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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민비 그리고 서재필 

 

(2018 년 서울의대 미주 동창회 하계 콘벤숀 강의 초록) 

 

이 세사람은 19 세기 중반에서 19 세기 말까지의 다사다난한 이 시기에 활동했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촛점은 민비가 어떻게 해서 시해되는가에 맞추어지겠 습니다.  

 

민비는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대원군과 개화당을 정적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세력은 일본과 결탁하여 민비를 제거하게 됩니다.  

 

서재필은 개화당의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여러분들과 같이 한국 사람으로써 미국 의사가 되었고 미국 시민이 되어 생애를 마치신 분입니다. 여러분들과 같은 직업을 가진 그가 그 어느 때 보다 어려운 시기에 어떻게 인생을 꾸려가는 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9 세기 중엽은 어떤 세상 이었던가? 

 

1840-1860 년 사이에 벌어진 1, 2 차 아편 전쟁은 세계의 질서가 중화 – 오랑캐 구도에서 문명-야만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교를 바탕으로 농경 사회를 이룩한 중국은 오랫동안 세계 최강국 이었고 세상의 중심은 중국(중화)이고 다른 나라는 모두 오랑캐라는 개념으로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우리 나라도 이 구조의 하나로 종주국-종속국 관계로 중국에 예속되어 있었습니다. 

 

유럽과 미국은 계몽사상과 산업 혁명를 거처 근대국가로 변신합니다. 중국의 낡은 제도는 부패해갔고 산업화된 신흥 구미국가들은 문명국-야만국 구도를 앞세워 침략 전쟁을 시작합니다. 자기들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문명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들이 다스려야 한다는 이론으로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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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어저가는 공룡 중국은 구미 국가의 이권 찬탈으로 외환을 앓고 있었던 것만이 아니고 안으로는 수많은 민중 봉기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난리가 태평천국의 난입니다.  

홍수환은 자신이 하느님의 둘째 아들임을 자칭하고 예수교의 평등 교리를 앞세워 남녀 평등, 토지 균등 분배등을 주장하고 약 14 년 동안 중국의 거의 반을 지배했던 사건입니다.  

 

이 난을 제압한 인물이 이홍장입니다. 이 공으로 이홍장은 청 나라 황제 다음으로 높은 권력자가 됩니다. 그리고 망해가는 청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개혁을 시작하는데 이를 양무운동이라고 합니다.  유교를 바탕으로 한 문화와 제도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군사 지식과 과학 기술을 도입하여 개혁을 하고자 했습니다.  조선의 민비-온건 개화파가 이 양무운동을 답습하게 됩니다.  

 

반면에 일본은 명치유신을 단행합니다. 쇼군이 통치하던 막부정권을 천황을 정권 전면에 내세워  입헌 군주제도를 도입하고 군사과학 기술을 받아들여 서양과 똑같은 나라를 만드는 개혁을 했습니다.  양무운동이 절름발이 개혁이었다면 명치유신은 완전무결한 개혁이 었습니다. 이 개혁을 주도한 사람중에 하나가 이토 히로부미 였습니다. 조선의 급진 개화파는 명치유신같은 개혁을 조선에서도 이룩할려고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됩니다. 

 

이와같이 중국의 이홍장,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등장할 무렵 조선에서는 흥선 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합니다.  1800 년 정조의 죽음은 조선을 망국으로 만드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절실하게 요구되었던 실학을 바탕으로 한 개혁이 정조가 죽음으로써 완전히 좌절되었습니다. 그리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60 여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씨왕조라기보다는 김씨왕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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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선 대원군 (1820-1898)

대원군은 이씨왕권을 되찾으려는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가 철종이 죽을 무렵 안동 김씨와 대립 관계에 있던 조대비(선정왕후)와 접촉하여 12 살난 자기 둘째 아들을 고종으로 옹립하고 자신이 섭정에 나섭니다. 1864 년 1 월 이었습니다. 

