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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의 옛 발자취를 찾아서 4회
 

여기에 나오는 내용은 거의 일화(逸話)에 근거를 두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의 대부분은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근거를 둔다. 선친은 십여세에 미국에 가셔서 십여년간 공부하시다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다니시던 중 송금문제를 상의하시려고 일시 귀국하셨다가 제일차세계대전의 발발로 귀교하실 수 없어서 공부는 그 시점에서 중단하시고 가사를 맡으셨다.
그 후 1925년에 다시 미국 방문하셔서, 짐을 찾고 대학공부는 계속하지 못하시고 귀국하셨다. 선친은 1954년 한국전쟁휴전한 다음해에 대구에서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선친으로부터 직접 들은 것은 별로없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어서 선친께서 나를 어리게 보셨기때문이라고 믿는다.
내가 1967년 졸업후 교육받으려고 도미할 때 선친의 고등학교학급사진 한장과 두번째 오셨을 때 찍으셨던 사진 넉장을 갖고 왔다. 그 후 나는 그 고등학교와 대학에 가서 선친의 기록을 모두 찾았다. 그리고 선친께서 거주하셨던 건물을 찾고보니 현재 뉴욕한인교회였다. 그러나 처음 오셔서 다니셨던 초등학교는 못찾았다. 전학교에 관한 아무 기록도 고등학교기록부에 없기 때문이다.

 
A. Images(영상물)

Exhibit 1: Williston Seminary 건물 정면 1913
선친은 뒷줄 우측 끝으로부터 세 번째 학생이다. 이 사진이 선친의 학창시절에 남긴 유일한 사진이며 또한 미국 유학의 증거물이다. 이 학교는 4년제 Boarding schoo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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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2: Easthampton Town Library 1985
1번에 나오는 학급사진과 같은 장소이니 현재는 지역도서관이 되었다. 여기에 나와 아들 Henry가 함께 와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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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3: Williston Seminary 사진 백주년 기념. 2013년 8월 31일
Henry, James, Connor and Kwan Ho 등 삼대가 Campus tour에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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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4: 도서관입구 사진(Unobstructed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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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5: Hee Sook and Kwan Ho June 19, 2014
Bar Harbor여행 후 귀가로에서 하룻밤 Northampton Hotel에서 자고 아침에 들러서 촬영하였다. Hee Sook에게는 처음 방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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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6: Admission Center - Williston Northampton School, 2013년 8월 31일

19 Payson Ave, Easthampton, MA 01027 
100주년 기념일 August 3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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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7: Entrance to an indoor G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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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8: Mr. Jeffrey Pilgrim in front of an old buil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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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9: Memorial 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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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10: Old School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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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11: Grandfather's 60th birthday photo - 1935
조부님 회갑연 사진 1935년.
부친은 조부님 후면에, 모친은 조모님 후면에 서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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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12: Father standing before stonewalls 1925 left, 선친과 이희경 선생님 right
 

아버지의 제2차 도미, 연도 1925년(교정 1923년)
여기서 돌담은 끝난다. 그 우측으로 descending staircase가 있는 듯하며, Protective wooden fence로 막혔다.
이희경 선생님은 선친과 의형제하신 분이며, 독립유공자로 국내에서 독립활동을 하시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시던 중 악랄한 고문으로 1941년에 옥사하셨다. 그분의 외동따님은 성악가 이관옥 교수이며, 다음 Exhibit 13-1에 조선호텔에서 개최한 제일회 독창회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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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12-1: My photo around the same spot for comparison with the above two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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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13: 앞줄 중앙에 이관옥씨의 처음 독창회
셋째줄 우단에서 세번째에 선친, 그리고 네 번째에 이희경 선생님이다. 장소 조선호텔. 193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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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14: I stood in front of the walls left and I moved away from the walls 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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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15:KHC in and out of the Gqze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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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이 이곳에 오셔서 사진을 찍으실 때부터 지금까지 9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때 사진으로 볼 때 나는 어마어마하게 긴 돌담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와서보니 본 성곽 입구 전면에 있는 작은 돌담이었다. 이곳에 지붕을 하느라고 돌기둥을 만들어 바쳤다. 90년전에 아버지께서 오셨던 곳에 내가 와서 내 사진도 찍었고 또 내가 빈 공간 사진도 찍으니 저 세상에 계신 아버지께서 "춘호야, 네가 이곳까지 왔구나!"하시는 말씀을 듣는 듯하였다.

 
Exhibit 16: Castle with another 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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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17: Footpath with the right f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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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18: Wooded a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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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10: Turtle P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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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금년 여름에 두 번, 즉 유월과 칠월에 한 번씩 방문하여 선친의 촬영 장소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는데 그곳을 찾지 못하였다. 보행로의 우측에 촛점을 맞추고 서서히 우회전을 하면서 모두 석장을 찍었다. 1925년(교정 1923년)에 있었던 성곽에서 시작된 언덕, 그 위에 긴 돌담이 있어야겠는데 전혀 안 보이고, 그대신 낮은 늪같은 자리에서 자라는 무성한 나무들, 게다가 Turtle Pond라고 부르는 연못이 있을 뿐이다. 다음에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듯하다..
재언하겠는데, 사진에 나온 벤치 앞에 보행로를 있었으며, 그 우측에는 상행 경사지게 있었으며, 맨 위에는 일직선으로 된 돌담이 Castle로 항하였는데, 이 우측방향에는 큰 못이 있어서 이러한 경사를 찾을 수 없었다. 다음에는 나뭇잎이 다 떨어진 후 즉 겨울에 가보고, 또 Visitors' Center 에 가서 혹시 대공사를 하였는지 문의하려고 한다.

 
Exhibit 20: 뉴욕 한인 교회 정면. Sept 8, 2014, 633 W 115th St, New York, 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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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은 원래 학생기숙사로 사용되었는데, 선친께서 Williston Seminary 기록부에 주소로 나와 있었으니 아마 1909년부터 1913년까지 계셨다고 믿는다. 혹시 이보다 더 오랜 세월동안 거주하셨을 수도 있다. 그리고 1910년까지는 선친의 숙부 Jewhan Chung과 함께 쓰셨다.
그런데 내가 이 주소를 처음 찾은 건 1970년이었다고 믿는다. 그때에야 비로소 뉴욕한인교회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4번을 방문하여 목사님을 뵈온 건 금년 1월과 6월초였다. 100년이 넘는 이 건물에 신축공사가 곧 시작될 계획이다.
현재 1층은 교회 예배실로, 2층은 사무실로, 3, 4층에서는 어린이 학교, 주일 학교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각층에 공동 화장 세면실이 있다. 아마 선친께서 3층이나 4층에서 기거하셨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 층의 방 사진을 찍었다.

 
Exhibit 21: 4층 큰방. 촬영일 June 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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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22: 3 층 큰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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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23: 교회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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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24: 상향층계 좌측과 하향층계 우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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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25: 복도와 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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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26: 1913~1914년간 선친의 University of Pennsylvania 대학시절 주소:3911 Pine Street, Philadelphia, 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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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 27: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본관 앞에서 사진. 2015년 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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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는 우측에, Connor는 좌측에 있으며, 부자가 이곳에 대학 순회 차 방문 중 College Hall 경내 Benjamin Franklin 동상 앞에 섰다. Henry는 이곳의 졸업생이고, Connor는 유서깊은 이 대학교에 관심이 크다.
이 벤자민 프랭클린의 동상은 1899년에 유명한 Strawbridge and Clothier Firm의 창립자, Justus C. Strawbridge 로부터 필라델피아 시가 기증받아 설립하였으며, 현재 College Hall 경내에 위치하였다. 1913년부터 1914년까지 선친의 Wharton School 시기에 바로 이 동상을 보셨을 것이다.
내가 국민학교시절에 선친의 대학교 사진을 보았다. 넓은 운동장에 제복을 입은 학생들이 열을 지어 서 있었고, 대포가 몇 개 있었는데, 대학생들이 군사훈련을 받는 것이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피란 후 귀가하였을 때에는 이미 모두 없어졌다. 나는 그곳이 당연히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교정이라고 믿는다. 이리하여 나는 아버님 대학교 사진을 보관하지 못하였으며, 이 손실이 너무 애석하다. 그래서 이번 아들과 손자가 대학교 순회 때 Pennsylvania 대학교 정면에서 사진을 찍어, 잃어버린 사진 대신으로 실었다.

 
Exhibit 28 선친 사진 좌측과 종조부 사진 우측

선친 학창시절종조부 학창시철

여기에 두 분 독사진을 나란히 실었다. 아버지 재학시절 사진임에는 틀림없지만 연도 미상이다. 아버지의 숙부되시는 정지환(鄭芝煥), Jewhan Chung의 학교사진이며 역시 연도 미상이다.
내게는 종조부(從祖父)가 되시니, 쉽게 작은 할아버지라고 칭한다. 영어로는 Granduncle이다. 미국에서 대학교육까지 마치시고 귀국 후 지병으로 일찍 돌아가셨고, 후손이 없다. 1879년 8월 16일에 출생하셨고, 1916년 7월 24일에 졸하셨다. 삼촌과 조카 두 분이 함께 10여년을 이역 만리 타국에서 사셨으니, 두 분 사진을 사진을 나란히 올린다.

