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30 03:02
경탁이형! 아무리 人命在天이라 하지만 天壽를 다하지도 못하고 이렇게 갑짜기 우리곁을 떠나 이렇게 붓을들게하니 이게 무슨경우인지 한편 야속하고 애통하외다. 형과의 인연은 55년전 의예과에서 부터 시작했지만 더욱 가깝게 지낼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졸업후해군 군의관 시절인듯하오.늘상 이사람보다 한두 걸음 앞서가며 이사람을 놀라게 하더니 이렇게 유명을 달리하는데도 우리들을놀라게 하는군요. 이무슨 청천벽력의 소식이란 말이오. 의예과때 배운 불어로 본과에 올라와 다른 동기생들은 영어 교과서로 공부할시 유독 불어책으로 공부를해서 우리들을 놀라게 했고 의학도 이면서도 동양화에 정진하여 의과 대학생때 국전 동양화부문에 당당입선을 하여 우리들을 또한번 놀라게 하였섰소. 해군입대 첫해에 우리 둘은 나란히 해병 포항 상륙사단 1연대 1대대,2대대 군의관으로배속받아 같은방에서 하숙을 하던일 그러나 그것도 얼마 않되어 청룡부대 월남 파병으로 끝나고 말았지 않았소.그당시 청룡부대 군의관 차출은 군번 순서대로 짤라 보냈는데 그당시 몹시 위험하다고 생각 되든 그곳을해당도 되지 않은 형은 말리려는 우리들을 뿌리치고 자원 입대하지 않았소. 그밖에도 충청도 완고한 민씨 집안 장남으로 태어나서 북미주에 이주하는것도 집안에서는 놀라운 일이었었을것인데 벽안의 French Canadian(Patricia)과 결혼했으니 그 놀라움은 이루 말할수 없었으리라 생각되오.이런것들을 두루생각해보면 형은 작은 체구에 걸맞지 않은 진취적인 선견과 용기를 갖은 거인이었소. Montreal에서 training을 마치고 California Napa area로 옮겨와서 그간 격조했던 우리 관계를학회를 핑계삼아 형댁에 몇번 방문 다시 만날수 있었고 또 그이후 오하이오로 와서 일할때는 지역적으로 가까워져서 우리집에 방문 몇일 묶고 갔던것이 이제 좋은 추억이 되었소. 직업에 억매어 그동안 하지 못했던 동양화도 다시 시작 '나는 이다음에 모택동이 주치의가 되겠다.'는 농담대로중국을 몇번씩 방문 자전거 빌려서 온데 다니며 필담으로 소통하면서 좋아하는 그림도 그리고 그러지 않았소.당시인 두보를 필두 한시와 송나라 휘종을 비롯 중국 서예화등에 심취했던 형이 아니었소. 늘상 소탈하고 티없이 순수하며 그러나 모든일을 근본부터 추리해가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 이었으며 의사가 아닌과학자가 되었어야 될사람이었소.젊은이 같은 순수한 꿈을 쫓아 그것을 과감하게 추진 실현할려는 노력은 우리같은범인의 눈을 휘둥그러지게 만든것이 어디 한두번 이었소. 중국 흑도자기가 그랬고 형의 dream house가 그것들 아니었소.중국 흑도자기에 매료되어 재생을 해보겠다고 세계에 두점밖에 없다는 일본에 소장되어있는 이 도자기들를 전시하는 틈을 타서 멀리 일본까지 가서 직접보고 집에와서 재생하보겠다고 집에 가마솥을 만들어 여러번 시도하지 않았소.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어도 ceramic journal에 내논형의 논문들을 다른사람들의 논문에 reference로 인용할만큼 그분야에서 두각을 내어 우리들을 또한번 놀라게하지 않았소. 그곳 dream house도 용기 있게 하나하나 이루어내어 어느때는 저런 큰일은 전문인을 이용했으면 하는 생각도우리들은 했지만 혼자배워 해내는 형을 보고 우리들다 놀라지 않았소. 이번 사고도 그런 맥락에서 일어난것이 아닌지 못내 안타깝고 화까지 치밀어오는 이사람의 마음을 이해해 주시오. 형에 대한 이런 이야기들이 어찌 한두장의 글로메꾸어 지겠소.우리는 의기 투합 몇번에 걸쳐 여행도 같이 했고 가끔씩 전화통을 대고 한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지 않았소. 이제는그런것들이 이사람의 좋은 추억이 되었소. 돌아가시기 얼마전에도 전화를 주셔서 내년 50주년 동기 기념 여행에대해 자기 의견을 피력 이사람도 좋은 의견같아서 추진해보라고 해 친구들간 의견교환 중이었던 이때에 이 무슨 경천 동지할 소식이란 말이오.남아있는 부인 Patricia와 장성한 자녀들은 걱정 하지 마시고 이제 편히 쉬시오. 어제는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안절부절 website에 나온 형 사진을 들락날락 들여다보며 아직도 믿기지않은 마음을 달래었소. 그사진에 빙그레 웃는 형의 미소를 보며 언젠가 형이 나보고 '규정아! 너는 사진 찍을때 너무 경직해있어! 나같이 거울보고 연습을해보아! 효과있어!'하던 생각이 문뜩나서 실소했소. 이제 그런 충고를 해주는형같은 친구를 어디에서 구하겠소? 허탈한 마음으로 붓을 놓소. 이보게! 경탁이! 이 무정한 사람아! 잘가시게! 친구 규정 |
2014.11.30 03:13
2014.11.30 15:59
고인을 웹에서만 대한 본인도 오늘도 마음이 허전하여 홈을 배회하던 중, 황규정 선생님 조사로 다시 저의 마음을 달랩니다.
