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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의 옛 발자취를 찾아서 5회: 미해결건


 

지난 2015년 7월 25일에 선친의 미국 발자취를 썼다. 하지만 모든 의문을 해결한 건 아니었다. 그 중 세가지 의문이 남아있어서, 최근 계속 문의와 추구를 하여서 부분적으로 해결을 보고 나머지는 영구히 미해결로 남겨 놓았기에, 나머지 정리를 하려고 한다. 크게 나누어서 세가지 문제들이다. 아래에 우선 목차부터 쓰겠다.

I. 미국 선교사에 의한 자금 횡령 건
II. 선친의 미국주소: 뉴욕시 서부 115번가 633번지
III. 오래된 사진 넉장

I. 한국에서 미국으로 계획한 송금의 차질로 인한 선친의 재정적 곤란


선친은 만 십 세경 1903년에 자신의 삼촌(나의 종조부)과 함께 미국에 유학을 오셨다.
조부님은 서울에 거주하던 미 선교사에게 한국에서 미국까지 송금건을 의뢰하셨다. 큰 부호인 조부님은 부친과 종조부에게 미국체류기간동안 필요한 교육비와 생활비에 충당할 충분한 금액을 정기적으로 선교사를 통해서 송금하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선친의 후견인 종조부(從祖父)께서는 송금 액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서 두 분의 재정적 곤란은 10여년 체류기간동안 계속되었다.
다음과 같은 대단한 곤란을 겪으셨다고 나는 모친으로부터 들었다.

부친은 학비가 조달되지 못해서 학급 1년을 마치지 못하셨는데 그 해가 1911년임을 학교기록에서 발견하였다.
몇 달 동안 돈이 다 떨어져서 식사도 제대로 못하셨고, 동네가게에서 식사대신 아이스크림을 외상으로 잡수셨는데 많이 수척하셨다고 한다.
긴 겨울에는 자신의 수양모 집을 비롯하여 동네 집 눈을 치웠는데, 한 번에 몇 전 씩 받았고, 또 수양모 미스 엘리(이름이 확실치 않음)가 자기 집에 와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까지 하였다.
그러한 상황이 계속되어서 10년 후에 송금문제를 해결하고자 1914년에 일시 귀국을 하셔서 조부님과 상의하여 해결책을 마련하신 후 귀교하려고 하실 때,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전 세계의 해상 봉쇄 령이 내려 태평양횡단여객선 운행이 중단되어 미국에 오실 수 없어서 국내에 정착하시고 가산관리와 결혼을 하셨다.
내가 한국에서 어머니로부터 이 말씀을 들을 때 그때가 오래전 옛날이었기에 당연히 국제간 송금이 그렇게 힘들었다고 하셨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내가 1985년 두 번째 부친 모교 윌리스턴 스쿨 동창회사무실에 방문하였을 때, 직원이 내게 오래된 편지를 보여주면서 혹시 나와 혹은 부친과 관계가 있는 서신이 아니냐고 물었다.
어떤 미국인이 Jewhan Chung 즉 나의 종조부인 정지환씨에 관해서 문의한 편지다.

그래서 내가 즉각적으로 알게 되어 그 편지 사본을 받고 집에 와서 읽어보니, 이 편지는 정지환씨의 지인(知人), “촬스 이디 페이”란 미국인이 정지환씨의 송금문제를 알게 되어 그를 도우려고 장로교 외국선교위원회에 접촉하여 회계담당자 “드와이트 에이취 데이”씨에게 이 문제를 제기하여 오랜 시일이 걸린 후 결국 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손해액을 보상하기로 결정하고 정지환씨에게 지불할 수표를 발행하여 페이씨에게 보냈는데, 그 편지를 쓴 해가 1956년이었고, 내가 처음으로 읽은 때는 1985년이었다.
물론 페이씨가 정지환씨의 주소를 가졌을 리가 없어서 이 두 분 즉 부친과 종조부의 모교인 Williston Seminary에 편지로 문의하였지만 모두 허사가 되었다. 내가 연도별로 설명하자면 종조부님은 1916년에 국내에서 병사하셨고, 부친은 1954년에 돌아가셨다. 결국 페이씨는 결국 그 수표를 외국선교위원회에 반송하였겠고, 또 내가 추후에 알아본 정보를 이용하면 페이씨는 편지 쓴 다음해 1957년에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그러니 이 편지내용은 그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의 횡령으로 부친과 종조부님의 재정곤란이 일어났음을 증명한 서신이다. 그러면 그 부정직한 장로교선교사는 누구인가?
어머니는 물론 모르셨겠고, 아버지는 아셨겠지만, 이런 정황이 결국 1956년 혹은 그 직전에 해명되었으니, 아버지와 종조부께서는 큰 의문이 있었어도 누구에게 말씀하지는 않으셨다고 나는 믿는다.