 
Exhibit 29: 촬스 이디 페이씨의 친필 서신
 

이 두 페이지 서신은 내가 1985년에 윌리스턴 동창회 사무실에 방문 때 직원으로부터 받은 서신의 복사본이다. 이 내용은 페이씨가 정지환님 나의 종조부를 위하여 장로교 본부와 교신한 내용이다. 아래에 복사본을 실었다.

 
(1) Letter Page 1
Fay's letter 1

(2) Letter page 2
Fay's letter 2

Exhibit 35: 촬스 이디 페이의 타자 서신
 

Charles Edey Fay - 1027 North A Street, Lake Worth, Florida January 8, 1956 Williston Seminary Easthampton, Mass Gentlemen: Almost 25 or 30 years ago, I made the acquaintance of Jewhan Chung of Seoul, Korea, then a student at Williston Seminary. He visited my home in Stamford, Conn, and also came to see me in New York City at my Wall Street office where he told me of his financial problem resulting from the misappropriation, by a Presbyterian Missionary, of funds intrusted to him for delivery to Jewhan Chung.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disclaimed liability on the ground that this man had had a nervous breakdown before leaving Korea for the U. S. A., had severed his connection with the Presbyterian Board. In having the details from Mr. Chung, I took up the matter with Dwight H. Day, Treasurer of the Board, pointing out that the Board was technically correct in claiming to be free from legal liability, there was a moral responsibility which might indeed be regarded as transcending in importance a legal liability. I also pointed out that, if the incident should become known in the areas where this missionary had labored for many years, the effect upon the Protestant Missions in general and the Presbyterian Missionary effort in particular, would be unfortunate. After calling a meeting of the Board, the individual members made up the amount of the loss sustained by Mr. Chung and sent me a check for transmission to him. As a token of his appreciation he sent me a pair of gold cuff-links. My purpose in advising you is to inquire whether you have any knowledge of his present location. Korea has witnessed some harsh vicissitudes and he may no longer be living. I should be interested in knowing when he left Williston and any details of his activities after his return to Korea. I have recently met the Rev. Robert Chung and his family, now living in this area, a fine Christian family. They have no knowledge of Jewhan Chung. If Dr. Galbraith is still with you, kindly give him my kindest regards. I met him here in Lake Worth about six years ago.
Yours very sincerely,
Charles Edey Fay.

상기의 친필 서신 복사본이 글자가 작고 흐려서 읽기 쉽도록 내가 직접 그대로 타자를 쳐서 실었다. 또한 추후 참조를 위하여 그 당시와 현재의 학교 일년 학비의 금액을 실었다.
1912년도 일년 학비: $100.00
2015년도 일년 학비: $55,300.00
아래에 페이씨의 편지를 한글 번역하여서 스캔하여 실었다.

 
Exhibit 30 페이씨의 편지의 타자형 스캔
Mr Fay's typed letter 1

Exhibit 31 페이의 편지 한글번역
촬스 페이의 편지 번역

Exhibit 32: 1910년도 정지환
 

2014년 9월에 나의 요청에 의하여 윌리스턴 학교의 기록보관소로부터 정지환씨의 학교 서류철을 받고, 거기서 발견된 7줄의 글자를 실은 쪽지를 읽게 되었다. 그 다음 여기 나온 글자와 약자를 원래 글자로 복구하여 타자를 쳐서 실었다. 둘째 줄에는 콜로라도 주, 골든 시, 콜로라도 광산 학교(대학)이고, 다음 출생은 1884년 8월 16일로 되어 있는데, 족보의 기록으로는 1879년 8월 16일이 정확한 시일이다. 넷째줄에 주소 즉 연락처는 윌리스턴 시기에 한국, 서울시, '닥터 조지 에취 존스 씨 댁'이며, 다섯째 줄에는 또 주소가 나오는데, '중국, 상해시, 버블링 웰 125 번지'인데 아마 닥터 존스의 또 다른 주소가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여섯째 줄에는 회보 혹은 게시를 하였는데 회신에 정보가 없음이라고 하였고 1922년 8월로 되어있다. 아마 학교에서 정지환씨에 관하여 어떤 곳에 문의를 하였는데 정보를 받지 못하였다는 의미인 듯하다. 맨 아래에 펜으로 쓴 글씨가 있는데, 1911년 혹은 1912년 사망이라고 기입되었는데 그 분의 사망일은 족보에 1916년 7월 24일이다. 정지환씨 신상에 관한 일자는 부정확하다. 그런데 여기서 발견한 대단히 중요한 정보가 있다. 여기 나온 원명 Dr. George H Jones란 인물이다. 그 이름의 장로교 선교사가 한국에서 대단히 잘 알려졌고, 수십년간 선교사업을 하였다. 이리하여 선친과 정지환씨 이 두 분의 모든 경비를 도맡아서 송금했던 바로 그 미국인 선교사임에 틀림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의 이름만이 정지환씨 서류철에 100여년간 지금까지 보존되었겠는가?

 
쪽지 원본
1910's Jewhan Chung Record

해독한 타자 기록
1910's Jewhan Chung decoded

번역한 타자 기록
1910 정지환

Exhibit 33: 뉴욕 한인 교회 신도부. Page 516에서 발견된 선친 기록 한 줄
633 W. 115th St
 

내가 2015년 1월 6일에 뉴욕한인교회를 방문하여 이용보 목사님께 교회와 한인동포간의 관계를 문의하였고 또 선친께서 이 건물 셋방을 사용하셨다고 설명을 하니까 목사님이 신도부 책자에서 선친의 함자를 발견하였다. 이는 내가 예상못했던 사실이었다. 선친께서 이건물에 세들었던 연도는 1909-1913년 혹은 1909이전-1913년까지었고, 교회 설립 연도는 1921년이었고, 현 주소 즉 현 건물로 이사한 연도는 1927년 이었으니, 그때보다 훨씬 전이었는데 어떻게 여기에 기록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너무도 반가웠다. 그런데 오류가 있어서 내가 목사님께 부탁하여 다음과 같이 교정과 추가를 하였다.
N.Y.U.에서 상과전공---펜실베니아 상과대학
세례교인---이승만 박사가 세례함
Jan 6, 2015 방문 오후1:59분
정관호(막내아들)

 
B. My Writing(나의 글 쓰기)
 

1. 아버님 인적사항
성명: 정재원(鄭載謜), 영문 Jaone Chung. 아호(雅號): 담재(淡齋)
출생지: 대한민국 경상남도 진주시
생년(生年): 1893년 9월 18일. 졸년(卒年); 1954년 2월 20일

