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5 05:15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856343&pDate=20190725
(Jtbc news: 휴전협정)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856342&pDate=20190725
(전쟁포로)
한국전쟁이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힘겨루기로 진행되었던 만큼 휴전도 그들의 국내사정에
따라서 이루어졌다. 청천강과 장진호에서의 미군의 패퇴는 미국내에 종전여론을 일으켜서 더이상
전쟁을 계속하기 힘들었다. 중공군은 초기의 승리이후 보급을 충분히 할수 없어서 남쪽으로 더욱
진격할 것을 포기한 상태였다. 군인들이 충분히 먹을 수 조차 없었다. 중국내의 경제상태가 나빠서
전쟁을 더이상 계속하기는 무리였다. 1953.3.5 스탈린이 사망했다. 미국이 핵공격을 고려 했으나,
쏘련은 이미 핵국가였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고집하고 휴전협정에 남측대표를 보내지 않았다.
휴전협정 문서에는 북한 남일이 북한군과 중공군을 대표하고, 유엔군을 대표한 미군 장군이 조인했다.
2019.07.25 06:45
2019.07.25 07:04
Deployment of U.S. atomic weapons in Korea in 1958
Paragraph 13(d) of the Armistice Agreement mandated that neither side introduce new
weapons into Korea, other than piece-for-piece replacement of equipment.[32] In September
1956 the U.S. Chairman of the Joint Chiefs of Staff Admiral Radford indicated that the U.S.
military intention was to introduce atomic weapons into Korea, which was agreed to by
the U.S. National Security Council and President Eisenhower.[33] The U.S. unilaterally
abrogated paragraph 13(d), breaking the Armistice Agreement, despite concerns by United
Nations allies.[34][35][36] At a meeting of the Military Armistice Commissionon 21 June
1957, the U.S. informed the North Korean representatives that the United Nations Command
no longer considered itself bound by paragraph 13(d) of the armistice.[37][38] In January 1958
nuclear armed Honest John missiles and 280mm atomic cannons were deployed to South
Korea,[39] followed within a year by atomic demolition munitions[40] and nuclear armed
Matador cruise missiles with the range to reach China and the Soviet Union.[35][41] North
Korea believed the U.S. had introduced new weapons earlier, citing NNSC inspection team
reports for August 1953 to April 1954.[33][42] The U.S. believed that North Korea had
introduced new weapons contrary to 13(d), but did not make specific allegations.[43]
Following the abrogation of paragraph 13(d), the NNSC largely lost its function, and
became primarily office based in the DMZ with a small staff. North Korea denounced the
abrogation of paragraph 13(d).[36] North Korea responded militarily by digging massive
underground fortifications resistant to nuclear attack, and by the forward deployment
of its conventional forces so that the use of nuclear weapons against it would endanger
South Korean and U.S. forces as well. In 1963 North Korea asked the Soviet Union and
China for help in developing nuclear weapons, but was refused.[35](Wikipedia)
During the Cold War, the United States deployed nuclear weapons in South Korea continuously
for 33 years, from 1958 to 1991. The South Korean-based nuclear arsenal peaked at an all-time
high of approximately 950 warheads in 1967. Since the last US nuclear weapons were withdrawn
from South Korea in 1991, the United States has protected South Korea and Japan under a
“nuclear umbrella” using nuclear bombers and submarines based elsewhere.(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
2019.07.25 08:03
정선배님은 저보다 8년 먼저 졸업하셨는데, 53년에 저는 만6세, 아직 학교도
가기전인데, 선배님은 벌써 고교 일학년 이셨다니 큰 어른 같이 느껴집니다.
요지음 베네수엘라 피난민 행렬을 보고 해방후, 6.25 전쟁 당시에 사셨던
분들의 어려운 생활상을 상상해 봅니다.
2019.07.25 23:28
Dr. 온, 이왕 말이 난 김에 조금 더 연장해서 이야기 하지요.
1953년 12월 말에 아버지는 병환이 심해져서 미국 고문관의 만류에도 불고하고 아동자선병원에서 사직하시고, 대구에서 개업한 누님에게 우리 세 식구가 갔더니 매형이 아버지를 서부시립병원에 입원시키셔서 요양을 받으시다가 다음해 12월 후반에 돌아가셨지요.
그 후 두 식구만 상경 귀가하였는데, 수입도 없는 두 식구가 결국 유일한 재산인 삼선교 집도 팔고 셋집으로 전전하였어요.
게다가 나는 일학년 2, 3학기를 불규측하게 수업읇 받아서 보성고에서 2학년을 올려주지 않으려고 했고, 고난을 무릅쓰고 겨우 올라는 갔는데, 듣도 보도 못한 불면증에 시달려서 다니다 휴학하다 반복을 하는 동안에, 결국 1년을 유급조차 하고 겨우 졸업하였고, 대학에 진학하게 되니 2년이상 겪었던 불면증도 차츰 없어졌지요.
휴전협정,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의 휴학 등, 이런 고난의 세월이기에 지금까지도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2019.07.26 07:42
저희 가족은 전주에서 부산 외가집으로 사변이나자마자 피난 갔습니다. 외할아버지
는 한의사로 부산에서 개업하고계셨습니다. 부산 어디인지는 잘모릅니다. 길가에 있
어서 미군 추럭이 오가는 것을 본 기억이 납니다. 외할어머니 손잡고 전차길 건너
국제시장 갔던 기억도 나구요. 아마 9.28 수복 후에 전주로 돌아 왔던 것으로 기억
합니다. 그때 부산에는 전국에서 피난민이 집결했던 것 같습니다. 외가도 얼마지나지
않아서 서울로 이사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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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글을 보니 나의 회상이 떠오릅니다
그때 나는 보성고교 1학년 1학기를 마쳤고, 보수사거리 서남방 코너에 있는 초가 행랑방에 있을 적이었다.
8월이 되니 정부, 기타 기관 그리고 학교가 거의 모두 환도하였다.
아버지는 방금 미국인 지인이 완월동에 있던 아동자선병원에 행정원장자리를 마련하여서 그리고 가셨다.
나는 학교를 따라 서울로 가야겠다고 하고 백팩에 교과서, 공책등을 짊어지고 기차타고 서울에 가서
우선 아는 집에 들어가서 임시로 묵으며 어머니 오실 때를 기다렸다.
보성학교는 미군부대에 점령을 당하여 우리는 명동성당에서 임시로 빌려서 수업을 받았다.
아버지 병환이 악회되어서 한달 넘게 걸린 후 어머니가 오셔서, 도저히 나를 하숙시키고 학비를 보낼
형편이 안되니, 부산에 돌아가서 그곳 학교를 알아보자고 하셔서, 다시 부산으로 내려 오니, 아마 10월 경이었다.
그곳 학교는 나처럼 환도못한 학생으로 가득차 있기에 들어갈 수 없어서
멀리 서면에 있는 종동고 피란교사에 들어가서 당분간 수업도 받았다.
이때 부산시의 반은 빈 듯하여서 길가에 그 많았던 사람들이 모두 없어진 듯하였다.
혼자서 길을 걸어가면 너무나 쓸쓸하였다. 그런데 간혹 여자들이 합창하는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도 기억한다. “만세소리 하늘 높이 들려 오는날…”
부산역 쪽에서 공보처 앞 큰길로 보수삼거리를 향하여 걸어 올 때 들리던 노랫소리가 지금도 기억이 난다.
텅 빈듯 한 도시에서 나는 혼자서 많이 걸으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할 때였다.
서울에 있는 나의 학교 보성고등학교 생각을 하였고, 내 앞날은 어찌 될런지 불안했던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