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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민비 그리고 서재필 #2/5

 

대원군의 반격; 이재선 반역 사건  

 

조선책략을 읽어 본 유생들은 이를 극열하게 반대했습니다. 여론 또한 위정척사파들 편이었습니다. 인기 좋았던 대원군은 후궁의 아들 이재선을 앞세워, 경기도 지방에 과거시험치려고 올라온 유생들을 이용하여  대신들과 민씨일족을 제거할려는 쿠테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임오군란 일년 전의 사건이었습니다.  

 

임오군란; 대원군의 쿠테타  

 

권불 10 년이라 했던가? 대원군의 섭정이 10 년째 되던 1873 년에  고종의 친정이 시작된지 9 년이 지난 1882 년, 임오군란이 일어 납니다. 이 사건은 구식군대의 “군란”이라기보다는 대원군이 민비 세력을 제거할려고 시도한 쿠테타였습니다.  

 

구식 군대가 시작했지만 많은 군중들이 합세했고 이 폭도들을 이끈 인물은 대원군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목적인 정권을 일시적 이나마 장악하게 됩니다.  

 

당시에 백성들의 조정에 대한 원성은 극에 달했습니다. 1882 년에 크게 흉년이 들었고, 일본과 통상을 연 후부터 쌀이 일본으로 많이 송출되어 쌀 품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쌀 값이 폭등했습니다. 민씨 외척들의 매관매직과 돈들여 벼슬자리 얻으면 본전에 이익까 지 챙기려고 백성들로 부터 부당하고 과도한 세금을 징수해 갔습니다.  민비의 잦은 무당 굿과 밤 늦은 잔치는 궁중 예산을 탕진했으니 무슨 돈으로 백성을 돌보았겠습니까?  

 

대원군은 섭정때 구식 군대를 잘 정비했고 그들은 병인 양요, 신미 양요 등 그런대로 제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종과 민비는 구식 군대  5 군영을 2 군영으로 줄였습니다. 그리고 별기군이라는 신식 군대를 일본의 힘을 빌려서 창설했습니다. 말하자면 전자는 대원군의 군대고 후자는 민비의 군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국세청장 쯤 돼 보이는 민겸호는 구식 군대에 지급될 쌀을 몽땅 착복해 버립니다. 무례 1 년 동안 구식 군대는 월급을 받지 못 했습니다. 13 개월 만에 쌀로 월급이 지급되었습니다. 무게를 늘일 려고 물과 모래를 부어 쌀이 썩어있었습니다. 화가 난 군인들은 폭도로 변하여 민겸호 집에 방화하고 무위영대장 이겸호 집을 습격 하는 등 우왕좌왕 하다가 대원군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자 그들을 이용한 쿠테타를 주도하게 됩니다. 일반 백성까지 합류하여 대원군은 막강한 실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군인들과 백성들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대원군 형 이최응을  살해하면서 창덕궁을 함락시킴니다. 궁궐로 피신해있던 민겸호와 김보현이 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반란군은 민비를 살해할려고 혈안이 되어 찾았으나 민비는 무사이 궁을 빠져 나갔습니다.  

 

구식군대 병졸들은 대원군  집권을 요구했고 고종은 이를 받아들여 전권이 다시 대원군에게 넘어갑니다. 궁을 빠져 나간 민비는 충주 장호원 목사 민응식 집에 숨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민비를 놓진 대원군은 행방불명으로 간주하고 시체 없는 민비 장례식을 치루었 습니다. 백성들은 대원군을 크게 환영했습니다. 그는 물가고 해결을 위해서 시전 상인 1000 명을 처형했습니다. 1866 년 천주교 신도 8000 처형의 악몽이 다시 떠오르는 냉혈한 대원군의 무자비한 행위였습니다.  

 

청; 반란군 진압-대원군 납치, 민비 복권  

 

충주에 숨어있던 민비는 친척을 통해서 청에 영선사로 가 있는 김윤식, 어윤중과 접촉하여 청에게 도움을 청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들은 이홍장과 접촉 할 수 있었고, 청과 김윤식은 대원군을 납치 하는데 동의하게 됩니다.  