2. 아버님 미국행

이번에 출품할 가장 중요한 사진은 나의 선친의 옛 학교 정문 앞에서 찍은 학급사진이다. 아버님은 내가 고등학교 일학년 말에 대구에서 숙환으로 돌아가셨다. 그때가 1954년 2월이었는데, 우리가족은 피란시절에 부산에서 살다가, 1953년 여름에 휴전이 되어서 피란민들이 거의 모두 상경하였지만, 아버님 병환이 악화되어서 대구에 살던 누나에게 갔더니 그 당시 서부시립병원에 입원시켜 드렸고, 결국 그곳에서 돌아가시고 고향 경남 진주시 반성면 선산에 묻히셨다.
나는 막내 겸 외아들로 노부모 슬하에서 외롭게 자랐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님은 45세셨고, 내가 고등하교 1학년 때 아버님은 62세로 돌아가셨다. 아버님은 나를 어리게 보셨고 내게 자상하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 적이 별로 없었으며, 돌아가시기 직전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는 말씀만 하셨다. 아버님에 관한 이야기는 어머니를 통하여 옛날 이야기같이 들었다. 어머니 또한 연로하셨으며, 좋은 집안에서 한학(漢學)을 많이 배우셨으나 신학문은 배우실 기회가 없었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아버님은 십세경에 조부님께서 당시의 지식인 두 분에게 부탁하여 한분은 부친을 서울에서 일본 동경까지 대동한 후 그곳의 청산외국어학원(靑山外國語學院)에 입학하여 1년간 영어교습을 받으셨고, 또 그 곳 미국사람가정에 하숙을 하시면서 그 집 애들과 사귀어서 영어를 배우셨다. 일 년 후 1903년경에 다른 분께서 부친을 태평양 횡단 정기선을 태우고 일본에서 출발하여 미국에 도착하시고 대륙횡단기차를 타시고 뉴욕시에 정착하면서 그 분이 계획하였던대로 어떤 학교에 가서 입학시험을 보셨는데 실패를 하셨다. 그 원인이 영어시험의 실패였다. 그 학교에서 6개월 기한을 주고 재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그동안에 부친은 많은 노력을 하여서 결국 합격하셔서 공부를 하시게 되었다.
여러 해 후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상과대학 즉 Wharton School에 입학하셔서 공부를 하시다가 그 동안 학비 송금이 대단히 힘들어서 이 문제를 해결하시겠다고 1914년에 귀국하신 후 다시 미국으로 귀환하시려는 시점에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전 세계 해상 봉쇄령(Global naval blockade)이 내려서 미국으로 오셔서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어서 한국에서 결혼하시고 가사를 돌보셨다. 그 후 1925년에 두 번째로 도미하셔서 학업을 재차 계속하실까 알아보았지만, 상황이 여의치 못해서 자신의 짐의 일부를 찾아서 돌아오셨다. 그 당시 미국여행은 모두 Trans-Pacific Liners(태평양 횡단 정기선)을 사용하였으며, 일본에서 미국까지 편도 30일이나 걸렸다고 한다. 이것이 내가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다음 부친에 관하여 어머니를 통하여 들은 그 곳 일화 몇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제1화.
부친이 미국에 도착하신 직후 Wright brothers의 최초비행이 성공하였다고 들었다. 그 때가 1903년 12월이었으니, 부친의 도착시기는 1903년이었고 12월 이전이었을것이다.
제2화.
더운 여름날 저녁때쯤 노인들이 의자를 들고 길가에 나와서 서로 지난 간 날의 이야기를 할 때 그 주제는 거의 다 남북전쟁이었고, 그들이 비교적 어린 나이에 소집되어 전투에 참가하였을 때 얼마나 무서웠던가하는 얘기들이었다.
제3화.
다음부터는 Williston Seminary 에서 일어났던 몇 가지 이야기를 싶겠다. Massachusetts서북부 작은 시골에 동양학생 하나가 왔으니, 그들은 매일 놀렸고 부친은 매일 그들과 몸싸움을 하셔서 얼굴이 성할 날이 없었다. 1년을 거의 매일 싸우다시피 하니까 나중에는 그들이 “That's enough. No more fights or hassles."한 후 그들과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 당시 아버지의 싸움소식이 이 작은 학교에 큰 소문거리였다. 매일 아침 조회 때 담임선생님이 훈시 후 아버지를 보면 얼굴이 멍들거나 부었으면 정상으로 간주하는데, 어떤 때 얼굴이 말짱하면 짐짓, “Jaone, what happened to you?"하고 놀렸다.
제4화.
부친은 목 뒤에 종기(furuncles)가 자주 나니까 선생님이 말씀하기를, “Jaone, watch your nape." 그러면 반 친구들이 부친께, ”You better look at the back of your neck."하고 놀렸다. 당연히 선생님은 “To care for your neck." 의미하였지만, 장난꾸러기 학생들이 ”Show me how you can look at the back of your neck." 하며 놀렸다.
제5화.
값비싼 기숙사에는 더운 물이 나오고 값싼 기숙사에는 찬 물만 나오는데 부친은 값싼 기숙사에 계셨고, 겨울이 대단히 추워서 1층에서 찬물로 세수하고 머리도 감고 3층까지 뛰어올라가는 동안 어떤 때에는 얼굴과 머리를 감은 물이 얼어서 방안에 활활 불타는 난로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면 얼마 후 얼음이 녹아서 수건으로 닦을 수 있었다.
제6화.
동네의 어떤 중년여인이 아버지와 친해져서 수양아들로 삼았다. 그는 어렸을 때 어떤 독신 목사집에서 일했던 하녀였는데, 목사가 죽을 때 전 재산을 그에게 남겨서 그것만 갖고서 독신으로 풍족하게 편안히 살았다. 또 어떤 부인이 부친의 나라가 Korea임을 알고 찾아와서 말하기를, “I am so glad to see you. Your country is near China. My parents were from Hungary. Our ancestors, Huns, lived north of China. So we are neighbors."
제7화.
부친이 청년기로 들어설 때 뉴욕에 한국동포가 얼마 있으면서 두 파가 있었는데, 하나는 남조선파, 또 하나는 북조선파이며 서로 알력이 심했다. 어떤 인연으로 이희경씨와 의형제를 맺었다. 그 분은 평안도 순천인으로 독립유공자로 추모되었다. 그런데 두 분이 함께 행동을 하였기에 두 분은 이 두 당파에 들어갈 수 없었다. 파벌이 심한 우리 민족의 이야기다. 아버님 일화는 여기에서 끝내고 부친 학업을 찾는 나의 노력을 설명하겠다.

 제8화
이것은 부친이 Wharton School 시절에 일어났던 일이다. 학교 상학(Commercial Science)시험에 만점을 받으셔서 학교신문에 게재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선친이 학교에서 우수한 학생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마 중간 정도였을것이라고 다시 말해서 B level student 라고 나는 믿는다.
3. 부친의 학업기록 찾기

처음에 나는 내가 항상 들었던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가서 부친 기록을 찾으려고 하였다.그때가 아마 1969년이었을 것이다. 내가 편리하게도 Resident training을 Philadelphia에 위치한 Pennsylvania Hospital에서 하고 있었다.
같은 도시에 있는 대학교 동창회에 가서 설명을 하였더니, 부친이 졸업생이 아니기에 동창회명부에는 찾을 수 없어서, 직원 두 사람이 나를 데리고 대학의 Archives에 가서 그들이 한 시간 이상의 노력 끝에 부친 Freshman record를 찾았다. 1913년~1914 년간의 기록이었다.
그러고 보니 부친이 1914년에 귀국하신 후 다시 교육을 계속하지 못하셨으니, 대학교육은 Freshman으로 끝난 모양이다. 여기서 전 학교인 Williston Seminary를 찾았다. 여러번 문의 끝에 현재는 Easthampton, MA에 위치한 Williston Academy임을 알게 되었다. 곧 가서 찾아보고 싶었지만 교육받는 기간이라 자유롭지 못했고, 그 후 Rochester, New York에 가서 개업하느라고 시간을 낼 수 없다가 1979년 여름 California에서 찾아온 처조카가 방금 Smith College에 입학하여 날보고 학교기숙사까지 데려달라고 하여서 지도에서 찾아보니 그 대학이 위치한 Northampton과 Williston Academy의 Easthampton은 5 마일정도 떨어져 있었고, 그 방문일이 바로 일요일이었다.
하여간 나는 그를 대학기숙사에 내려놓고 Williston Academy를 찾아가서 동창회장을 찾았더니 마침 중대한 논의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어 나를 만나서 부친에 관한 사진을 두 장 복사해서 내게 주었고, 내가 갖고 온 학급사진을 자신이 복사하여서 가졌다. 그 때 그가 내게 설명하기를 현 학교건물은 옛 학교를 허물고 그 위에 새로 건축하였으나, 사진에 나온 정문은 현재 Town Library의 정문이니 내가 여기 Park St을 따라 북으로 300 ft 정도 가면 왼쪽에 있는 Library 입구가 바로 이 사진의 건물 입구라고 하여서 그곳을 통과하면서 그 도서관입구를 보았다. 이것이 나의 첫 번 Williston방문이었다. 그때가 1979년 8월말 대학 개학 전날이었다.
그 후 기회가 오면 그 도서관 정문 앞에서 우리가 사진을 찍겠다고 생각하였다. 그 후 1985년 여름방학시절 맏아들 Henry가 11th grade를 마치고 College interview하느라고 Dartmouth College 방문 후, Brown University로 데리고 가던 도중 Williston Academy에 다시 들러 부친의 1909년부터 1913년까지 4년 성적증명서도 발급받고 곧장 그 도서관에 들어갔다.
시골 도서관답게 창문을 열어놓고 노인 서너명이 신문잡지를 보는 듯했다. 나는 Henry를 데리고 곧장 좌측에 있는 한 50대 여성 Librarian에게 가서 인사를 하고 우선 내가 가져온 부친 Class Photo를 보이면서 “Ma'am, can you recognize this photo?" 하니까 그 분이 이 고색이 창연한 사진을 보고 깜짝 놀라며, ”Ah! This is the old Williston School photo. It was taken in the year of 1913, before I was born. The door in this photo is the same door both of you just entered." 이때 내가 부친을 지적하면서, “This was my father, and this boy is my son. We decided to visit this place with this door seen in the old photo." 그 분은 많이 감동하였다. ”I have been living in this town all my life, and once in a while some Willistonian children like you visited the school to commemorate their parents or grandparents. It's so nice to have you. If you have some time, may I bring some old Williston Seminary photos?". 그러고는 지하실에 내려가서 큼직한 box에 넣은 많은 사진을 갖고 와서 우리에게 보였다. 참으로 오래된 사진들이었다. 나로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지만, 부친이 보시면 얼마나 감개무량하셨을까! 사진들을 모두 보고 떠나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을 하였다.
“I want to have photos taken in front of this memorable door with my son. Could you take the photos for us?". 그는 선선히 응낙하고 우리 둘은 문 앞에 섰고 그분은 앞길 Park Street으로 내려가서 양 손을 들고 양 방향으로 오는 Traffic를 모두 정지시킨 다음 천천히 전진 후진하면서 사진을 몇 장 찍었고 좌우에 많은 차량이 섰어도 그분은 태연자약하게 자기 할 일만 다하였다. 나는 그 고마운 분께 많이 사례하고, 떠났다. 그 후 나는 퇴직한 후 이곳 Canandaigua Lake 가에서 살고 있다, 가끔 내가 만일 Boston지역에 갈일이 있으면 이제는 여유롭게 들르려고 생각도 하였다.
그런데 지난 해 2013년 여름 나의 큰 며느리 Lillian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저희 집에 있는 Williston Class Photo 찍은 지 100주년이 되니 가족이 기념방문을 할 것을 내게 제의하였다.
나는 100주년이란 사실을 잊고 있다가 이 좋은 생각에 찬성하고 맏아들 Henry, 맏손자 Connor, 둘째 아들 James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이 학교개학직전 8월 31일 토요일에 가기로 계획하였고, 모두 James의 Manhattan 아파트에서 만나서 출발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토요일이라 학교와 도서관이 닫혀있겠기에 우리끼리 건물 밖에서 사진 몇 장만 찍고 오는 것이 너무 섭섭하여서 내가 학교동창회에 전화하여 Director of Alumni Relations인 Mr. Jeffrey Pilgrim과 통화하고 그날 12시에서 오후 1시 사이에 전화연락으로 Campus내에서 만났고 그가 우리를 데리고 교정과 Gymnasium을 포함한 건물내 campus tour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 걸어서 Emily Williston Memorial Library를 방문하고 그가 우리 넷의 사진을 찍어주었고, 나 역시 많이 감동하여서 금일봉을 학교기금에 기증하였다. 이것이 나의 세 번째 방문이었다.
떠날 때 좀 섭섭하였다. 또 다시 올 일은 없을 듯싶었다. 그런데 금년 6월 초에 아주 오래간만에 New England tour를 하였다. 처음에는 Concord, MA에 있는 Walden Pond에 가서 Henry David Thoreau의 복구된 Cabin을 찾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Bar Harbor, ME에 가서 이틀간 놀다가 귀가할 계획이었는데, 그 직행거리가 650마일에 주행시간이 10시간이 넘는다. 중간에 하룻밤 자고 오는 게 무리가 없겠는데, 특별히 선호할 도시가 보이지 않아서 Easthampton을 생각했지만 그 작은 동네에는 잘 곳이 없어서 Northampton의 호텔에서 자고 그 다음 날 다시 학교를 찾았더니, Mr. Pilgrim이 휴가 중이라 이번에는 다른 용건을 내어 놓았다.
그건 부친의 삼촌 즉 조부님의 셋째 동생이 어렸던 부친을 돌보려고 함께 미국에 오셨다가 결국 Colorado School of Mines 즉 콜로라도 광산대학을 졸업하셨다고 들었는데, 조회하여보니 그분은 Williston Seminary에 1906년부터 1910년까지 다니셨다는 게 발견되었다. 그 분의 함자는 정지환(鄭芝煥) 영문명은 Jewhan Chung이었다. 그 분은 귀국하셨으나 병환으로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고, 또 자손도 없었다. 그래서 그 분의 학교기록을 요청하여 전 기록을 받았다. 그분께서 먼저 1906년에 Williston에 입학하신 후 자기 조카님인 나의 부친을 1909년에 입학시키고 삼촌과 조카 두 분이 함께 Williston에 1909년-1910년 학기를 함께 다니셨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 Williston Northampton School은 나의 부친과 넷째 할아버지가 수학하셨던 나에게 유서 깊은 학교임을 알 게 되었다. 지금까지 이 도서관, 바로 이 문앞에서 우리가족이 사진 찍기를 세 번, 빈 입구에서 찍은 사진 한 번, 모두 네 번 사진을 찍었다.

