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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女真: 여진

2023.11.16 03:53

정관호*63 Views:96

 

 

여진(女真 )

 

 

서론

 

여진족

 

여진(여진어: , 만주어: Jušen , 문화어: 녀진, 중국어 정체자: 女真 , 간체자: 女真, 병음: nǚzhēn)은 중국의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과 한반도의 함경도, 러시아의 연해주, 하바롭스크 지방, 아무르 주에서 거주했던 퉁구스계 민족이다. 금대 여진은 국제발음구호로 주션(ʤu-çiɛn), 주션(ʤuʃiən) 등으로, n음이 탈락하면 주셔(ʤuʃə)로, 청대 만주어로는 주션(ʤuʃən) 혹은 주션(ʤuʃiɛn)으로 그 발음들이 유사하다.

별칭으로는 제신(諸申)·주신(珠申)·주선(朱先), 주리진(朱里眞)·주리진(朱理眞)·주이진(朱爾眞), 주리차특(朱里扯特)·주아차척(主兒扯惕)·졸아찰대(拙兒擦歹)·주리흠(朱里欽), 여직(女直)·여정(女貞)·여질(女質) 등이 있다. 사서에 의하면 금나라를 건국한 여진족 완안아골타의 어버이는 고려 평주에서 여진으로 이주한 고려인 금준(今俊)이라고 전해진다.

 

정체성

 

여진(女真)은 오랫동안 고구려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고 발해 이후 한반도의 한민족 중앙왕조와는 개별된 활동을 하고 왕조들을 구성했다.

여진은 원래 고대에는 숙신이라는 명칭으로 불렸었고 이후 읍루, 물길로 불렸다. 읍루, 물길 전부가 고구려의 속민으로 통합된 이후에는 물길과 같은 어원인 말갈이라고 불렸다. 발해 멸망 이후 거란인들은 말갈을 일방적으로 여진으로 불렀는데 여진은 Jurchen을 음차한 것이며 말갈에 대한 비(卑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말갈에서 나온 여진의 완안부는 1115년, 금나라를 건국하여 금 태종은 북송의 한족들을 토벌하고 북송의 수도 카이펑을 함락시켰고 금 태종은 여진족 군사를 모아 북송을 정복한다. 1234년까지 전성기를 이루었다. 금나라 멸망 이후, 여진은 야인여진(野人女眞), 해서 여진(海西女眞), 건주여진(建洲女真)으로 나뉘었고 독립적인 행태를 보였다.

그 후 1619년, 후금의 누르하치가 여진의 표면상 세부를 통합했고, 1635년, 여진이라는 족명을 금지하고, 야인여진 일부를 제외한 뒤 만주족으로 족명을 개칭했으며, 1640년대에는 몽골의 하라친(만주어: Karacin) 등 여러 몽골 민족들도 만주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역사(歷史)

 

서요(西遼)、금(金)、송판도(宋版圖)

여진인의 종족근원은 숙진(肅慎)이며 그 민족형성시기는 대략 당조의 말갈(靺鞨)시기였고, 전체가 7부로 나뉘었다. 구당서말갈전에 기재하기를, 흑수말갈(黑水靺鞨)등 말갈 각부의 정황은 “그 나라가 수십부나 되었고, 각각 추수(酋帥) 즉 추장(酋長)을 가졌고, 혹은 고려에 친근하거나, 혹은 돌궐에 신하가 되었다. 흑수말갈은 가장 북부에 있어서 경건(勁健)하다고 알려졌고, 용맹을 믿고 항상 이웃에 환란거리였다. 그 백산부는 본래 고려(고구려와 혼돈한듯)에 친근하였고, 고구려를 평정한 후 대다수가 중국에 들어왔다. 멱돌(汨咄), 안거골(安車骨), 호실(號室)등 부족, 또한 고려격파후 분산하고 미약해져서 그후 다시 듣지 못하였고, 비록 그들이 남겨져서, 발해로 호적이 편성되었다. 오로지 흑수부(黑水部)가 전성을 이루어 16부로 나뉘었고, 또한 남북으로 칭하였다.