그분의 지난 날의 글들을 어제도 몇개 읽고 주고 받은 댓글 등 그분의 철저하심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 일들은 어쩔 수 없는 생리이기도 합니다.
고 민경탁 선생님을 보다 가까이 하시고 정을 쌓아오신 여러 동문선생님께도 위로할 길 없습니다.
멀게 가깝게 그분 가신 길을 따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평화한 곳에서 내려다 보시며 고인은 이곳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참으로 인생무상 속에 모두가 무상한 세상을 하루하루, 시각시각 살고 있습니다.
사진속 소탈한 고인의 웃음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나 편안히 잘 있는데 왜들 슬퍼하세요!" 하시고 계신듯.
2014.11.30 21:03
2014.12.01 01:12
故민경탁 동문에대한 좋은말씀들에 감사드립니다.
어느 죽음이 슬프지 않으련만 노년에 오랜지병끝에 돌아간것에 비해
조심만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것이라서 더욱더 우리들을 슬프게
하네요.
그러나
부모님때와 같이 세월이 약이라고 시간이 흐르면 또 지나 가겠지요. 규정
2014.12.01 07:07
2014.12.01 13:14
늘상 따뜻한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이번일로 늙어갈수록 우리 기운에 부치는 무리한일은
피하는것이좋은 것이라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우리들이 이제 40대가 아니니 말입니다. 규정
2014.12.03 01:38
2014.12.03 06:02
돌아오지 않는 모래알
이 하늘아래 어느 바다물속에서 못찾아도
그 모래알에 우리들의 얽혀진 영이 있으니.
한 몸이던 한 부분이 떨어져가도
공간과 시간에서 자유로이
우리의 넋은 영원토록 나누이지 않으리니.
AgnesKSS Dec.04, 2014
서윤석 선생님,
고 민경탁 선생님을 기리시는 번역시에 답글을 올리고 슬픈 마음을 달래며
고인을 위하여 삼가 명복을 빕니다.
2014.12.03 07:34
2014.12.03 07:34
2014.12.03 08:00
황규정 선생님,
세월이 약이라고 옛부터 일러오지만 그 세월이 지나도록 고인을 향한 애도의 마음은 좀처럼 사그러지지 않습니다.
김광섭 시 김환기 그림과 함께 감사히 읽습니다.
동문님들 내내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서윤석 선생님,
오늘 인터넷에서 동창회보 보았습니다.
참여하려는 마음으로 제출만 하고 전시회에는 못 가보고 도록만 받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絶句(절구) -杜甫(두보)
江碧鳥逾白(강벽조유백) : 강이 푸르니 새 더욱 희고
山靑花欲然(산청화욕연) : 산이 푸르니 꽃은 더욱 붉네
今春看又過(금춘간우과) : 올 봄도 눈앞에서 지나가니
何日是歸年(하일시귀년) : 어느 날이 돌아갈 해일런고
http://blog.daum.net/ajr3308/3862827
2014.12.03 10:20
2014.12.03 10:50
두보(712 - 770)는 이백(701 - 762)과 같은 시대의 당나라 시인으로 흔히 이백을 시선(詩仙)이라 하고 두보(杜甫)를 시성(詩聖)이라고 한다고 하지요.
<풍경>이란 Daum카페의 글 한 구절을 아래에 붙입니다.
<<굳이 비교한다면 각자의 특색이 있을 따름이다.
이태백이 연꽃처럼 청순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환상적으로 그려내 우리를 높고 우아한 정신세계로 이끌었다면,
두보는 뼈를 깍는 학습과정과 노력으로 인생과 사회를 반영하면서 우리를 넓고도 광활한 현실사회로 ------.>>
2014.12.03 13:43
이제는 경탁이 목소리를 들을수 없다는것이 실감이 나지않고 인상무상함을
통감하는 중입니다. 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