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03 23:35
세계 다이빙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한 한국계 미국인 다이빙 영웅 새미 리가 3일(한국 시각) 폐렴으로 별세했다. 올해 96세.
그의 인생은 백인 중심 사회의 차별과 편견을 극복하고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감동 스토리였다. 새미 리는 1920년 캘리포니아 프레즈노에서 이민자 2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대학까지 나왔지만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직장을 얻지 못하고 식당을 운영했다. 새미 리는 열두 살이던 1932년 LA올림픽을 보면서 금메달의 꿈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유색인종은 일주일에 한 번 수요일에만 수영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 미국 백인들은 이후 물을 새로 갈고 다이빙을 했다.
새미 리는 마당에 구덩이를 파고 모래를 채운 뒤 뛰어내리는 훈련을 병행해야 했다. 지독한 편견과 싸우면서 새미 리는 1942년 미국 다이빙선수권 10m 플랫폼과 3m 스프링보드에서 우승했다. 유색인종이 미 다이빙 챔피언에 오른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157㎝의 단신인 동양계 새미 리의 선수권 정복은 미국 사회를 놀라게 한 사건이었다. 그는 올림픽 출전을 꿈꿨지만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올림픽 데뷔 무대는 1948년으로 미뤄졌다.
그 사이 그는 아버지의 희망대로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의대를 졸업해 이비인후과 의사가 됐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그는 10m 플랫폼 정상에 올랐다. 3m 스프링보드에선 동메달을 땄다. 아시아계 미국인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새미 리는 4년 뒤 32세의 나이로 출전한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도 다이빙 10m 플랫폼에서 우승했다. 다이빙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 2연패에 성공한 이후로도 그의 도전은 계속됐다.
1960년과 1964년엔 코치로 미국에 올림픽 금메달을 선사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사모아계 그레그 루가니스도 그의 제자였다. 루가니스는 당시 예선에서 스프링보드에 머리를 부딪쳐 피가 흘렀지만 약물 규정 때문에 마취제도 쓰지 않고 상처를 꿰맨 뒤 금메달을 따냈다. 1990년엔 미 올림픽 명예의 전당에 올라 아마추어 선수로선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그는 각계와의 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도 도왔다.
2010년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을 기념해 선정한 ‘자랑스러운 한국인’에 뽑혔고 그해 LA 한인 타운엔 그의 이름을 딴 광장이 생겼다. 2013년엔 그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도 생겼다. 그가 올림픽 때 입었던 수영복과 운동복, 모자는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2/04/201612040136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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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3 23:52
2016.12.07 07:45
미국에서 2 주일 아이들과 Thanksgiving 을 지내고 돌아가던길,지난 주말 LAX
비행장에서 기다리는 동안 LA times 와 NY times에 난 Sammy Lee 부고를
읽게 되었읍니다.
한국 이민자로서, 또 우리의 후손의 먼 훗날을 생각해 볼 때그의 생애는 감명스러운
영웅의 생애였고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 됩니다.
그가 겪었던 racial discrimination 에도 불구하고, 그가 코치했던 미래의 올림픽 다이빙
선수나 단체에서 보수를 받지않았고,한국 전쟁중 1952 년 한국에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Helsinki Olympic 때도 근무를 계속하려 했다고 합니다.
상관 들이 "we've got only one doctor who can win the Olympic Gold Medal.We've got
hundreds of doctors who can repair the wounded. You can go but you better win."
라고 이야기 한 후에 올림픽 에 갔다고 합니다.
Dr.Lee 가 돌아가기 며칠전 Hoag Memorial Hospital(Newport Beach)를 찾아갔던,
그의 다이빙 제자였던 Bob Webster(back to back Olympic gold medalist) commented.
"He gave me one of the greatest gifts an indiividual can give another.He gave
me self esteem and a belief in myself.Without Sammy,I don't know what I
would've done in diving or went on to do in life."
At the time of his visit, he couldn't speak,but he opened his eyes wide and
recognized Webster.
"I wanted to make sure I was able to tell him how much he meant to me in my life"
Webster said.
Sammy Lee 의 시대, Martin Luther King 의 시대, 보다는 많이 낳아졌지만, 아직도
미국이 진정한 평등의 시대에 도달하기에는 갈길이 먼 듯 합니다.
For our future genertions,"some day anywhere in the world people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Every hill and mountain shall be made low
,the rough places will be made plain, and the crooked places will be made straight."
(M.L.King,Jr,)
http://www.latimes.com/local/obituaries/la-me-sammy-lee-snap-20161203-story.html
http://www.nytimes.com/2016/12/03/sports/sammy-lee-dies-asian-american-olympic-gold.html?_r=0
올림픽 수영 다이빙부문에서 2연패를하여 미국의 영웅이 되었던
미국 교포 새미리 박사께서 96세를 일기로 우리곁을 떠났다.
그당시만해도 백인 일색의 수영부문에서 온갖 역경을 딛고 대성
한것은 전설적인 일이며 한국인으로서 우리에게 자긍심을 심어준
분이시다. 그분은 수영선수와 동시 이빈후과 의사이기도 했다.
수영선수로 은퇴후 미국 다이빙코치로 루게니스같은 올림픽 금
메달리스트를 배출하기도했고 평창올림픽 선정에도 그의 인맥을
동원 일조했다한다.
수영의 다이빙 부문에서 일세를 풍미했던 그의 업적을 기리며
그분의 명복을 빌고 삼가 조의를 표한다. 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