11세기에 여진이 요(遼)에게 칭신하였다. 요는 장차 남부를 포함하여 발해국을 멸하고 강제로 인구를 요동으로 이주시키고, 속말말갈(粟末靺鞨)이 주가 되며 발해인은 안에, 비교적 강대한 부중이 되어 요의 호적에 편입되엇고, “합소관(合蘇館)이라 칭하고 또한 갈소관(曷蘇館), 합소곤(合蘇袞)을 만들어, 여진어로 “번리(藩籬) 즉 울타리였고, 이들을 “숙녀진(熟女真)”이라고 칭한다. 따로 일부분은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주가 되어서 속말수(粟末水: 松花江北流段) 북에 거주하며, 영강주(寧江州; 현재 吉林扶余縣) 동편이며, 요의 호적에 편입되지 않았으며 그들이 생여진(生女真)이다. 후에 금조의 완안부(金朝的完顏部)를 건립하였으니, 이는 생여진의 한 가지이며, 또한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직계이다.

생여진은 수십개 부락으로 나뉘었고, 그중 완안부가 비교적 컸다. 11세기초 비록 완안수(完顏綏)가 안출호수(按出虎水: 今哈爾濱東南阿什河)에 정착하였지만, 그 아들 석로(石魯)가 추장이 되어 후에 부근 부락을 정복하고 부락연맹을 성립하였다. 석로의 아들 오고내(烏古乃)는 허다한 부락을 합병하였다.

 

刀伊入寇 : 도이(즉 동이)가 해적이 되다.

是1019年在遼國女真族海盜入侵日本北九州的事件。「刀伊」(とい)意即東夷,是朝鲜半岛高麗國對高麗北面及東北面外族人的蔑稱。刀伊入寇是日本史上第一次正式遭外國勢力入侵。

 

1910년 3000명의 여진인이 해적이 되어 고려를 습격하고 후에 일본을 침략하여서, 일본인을 약탈하였다. 1113년 오고내의 손자 완안아골타(完顏阿骨打)가 계승하고 1115년 완안아골타는 여진 각부를 통일하고 글안(契丹)의 통치를 구축하여 금조(金朝)를 건립하여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칭하고 역사에 금(金)이라 칭한다. 국호의 근원은 발원지 금수(金水) 즉 아십하(阿什河)에서 유래하였다고 말하였다. 첫째 여진인은 현대 중국 동북에서 수렵(狩獵)이 생활방식이고, 겸하여 어렵(漁獵), 농경(農耕), 목축(畜牧)을 포함한다. 결국 타종족과 통혼을 허락하였으니 이는 금조의 통치자가 유가문화의 영향을 받아드렸기 때문이다.

금조 건국후 요오경[以辽五京]으로써 요를 멸하는 전략목표를 전개하고 아울러 짧은 시간내에 요국의 북방수도 상경(上京)을 획득한 후 요를 멸망시켰다. 1125년 요를 멸망시킨후 요국의 대부분 토지를 획득하였고, 연운십육주의 장각사건때문에 금국과 송국의 연맹이 파열되었다. 금은 대거로 송을 공격하였고, 아울러 송조북부에 괴로정권인 제와 초[齐,楚]를 건립하였다, 이후 북방의 토지는 금의 노주제도(路州制度)안에 포함되었다. 1126년 금은 송의 수도 개봉을 점령하였고, 아울러 송의 군을 장강이남으로 쫓아내었다. 양국군은 회하(淮河) 일대에서 항상 대치하였다.