이 시점에서 나는 알아보고 싶었다. 우선 세가지 의문이 앞선다.
첫째 그 미국인 선교사의 이름, 둘째 횡령 금액, 셋째 장로교 선교위원회에서 정지환씨에게 지불을 명시한 수표 금액이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친은 윌리스턴 세미너리에서 1909년부터 1913년까지 4년간 수업하셨는데, 종조부는 같은 학교에서 1906년부터 1910년에 졸업하고 콜로라도 광산대학에 입학하셨다.
그래서 나는 부친과 종조부 이 두 분의 학교기록을 요청하여서 받았는데 종조부 기록 중에 한 장의 정리용 카드(file card)와 그 안에 타자 내용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윌리스턴 학교에서 연락인으로 한국 서울시 “조지 에이취 존스” 박사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이름을 추적하였더니 그가 바로 그 당시 한국에서 활동했던 유명한 미국인 선교사였다. 자, 이러니 당연히 나의 관심은 그에게 쏠렸다.
내가 증명까지 할 수는 없어도, 그가 송금을 담당했던 선교사였겠고, 또 횡령을 자행하였던 선교사였을 것이란 심각한 의심이 생겼다. 존스 박사는 종조부에게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기에 그의 이름을 썼던 카드가 학교 기록에 100여년간 보관되었던가? 그리고 그의 횡령사실이 밝혀졌기에 장로교외국선교위원회에서 페이씨를 통하여 손해액을 수표로서 보상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아래에 그에 관해서 좀 더 자세히 기록하겠다. 이리하여 나는 다음 몇 곳에 문의하여 장로교 외국선교위원회에 접촉을 시도하였다.
첫째 뉴욕주 로체스터시 장로교회에 연락하였으나 회신조차 없었다.
둘째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시에 있는 장로교사학회에 연락하여서 정보제공기록보관담당자, 그리고 연구원에게 문의하였지만 그 시기가 원래 오래되었고, 기간이 너무 길어(1903~1956) 기록 분량이 방대하고 조사기간이 너무 길어서 자신들이 할 수 없고 나에게 직접 와서 소장 서적을 읽어보라고 하는데 나의 집에서 워낙 멀고 또 기록을 찾는 과정이 너무 힘들겠어서 중단하였다.
셋째와 넷째 브로드웨이 장로교회와 뉴욕시 장로회에 연락하였으니 결과가 없었다,
다섯째 외국선교위원회의 현재후계자가 장로교선교단체가 되었다고 하여 그리로 연락해보니 다시 장로교사학회로 넘기려고 하여 결국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주 이유는 시일이 워낙 오래되었고, 현직원이 성의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촬스 이디 페이씨의 친필편지이며 그 다음에는 한글번역이다

 
촬스 이디 페이씨의 친필편지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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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스 이디 페이씨의 편지 타이프 스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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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스 이디 페이씨의 편지 한글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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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 논의

  내가 1956년 1월 8일 일자의 “촬스 이디 페이” 씨의 편지를 읽을 때까지, 1903년부터 1914년까지의 선친의 재정적 곤란은 그 당시 국제송금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고 어머니로부터 들어서 당연한 상황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리고 송금은 한국 서울에 거주했던 미국 선교사가 담당하였고, 물론 그 당시에 국제전화나 태평양을 통과하는 항공기가 없었기에 대단히 힘들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내가 이 편지를 읽었을 때 나의 이해가 완전히 변하였다. 선친의 송금 곤란은 국제간 송금 문제가 아니라 이 선교사의 횡령때문이었음이고 이 횡령은 10여년간 그가 자행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외국선교위원회에서 그 손해액의 보상을 하기로 결정하였고, 결국 선친의 후견인인 종조부 정지환씨에게 지불할 금액의 수표를 발행했기에확실히 증명된 사실이다. 물론 이 편지를 썼던 1956년에는 종조부는 1916년에, 그리고 선친은 1954년에 돌아가셨고, 내가 이 편지를 읽었던 1985년에는 이미 29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게다가 내가 1985년 당시에는 개업하느라고 대단히 바빠서 이 문제에 집중할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이 일을 거의 잊었을 때 우연히 선친의 기념사진을 나의 모교 사진전에 참여하는 기회에 다시 선친과 종조부님에 관련된 이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2015년이었다.

나는 당연히 외국선교위원회를 찾고자 노력하였는데, 도대체 여러 장로교회에 문의를 하여도 대부분 회신조차 없었고, 있어보아야 무성이한 회답만 받았을 뿐이다. 최근에 나의 이 문의에 대하여 장로교사학회로부터 미국에서 장로교해외선교위원회는 1837년에 조직되어서 존재하다가 1958년에 그 활동이 미국내에 통합된 장로교회의 위원회로 이전되었고, 1972년에는 통합장로교회의 계획국으로 대치되었다고, 1983년에는 통합장로교회와 장로교회가 재결합되었고, 1988년에는 재결합된 장로교회의 일반 상임위원회가 형성되었다.
그 후 2008년에는 일반상임위원회가 일반상임 임무위원회로 개명되었고, 2012년에 현재의 장로교임무국으로 개명되었다는 최종 설명까지 들었다.

그러니 지환종조부님이 겪었던 횡령건의 책임기관인 장로교해외선교위원회는 1837년부터 1958년까지 존재하였고 그 후에는 네개의 다른 기관으로 이전되었는데 나는 이 임무국에게 나의 의문을 여러차례 제기하였지만 그들은 모른다거나 그들은 예전 일에 관하여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전혀 협조를 하지 않았다.
페이씨의 편지가 1956년이었고, 또 그 직전쯤 수표를 발행한 이유는 아마 그 위원회에서 종료하기 전에 금전관계를 마무리하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환씨는 1916년에, 선친은 1954년에 그리고 페이씨는 편지 다음해인 1957년에 모두 사망하셨으니, 이 일은 이렇게 끝났다.