3-1.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수업년도의 오류

그런데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정보 중에 큰 오류가 있음을 나의 첫 번 추적 시도 때 알게 되었다. 어머니 말씀에, “아버지는 펜실베이니아 상과대학에서 4년 과정 중 3년을 마치시고 1년을 남겨놓고 학비조달건을 상의하시려고 귀국하셨다.”고 들었고 또 내가 새로 발견한 내용을 셋째 누님께 말했더니, 누님 역시 펄쩍 뛰다시피하며, “아버지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4년제의 3년만 마치시고 1년을 못 마치시고 귀국하셨는데 웬 소리냐?”하였다.
그런데 이 정보의 오류는 1969년경 내가 처음으로 PENN대학 동창회에 갔을 때 알게되었다. 아버지의 수학연도가 1914년까지 3년을 마치셨다고 말하였더니, 직원이 살펴본 후 1913-1914년 Yearbook에서 아버지를 찾아내었는데 그 연도에 Freshman course수료가 되어있었다. 그 직후 Archives에서 아버지 성적증명서를 발급받았다. 그러니 1914년 여름에 귀국하신 후 학업은 영구중단이 되었음은 확실하다. 그래서 아버지의 PENN 대학교 수학연도는 1913년부터 1914년까지 1년 간이었음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받아 드려야겠다.
그리고 아버지 윌리스턴 사진은 그곳 졸업사진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처음 그곳 졸업에 의심을 일으킨 건 2013년 백주년 기념방문 때 필그림 씨가 내게 지나가는 말투로, “당신 아버지는 이곳을 졸업하지 않으셨는데.” 그래서 나는 고개를 갸웃 뚱 했었다.
아버지 성적증명서는 1909부터 1913년까지 나와있는 걸 보았기 때문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2014년 6월 19일에 New England Tour를 마치고 귀가하는 도중에 다시 도서관 앞에서 사진을 찍고 또 학교 동창회 실에서 몇 가지 조회하면서 직원에게 아버지 졸업사진을 보여달라고 하였더니, 그는 1913년 졸업생 사진을 모두 찾아 보고서 아버지 사진을 찾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말은 1913년에 아버지는 졸업을 하지 못 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니 4년간 졸업증서가 없음을 어찌 설명할건가? 이 문제에 관하여 학교 Archivist인 Richard Tellier과 여러 차례 교신을 하였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1911~1912기간과 1912~1913기간에 아버지는 중복으로 3학년 즉 Middle Class를 하셨는데, 1911~1912년간에 학급에 빠진 날자가 너무 많았는데 그 이유를 모른다고 하며 혹시 건강에 어떤 이상이 있지 않는가?하는 의문을 내게 제기하였지만 아버지는 항상 건강하셨다고 들었다.
나의 이해로는 송금이 안되어서 윌리스턴에서 대단히 고생하셨다고 들었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고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아마 송금이 안되어서 학교에 등록을 못하셨다고 믿는다.
그러니 내가 다시 정리해 보건대 아버지의 펜 대학교에서 사년중 일년을 못하셨다는 건 결국 윌리스턴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신교육을 받지 못하셨고, 물론 영어교육도 못받으셨으니, 윌리스턴과 펜 대학교를 혼동하셨다고 믿게 되었다.
이리하여 다시 내가 교정하자면, 아버지는 어느 (뉴욕시) 초등학교에서 5년간 교육을 받으셨고, 윌리스턴에서 4년간 교육을 받으셨고, 마지막 PENN 대학교에서 일학년을 마치셨다.

4. 부친의 옛날 미국주소 찾기

(1) 633 West 115th Street, New York, N. Y.
아래에 이 기록을 증명하는 쪽지, 나의 해독문, 그리고 나의 번역문을 싣는다.