 

정권을 거머 쥔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인한 적폐를 청산하기 위한 개혁을 실시했습니다.  백성들을 착취하기 위한 부당한 세금 제도를 바로 잡고 매관 매직을 금지했으며, 붕당의 진원지이고 백성을 괴롭혔던 서원을 철폐하여 백성들의 삶이 많이 증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들은  단순히 영,정조 시대를 회복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시대가 요구하는 개혁은 옛 것을 복구하는 수구 보수적인 것이 아니고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산업사회를 만드는 좀 더 진취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웃 나라 일본의 명치유신은 물론 대국 청나라의 양무운동보다도 훨씬 미흡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은 백성들의 열열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쇄국 정책,  제너럴 샤만호 사건과  박규수 

 

청나라, 조선, 일본은 모두 오랜동안 쇄국이 기본 외교정책이었습 니다. 왜냐면 서양 국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가 무너져서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령 천주교를 받아드리면 신분제도를 유지하기가 힘들어질 것입니다.  대원군은 이러한 수구적인 생각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원군은 우선 내치를 안정시켜 나라를 부강하게한 다음 문호를 개방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서양국가들의 통상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1866 년 8 월, 대동강 물은 장마로 크게 불어나 있었습니다. 미국 상선 General Scherman 호는 그 물을 타고 평양성 깊숙히 들어 왔습니다. 상선이지만 대포와 총으로 무장을 하고 있어서 해적선 으로도 의심을 받았습니다. 선원들이 주민들에게 총을 쏘는 등 폭력을 가하자 분노한 주민들이 관군과 합세하여 이들을 공격 했습니다. 강물이 줄어들어 배가 움직일 수 없게되자 평안감사 박규수는 화공으로 배를 공격하여 배에 불이 붙자 선원 전원이 물에  뛰어들어 사망했고 박규수는 배의 엔진를 노휙했습니다.  

 

박규수는 이조참판을 지내는 등 중앙에서 높은 벼슬을 하던 인물이 었습니다. 당시에 중앙에서 높은 벼슬을 할려면 지방근무로 세상을 알아야 한다 하여 지방 수령 직을 거쳐야 했습니다. 마침 중요한 사건이 평양에서 벌어지고 있던 시기에 큰 인물이 평양감사를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규수는 북학파 실학자인 박지원의 손자였습니다. 박규수 또한 북경을 여러 차례 다녀오면서 아편전쟁의 심각성을 감지하고 조선도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하고 개화파 육성을 시작한 인물입니다. 이 개화파는 민비의 강력한 정적이 됩니다.  

 

민비의 등장과 고종 친정 시작

  


명성황후 (1851-1895)  원명: 민자영

명성황후의 정식 사진은 없는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녀는 일생 사진을 않 찍었다 한다.

1866 년 민자영이 왕비가 되던 해는 대원군이 무려 8,000 명의 천주교 신자와 프랑스 신부 9 명을 죽이는 천주교 박해가 있었고 이로 인한 병인양요, 제너랄 셔만호 사건 등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여흥 민씨인 대원군의 부인에게는 민승호라는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민비는 민승호를 자기 아버지 민치록의 아들로 입적시키고 자신의 오라비로 삼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 권력 만들기를 시작했습니다. 대원군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해서 “반 대원군 세력”을 규합했습니다. 조 대비와 연대하여 권력을 차지한 대원군은 풍양 조씨에게 충분한 대접을 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조영하, 조성하를 포섭했습니다. 흥선대원군 형 흥인군 이최응도 민비 세력이 되었습니다. 대원군이 개혁을 위해서 남인과 북인을 선호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노론 계인 안동 김씨 김병기를 포섭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반 대원군 세력은 유학자들이었습니다. 교육 기관이라기 보다는 붕당의 아지트였고 백성 착취의 전위부대였던 서원을 철폐한 대원군은 유학자들의 원수였습니다. 

 

대원군 섭정 10 년, 고종의 나이 22 세가 되자, 그중 지도자 격인 최익현을 포섭하여 대원군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게 합니다. 

물론 이 상소는 반 대원군 세력의 지지를 받았고 이것을 근거로 1873 년, 대원군은 권좌에서 물러나고 고종-민비가 정권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여흥 민씨 세도정치와 대원군의 반격  

 

민비의 처가 여흥 민씨들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보다 더 심한 매관 매직, 뇌물 수수등 온갓 비리로 권력 유지와 축재를 했습니다. 이로인한 민생고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민비와 고종 사이에서 난 왕자와 공주들은 낳자마자 죽거나 병약 했습니다. 민비는 이를 해결해 보고자 무당을 불러서 궁중에서 굿을 하거나, 전국 유명한 사찰에서 불공을 드렸습니다. 민비는 무당과 사찰에 막대한 국고를 낭비했습니다. 