아래에 나의 추리가 있다.
이 횡령건이 자행되었던 시기는 1903년부터 1914년까지 선친과 종조부 두 분이 미국에 계실 때였다. 그리고 종조부 Jewhan Chung께서 Mr. Charles Edey Fay에게 이 일을 부탁하였을 때는 분명히 1906년부터 1910년까지 Williston Seminary학생시절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1910년에는 Seminary 졸업하셨고, Colorado School of Mines, Golden, Colorado로 가셨으니, 아무래도 떠나시기 전에 이 일을 의뢰하셨고, 또 Mr. Fay도 종조부가 떠나기 전에 이 일을 추진하셨을 거로 믿는다.
그런데 1910년이전에 시작되었던 일을 어찌하여 1956년 혹은 그 직전에 마무리되어서 수표까지 발행하게 되었는지 이 일을 하는데 1956-1910=46년 혹은 그 이상의 시일을 요했는가하는 의문이다. 도저히 납득이 될 수 없는 지연이다.
상기의 정보에 의거하여 나대로 추리하였다. 아마 이 사건을 무시하였는지, 실수로 누락되었는지간에 그동안 묵살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Board of Foreign Missions가 1958년에 해체되려고 하니, 그동안 해결을 못했던 문제를 재조사하게 되어 이 일을 다시 부각하여서 뒤늦게 수표를 발행하였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 이 얼마나 불행하고 억울한 일인가? 이제 책임자들은 모두 떠났고, 그 기관 자체도 없어졌으니!

아래에 내가 장로교 사학회로부터 받은 편지 스캔하였고 또 번역문 역시 스캔하여 여러분께 보이려 한다.

 

장로교해외선교위원회에서 장로교임무단체로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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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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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남은 의문은 도대체 그 악덕 미국선교사는 누구인가? 물론 조부님, 종조부님, 그리고 틀림없이 선친 이 분들은 그 선교사를 알고 계셨을 것이다. 내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어머니는 물론 모르셨다. 이 편지를 썼던 페이 씨도 물론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편지에 “한 장로교 선교사”라고만 나와 있었고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아마 여기에는 명예회손 문제가 야기되겠기에 페이 씨가 신중을 위하여 이름을 넣지 않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런데 선친과 종조부 두 분께서 같은 학교 윌리스턴 세미너리에 다니셨기에 내가 학교 기록보관소에게 두 분의 모든 기록을 보내달라고 하여서 받았던, 종조부님 서류철에서 나온 종이 한 장에서 발견된 이름이었다. 그 사본과 번역문을 아래에 싣겠다. 이리하여 그 이름이 내가 찾고 있는 그 선교사라고 믿게 되었다.

  1910’s Jewhan Chung(1910년 정지환)

 

윗글은 이 카드의 제목이며, 이는 내가 윌리스턴 학교 기록실로부터 2014년 9월에 받았다. 여기에 한국 서울에 주소를 둔 “조지 에이취 존스” 박사가 연락인으로 나와 있으며 내가 의심하고 있는 횡령 선교사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다.



 

Slip of paper for Jewhan Ch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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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스캔 파일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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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번역문
1910년도에 한국출신 정지환은 골든 칼로라도의 칼로라도 광산대학에 입학함. 그는 1884년 8월16일에 출생함.
그의 윌리서턴 재학시 주소: Dr. George H Jones의다음주소를 사용하도록 되었음. 125 Bubling Well, Shanghai, China. 1922년 8월에 공공통지는 정보없이 돌아왔음. 1911년 혹은 1912년에 사앙하였음으로 추정.

 

Ib. 송금건 관련자 삼인

  이 세 사람중 두 사람은 페이씨의 편지에서 발견한 두 사람이니 첫번 사람은 페이씨 자신이고, 또 한 사람은 편지에 나온 외국선교위원회의 회계담당자 드와이트 에이취 데이다. 제삼자는 조지 에이취 존스 박사로 종조부 정지환씨의 학교 서류철에서 나온 이름이다.

  Ibi.촬스 이디 페이

  그의 편지에 자기는 정지환씨의 지인이라고 소개하였고 자기의 월스트리트 사무실과 컨네티컷 스탬포드의 집에 방문하였다고 말하였다. 이 편지에 자기의 직업과 개인적인 정보가 없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본 결과 미국 지방자치제 연맹의 회원이고 스탬포드 사학회의 전기작가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페이씨가 정지환씨에게 그러한 도움을 주려고 그러한 오랜 세월동안 노력하였음에 대단히 감사한다. 그런데 그가 1956년 편지에 말하기를, 대략 25년 내지 30년전에 윌리스턴 세미너리의 학생이었던 정지환씨와 알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나의 계산으로는 종조부의 그곳 학생시절은 1906년에서 1910년까지였으니, 그 때는 적어도 46년전이었었다. 페이씨는 세월이 그렇게 빨리 간줄 깨닫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노력을 그치지 않았고. 정지환씨가 신경쇠약환자였다는 장로교 선교회측의 거짓 설명에도 불구하고 외국선교위원회와 장로교선교사는 법적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부당한 주장을 반박하여 결국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손해액을 보상하도록 하였다.

