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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야(子夜)와 그녀의 연인 백석
 
김영한은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한다. 1932년 그녀의 집안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어 거리로 나앉게 되었는데 이때 김영한은 열여섯 살의 나이로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기명(技名)은 진향(眞香). 그는 조선 권번에서 조선 정악계(正樂界)의 대부였던 하규일 선생 문하에서 여창가곡, 궁중무 등을 배운다. 문재(文才)를 타고난 김영한은 기생 생활 중에도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하며 인텔리 기생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해관 신윤국은 기생 김영한의 능력을 높이 사 일본 유학을 주선한다. 신윤국의 후원으로 도쿄에서 공부하던 중 그는 신윤국이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한다. 김영한은 함흥에서 스승의 면회를 시도했으나 면회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함흥에 눌러앉는다. 그는 고민 끝에 다시 함흥 권번으로 들어가는데, 그 배경이 순진했다고 한다. 그는 기생이 되면 큰 연회에 나갈 기회가 많고 자연스럽게 함흥 법조계 유력인사를 만나게 되면 스승을 특별면회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고 한다. 

 진향은 끝내 스승 신윤국을 면회하지 못했지만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진향은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의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백석을 만난다. 백석은 진향을 옆자리에 앉히고 손을 꼭 잡고는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내 사랑 백석’에서)
 그때 백석의 나이 스물여섯, 김영한의 나이는 스물둘.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곤 했다. 어느날 백석은 진향이 사들고 온 ‘당시선집’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자야오가’는 장안(長安)에서 서역(西域) 지방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러 나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곡이다.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백의 춘하추동 오언율시 중에서 가을 편이 ‘장안 달 밝은 밤에’로 소개된 적이 있다. 진나라 때부터 민간에서 불려진 노래로 이백 외에도 중국의 여러 시인들이 ‘자야가’를 썼다. 백석이 하늘에 맺어준 여인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붙여준 것은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영한은 ‘내 사랑 백석’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아마도 당신은 두 사람의 처절한 숙명이 정해질 어떤 예감에서, 혹은 그 어떤 영감에서 이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던 것은 아닐까.’ 
 
함흥에서 서울로 먼저 올라온 사람은 자야였다. 백석이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인 고보 영어교사 자리를 그만두게 된 것도 자야 때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서울에 올라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시켜놓고 자신은 정작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이 사실이 밝혀져 함흥여고보는 발칵 뒤집혔고 백석은 미련없이 자야의 곁에 있기 위해 사표를 던진다.


18세때의 김영한

 백석은 자야를 따라 함흥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린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은 부부와 똑같았다. 두 사람은 거처를 명륜동으로 옮긴다. 비슷한 시기 천재작가 이상(李箱)은 황해도 배천에서 만난 기생 금홍이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잠시 종로 우미관 뒤편에서 살림을 차렸고, 현재의 교보문고 뒤편 피맛길에서 훗날 ‘오감도’가 탄생하게 되는 제비다방을 연다.
 백석과 자야가 동거를 한 기간은 3년여. 백석은 자야와 사랑을 하는 동안 사랑을 주제로 한 여러 편의 서정시를 쓰는데, 그 중 ‘여성’에 발표한 ‘바다’와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는 자야와 관련된 작품이었다.
 백석은 어느날 ‘바다’가 실린 여성지를 갖고와서는 자야에게 보여주며 “이 시는 당신을 생각하면서 썼다”고 말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차디찼다.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결혼을 시키기로 한다. 백석은 부모의 강요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올리지만 손목 한번 잡아보지 않고 도망쳐나와 자야 품으로 돌아온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효심과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하고 갈등한다. 백석은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사랑의 도피를 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한다.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라는 시에서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노래한다.

 < … 나타샤와 나는 /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를 타고 / 산골로 가자 출출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 눈은 푹푹 나리고 /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 >

 자야는 자신의 존재가 백석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으로 떠나는데,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국전쟁 발발로 남북으로 분단되었기 때문이다. 서울과 함흥과 정주를 마음대로 오가며 문학활동을 하던 백석은 한반도의 허리가 잘리면서 북쪽을 선택한 결과가 되었다. 그는 월북작가가 아닌 재북작가였다.

백석의 연인 자야는 1987년까지 세상에 그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987년 9월, 시인 이동순(李東洵) 영남대 교수는 ‘백석 시선집’(창작과 비평사)을 펴냈다. 이동순 교수는 한 달 뒤인 10월, 단정하고 기품 있는 음성의 할머니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 이 할머니는 자신을 처녀 시절 백석과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사람이라고 소개했고, 이동순 교수는 곧장 서울로 올라와 이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이동순 교수는 김영한으로부터 백석 시인과 관련된 한 많은 생애를 듣게 되었다. 김영한은 자신을 찾아온 백석의 까마득한 후배 시인인 이동순 교수에게 백석이 붙여준 이름 ‘자야’로 불러달라고 부탁하고는 백석과 얽힌 한 많은 지난날을 나지막이 털어놓았다. 이동순 시인은 그 때의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 동시에 함흥 시절에 쓴 백석 시의 애틋함과 고뇌와 갈등 따위가 일시에 정동된 풍경으로 다가왔다. 내가 그토록 존경하고 흠모하던 한 선배 시인의 풍모와 체취를 새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기회에 나는 몹시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버렸다.”

 이동순 교수는 일차로 백석과 관련된 자야의 생애를 엮어서 ‘창작과 비평’에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한다. 이 글이 나온 뒤에도 이동순 교수는 백석의 삶에 대한 미진함과 아쉬움이 남아 자야에게 백석과 보낸 3년의 이야기를 써보라고 권했다. 이동순 교수는 자야가 글솜씨가 있는 데다 1953년 만학으로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할 정도의 학구파였기에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자야는 원고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무리를 해 두 번씩이나 입원을 하기도 했다. 김영한은 1995년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출간했는데, 이 교수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1930년대의 필치(筆致)로 쓴 원고를 이 교수가 현대적 필치로 바꾸고 부족한 부분은 구술정리로 보완했다고 한다. 이 책의 출간으로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백석의 삶이 비로소 복원되었다. 
 
생전의 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연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년의 자야는 백석의 시를 조용히 읽는 게 가장 큰 생의 기쁨이었다 한다. 자야는 ‘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고 술회한다. 백석이 그리우면 자야는 줄담배를 피워댔다. 희뿌연 연기라도 허공으로 날리지 않고서는 백석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피운 담배로 자야는 기어이 폐암에 걸렸고,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자야는 삶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일군 요정 대원각은 법정스님에 기증하여 오늘날의 길상사 절이 되었고, 현금 2억원을 1997년 창작과 비평사에 출연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하도록 했다. 시집을 대상으로 한 백석문학상은 1999년부터 수상작을 발표해 현재 10회를 맞고 있다. 황지우, 최영철, 신대철 등이 백석문학상을 수상한 시인들이다. 김영한은 평생 동안 한 사람을 사랑하며 기리다가 눈이 펑펑 쏟아지던 겨울날 한 많은 생을 마쳤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되어 하얗게 눈쌓인 길상사 마당에 뿌려졌다. 자야는 지금 길상사 언덕에 비석 하나로 남아있다. 
 
2003년 12월 8일 조선일보 "백석과 기생 자야의 비련의 사랑"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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