 

민비는 굿과 풍악을 좋아하여 거의 저녁마다 잔치를 벌렸다고 합니다. 밤잠을 설친 고종은 낮에 정사를 보면서 꾸벅꾸벅 졸았다고 합니다. 이에 많은 국고를 썼습니다. 

 

대원군이 궁중 재정을 흑자로 돌려 놓은 것을 고종과 민비는 적자로 민들었고 이를 메꾸고자 많은 세금을 징수해야 했습니다. 

 

자연히 민비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은 높았고 대원군의 인기는 상승 했습니다. 권좌에서 물러난 대원군은 끈질기게 민비 세력을 약화 시키기 위한 공작을 시도합니다. 민비 숙소에서 폭탄이 폭발했지만 민비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습니다. 선물 보따리에 폭탄을 넣어 민승호의 집에 보내어서 이것이 폭발하여 민승호를 비롯 한 일가가 사망했습니다. 대원군의 형 흥인군 집에 불이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사건에는 대원군 집에 머물렀던 식객이 주도 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집권한 고종과 민비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라의 문을 열게 됩니다. 한국 최초의 통상 조약인 병자 수호 조약을 1876 년에 일본과 체결 했습니다. 이는 지독한 불평등 조약으로 일본의 권리만 명시하고 조선의 권리나 일본의 의무는 전혀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민비의 또 하나의 정적 개화당의 탄생  


김옥균 (金玉均, 1851-1894) 급진개화파

물론 당시의 그의 생각은 이홍장의 양무운동과 같이 전통적인 유교를 바탕으로 한 문화와 제도를 유지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온건 개화파와 상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양반 세도가들의 자식들을 자기 집에 모이게 하여 북경에서 가지고 온 새로운 서양 문물과 책를 소개하는 등 서양 지식을 그들에 전수하였습니다. 

 

김옥균, 유길준, 박용효, 박영교, 홍영식, 김윤식, 서광범 등이 대표적인 인물 들이었고  그중 김옥균이 이들의 보스 였습니다.

 

그는 노론계 안동 김씨 김병기의 양자였습니다. 시문, 글씨, 그림에 뛰어나고, 매우 사교적이어서 위로는 정승 판서와 친했고 아래로는 시장 잡배와 어울렸다고 합니다. 가무, 음주, 주색 잡기, 바둑, 투전, 골패에도 탁월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습니다.

 

박규수는 그에게 중화 사상이 허구 임을 가르쳤고, 개화파들이 청과의 관계 단절을 외치고 다니게 되는 믿 거름이 되었습니다. 

 

박영효는 철종의 딸 영혜옹주의 남편이었다. 박규수는 고종에게 박영효를 부마로 삼을 것을 추천했습니다.  서광범은 이조 참판 서상익의 아들이었 습니다.  

 

서재필; 개화파의 일원이 되다. 

 


서재필 (徐載弼, 1864-1951) Philip Jaisohn

유년기의 서재필은 동료들보다 키가 큰 편이었고 싸움을 잘 했 으며 명석했고  자존심이 강한 소년이었다고 합니다. 외삼촌 김성근의 집에서 과거 시험 공부를 했는데,  김옥균, 서광범등이 이집에 드나 들었고 서재필은 이들과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김옥균은 서재필을 총애했습니다. 김옥균을 통해 박영효도 알게 되었습니다. 서재필은 곧 이들과 함께 박규수의 집에 드나 들면서 개화사상을 배우게 됩니다. 

 

서재필은 18 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명문 거족의 딸 광산 김씨와 결혼했습니다.  무관으로 관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김옥균이 개화당의 모체인 충의계를 만들자 서재필도 이에 합류했습니다. 

 

개화파와 붕원사 주지 스님 이동익  

 

박규수 외에 개화파 형성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봉원사 주지 스님 이동익입니다. 그는 일찍이 일본 사찰에 묶으면서 게이오 의숙에서 개화 사상을 배웠고 유기치와 개화파 인사들을 연결시켜주는 역활을 했습니다.  

 

이동익은 부산 출신이어서 그곳 왜관에 자주 출입하면서 일본인 과 접촉하여 새로운 문물과 서적들을 봉원사로 가져 왔습니다. 김옥균등 개화파 인사들은 봉원사에 드나들면서 이동익이  가져온  것들을 교재로 공부했고  12 살 위인 김옥균은 서재필을 이들과 같이 공부하게 해주었습니다. 