 
쪽지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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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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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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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주소가 Williston Seminary 학교기록에 기재된 아버지의 주소가 있다. 부친께서는 가끔 미국에서 사실 때 얘기를 하셨으니 바로 이곳을 말씀하셨다고 믿는다.
뉴욕에서 부친과 자신의 삼촌이 큰 방을 세들었었고, 이승만박사(李承晩博士)께서는 작은 방을 세들어서 한 건물에서 6개월을 보내셨으며, 이박사는 그때 중년쯤 되셨고 부친은 한 20세가 되기 전이었다. 친해지셔서 농담도 하실 정도였다. 그 때 이박사는 프린스턴대학교에 제출할 박사논문준비를 하셨으니 이 때가 1910년으로 되어있다. 이박사는 또한 목사님이어서 부친을 세례 하여 드렸다. 나는 물론 그 거주지와 시기를 알지 못하였지만, 부친 고등학교기록에서 상기의 주소를 찾을 수 있었다.
그 때는 1968년부터 1970년 사이에 Philadelphia에서Residency 교육중이었고, 그 후에 1970년 7월부터 1971년 12월까지 Bronx-Lebanon Hospital에서 Residency and Fellowship 교육을 받고 있을 때, 어느 일요일에 혼자서 차를 몰고 이 주소를 찾아갔더니, 놀랍게도 이 주소에 한국교회가 있었다.
그러고 부친이 그 곳에 계셨던 때가 1909년부터 1913년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고 믿지만 혹시 1909년 이전에도 계셨을 수 있었다. 
하긴 2013년에 Williston School에 갔을 때 Mr. Pilgrim이 학교기록에 의하면 1930년대에 
학교에서 어떤 문의편지를 이 주소로 보냈는데 회신을 못 받았다고 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부친, 
작은 할아버님, 이승만박사 그리고 독립유공자 이희경선생님 등, 이분들이 이 장소에 같은 시기에 계셨을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작년 9월 9일에 New York Historical Society 담당관에게 
이 주소가 그 당시에 무엇이었고 또 한국인 혹은 한국사회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문의하였더니, 
그가 조회한 후 New York Times 기사를 발췌하여 내게 주었다. Aug 19, 1929일에 Rev. P K Yoon이 한국을 지배했던 일본을 비난했던 설교였고, 또 Aug 26. 1929일에같은 윤목사님의 설교로서 서양과 동양의 최선의 문명이 공동으로 세계 평화를 이루기를 열망하는 글을 발견하였다. 그보다 좀 이르게, Aug 29, 1926일에는 Westside Residential Lease를 보도하였는데, 633 West 115th Street에 위치한 Four story 25 foot dwelling를 Houghton Company가 Lease한다는 소식이었다.
하긴 내가 그보다 하루 전날인 9월 8일 
아침에 갔으나 문이 잠겨서 아무도 못 만났다. 그래서 이 교회사진 몇 장만 찍었다. 바로 이곳이 
백여년전에 방금 청년이 되신 선친과 중년의 이승만박사가 6개월을 함께 지내셨던 곳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또 1910년 8월 29일에 한일합방이 되었을 때 부친과 그 삼촌 두 분이 얼싸안고 하루 종일 빈 방에서 우셨다고 하니 틀림없이 이 집이었을것이다. 나라잃은 백성이 된 슬픔으로 우셨다는 뜻이다. 그 후, 선친께서 제2차 미국방문하시고 귀국시 누구를 통하여 하와이에서 일본 첩자나 친일세력들로부터 피신중이셨던 이승만 박사를 마지막으로 만나셨다.
다음은 Korean Methodist Church의 역사를 Wikipedia에서 찾은 내용이다. Korean Methodist Church and Institute는 1921년에 뉴욕시에 설립되었고, 그 현재 주소는 633 West 115th Street, New York, NY 이다.1910년 한일합방과 1919년 3 .1 운동이후 뉴욕시 지역의 한국인이 모여서 1921년에 3.1운동을 기념하고 추모한 후 교회를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처음 예배는 매디슨 애비뉴의 Methodist Church에서 거행하였고, 1921년 4월 28일에 교회설립일로 정하였고 1923년 4월 22일에 459 West 21st Street 에 위치한 빌딩으로 이사하였고, 1927년 현재 주소로 다시 이사하였다. 이 건물은 4층이고 25X100 feet이며, Columbia University와 인접하여있다. 이리하여 선친이 거주지 주소로 사용하였던 곳을 찾았다. 게다가 그 후 이곳에서 우리나라 광복의 뜻을 갖인 선인들께서 독립을 위해 여러가지 의거를 계획하셨던 곳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메일로 교회담당인과 미리 연락을 한 후, 이용보목사님과 예약을 한 후 1월 6일 오후에 그 주소에서 만나서 많은 의문을 풀었다. 우선 나는 목사님께 부친께서 틀림없이 1909~1913년까지 이곳을 주소로 사용하셨고, 또 이곳에서 여러가지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하였다. 또 1910년 한일합방을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와 후견인인 작은 할아버지 두 분은 서로 붙잡고 하루종일 방에서 우셨다고하였고, 또 1910년경에 이승만박사께서 이곳에 오셔서 박사학위논문을 6개월간 준비하셨는데 그 때 작은 방은 이박사께서, 큰방은 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께서 쓰셨다는 내용, 아버지는 20세이전이었고, 이박사께서도 40세 미만이셨는데, 두분이 아주 가까워져서 농담도 하실 정도였다는 내용, 이박사는 목사님이였기에 아버지를 세례해 드렸다는 내용, 그 후 1925년 부친이 미국을 방문하셨다가 귀국길에, 하와이에서 일제세력으로부터 피신하고 계시던 이박사를 아버지를 잠시 만나서 무슨 상의를 하신게 두분의 마지막 만남이었다는 내용을 모두 목사님께 설명하였다.
또 한가지는 독립유공자이신 이희경선생님의 이야기인데, 그분은 선친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이며, 의사(Doctor)이며 독립투사였으며, 독립운동차 중국과 한국에서 일하시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가 결국 병사하시고 또 우리나라 독립후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한가지 지적할 일은서울대학교 음대교수이며 Soprano인 이관옥교수는 이선생님의 외동딸이란 사실이다. 그런데 이 두 분은 이곳에서 함께 6개월간 기거를 하셨는데, 이선생님이 요리를 하시고 아버지는 청소와 설거지를 하셨다는 내용까지도 설명하였다.
그러고 나서 목사님의 설명이 다음과 같았다. 이 장소에서 한인교회가 설립된 때는 1927년이었고, 그 전에 한인들이 오게 된 연유는 이곳이 기숙사였기 때문이다. 나를 데리고 4층을 모두 보여주셨는데, 기숙사처럼 각층마다 공동 Bathroom with shower room이 있었고, 기타 방은 3개였고, 아버지 말씀처럼 큰방과 작은 방이 있었고 또 Fireplace도 있었다.
목사님이 내게 신도목록인 두꺼운 책자를 보여서 찾으니, 놀랍게도
정재원 서울출신, N.Y.U.에서 상과전공, 세례교인. 귀국.
그래서 내가 N.Y.U.를 정정해 달라고 하여 펜실베니아 상과대학으로 정정하고,
세례교인에는 이승만박사가 세례함이라고 추가하고 또 그 위에
Jan 6, 2015 방문
오후 1:59분. 정관호 (막내아들)”
이렇게 기록하였다.
(2) Belvedere Castle
다음에는 선친께서 1925년에 두 번째로 미국에 오셔서 해결 못하셨던 마무리 하셨던 기록이다. 그 때 어떤 한국인 두 분과 사진을 넉 장 찍으셔서 갖고 오셨는데 한분은 이희경선생님이였다.
처음 두 장은 낮은 돌담 옆에서 혼자서, 그리고 이희경 선생님과 함께 찍으신 사진이며, 다른 두 장은 두 분과 번갈아 가며 나란히 벤치에 앉아서 찍으셨고, 건물과 붙어있는 탑이 제법 멀리서 보이는데, 어딘지 알 수 없어서 New York Historical Society에 두 번이나 가서 문의한 결과 두 번째 방문에 그 장소를 확인 할 수 있었다.
그곳은 Belvedere Castle 이라고 하며 Central Park내에 있었다. 그 주소는 Belvedere Castle, W 79th Street, New York, N. Y.이었다. 2015년 1월 6일 눈이 많이 오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돌담을 찾아서 내가 그곳에서 사진 두 장을 찍었다. 그런데 두 번째 두 사진을 찍으신 장소 찾기는 불순한 날씨 때문에 부득이 다음 기회로 연기하였다가 금년 6월 6일에 두번째 찾아 갔다. 우선 내가 성곽 남쪽 보행로에 가서 보니, 건물과 탑의 배열이 옛 사진의 그것과 같았다.
그러나 사진 찍을때 앉으셨던 Bench, 그 바로 뒤에 높은 Pole, 특히 보행로 우측에 위치한 상행 경사지, 그리고 맨 위에 그곳에서부터 성곽으로 향하는 긴 돌담은 전혀 없었고, 그 자리 즉 보행로 우측에는 오로지 대단히 큰 못(Pond)만 있었다.
그래서 다음 방문 때에는 내가 겨울에 와서 전처럼 비교적 원거리에서 성곽을 보며 사진 촬영하려고 한다. 또 Visitor's Center에 가서 안내자의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아마 친구 두 분과 그 Castle정원에서 자리를 바꾸면서 두 곳에서 두 장씩 촬영하셨다고 믿는다.
결론으로, 아버님께서는 1903년경 십여세 경에 동경에서 미국행 정기선을 타고 유학길을 떠나셨다. 처음 6년은 틀림없이 요즘말로 Elementary School에 다니셨을 텐데 그 정보는 도저히 찾을 수 없다. 
내가 Williston School 동창회와 학적부에 여러 번 문의해보아도 전학교(former school)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대답뿐이다. 그러나 마지막 5년은 1909년~1913년까지 Williston Seminary에서 수학하였다, 1913년~1914년까지는 Wharton School, 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Freshman course를 마치셨다.