나 자신은 우리 진양정씨 가문의 종손으로서 선친과 종조부의 유일한 대리인이다. 그러기에 내가 노력하여서 이 고마운 분의 신상정보를 알아보고, 그의 자녀와 후손에게 나의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
좀 더 추적해본 결과 두가지 사실을 발견하였다. 첫번째는 “메리 쎌레스트의 이야기”의 저자 “촬스 이디 페이”를 찾아내었고, 그가 전기작가임을 증명하게 되었다. 이 책의 초판이 1942년에 그리고 재판이 1988년에 출간되었다. 이는 19세기 후반에 있었던 논란이 많았던 미해결의 난파선 이야기다.

두번째는 그의 매장지를 발견하였다. 그곳은 플로리다, 팜비취, 레익 워스, 파인크레스트 묘지이며, 그의 편지주소 플로리다, 레익 워스, 12번 도로 남쪽, 1724번지와 근접한 거리이다. 그의 비석에는 생평연도: 1875년 출생, 1957년 사망. 그가 1956년에 편지를 쓰고 1년후에 사망하였다.
다음에 그의 연대표, “메리 씰레스트의 이야기” 겉장, 같은 책자내의 항해 그림, 그리고 묘비다.
연대표와 주소 설명:
1875: 촬스 이디 페이 출생. 1879: 종조부 정지환씨 출생. 1906-1910; 정지환씨가 윌리스턴 세미너리 수업시기이며 페이씨와 친교를 맺음.. 1916: 정지환씨 만성질환으로 사망. 1942: 메리 쎌레스트 초본 출간. 1956: 페이씨가 편지로 정지환씨 주소를 윌리스턴 세미너리에 문의. 1957: 페이씨가 플로리다 레익 워스에서 사망. 1985: 본인 정관호가 1985년 윌리스턴 아카데미에서 촬스 이디 페이씨 편지를 읽다. 1988: 메리 쎌레스트 재판 출간.
Address 1: 컨네티컷 스탬포드에 거주, 월 스트리트 사무실 운영 -1906 to 1910. Address 2: 컨네티컷 우드베리 그래씨 도로, 써니 크레스트 팜에 거주 (1942) Address 3: 플로리다 레익워스 북부 에이 가, 1027번지 (33460) - 1956. Address 4: 플로리다 레익워스 12번 가 남부 파인크레스트 묘지 - 1957~ .

 
페이씨와 지환 종조부의 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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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쎌레스트 이야기”의 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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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쎌레스트가 바다에서 유기(遺棄) 1872년 1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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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스 이디 페이씨의 묘비(Tombs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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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ii. 드와이트 에이취 데이

  외국선교위원회 재무담당자로서 결국 이 문제 해결의 중심인물이고 또한 종조부앞으로 손해금액에 상당한 수표를 쓴 인물이다. 구글 검색에서 많은 글을 발견하였는데, 주로 그의 근무내용, 국제 선교의 재검토, 세계 선교사 회의 등 많은 재료가 있었다. 이 모두 2015년 이후에 발간한 재료다.

  Ibiii. 조지 에이취 존스 박사(1867~1919년)

  존스 박사는 한국에서 일했던 미국인 기독교 선교사였다. 그는 첫번째 한국에 온 개신교 선교사로서 한국 종교의 학구적 연구를 하였다. 그는 1887년에 감리교 선교사로서 한국에 와서 한국의 기독교 전파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고, 세가지 학구적 신문을 설립하였다.
그는 또한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을 격려하여 이주 노동자가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도록 하였는데 1902년 십이월에 시작하였고, 1907년에는 그의 인천 교회로부터 반 이상이 하와이에 갔다.,
1907년에 그는 살해시도건에 대상이 되었는데, 이는 예일 대학교의 “조지 트럼불 래드” 교수가 관련되었다. 내용인즉 존스가 한국인이 일으킨 독립운동을 억압한 일본경찰의 행위를 찬양한데서 일어났다. 그는 1919년에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사망하였다.

내가 수집한 재료를 종합연구한 바, 비록 완전한 증명은 할 도리가 없지만, 정지환씨의 학교 기록에 현재까지 보관된 서류철속에 정리용 카드에 그의 이름이 현재까지 100여년간 보관될 중요한 기록이다. 여기에 근거하여도 조지 에이취 존스 박사가 촬스 이디 페이씨의 편지에 서술된 정지환씨의 송금을 횡령했던 바로 그 장로교 선교사라고 증명할 수는 없지만, 전후 상황을 고려하면 그렇게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페이 씨 편지에 장로교 선교운영위원회에서 종조부가 한국에 있을 때부터 신경쇠약을 가졌다고 거짓 주장을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그 선교사가 자신의 횡령건을 부인하려고 조작한 말이지 어찌 장로교 선교회에서 종조부의 병력까지 알 수 있었겠는가?
이런 점을 생각하면 그 사람은 대단히 부정직하고 악랄한 인간이라고 나는 믿는다.
페이씨는 정지환씨로부터 자세한 내용을 알았겠고, 오로지 존스 박사의 명예훼손을 피하기 위해서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 뿐이라고 믿는다. 게다가 이름 높은 존스 박사는 강력한 일본에 아부하기 위해서 우리나라 독립투사를 무차별 살해했던 일본경찰을 찬양까지 하였음은 그가 종교인이지만 위선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와이에서 한국인 신도집회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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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선친의 미국주소: 뉴욕주 뉴욕시 서부 115번가 633번지