 

개화파의 승계; 오경석-유흥기(대치) 

 

1877 년에 박규수가 죽자, 역관 중인 출신 오경석이 개화파를 승계 했습니다.  그는 역관 출신으로 중인이었습니다.  그는 박제가의 실학을 발전  확대시켰습니다. 개화는 신분제도를 없애고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어서 중인 출신인 그는 더욱 적극적이었습니다. 

 

오경석은 한의사였던 대치 유흥기와 같이 활동했는데, 1879 년에 

오경석이 사망하자 유흥기가 승계하여 개화파를 이끌게 됩니다. 그는 백의정승이라는 별명을 가졌었고 교육 뿐만 아니라 현실 정치에 참여 했다고 합니다.  

 

급진 개화파, 온건 개화파, 위정 척사파  

 

개화파는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로 갈라집니다.  온건 개화파는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민영익, 김성근 등으로 청일전쟁으로 청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할 때까지 집권 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은 청나라의 이홍장이 시도 하고 있는 양무운동과 같은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당연히 이 사람들은 친청 세력이었습니다. 

 

급진 개화파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등이 대표적인 인물 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다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본이 앞서 시행했던 명치유신과 같은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조선의 뒤처진 현실을 중국에 예속된 조선의 관계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고 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일본으로 부터 배워야 한다고 주장 했습니다. 그들은 친일 세력이었습니다.  

 

위정척사파 라는 말은  바른 것을 지키고 그른 것을 물리치자는 뜻 입니다. 유교는 옳은 것이고 천주교등 외래 사상은 틀리다는 주장 입니다.  서양문물은 물욕을 추구 하는 것이어서 순수한 인륜문명을 타락시킨다고 생각했으며,  과학보다 도가 더 중요하며 무보다 문이 중요하다고 고집했습니다. 최익현등이 주도했던 이들을 다수의 국민이 지지했습니다. 외세를 배제해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조선 국민들의 의식 수준은 개화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패망을 오히려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고종; 청나라에 영선사 파견, 개화파; 후꾸자와 유키치와 접촉 

 

1880 년 김홍집은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 중 청 공사관 서기관이었던 황준헌을 만났습니다. 그는 김홍집에게 조선 책략 이라는 책을 줍니다. 이 책의 내용은 조선이 외세로 부터 살아 남을려면 어떻게 외교 정책을 수행해야 하는 가를 충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청의 책략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친중, 결일, 연미가 정책의 골자였습니다. 김홍집은 이책을 고종에게 가져다 주었고 고종은 이 세 나라와 잘 해볼려고 노력하기 시작 했습니다. 이 책이 전국적으로 퍼지자 위정 척사파는 극열하게 반대했고 백성들 또한 대다수가 이에 동조했습니다.  

 

1881 년, 고종은 지금의 외무부와 비슷한 통리기무 아문을 설치하고 청에 영선사, 일본에 신사 유람단을 파견합니다. 김윤집, 어윤중은 영선사로 청나라에 가게 되는 데 임오군란 때 민비를 멸망 일보 전에 대원군으로 부터 구하는 데 큰 역활을 하게 됩니다.  

 

고종은 극비리에 신사 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했습니다. 위정 척사파들을 비롯한 백성들이 일본과 거래 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이동익이  주선했고 이동익도 수행할려고 했으나, 그는 떠나기 전에 행방불명이 되고 그 이후로는 그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때 유길준은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게 됩니다. 그는 원래 계획대로 일본에 남아서 게이오 의숙에 입학하여 새로운 문물을 배웠습니다. 급진 개화파와 후꾸자와 유기치 와의 유대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후꾸자와는 일본 제일의 현자이고 일본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일본 돈 만원권에 프린트 된 그의 초상은 이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게이오 의숙을 창설하여 일본 근대화에 이바지 한 많은 인재를 만들어 냈습니다. 시사신보를 만들어 계몽 활동을 했습니다. “탈 아시아”라는 기치를 앞세워 일본의 유럽화를 외쳤 습니다.  김옥균은 1883 년에 60 명을 게이오 의숙에 유학하게 했습니다. 후꾸자와 유기치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를 뒤에서 조종한 인물이었습니다.  

 

다음에 계속:

대원군의 반격; 이재선 반역 사건 

임오군란; 대원군의 쿠테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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