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09 09:05
https://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78762
(시사저널; 2019.6.27: 김일성의 패주행각 “인민은 죽어도 나는 살아야 겠다”)
http://m.mk.co.kr/news/opinion/2013/622464
(매일경제; 2014: 역사의 향기, 임진왜란의 전시작전권)
1592년 12월 25일. 눈으로 가득 쌓인 의주의 용만관(龍灣館). 조선의 국왕 선조는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여송은 거만한 태도로 한없이 초라해진 선조의
인사를 받으며 단상 위에 올랐다. "속국(屬國)을 구하기 위해 왔다"는 이여송에게 선조는
조선 군사지휘권의 상징인 환도(環刀ㆍ의장용 칼) 한 쌍을 올리며 명나라에 전쟁의 모든
것을 맡겼다. 이로써 조선에서의 모든 '전시작전권'은 명나라에 넘어갔다. 명이 임진왜란에
참전한 지 단 하루 만의 일이다.(본문에서)
신립 장군이 충주에서 패하자 선조는 궁녀와 신하들을 데리고 황급히 한양을 떠났다. 백성들에
게는 알리지도 않고. 화가난 백성들은 경복궁에 불을 지르고 내탕고의 보물을 약탈했다.
1950년6월27일, 이승만은 국군이 서울을 탈출하여 한강다리를 건너 대전에 가서, 서울시민에게
국군이 잘싸워 방위할터이니 “가만이 있으라 “ 고 방송했다. 그동안에 작전권을 맥아터에게
넘기고 한강다리가 파괴되었다.
http://m.pressian.com/m/m_article/?no=125084#08gq
(프레시안; 2015.3.29: 1호 피난민 이승만 서울시민엔 가만히 있으라)
자기 명줄 단속하기에는 김일성 또한 이승만 못지않았다. 최근 시사저널은 김일성의 패주 행각을
자세히 보도하고있다. 재미있는 새로운 사실이다.
2019.07.09 21:50
2019.07.09 23:26
저는 해방되던 해에 낳아서 기록된 역사를 통해서 알게 되는데,
정선배님은 실제로 겪은 경험담을 이야기하시니 놀랍습니다. 1.4
후퇴 때 이승만의 행위는 잘 몰랐는 데 또 시민들을 기만하려고 했
군요. 한국역사에서 사리를 뒤로 하고 국민과 나라의 장래를 앞세우
는 지도자를 찾아 보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2019.07.10 01:48
Dr. 온, 우리의 의견은 완전 일치는 아니지만, 나는 목숨을 내어놓고 나라를 위해 싸운 분을 숭모합니다.
그 중에 한 분이 김구선생이시지요. 그런데 그분이 과격파임은 사실입니다.
선친께서는 미국파이기에 김구 선생과 아무 연관이 없었지요.
이건 오로지 나의 생각이며 내가 그분의 자서전을 읽은 후 나름대로 생각한 바입니다.
소년 시절에 어떤 애국자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달라고 하니 그 분의 말씀은 :
자고로 망하지 않은 나라는 없다. 그런데 깨끗하게 망했는가 더럽계 망했는가에 따라 구분된다.
이 나라는 곧 망할텐데, 우리가 할일은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죽을 뿐이다.
이 교훈을 듣고 소년 김구는 울었고, 자신도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서하였다고 합니다.
나도 여기에 이르러 많이 감격하였습니다.
2019.07.10 02:12
운영자 Note:
여기 website에서 우리끼리 사이의 discussion에서 "반듯이" 의견의 일치를 추구한다면,
또 의견의 충돌을 염려하고 피할려한다면 우리의 discussion에는 전혀 의미가 없는
시간의 낭비가 되는것입니다.
We should do our best to present a counter opinion as well.
Otherwise we will never learn anything.
Please don't try to be one's slave all the time !!
Arguments on our computer screen can not hurt very much.
2019.07.10 02:25
At times, I see someone comes out in favor of 이승만 and propose to make him the father of ROK.
I think the father of ROK is either the U.S. or 반일 독립투사 under the Japanese occupation.
The modern Korean people do not know how corrupted and deceiving his government was.
Even though I was at the 4th grade in primary school when the 6.25 war broke out,
I remember his regime so well through my high school years.
His presidency ended in shame by the 4.19 학생봉기 when I was in the second year of premed.
I am always so proud that we were the very students in the 4.19 event
that lead into the 5.16 military coup and eventually, President Park's reign afterward.
Otherwise, under the Rhee's or his successor's regime, we may be still a banana republic today
or a subordinate region under China or Russia.
2019.07.10 11:27
I would like to have more commentators than what we have now.
Now, it seems to me that it is like an editorial board. It is only for
5 or 6 of us. I would like to see many participants posting different opinions
on the subject. Opposing opinions always trigger heated discussions and are
much more interesting than simply agreeing with the writers.
There is no doubt that South Korea was made by the U.S.A.. It is certainly not
the country that independent fighters against Japan like Kim Gu was envisioned.
He was adamantly against the election on the south of 38 parallel that 이승만 and the U.S. wanted.
It might have been the cause of his death.
2019.07.11 00:53
Korean people try to avoid to express any contradictory comments.
This is a brain-washed habit of ours from the long control of Japnese rulers,
followed by another long control by Syngman Rhee's regime, and then
another long control under the Korean CIA afterward.
Adding to that bad habit, "being quiet" is the mantra of the Confucius doctrine.
The Confucious doctrine says we have to be "humble and agreeable" anytime anywhere.
That's why we are so quiet and humble, the ultimate virtue of Koreans.
I am only trying to show you, we should freely express our opinions.
We are living in America !! This is an American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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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한마디: 나는 서울을 떠나지 않으련다.
1950년 나는 보성중 1학년이었다.
9/28 수복후 안도와 기쁨도 잠시였고, 학교는 미군부대에 점령을 당했기에 우선 전영필교주의
성북동 골짜기에 위치한 저택을 임시교사로 사용하며 우리는 공부를 하였는데, 전황이 더욱 더
불리하게 되니, 공산치하에서 석달을 신음하였던 서울시민은 너나나나 할것없이 남쪽 즉
부산방면으로 피란을 가기시작하였고, 정부에서는 시민을 안심시키려 하였지만 아무도 듣지 않고
나중에는 필사적으로 남하하였다.
부친은 그래도 미군이 서울까지는 내어주지 않을거로 짐작하시고 계속 칩거하셔서 우리도 집만
지키고 있을 때였다. 어느날 11월 말 혹은 12월 초에 동아일보 기사에 이승만대통령의 담화가 나왔다.
그 제목은 “나는 서울을 떠나지 않으련다.”였고, 그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하여간 연합군의 방어를 믿고 자기는 서울을 지키겠다는 비장한 성명이었다.
내 생각에는 몇 달 전에 아무 말도 없이 서울시민을 버리고 달아났던 이승만 대통령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겠고, 그 성명이 피란행렬을 멈추거나 줄이지 못했다.
그 후 1월 4일 새벽에 동네 반장이 종을치며 큰 소리로, “서울 철수입니다. 피란가세요.”하는 소리에
잠을 깨어 허둥지둥 피란 봇다리를 싸서 이거나 짊어지고 우리식구도 떠나게 되었다.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이대통령은 이번에도 1/4후퇴에 관해서 시민에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전번 6월 25일 처럼 시민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혼자서 서울을 달아나 버렸다.
나머지 시민을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라고!
Dr. 온 말씀처럼 이승만도 비겁하기 짝이 없는 지도자임이 틀림없다. 이는 나의 생생한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