1189년이후 금조는 북방의 몽고인과 남방의 송조의 양면작전에 대하였고, 몽고인의 공격하에 1215년에 부득이 수도 금중도(金中都; 現北京)에서 개봉(開封)으로 옮겼다. 1234년 몽고인은 금조를 파멸시켰다. 원조(元朝)에서 팽대아(彭大雅)가 동북의 여진으로 수달단여진(水韃靼女真)이 되었다. 원조정부는 송화강하류(松花江下游)와 흑룡강(黑龍江)에 알타리(斡朵裡), 화하아(火兒阿: 胡裡改)、도온(桃溫)、탈알연(脫斡憐)、패고강(孛苦江)의 오만호부(戶府)를 설치하여서 여진의 수달달(水達達)을 관활하였다. 후에 원조정부는 식량을 증가시키려고 그들에게 고기잡이에서 농업으로 강요하여 그곳에 둔전을 시행하였다. 그외에 여진인과 수달달 일부는 포령로와 조주둔전(浦嶺路和肇州屯田)에 도달하였고, 원년삼월(元年三月: 1321)에 이르러 원조정붕에서 명령하기를 “파녀직만호부구첨(罷女直萬戶府及狗站)”이었으니, 그 의미는 金朝滅亡後,幸存並留居中原的女真人大都被漢人同化로서 금조 멸망후 요행히 중원에 거주하는 여진인은 거의 모두 한인과 동화하였다는 의미이다.

금조(金朝)가 멸망한 후, 다행히 중원에 거주했던 여진인이 대략 한인으로 동화되었다. 원과 명 양조에서는 동북지역의 어렵민족을 여진이라고 칭하였고, 금조를 건립한 여진족 후대 대부분은 해서여진(海西女真) 4부중에 있었고, 후세에 청조를 건립한 여진은 요와 금대에 발해인(渤海人)의 후예였다.

건주여진(建州女真)의 핵심 호리개부(胡裡改部)와 알타리부(斡朵裡部)는 원조초기에 목단강상류(牡丹江上游)에 거주하였고, 현재 흑룡강성의란현(黑龍江省依蘭縣) 일대이며, 원조중엽에 점차 목단강하류일대로 옮긴 후 정착하였다. 명조홍무(明朝洪武) 5년, 1372년에 이르러 야인여진(野人女真)의 올적합부(兀狄哈部) 습격에 이전하게 되었고, 호리개부와 알타리부(會寧一帶)로 내려왔다. 이후에 호리개부와 알타리부는 부단히 이주하여 선후로 아목하일대(阿木河一帶), 길림적회파강방주일대(吉林的回波江方州一帶)에 거주하고, 최종으로 요령경내적혁도아랍(遼寧境內的赫圖阿拉)으로 모여서 내려왔다.

호리개부와 알타리부가 남으로 내려올 때 송화강중유일대(松花江中游一帶)에 원래 거주했던 여진부락(女真部落)도 첨차 남하하여서 현재 개원이북(開原以北)의 송화강대곡절일대(松花江大曲折一帶)에 이르러서, 엽혁(葉赫), 합달(哈達), 오납(烏拉), 휘발(輝發) 4부를 형성하고 명말(明末)에 건주여진(建州女真)이 되어 해서여진(海西女真)과 다투었다.

명조초년에 호리개부수령아합(胡裡改部首領阿哈)이 알타리부수령맹가접목아(斡朵裡部首領猛哥帖木兒)와 더불어 명성조(明成祖)의 초안을 받아드려 부하를 거느리고 귀순하였고, 후에 명조는 건주삼위(建州三衛)를 성립하는 기초를 이루고, 이리하여 후에 건주여진(建州女真)이 되었다.

명조만력(明朝萬歷) 43년 (1615년 ) 건주여진수령 노이합적(努爾哈赤: 누르하치)이 신빈형이도하자반의 협도아랍성(新賓縣二道河子畔的赫圖阿拉城)을 한건국(汗建國)이라 칭하고, 여진민족의 역사를 계승하여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칭하여서, 완안아골타의 금과 구별하며, 역사에서는 소위 후금(後金)이라 구별한다. 그의 원래 고향은 바어럽(費阿拉)이었고, 후금의 건립이후 요양(遼陽)을 수도로 정하였다.

 

민족풍속(民族風俗)

 

혼인가정형식(婚姻家庭形式)

 

일부일처제(一夫一妻制)

여진사회는 일찍이 오대시기(五代時期)에 즉 중원에서 여진인(女真人)이라고 칭하던 시기를 전후하여, 이미 사유재산을 생산하였고, 아울러 부계사회(父系社會)로 진입하였고, 무리결혼과 짝결혼에서 탈피하여, 일부일처제를 실행하였다. 부부는 고정으로 부르기를, “지아비는 지어미를 “살나한(薩那罕)”, 지어미는 지아비를 “애근(愛根)”이라고 불렀다.