5. 선친의 재정적곤란

선친이 자신의 삼촌 정지환씨와 함께 미국에 가셨을 때 오직 11세였다. 조부께서는 미국인 장로교선교사에게 한국에서 미국으로의 송금을 위탁하였다. 그런데 선친은 조부께서 생활비와 교육비로 쓸 충분한 돈을 규칙적으로 보냈는데도 돈이 제대로 송금되지 않아서 10여년간 항상 곤란을 겪으셨다. 모친이 내게 얘기해 주시기를: 그 당시 한국에서 미국으로 송금하는게 워낙 대단히 어려웠으며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주셨다.
어느 때 일년치 학비를 낼 수 없어서 1년간 학교를 걸르셨다. 몇 달씩 무일푼이 되어서 오랫동안 식료품이나 음식을 살 돈이 없어서, 그곳 아이스크림가게에서 외상으로 드셨고 그때 많이 수척하셨다. 그럴 때 동네 집 눈을 치는 일을 하셔서 시간당 몇 푼을 받으셨고, 자신의 수양모 집의 눈도 치웠으며 수양모는 선친이 무일푼인걸 알고, “내게 와서 함께 먹자.”하였어도 공짜로 얻어 먹는게 너무 미안했다고 하셨다.
마침내 10년간 재정곤란을 겪으시다가 대학교 1학년 수료하신 후, 큰 결심을 하시고, 더 좋은 방법의 송금을 마련하시려고 귀국하셔서 조부님과 어떤 합의를 이루셨는데 계획대로 귀교하시려고 하는 때 공교롭게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또 세계적해상봉쇄령이 내려서 교육계획이 끝났고 한국에 정착하셨다.
처음에 나는 이해하기를, 선친의 미국교육기간 (1903~1914)은 워낙 오래된 세월이었기에 한국에서 일했던 장로교선교사가 주선한 송금이 워낙 힘들어서 선친이 그렇게 심한 재정적 곤란을 겪으셨다고 믿었다.
그런데 1985년 내가 선친의 모교 Williston Academy 동창회사무실을 방문해서 선친의 전학교를 알아보려고 하였으나 그 곳에 전학교의 기록이 전혀 없었는데, 계속 문의하던 나에게 직원 한사람이 오래된 서류철에서 오래된 2페이지의 친필 서신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Charles Edey Fay란 분이 1956년에 동창회에 편지를 써서 정지환씨의 당시 거주지를 찾고 있었다. 그 정지환씨가 누군지 내가 알고있었기에 그 편지 복사본을 받아서 갖고 와서 읽었고, 거기서 선친과 정지환씨의 재정적인 문제를 훨씬 다른 면에서 알게 되었다.
그 편지에 기술하기를; 한 장로교선교사가 자행한 송금횡령을 정지환씨가 주장하였고, 이 편지의 주인공인 미스터 페이는 외국선교위원회의 회계담당자, 드와이트 에이취 데이를 연락하여 토론하였고, 결국 위원회 회원이 만장일치로 그 손해액을 보상하도록 그 금액의 수표를 미스터 페이에게 보냈는데, 오랫동안 정지환씨와 연락이 끊어져서 그의 거주지를 문의하는 편지였다.
이 편지에 장로교선교사라고만 하였지 그 선교사의 성명을 어떤 이유때문에 기록하지 않았다. 정지환씨와 선친은 내가 편지를읽었을 때에는 이미 사망하신지 오래되었다. 결국 두 분이 그 선교사의 농간과 횡령행위로 그러한 고생을 십여년간 하셨다. 부친과 어머니는 아마 이런 내용까지는 몰랐던 모양이다. 나는 아들로서 또 손자로서 이 일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고 알아 볼 수 있는데 까지 알아보고 싶다. 현재 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에 연락하여 문의중이다.

그런데 2014년 9월에 내가 Williston School Archives로부터 정지환씨 기록을 우편물로 받았는데 그 안에 7줄 되는 글씨가 있었다. 1910년 정지환씨 성명이 나왔고, 넷째 줄에 주소로서 “c/o Dr. George H. Jones, Seoul, Korea”라고 하였으니 “닥터. 조지 에이취 존스”의 자택으로 연락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또 공보한 후 돌아왔는데 정보가 없음이라고 하였고 1922년 8월이었다. 왜 정지환씨 서류철에 Dr.George H. Jones의 이름이 있으며 무슨 이유인지 학교에서 Dr. Jones에게 연락을 하였으나, 회신을 받지 못하였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 이름을 검색해보니 유명한 장로교선교사로 1800년대 후기부터 1900년대 초기까지 한국에서 거주하며 선교하였던 사람이다. 내 생각으로 분명히 이 사람이 송금을 담당하고 처리한 인물이라고 믿는다. 다른 누구를 찾을 건가?
나의 희망은 지불 액과 전달 액을 포함한 완전한 송금기록을 찾아서 조회하여보고, 또 Mr. Fay에게 전달을 부탁하였던 그 수표의 금액 즉 손해에 대한 보상액이 얼마 되는지 알기를 원한다. 나의 정당한 희망이 성취할지는 전혀 미지수이다.

6. 아버님의 유산(Legacy)

내가 처음 Williston Academy를 방문했을 때 Henry는 11세, James는 8세로 Elementary School에 다닐 때였다. 그 날 그 곳 동창회장에게 내가 듣기만 했던 Boarding School인가 하고 문의하였더니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차 속에 있던 아이들을 보며 몇 살이냐고 묻고 만일 이 아이들이 자라서 고등학교 갈 때에 Boarding School(College Preparatory School과 동의어)을 고려하고 또 Williston Academy에 Apply할 경우에는 아버님의 재학사실과 동창회장 자신과 이날 만났던 일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학교에 제출하라고 대단히 친절하게 설명하였다.
그 때부터 나는 우리 두 아들을 Boarding School에 보낼 계획을 세웠고 또 그 다음에는 Ivy League College에 보낼 계획도 세웠고 결국 그 때 계획했던 대로 실현하였다. 아버님이 그 옛날 오로지 미국 교육을 받으시려고 이 먼 나라에서 십여년간 노력과 고생을 하셨고 그러면서도 대학교 교육을 끝마치지 못 하신 사실을 생각하여, 나는 더욱 분발하셔서 두 아들에게 좋은 교육을 받게 할 결심을 하게 된 결과이다.

다음은 아버님의 일화 한편이다. 내가 소학교 아래학년시절 일이다. 나는 별로 우수한 생도가 못되었다. 그래도 노력하여 가끔 100점짜리 시험답안지를 들고 집에 와서 아버님께 보일 때 아버님은 내게, “춘호야, 백점보다 팔십점이 더 좋은 것이다. “ 하셨던 말씀을 여러 번 들었다.
나는 다른 과목보다 수학(예전에는 산술이라고 불렀다.)을 잘 하였다. 그런데 왜 하필 80점이 100점보다 더 낳았다고 하셨는지 그 뜻을 몰랐지만 아버님께 그 이유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 후 지인들에게 잡담할 때 이 이야기를 하면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내가 이 지역에서 개업하고 병원에 Attending Physician으로 일할 때 그 때가 좋았던 세상이었다.
내 환자를 회진한 후 환자 Charts를 들고 Nursing Station에 가서 Progress notes and Orders를 쓴 후 옆에 있는 담당 Nurse에게 Charts를 주면 간호원들은 내게 의례 ”Want some hot coffee?" "Yes, please."하고, 주는 Coffee를 마시며 잡담을 한다. 어느 날 한가할 때 우연히 아버님의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아직도 왜 Grade A보다 Grade B를 더 선호하셨는지 모른다고 말했더니, Mary라고 하는 중년 Nurse가 대뜸, “Don't you know, Dr. Chung? Your father wanted you to be an all-American boy with a well-rounded personality. He didn't want you just to be a so-called bookworm.". 아무도 대답을 못 했던 나의 반생의 의문을 Mary가 풀어주었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고 세속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는 걸 대단하게 생각지 않으셨던 분이었다.이게 나의 아버님의 유산이다.

또 한가지 기억나는게 있다. 아버지께서 소년시절에 세례를 받으셨고, 이번에 처음으로 아버지가 뉴욕한인교회 신도명단에 세례교인으로 되어있음을 알게 되었다. 가끔 말씀중에 God 인용을 하셨다. 나는 나면서부터 어머니께서 나를 데리고 절에 가셔서 항상 불자이었다. 아버지께서 부산 피란시절에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 세상에 모든 종교는 다 좋은 것이다. 네가 어떤 종교를 택하든지 진실하게 믿으면 된다.” 그 말씀을 나는 나의 며느리들에게 하여주었다. 이 또한 아버지의 유산이다.

7. 부친의 말년

미국유학은 1914년에 송금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일시 귀국하셨다가 뜻밖에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도미와 귀교가 불가능하게 되어서 결국 학업을 끝마치지 못하셨다. 하지만 독자 중에는
그 후에 어떻게 지나셨는가하는 의문이 생기겠기에 그 후의 행적을 요약하려고 한다. 이리하여 조부께서는 부친께 가사를 전담하시도록 명하셨고 또 모친과의 결혼도 곧 하셨다. 또 많은 친구도 사귀게 되셨고 중요한 일은 YMCA의 초대영어교사가 되셨으며 그때 제자 중 많이 알려진 분이 영문시인 수주 변영로선생, 성균관대학교수 성재 이관구선생, 기상대장 이원철 박사였다. 
그 외에도 많은 문인, 지사, 사상가와 교류를 하셨고 그들 모두 반일인사 혹은 항일투사였었다.
그 후 개인재산을 써서 국외 수출과 기타 사업을 하셨으나, 모두 실패하셨다. 일제시대에 반일인사가 사업을 하려니 될 수 없었다. 결국 중년시기에 가세는 기울어졌고, 부친은 
일본경찰로부터 요시찰인(要視察人)명단에 올라서 항상 고등계형사가 배치되었다. 얼마나 고생하셨느냐하면, 돈이 다 떨어진 후 친우 두 세분과 함께 단골 찻집에서 만나서 냉수만 마셨다고 들었다.
해방 후 부친이 정계에 들어가실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부친은 그들 즉 정계에 들어간 분들과 뜻이 맞지 않는다고 하시며. 생계를 위하여 개인회사에서 근무하셨고, 가족은 항상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육이오동란이 일어나서 다음 해 1951년에 부산에서 피란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때 연세는 이미 육십이 가까뒀으나, 쉬고 계실 수 없어서 계속 일을 하시다가 1953년에는 잘 알던 미국인의 소개로 마지막 직장이 되었던 완월동에 위치한 ‘부산아동자선병원’에서 행정 병원장으로 일하시다가, 지병의 악화로, "좀 더 치료도 받고 일을 계속하시라"는 미고문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사직하셨다.
그 후 대구에서 살던 셋째 누님에게 가셔서 대구서부시립병원에 입원하셨고 다음 해 1954년 2월에돌아가시고, 유해는 고향인 진주 일반성면에 위치한 선산에 모셨다. 아버지는 만석부호의 종손으로 태어나셨고, 자기 재산으로 10여년 미국 유학하셨고, 패가하신 이후부터 줄곧 곤궁하게 사셨다. 내가 연전에 집 이야기를 영어로 써서 아이들에게 남기려할 때 나의 글을 도와주었던 영어선생 Merry Ewing이 내게 묻기를, "Was he an intellectual?" 나는 아니라고 했고, "He was a person of principle." 이라고 하였으니, 자신의 원칙대로 사셨던 분이란 뜻이다.