IIa.뉴욕한인교회


  선친의 모교 윌리스턴 세미너리 기록에 의하면 선친주소가 다음과 같았다.
633 West 115th St., N. Y. City. 뉴욕시 115번가 서부 633번지
1971년 내가 뉴욕시 브롱크스 병원에서 근무할 때 그 주소를 찾아갔더니, 뉴욕시 맨해튼에 있는 “뉴욕한인교회”였다. 목사님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선친께서 자기가 “세들었던 방”이야기를 간혹 하신 걸 직접 들었다.
첫번째 이야기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 박사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느 해 이박사께서 그곳 작은 방에 들어오셔서 박사학위논문을 쓰고 계셨는데 아마 3개월내지 6개월쯤 걸렸다고 들었다. 선친과 종조부께서는 두 분이 큰 방을 쓰셨다. 이박사는 중년이 되셨고, 선친은 십대 후반이었을 것이고, 나의 추정에 의하면 그 해가 1910년이었을 것이다. 이박사와 선친은 대단히 가까웠고 또 농담도 주고 받을 지경이었으며, 그때 선친은 이박사로부터 세례를 받으셨다.
두번째 이야기는 2010년에 한일합방의 비보를 들었을 때 선친과 종조부 두 분은 서로 얼싸안고 방에서 하루 종일 우셨다. 이제는 나라없는 백성이 되었기에. 내가 2015년 1월 6일에 그 교회의 이용보 목사님을 만났을 때 오래된 신도부책을 갖고 오셔서 선친 함자 “정재원”씨를 찾아 내었다. 너무나 반가운 일이었다. 단 한줄인데 거기에 다음과 같이 나와있어서 내가 조금 교정을 하였다. 원본: “정재원”: 서울출신, N.Y.U.에서 상과전공 세례교인, 귀국.“
교정: ”N.Y.U. 상과전공”을 “펜실베니아 상과대학”으로, 세례교인난에 “이승만박사가 세례함”으로, “Jan 6, 2015 방문 오후 1:59분. 정관호 (막내아들)”을 추가하였다.
그런데 이 교회는 1921년에 다른 곳에서 시작하였지만 결국 1927년에 현 주소로 이사를 왔다. 선친은 이 건물에 분명히 1909년부터 1913년까지 계셨겠고, 아마 그보다 더 일찍 거주하셨을 가능성이 크다. 내가 두번째 2015년 6월에 이용보목사님을 방문하여서 곧 현건물은 철거되고 재개발이 시작될 시점에 옛 모습을 보관하고자 4층까지 모두 올라가서 사진을 찍었다. 각층에 방에 세개 씩이고, 하나는 공동 화장실이었고, 내 생각으로 4층에서 선친-종조부와 이박사가 계시지 않았나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니 선친은 그곳이 후에 한인교회가 된것을 아셨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선친의 명단을 보니 많은 감회가 일어난다, 건물 1층이 교회인데, 교회안에 “강변에 앉아 울었노라: 뉴욕한인교회70년사”란 글이 있다. 그 당시 한인들이 오갈데도 없었겠고, 모여서 허드슨 강가에 앉아 울고 슬픔을 달랬다고 믿는다. 여기 나온 한줄의 선친소개는 선친이 직접 쓰신 건 물론 아니고 어떤 아는 분이 썼다고 생각된다. 아래에 사진과 신도부 명단을 싣는다. 다음에 사진을 싣는다.

 

뉴욕한인교회 원건물 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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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층 거실(선친거실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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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신도부의 선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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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a. 뉴욕한인교회에 관하여

  위키피디어를 통하여 다음의 정보를 얻었다. 1921년4월 28일에 한국 거주자와 학생들에 의하여 매디슨 애비뉴 감리교회에서 3.1운동을 기념하였기에 이 날을 교회설립일로 정하였고, 1927년에 현주소지로 이전하였다. 건물은 작은 4층이며, 크기는 ‘25피트X100피트’이며 한국독립운동과 강력한 유대를 가진 지식인의 교회였다.
선친은 틀림없이 1909년부터 1913년까지 이곳을 거주지로 정하고 사용하셨겠지만, 한방을 쓰셨던 종조부님은 같은 윌리스턴 세미너리에 1906년부터 1910년까지 수업을 하셨고, 두분이 항상 같은 숙소를 썼음을 감안할 때 아마 이 숙소 사용은 적어도 1906년부터 1913년까지 긴 세월동안 거주하셨던 두분의 오랜 숙소였다고 믿는다. 게다가 여기서 이승만박사가 선친을 세례하여 주셨으니, 이 교회가 나의 아버지 그리고 종조부와의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런데 이곳 뉴욕한인교회 70년사가 출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2021년 창립 백주년을 기하여 뉴욕한인교회 100년사가 크게 출간될 예정이기에 아버지의 이러한 인연을 생각하여 아버지 함자를 100년사 책에 넣어 달라고 이용보 목사님과 윤창희 변호사님에게 요청을 하였고, 지난 2016년 11월 28일 월요일에 윤변호사님을 직접 만나서 아버지에 관한 모든 정보와 서류 복사본을 드렸고 거듭 부탁하였다.