 

부락외혼제(部落外婚制)

여진인은 부(部)로써 성(姓)을 정하니, 부락(部落)이 같지 않으면 성이 같지 않은 법이다. 금사(金史)속에 여진인은 조기 결혼이 기재되었고, 배우 쌍방에 많이 같은 성이었고, 또 부락간에 통혼한 정황이 있었다. 후에 요가 발해국을 멸하였을 적에 여진족은 남으로 이동을 강요받았던 과정이 가속되어서 씨족부락(氏族部落)이 조직적으로 분화되어서, 여진인은 같지 않은 씨족을 점차 받아드렸고, 다른 부락간에 빈번한 통혼이 있었다.

금조건립초기(金朝建立初期)를 살피니, 어떤 지방에서 생활에 있어서, 숙녀진인(熟女真人)은 같은 부락내에서 결혼하는 옛 습관을 아직도 계속하여서, 금조정(金朝廷)이 조칙을 내리기를, 같은 성의 부락안에서 결혼을 금지하였고, 법률적형식으로 진행하도록 규정을 하였다.

 

여진족후예(女真族後裔)

 

중국대륙(中國大陸)

1644년 청군이 산해관(山海關)과 중원에 들어왔다. 여진족 직계후예 만족외에. 아직도 감숙성경천현경하북안에 하나의 여진족후예무리가 촌락을 갖고 있으니, 전촌에 약 3000여인이 있으며, 거의 대부분 성은 완안(完顏)이며, 촌민은 오로지 자칭 자기는 여진인완안부의 후예라 한다. 지금까지 전통여진의 습속을 보류하였으니, 예컨대 매신년마다 모여서 완안사당에서 조상 제사를 지매며 만족의 춤을 춘다.

감숙성정협주석장회군과 경천현완안만족연의회회장완안빈(甘肅省政協主席張懷群和涇川縣完顏滿族聯誼會會長完顏斌)표시에 의거하면: 800여년전 금회종시기(金熙宗時期)에 경천일대가 바로 종필의 영지(宗弼的領地)였다. 완안종필사후(完顏宗弼死後)에 해능왕(海陵王)은 완안종필의 아들 완안형(完顏亨)을 죽였다. 형의 가족은 구정매화산(九頂梅花山)아래로 옮겨갔다. 금조말대황제 완안승린(金朝末代皇帝完顏承麟)의 묘가 거기에 있다.

하남(河南)에는 5000여 성 완안여진후예(完顏的女真後裔)가 있으며, 마포, 노장, 태청, 가탄, 양호구(馬鋪、老莊、太清、賈灘、楊湖口)등 5향9촌(五鄉九村)에 분포되어있으며, 모두 750여호, 거의 3000인이나된다. 여주시완안장(汝州市完顏莊), 허창현완문촌(許昌縣完門村)에는 아직도 2000여인이나 있고, 이들은 녹읍(鹿邑)으로부터 옮겨왔다.

녹읍여진후예는 본래 완안씨였고, 후에 개성하여 완씨(完氏)이다. 완씨종보(完氏宗譜)기재에 의하면, 그들은 명조만력연간(明朝萬曆年間)에 안휘비(安徽肥)로부터 동으로 이주하였다. 원말명초(元末明初)에 종필후대(宗弼後代) 완안패(完顏佩)가 주원장(朱元璋)을 따라 남북으로 싸웠고, 전공으로 “여진장군(女真將軍)을 봉하였고, 봉지(封地)는 노주(潞州)이었다. 명만력연간(明萬曆年間) 완안패의 10세손 완안필중(完顏必重)이 북경에 가서 시험을 보고, 하남에서 관직을 가졌다가 녹읍(鹿邑)에 정착하였다.