8.일화 몇가지

회고하다보면 여러가지 생각나는 게 있다. 그래서 일화를 생각나는대로 엮어보았다.

(1). 이승만박사의 이화장 환영
나의 선친은 해방 후 반이승만 인사였다. 소년시절에 그렇게 가까웠고 선친에게서 상해임시정부에서 일을 하여 달라고까지 부탁하였을 정도의 친분이었다. 그런데 이 박사의 귀국을 환영했던 그때, 즉 이화장에서 많은 인사가 모두 모여있었던 그날, 그 장소에서 이 박사의 얼굴을 보이기 직전에 무슨 일이 있었다.
그곳에는 두 사람이 바쁘게 왔다갔다하면서 이 환영행사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때 선친이 옆에 앉으셨던 여운홍씨(여운형씨의 아우)에게 묻기를, "저 둘이 여기서 무엇하자는 거지요?" 여운홍씨, "미스터 정, 아직 모르시오? 저 사람은 이 박사의 비서이고, 또 다른 인물은 저 사람의 비서라오." 이때 선친은 불끈하여 일어나셨다. "저 분이 천하에 고약한 친일파 두 인간을 자기의 비서로 쓰다니...나는 저 분 만나지 않겠소. " 하고 그 자리에서 Walk out 하셨다.
나는 그 두 인물의 이름을 지금까지 분명히 기억한다. 이 박사의 비서는 친일파 윤치영이고, 윤치영의 비서는 유래장이었다. 선친은 이런 자들이 득세해서 해방된 우리나라를 다시 더럽히는 걸 보실 수 없었다. 윤치영의 더러운 이름은 이미 잘 알려졌으나 유래장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선친의 해방 후 행적을 일부이다.
그 당시 선친을 잘 아셨던 분들은 선친을 많이 비평하였다. 왜 이승만씨를 가까이 하여 좋은 자리를 갖고, 자신의 포부를 이룩하지 못하는가?하고 많이 애석해 하였으나, 그것은 선친이 원하신 길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나는 선친을 신념의 인물 즉 A person of principle라고 소개하였다.
우리는 항상 가난하게 살았고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청빈을 이해하였다. 선친께서는 이승만 정부를 많이 비판하였다. 더군다나 이대통령은 육이오발발 이후 일사후퇴당시 "나는 서울을 떠나지 않으련다."하고 동아일보신문지상에 공포하였다. 그것을 중학교 일년생인 나도 읽었다. 그러던 지도자가 아무 예고도 없이 국민을 버리고 자기만 달아나지 않았던가? 구이팔 수복 이후 귀환하면서 발표한 성명서에 단 한 번도 국민에게 미안했다는 사과는 없있고, 이북 비난만 하였다고 선친은 분개하셨다.
이 대통령이 국민을 존중하지 않은 증거라고 하셨다. 예컨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올 때 수 많은 백성이 임금님 오신다고 마중을 나오니, 선조는 수레에서 내려, "과인의 부덕으로 모두 이런 고생을 하였다." 백성에게 사과를 하였는데 이 대통령은 그런 기미조차 보이지 아니 하였다하고 그를 많이 비난하였다. 나는 선친이 그의 일파가 되지 않으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고 믿는다. 말 할것 없이 선친은 이 대통령을 많이 비평하셨다. 어느날 내가 중3 혹은 고1때에 기억이 확실치 않았지만, 꼭 한번 질문을 하였다. "이대통령이 나쁜 사람입니까?". 아버지는 "그 분은 신념이 강한 사람이다."로 대답하셨다. 나에게는 이 대답 하나면 충분하였다. 신념이 강하기에 일생 항일을 하셨고, 또 해방 후 반공으로 국가를 이끌어 간 게 아닌가하고 생각한다. 그분에 대한 공과 과는 후세의 사학자들이 결정할 소재다.
(2). 해방전 찻집에서

내 기억에 의하면 1943년 여름에 우리는 서울서 강릉으로 이사를 갔다. 해방전 우리집은 완전히 무일푼이 되다시피 하였다. 아버지의 사업이 결단났기 때문이다. 아버지로부터 몇번씩이나 들었던 얘기이다. 늘 친구와 만났던 찻집에서 무일푼인 아버지는 자신보다 더 나을게 없었던 친구들과 찻집에서 만났을 때, 차 값이 없어서 냉수만 마셨다고 하시며 조병옥씨와 이기붕씨의 성명을 거론하셨다. 그 두분도 그때 무일푼이셨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미국에서 조병옥씨를 만났을 때 그 분은 음식점에서 접시를 높이 올려들고 날랐다고 하셨고, 이기붕씨와의 처음 만남은 미국의 대금주령 당시(Great Prohibition 1920 to 1933) 어떤 분을 통하여 연락을 받아서 그의 숙소에서 만났을 때 이기붕씨가 비장했던 양주 두 병을 내어 놓으면서 "Mr. 정께서 술을 좋아하신다고 들어서 한 번 대접해 드린다"고 하셨다. 내가 그 두 분과의 만나셨던 연도를 추정해 본 결과 아마 아버지께서 1925년 두 번째 미국 방문하였을 것이다.
하긴 두 번째 오셔서 체류하시는 기간이 얼마가 되었을런지 모르지만 적어도 몇 달 동안 계셨다고 믿는다. 내가 두번째 뉴욕한인교회 방문시(2015년 6월 6일) 목사님께 문의를 하려고 신도부에서 정지환씨와 이희경씨를 찾았으나, 그분들의 성함이 없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혹시나 하고 장면씨의 기록을 열었지만, 이분이 선친과 교류가 있었다는 말씀은 들은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난 김에 조병옥씨와 이기붕씨를 찾았더니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또 이기붕씨의 불행한 최후는 선친이 돌아가신 후의 일이었다.

(3). 와전되었던 일화

(3-1) 장씨의 성을 가진 모 인사의 옥스퍼드 수학기
그 당시의 청년시절의 그 인사는 자신이 옥스퍼드 대학생이라고 지인들에게 알리었다. 그런데 그가 옥스퍼드 문전에 발을 붙이지 못하였음은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참다 못해 이희경 선생께서 이것을 정정해야겠다고 옥스퍼드대학 교무과에 편지 문의를 한 결과 거기서 다음의 답이왔다. "상기 이름의 학생은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습니다."하는 편지를 지참하고 장씨를 만나면 따지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해방 후에도 그가 옥스퍼드 출신이라고 모든 곳에 알려졌다. 그 후 최근에 네이버 검색을 찾아보니 그가 난데없이 에딘버러 대학 출신이라고 나와있다. 이 어찌 된 일인가? 나는 이 분의 성명을 잘 알고 있고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도 아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글은 폭로하여 어떤 사람이든 다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기에 그 분을 익명으로 남겨둔다.


(3-2)이준 열사의 할복자살
해방 직후에 이준열사의 할복자살이야기가 안중근의사의 이등박문 총살과 더불어 가장 인기있는 애국투사의 두 이야기였다. '해아'에 고종밀사로 간 이준열사가 만국회의석상에서 한국의 억울함을 호소하던 장면에 이어 갑자기 품에 감추었던 칼을 꺼내서 칼쥔 오른손으로 배를 가르고, 왼손으로는 열린 뱃속의 내장을 끄집어내어 옆에 앉았던 일본대표의 얼굴에 던지니, 비겁한 일본대표는 그만 '으악'하고 기절하여 쓰러지던 통쾌하고 비분강개한 장면이다.
이런 장면은 우리 소학교시절에 반장, 부반장같은 중요생도가 웅변대회에서 열을 올리면서 웅변을 하였고, 나의 혜화국민학교 동기인 우수생도 성군은 너무도 감상적이라 학교 웅변대회에서 이 극적인 장면에 이르면 그만 '엉엉'소리를 내며 대성통곡을 하여 많은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다.
선친께서는 한심하셔서 말씀하시기를,"이준밀사가 해아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였는데 그 사위되는 자가 술좌석에서 이런 헛소문을 내어서 아이들 교과서에까지 올렸다."고 한탄을 하셨고 아버지 돌아가신 지 몇 년 후에 이게 근거없는 소문인 게 확인되어서 교과서에서 할복자살이 아니고 '분사'라고 고쳤다. 선친께서는 이러한 세태에 많은 실망을 가지셨다.