  IIb. 선친의 교육

  성명: 정재원, 鄭載謜, 영문 Jaone Chung
생평연도: 1893-1954
출생지: 대한민국 경상도 진주시
선친이 연소하셨을 때 조부님은 중대한 결정을 내리셔서 우리 고향인 진주로부터 한양으로 이사하셔서 변화하는 세계에 관하여 배우시고 또 선친에게 좋은 현대교육을 마련하셨다.
그 당시 정규교육인 한문학외에 현대서양교육을 흥아학교에서 수업받으셨고, 미국유학준비차 동경에 위치한 청산외국어학원(靑山外國語學院)에서 영어교육을 일년간 받으시고, 다음해에 삼촌되셨던 정지환(鄭芝煥)씨와 함께 미국 뉴욕으로 오셨다. 그때 김규식박사께서 대동하셨고, 또 뉴욕시에서 학교에 입학할 준비도 미리하였다고 들었는데, 그 학교에 가서 입학시험을 첬는데 영어과목에서 낙제를 하셔서 다시 3개월간 준비하시고 재시험에 합격하셨다.
이 이야기는 선친으로부터 내가 몇 차례 들었다. 내가 어릴적이었기에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윌리스턴 학교를 두번째 방문할 때부터 선친의 전학교 즉 초등학교에 관해서 알려고 문의해보아도 그곳 기록에는 전학교가 나와있지 않다고만 하였고, 현재까지 알지 못한 상태이다. 물론 나는 국내에서 학교 다닐때, 특히 선친 재세 시에 내가 미국에 간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고, 선친도 내가 미국에 갈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고 믿는다. 지금같으면 당연히 선친의 학교 이름과 수업연도를 모두 잘 받아놓았을텐데 많이 아쉽다.
여기에 쓴 선친의 귀국연도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게 제일차세계대전의 연도였으니 1914년이 확고한 정보다. 그런데 미국 도착연도는 내가 추정하였다. 선친께서 대략 10여년간 공부를 하셨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라이트 형제의 초기 비행은 선친이 미국에 오신 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하셨다. 그 초기비행시기는 1903년 12월 17일이었으니, 아마 선친은 1903년 여름이나 가을에 도미하셨다고 믿는다. 내가 찾을 수 있는 학교기록은 윌리스턴 세미너리 1909~1913년, 워튼 스쿨 1913~1914년이 전부다. 그럼 1903년 아니면 1904년부터 1909년까지 5년간 어디서 초등교육을 받으셨는지 알 수 없어서 많이 답답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윌리스턴 세미너리와 워튼 스쿨에서 선친의 기록이 잘 보존되었기에 이나마 찾은 것이 다행이다. 아래에는 아버지의 학교교육을 증명하는 유일한 사진이며 옛 학교건물은 새 건물로 완전히 대치되었지만 다행히 이 정문은 보존되어 그곳 도서관의 정문이 되어서 여기에 이 1913년 사진, 1985년 본인과 아들 헨리의 사진, 그리고 2014년 100주년 기념을 우리가 하고 마지막에 이곳에 와서 본인, 아들 헨리와 제임스, 그리고 손자 카너 이렇게 삼대가 또 그 정문앞에서 찍은 사진을 올린다.



 
선친의 미국교육의 유일한 증빙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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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햄튼 시도서관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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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급 사진 백주년 기념. 2013년 8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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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양정씨 종파 오대 가계 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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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도표 타자 기록
東允(동윤)-祥煥(상환)-載謜(재원)-觀鎬(관호)-源景(원경)(
 

이 도표에서 상부는 증조부님, 다음은 조부님과 종조부님(정지환), 다음은 부친 정재원이시고, 다음은 본인 정관호이고 맨 아래에는 정원경(Henry)와 정원희(James)이다. 여기서 적색 하선은 미국에서 1903년부터 1914년까지 교육을 받으신 종조부와 부친을 표시한다.

