과연 와 줄까 하는 생각으로 가슴을 졸였다. 나는 아직 고교생이었고, 그녀는 장안에서 인기 있는 여대생이었다.

그녀가 왔다. 나에게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차분하게 전시장으로 안내했다. 사진 한 장 한 장을 보던 그녀는 "사진이 좋다. 고등학생 사진 같지가 않다"고 평가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광릉으로 같이 나들이를 가고, 그녀 집에 찾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나를 동생으로 취급했다.

어느 날 영화를 보러 갔다. 수도극장(현재의 스카라극장)에서 상영하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다. 우리가 극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영이 시작됐다. 어둠 속에서 자리를 찾다가 얼떨결에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잡은 내가 더 놀랐다. 그녀는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네 시간이 넘는 긴 영화를 보는 내내 손끝에 남은 온기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손을 씻지 않았다.

1960년 내가 유학을 떠나며 우리는 헤어졌다. 그녀를 다시 보게 된 것은 14년이나 흐른 74년이었다. 서울에 오자마자 그녀를 찾았다. 그런데 그녀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67년 '동백림(東伯林)사건'이라는 간첩단 수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서유럽에 거주하는 194명의 예술가와 교수.유학생이 간첩활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 사건은 2006년 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원회에 의해 간첩단 사건이 아니라는 쪽으로 결론이 났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정치적.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그녀는 파리에서 공부하다가 유학생과 결혼했다. 남자는 "신혼여행을 어디로 가고 싶으냐. 세상 어디나 가게 해 주겠다"고 했고, 그녀는 농담 삼아 "북한"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소원대로 북한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가난한 유학생이던 남자가 북한의 도움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동백림 사건이 터지자 남자뿐 아니라 그녀도 옥살이를 하게 되었고, 대단하던 그녀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다시 만난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남편은 아직 복역 중이었다. 서울에 머물던 어느 날 옛사랑을 고백했다. "옛날에, 내가 당신을 사랑한 거 아나요?"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알고 있었어요."

처량한 고백이요, 쓸쓸한 회고였다. 사춘기 시절 내 가슴을 불태웠던 그녀가 분단의 희생양이 되어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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