 

한국(韓國)

한국의 고려대학문학박사왕영일(王永一)교수가 말하기를: 북한의 압록강과 두만강변경지역에 명초시기(明初時期)에 서북면(西北面)과 동북면(東北面)이라고 칭하였으며, 그곳이 여진족의 주요 취거 지구였고, 그후에 융입되어 조선민족이 되었으니, 한국청해이씨 시조 이지란(韓國青海李氏始祖李之蘭)이 바로 여진족추장의 하나였고, 일찍이 고려말기에 일군(一群)의 여진족 각부락추장들이 이성계진영(李成桂陣營)에 투입되어서 조선왕조건국에 협조하였다. 왕영일교수는 조선왕조와 여진족관계를 연구할 때 일찍이 2002년 한국청해이씨종친회와 이지란 후손을 방문하고, 허다한 상관사료와 지원을 획득하였다. 다음에 언급할 가치가 있는 바: 조선왕조실록과 용비어천가는 여진족의 역사발전을 상세히 기재한 사서(史書)이다.

 

대만(台灣)

중국복건성(中國福建省)과 중화민국에 상당수의 여진족후예가 있으며, 창화현복흥향(彰化縣福興鄉)의 점착장(粘厝莊)아 대만의 유일한 생녀진족(生女真族)이며, 오로지 전부 한화(漢化)되었고, 겨우 조상제사때 여진조선(女真祖先)을 제배(祭拜)한다.

창화현복건향점착주민은 경국사관대만문헌관(經國史館臺灣文獻館)이 실증하였으니, 동북길림부근(是由東北吉林附近)으로부터 금국시대(金國時代)에 남천(南遷)을 시작하여 최후로 대만간황(墾荒: 개간황무지)에 이르렀다. 눈앞에 복흥향점착촌(福興鄉粘厝村)의 4, 500호의 인가가 있고, 그중 90/100은 모두 점성(粘姓)이라, 이로인하여 외인(外人)은 점착촌(粘厝村) 혹은 점착장(粘厝莊)이라 부른다.

점성(粘姓)의 시조는 점한(粘罕)이고, 국립대만대학교수 왕덕의박사(王德毅博士)가 말하기를: 여진부족이 중원을 침입후 한화(漢化)를 점차 따라서 분분히 성을 바꾸어서, “ 완안점(完顏粘) 한가지가 이름이 성이 되어서 점성(粘姓)이 유래되었다. 이 가지 점성여진족 근원은 일찍이 동북길림부근(東北吉林附近)에 거주하다가 금국시대(金國時代)에 하남의양, 산동내양(河南宜陽,山東萊陽) 일대에 제8대에 이르러, 그 중부분은 원말전난을 도피하여 복건(福建)에 와서, 성내 각지에 흩어졌고, 그 중 한가닥은 청초명장시랑(清初名將施琅)의 조상곁에서 살아서, 점, 시 양족(粘、施兩族)이 통혼을 하고, 18세기에 이르러 청조정에서 대만 개간을 격려시켜, 점성 22대 자손 점악(粘萼)이 부분 족인(族人)을 대만녹항서남해변(台灣鹿港西南海邊)으로 동천하여 당시 황량하였지만, 후에 자손이 번연(繁衍)하여 점성이 많아졌고, 촌중에 주민 성을 따라서 지금 양촌 정점(頂粘)과 하점(廈粘) 으로 나뉘었다. 이외에 대만경내 허다한 비점성적여진족후예(非粘姓的女真族後裔)가 있고, 그리고 비만족석백족후예(非滿族的錫伯族後裔)가 있다.

 

IMAGES

 

中國東北地區歷史

Northeast China.svg

 

西遼、金、宋版圖

 

China in circa 1141

 

A 1682 Italian map showing the "Kingdom of the Niuche" (i.e., Nǚzhēn) or the "Kin (Jin) Tartars", who "have occupied and are at present ruling China", north of Liaodong and Korea

 

Ethnic map prior to Jurchen unification

 

Bixi from the grave of a 12th-century Jurchen leader in today's Ussuriysk

 

女真

 

A Jurchen man hunting from his horse, from a 15th-century ink and color painting on silk.

 

Kwan Ho Chung - Nov. 1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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