 
Belvedere Castle
Belvedere Castle - Central Park Tours
 

III. 선친의 사진 촬영장소 찾기
  나는 선친의 옛 사진 넉장을 갖고 있는데, 그 중 두장은 돌담 앞에서 그리고 나머지 두장은 공원 벤치에 앉아서 찍으신 사진이다.
첫 두장은 보관상태가 불량해서 배경의 세부를 보기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인물, 돌담, 울타리, 그리고 하행계단도 볼 수 있었다. 혹시 희미한 배경이 허드슨 강이 아닌가하고 의심한 적도 하였다.
2015년 1월 6일에 나는 뉴욕 사학회에 2차로 갔더니, 그곳 상담가가 곧 알아내어서, 그곳에서 비교적 가깝게 위치한 벨베디어 성(Belvedere Castle)이라고 하여서, 나는 아침 눈을 무릅쓰고 걸어서 방문객 안내소에 갔다.
그곳 직원은 돌담 사진의 위치를 알아보고, 또 한 직원을 불러서 우리 셋이서 앞뜰로 나가서 원직원은 돌담앞에 내가 설 곳을 지시했고, 둘째 직원은 사진 두 장을 찍었다. 나는 그들에게 감사하였고, 눈이 워낙 많이 내려서 벤취 장소는 추후에 방문하기로하고 돌아왔다.
2015년 6월 6일 나는 이 성을 재방문하였고, 두번째 사진 두 장이 찍혔던 벤치의 장소를 찾으려고 하였는데, 선친이 친구 두분과 번갈아 앉아서 찍으셨다. 겨울외투를 입으셨으니 아마 겨울이었던 모양이다. 이 사진 배경은 비교적 잘 나타나서 성곽과 탑, 거기서 시작한 긴 돌담이 우측으로 나아가서 화면이 끝날때까지 계속되었고, 벤치뒤에 조각한 기둥 일부가 보였고, 또 전면에 곧은 보행로가 있어서, 어렵지 않게 보행로를 찾았고, 성으로부터 예상된 거리를 보행로 우측에서 찾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성과 보행로는 틀림없는데, 사진 우측에 있던 상행 경사지, 긴 돌담, 벤치, 그리고 기둥이 전혀 없을뿐 아니라 우측은 일종의 동산이었는데, 현재는 우측에 지면이 내려앉고 큼직한 못이 있었다. 게다가 보행로 양편에 있는 나무가 대단히 무성하였고 그 잎에 가려져서 내가 섰던 지역에서 성 건물이 거의 다 보이지 않았기에 성 아래에 접근하여 사진찍었다. 오랫동안 머물 시간이 없어서 다음을 기약하고 소득없이 떠났다. 그래서 다음 방문 시기에는 나뭇잎이 다 떨어진 겨울에 오고, 또 그 안내소에 가서 문의할 계획을 세웠다.
우리 가족 모두 이번 추수감사절에 롱 아일랜드 사우댐턴(Southampton, New York)에 있는 둘째 아들 집에서 며칠 지나다가 맨해튼 아파트로 옮겨와서 2016년 11월 28일 월요일에 이 성을 다시 방문하였는데 계획대로 전에 갔던 안내소에 가서 이번 두장 사진을 보였더니, 안내원은 역시 많은 흥미를 보였고, 사진 우측의 변화는 1937년경에 Turtle Pond 즉 거북 못을 만들기 위해 언덕과 돌담 등을 발굴하였기에 모두 없어졌다고 내게 설명하였다.
사진 장소를 내게 알려줄 수 있겠느냐는 문의에 선선히 응락하여 우리는 함께 하행로로 내려가서 성 건물을 우측으로 돌아서 그 보행로 까지 간 후 적절한 위치를 지적하며, 그곳이 사진 장소라고 내게 알려준 후 안내원은 떠났다.
그래서 나는 그가 지적했던 지점에 선친이 앉으셨다는 상상을 하며 몇 걸음 후퇴하여 그 장소, 성 건물, 보행로를 옛 사진에 넣었던 것과 같이 적절한 거리와 각도를 사용하여 인물이 없는 빈 공간 사진을 찍었고, 다음에 보행자에게 청하여 그가 나를 바로 그 자리에 넣은 사진도 한 장 찍었다.
그 다음 사라진 우측 장면을 좀 더 강조하려고 ‘빈 공간’ 사진에서 조금씩 우회전하며 사진 석장을 찍어서 마지막 사진에는 거북 연못이 잘 나오게 하였다.
그리고 그 안내자가 갖고 온 공원 지도에 우리가 보았던 표지물을 보여주기 위하여 볼펜으로 큰 사각형을 그렸고, 그 성을 표시하는 작은 사각형을 원으로 그렸고, 다음 벤치 자리에 “V”자를 뒤집어서 ‘체크’하였는데, 귀가 후에 내가 이 그림을 스캔하여 여기 마지막 사진으로 실었다. 내가 오랫동안 찾았던 그 두 장소를 찾고 또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사진도 찍었기에 너무나 만족하였다.
여기서 내가 그 자리에 서서 사진을 찍을 때 아버지가 옆에 계신 듯한 생각이 들었다. 1925년 겨울에 찍으셨고, 나는 2016년 겨울에 찾아왔으니 만 96년만에 찾은 셈이다. 전에도 나의 상황을 이야기하였지만, 내가 고1때 만16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내게 미국유학이야기를 자상하게 말씀하신 적이 없었고, 나는 친척이나 손님이 오셨을 때 아버지가 술을 마시면서 그 당시 회고담 하시는 걸 조금 들었던 기억이 나의 지식의 전체이고, 나머지 내용 전체는 어머니로부터 들었을 뿐이다. 어머니는 한문에 유식하시지만 신교육을 받지 못하셨기에 나에게 알려 주시는 데 한계가 있었다.
나는 아버지 생전에 내가 미국에 온다는 생각, 미국에서 교육을 받는 다는 생각, 미국에서 시민권을 얻어 영주한다는 생각, 게다가 아버지 학교를 찾는 다는 생각은 전혀 해 본적이 없었다. 만일 그랬다면 내가 아버지께 차근차근 구체적으로 여쭈어 보았겠는데 하긴 아직도 미진한 점이 있지만, 세상일이 다 그렇듯이, 이는 영구히 미상의문으로 남을 것이다.
하여간 이 넉장 사진의 촬영장소 즉 바로 그 자리를 찾았고, 또 내가 바로, 선친이 서서, 그리고 앉아서 찍으신 그 장소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에 대단히 만족한다.
이 성은 뉴욕시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 안에 있으면, 79번가에 있는데, 인기있는 곳이기에 많은 관광객 특히 외국인, 유럽인들이 북적거린다. 내가 길을 잃어서 물어보면 대다수가 손을 흔들면서 자기도 처음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 글을 읽고 또 뉴욕시에서 관광하는 분들에게 이 성곽방문을 추천하고 그 때 정관호가 찾았던 곳도 한 번 들렸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끝마친다.