(4). 춘원 이광수씨와의 교류

선친은 이광수씨와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고 들었다. 아마 미국에서 수업하시는 때 편지 교류를 하셨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당시 이광수씨 편지가 너무 심금을 울려 선친께서는 많은 눈물을 흘리셨다고 들었다. 그 후 이광수씨께서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일본의 간첩 혹은 일본의 사주를 받았던 허영숙에게 유혹되어 그 둘이 결합을 하고 이광수씨는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그런 연고로 선친은 그와 절교를 하였다. 그 후 친구분들께서 가끔 만나서 술 잔치를 하실 때 이광수씨에게 참가할 것을 권유하면 그때 만나는 분들이 누구냐고 묻다가 선친의 함자를 들으면, "그래요? 미스터 정이 나를 그렇게 싫어하니, 이번에는 내가 빠지겠소." 하셨다고 하였다. 그 후 육이오 때 선친께서 돈암동 전차 종점 근방에서 북한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납득되는 걸 보신게 마지막이라고 들었다. 불행한 이야기다.

(5). 한국 전쟁 당시

1950년 6월 25일에 전쟁이 일어났고, 9월 28일에 서울 수복하였고, 1951년 1월 4일에 수도 서울을 침범했던 중공군에게 내어주고, 서울시민은 모두 남부여대하며 남하하였다. 우리 모두 겪었던 지난 3개월동안 공산치하의 잔인무쌍한 숙청과 살인에 대한 공포로 너도 나도 할것 없이 거의 모든 시민이 일사후퇴이전부터 대량으로 남하하였다. 기차나 추럭이나간에 무엇이든 타고 남하할 수단이면 그걸 사용하였다. 팔군사령관 General Walker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였고, 그 후임으로 General Ridgeway가 대체되었으니, 상황은 대단히 나빴다.
그런데 선친께서는 미군이 절대로 서울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굳은 신념을 갖고 계셨다. 하지만 1월 4일 새벽에 동반장이 종을 울리면서 큰 소리로 "서울철수입니다. 빨리 떠나세요." 이 소리에 우리는 급히 보따리를 싸서 짊어지고 들고 하며, 도보로 남행을 하게 되었다. 왜 아버지께서는 미군이 서울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셨던가? 미국 당국의 의지와 명예를 건 한판 대전인데 생사를 결단할 일전을 앞두고 맥없이 서울을 내 주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드셨던 아버지 예측이 빗나갔다. 요즘 백선엽장군의 육이오사를 읽있더니 다음과 같은 글을 찾았다. 즉 미군에게는 서울이란 고장이 오로지 전략적인 면으로 보건대 그 가치가 기타 지역 즉 안성, 평택, 수원 등 이런 곳보다 더 중요치 않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만일 준비 좀 하셔서 남쪽 즉 부산, 대구, 혹은 진주같은 곳이라도 우리를 데리고 가셨으면, 이보다 덜 고생하였겠는데... 65년만에 해보는 생각이다. 아버지가 학교 영어선생님이 되셔도 좋았겠고, 누나도 취직하고 나는 그곳 학교나 다니고 살았으면, 인생이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텐데…
(6). 김규식 박사(1881-1950?) 이야기

선친께서 미국에 가실 때 두 분이 책임을 부담하였다. 한 분은 한국에서 일본까지, 또 한 분은 일본에서 미국까지 여행을 담당하였다. 한국에서 일본까지 담당하였던 분의 성함을 예전에 들었으나 그 후에 잊었다. 그런데 일본에서 미국까지의 여행을 담당하셨던 분은 김규식박사였다. 게다가 이 분은 할머니와 의남매를 하셨다고 어머니가 얘기하셨으니 그 당시에 참으로 드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혹시 나의 할머니와 동본의 서흥김씨가 아니었나하고 생각도 한다.
그러니 선친이 아마 1902년부터 1903년까지 동경의 청산외국어학원에서 영어를 배우신 후 1903년에 일본 동경에서 미국 San Francisco까지 30일간 여행 후에 대륙횡단철도(transcontinental railroad)로 San Francisco에서 New York까지 아마 열흘 내지 보름쯤 걸렸을 거로 사료된다.
그 직후 미리 알았던 학교에 가서 인터뷰와 입학시험을 보았는데 영어시험에 떨어지셔서 3-6개월 기간을 주고 재 준비를 하여서 도서관에 가셔서 온갖 책을 읽으면서 공부하신 결과 두번째 입학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런데 내가 선친의 첫 학교의 기록을 계속 문의해 보아도 알 수 없었다. 내 추측으로는 교회에서 운영했던 Grammar School이 아니었나하고 생각해본다. 이러한 모든 일을 김박사께서 하셨다고 믿는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해방이후에 김박사가 귀국하여 삼청장에서 귀국 환영회를 할 때 선친도 참석하였는데 김박사가 들어오셔서 사람들을 보고 인사를 하면서 선친 보실 때 첫 마디가, "얼굴이 왜 이렇게 길어졌지?"하셨고, 그 후에 다시 찾아가셨을 때 부인에게 선친을 소개시켰다. 선친은 김규식박사가 정권을 갖게 되면 그 분과 함께 일 하시기를 원하셨지만, 육이오 때 납북, 별세하였다. 선친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셈이다.

(7). 수주변영로 선생님과 성재이관구 선생님

이 두 분은 선친께서 YMCA영어교사일 때 제자였으나 연배도 비슷하여 절친한 친구가 되어서 일생 가까이 지내셨다. 수주 선생님은 영문시인이었고, 성재 선생님은 언론인이였다. 특히 수주 선생님이 쓰신 "명정사십년"에 선친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여기에 “김우영 작가방”에서 소개한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선생의 명정사십년기” 에서 인용한 일화를 소개한다. 또, 웃지 않고는 못 견딜 일화가 있다.
그가 종로에 있는 기독교 청년 영어반에 영어를 배우러 다닐 때의 일이다. 그의 전임강사는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담재, 정재원 이었다. 영어반을 나오면 그들은 이미 사제지간이 아니라 무이주붕(無二酒朋) 이다. 매일 무슨 핑계든 만들어 1년 365일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계속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다 말 술을 사양 않는 대단한 술꾼들이었다.
하루는 두 사람과 몇이서 국일관에 술을 먹으러 갔다. 한여름에도 통풍도 잘 안 되는 2층에서 그들은 술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술을 얼마쯤 마셨는지, 대취하자 그는 잠시 쉬려고 목침을 베고 누워 자버렸다. 얼마 후 갑자기 안면의 격돌을 느끼며 눈을 떠보니 담재가 그의 얼굴을 힘껏 걷어찬 것이 아닌가 !
전후 사정을 따질 겨를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담재를 번쩍 들고는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때만 해도 그는 체력이 왕성했고 담재는 유난히도 체중이 가벼워 엄청난 일이 가능했다. 다행이 하늘이 도왔던지 창밖으로 던져진 담재는 처마 끝 홈통에 대롱대롱 매달려 그곳 국일관 사람들의 협력으로 간신히 끌어올렸다. 그 바람에 담재는 팔에 깊은 상처를 입고 병원으로 가는 등 해괴한 살풍경이 벌어졌던 일화는 지금껏 그를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8). 선친은 반일인사(反日人士)였다.

선친은 귀국하신 후 가산관리를 하셨는데, 여러차례 중국으로 수출사업을 시도하셨고, 불행히도 모두 실패하셨다. 선친은 가정을 책임지셔야 할 입장이어서 직접 항일운동에 가담하시지는 못하셨지만, 독립투사가 거사를 한 후 일본경찰에게 쫓기어 국외로 피신할 때 지인을 통하여 선친에게 도움을 청하면 선친은 선선히 돈을 지불하섰던 일이 대단히 많았다고 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그 후 우리의 가산이 탕진한 후에도 급히 피신하여야 할 독립투사에게 선친이 도울 만한 현금이 없을 때에는 심지어 어머니의 패물까지 전당포에 잡혀서 돈을 마련하여 그 분들에게 도움을 주셨다고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선친은 또한 일경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조심을 하셨지만 그들의 의심을 많이 받게되어서 결국 일본경찰의 “요시찰인”([要視察人]) 명단에 들어가서 선친에게 고등계 형사 두명의 배치되어서 선친의 배후를 추적하였다. 다행히 선친은 조심하셔서 그들에게 체포는 당하지 않으셨지만 항상 위험이 뒤따랐다. 우리나라가 해방된 1945년까지의 오랫동안 계속된 역경이었다.

여러분 또 생각나는 게 있으면 다시 여기에 돌아오겠습니다.

 


Kwan Ho Chung - July 2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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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0 渤海滅亡: 발해멸망 [3] 2023.10.11 정관호*63 2023.11.18 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