 
Two photos in front of stone wall: Left father alone, right father and his friend: Winter of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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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 photos in front of the stone w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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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her with Dr. Heegyung Lee on a bench: Winter of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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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ther with another friend: Winter of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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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나의 최대의 계획은 1923년) 사진에 나왔던 아버지와 친구분들이 벤치에 앉으셨던 그 장소찾기였다. 그 사진 두 장은 성곽의 주건물과 탑, 건물로부터 연결된 언덕위에 앉은 돌담, 큰 기둥과 보행로등을 잘 보여주었다. 그런데 현재 긴 돌담, 언덕, 기둥, 그리고 벤치는 모두 없어졌고, 그 대신 그 위치에 “자라의 못”과 나무가 빽빽한 숲으로 방문객의 진입을 불허하는 저지선이 보행로 북편에 설치되었다. 그 기념품점의 여종업원은 본건물을 남행하고 동행하여 보행로를 따라 나를 그 지점까지 30 야드 가까이 안내한 후 바로 벤치가 있었다고 믿는 지점을 내게 지적하였고, 게다가 “센트럴 파크”의 공식지도를 꺼내어 걸어온 길을 선으로 그리고 마지막에 까만 삼각형을 찍어서 표시한 후 내게 주었다. 이게 바로 내가 몇 달 수고를 한 결과였으니, 당연이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깎듯이 하였다. 결국 나는 그 자리를 모두 찾았다! 여기에 구글 지도에서 한 장, 그리고 그 직원이 준 “센트럴 파크 지도”에서 한 장, 이렇게 두 개의 이미지를 넣는다. 또 바로 그 지점에 내가 서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이것도 싣는다.

 
Vacant Pedestrian w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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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사진에 나왔던 벤치의 위치라고 추정한 곳에 촛점을 맞추고 성곽을 향하여 내가 직접 찍은 사진이다. 그런데 여기서 옛 사진과 비교해보니 성곽에 너무 가깝고 또 벤치와 사진사는 모두 우측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하니 그 둘이 돌담 앞 사진처럼 똑같을 수는 없다.

 
KHC trying to stand as close as possible to the bench 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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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hoto of myself standing close to the presumed old bench 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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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tle Map 1: From Google Ma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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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흑색 점을 가진 적색 물방울은 벨베디어 성곽이며, 자라 못은 동북부에 위치하였고, 그 아래에 79번가 횡단로가 있다. 거의 평행인 횡단로위에 작은 도로는 아버지, 친구분들, 그리고 현재 나 자신이 통과한 보행로이다.

 
Map 2 센트럴 파크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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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펜으로 그린 직사각형에서 우측 수직선에 아래의 적색 점은 “벨베디어 성곽”을, 그리고 그 위에 흑색 삼각형은 벤치의 자리와 나의 현재 위치를 가리킨다.

 
Map 3 파크 지도중 성곽과 선친의 사진 위치를 명시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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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확대 지도는 하단에 가까운 79th Street Transverse를 자세히 보여주며, 또 그 위에 평행으로 가는 보행로는 “Belvedere Castle”이란 글자가 부분적으로 가렸다.
그 중간쯤 되는 지점에 검은 적색 점은 Castle을 표시하고 거기서 조금 우측에 있는 내가 그린 같은 색의 삼각형이 바로 내가 찾았던 선친과 친구분들이 앉았던 벤치의 위치다.
이 위치는 관광안내소 직원이 짚어 준 바로 그 점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벤치, 아버지와 친구분들, 그리고 내가 “KHChung with pedestrians”란 제목으로 찍었다.
그 세분이 앉으셨던 벤치(즉 의자)는 없어졌고, 그 대신 긴 철제 말뚝과 철선을 설치하여 관광객이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나 역시 철선밖에 서서 사진을 찍혔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나의 성취한 결과다.

 
부록
 

선친 Williston Seminary 학교 기록안에서 작은 쪽지에 학교시절 주소를 발견하였다.
아래에 그 쪽지와 내가 해독한 글을 싣는다.재학시절 주소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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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 원본 스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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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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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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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소에서 현재 뉴욕한인교회가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재학시절은 1909 - 1913년이었고, 한인교회가 이 장소에 이사온 연도는 1927년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용보 목사님을 2015년 1월에 방문하여 오래된 신도 기록부에서 선친의 성함을 찾았다.
선친과 종조부 두 분이 김규식박사의 안내로 뉴욕시에 도착하시고 또 숙소를 정하고 다음에 선친은 (근방)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시다가 1909년 Williston으로 가셨으니,
혹시 처음부터 이곳에 계셨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까지 처음 다니셨던 초등학교 즉 Grammar School을 찾지는 못 하였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그 학교를 찾아 보려고 한다.

 
후기
 

이 추적의 나의 동기는 첫째 사진의 정확한 장소를 발견하는데 있었는데 직원의 도움으로 가능하여서 거기에 내가 서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현재 사진을 90여년전 사진과 비교해보니, 첫번 두 장 사진의 돌담은 변하지 않았으나, 거기에 지붕, 기둥 그리고 전망대같은 추가 건축이 있었다.
그러나 두번째 사진 두장에서 나왔던 우측 표시물은 언덕, 돌담, 기둥 그리고 벤치등 거의 모두 없어졌고, 아직 남아있는 품목은 성과 탑, 직선 보행로뿐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 다시 와서 나의 소망을 이룰 수 있음에 기뻤다. 명랑한 기분으로 떠나면서 고대 한시 마지막 구절을 읊었다.
幸甚至哉, 歌以詠志(행신지재여, 가이영지로다), 즉 이곳에 왔음이 큰 행운이니, 나의 기쁨을 노래하리로다.
여러분이 잘 아는 삼국지의 조조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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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n Ho Chung – February 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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