 

이홍장은 많은 영토와 자기들 영향권에 있던 나라들이 서양 세력에게 넘어가는 것을 우려하여 조선을 확실하게 자기들 영향권에 잡고 있으려고 조선에 회군대장 오장경이 지휘 하는 3000 명의 병력을 한양에 보냈습니다. 이 때 김윤식도 같이 귀국했습니다.  

 

오장경은 고종을 예방한 후 운현궁으로 대원군을 방문하면서 대원군을 자기막사로 초대합니다. 용산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막사로 대원군이 들어서자 마자 체포해 버립니다. 그리고 텐진으로 유폐 되어 4 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33 일 동안의 권력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습니다.  

 

고종과 민비는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이제는 절름발이 정권이 되었습니다. 청나라 장수가 그들이 어찌 할 수 없는 권력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조청상민 수륙장정 이라는 일종의 행정 명령을 내려 청나라 상인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그들이 마음대로 조선에서 상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선 상인들에 대한 피해와 

청군의 보호를 받은 그들의 조선인에 대한 행패가 극심했다고  합니다.  

 

서재필의 정계 진출과 개화파와 후꾸자와의 밀착  

 

1883 년 5 월, 서재필은 14 명의 유학생 대표로 일본에 가서 6 개월간 게이오 의숙에서 교육을 받습니다. 언어 습득력이 남달리 뛰어 난 서재필은 불과 6 개월 만에 통역 없이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884 년 1 월에 그는 일본군 하사관 학교에서 6 개월간 군사 교육을 받고 귀국하여 사관 학교 교장격인 장교 양성학교 사관장으로 봉직했습니다.  

 

1882 년 8 월에 급진 개화파들은 임오군란 뒷 처리를 위해서 일본에 파견되었고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민영익등은 후꾸자와 유기치와 만났습니다. 그들은 유키치에게 감화되어 우리도 일본같이 개혁해야 된다고 굳게 믿게됩니다.  

  

갑신정변; 청과 일본의 대결-청의 승리 

 

임오군란 후 청군의 도움으로 대원군을 밀어내고 복권하게 된 고종과 민비는 친청 세력인 온건 개화파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영향력은 청군이 조선에 주둔 함으로써 많이 약화되는 수 밖에 없었고 친일 세력인 개화 파는 점점 권력에서 소외되기 시작 했습니다. 더구나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의 횡포는 중국의 영향이 조선의 쇠약한 국력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개화파 인사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민영익은 김옥균, 박영효 등과 절친한 사이였고 급진 개화파와 같이 일했으나, 미국, 구라파를 돌아본 후에 친 민비 집권 당인 친청 온건 개화파 쪽으로 이탈했습니다.  

 

한편 박영효는 한성 판윤에서 광주 유수로 급기야는 백수가 되었 습니다. 크게 그세력이 위축된 개화파는 일본 공사와 접촉하여 쿠테타 계획을 세우고 그 시기를 염탐하던 중, 청나라와 프랑스가 베트남을 놓고 전쟁을 하기 시작하자, 조선 주둔군의 반인 1500 명을 본국으로 소환했습니다.  

 

1884 년 12 월 4 일 우정국 낙성식 때 주요 인사가 한자리 모인 현장 에서 주위에 불을 지르고 소란을 피운 후 이들을 살해하고 고종을 경우궁으로 옮겨 감금하고 거국 내각을 구성하고 개혁 요강을 발표 했습니다. 경우궁으로 고종을 알현하려 찿아온 대신 11 명을 고종 앞에서 살해했습니다.  

 

다음 날 고종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고종이 환궁하도록 허용 했습니다. 경우궁은 협소해서 방어하기가 용이한 편이었으나 넓은 창덕궁은 진압군을 방어하기 힘들어서 환궁 허용은 큰 실수였다고 합니다.  

 

청군대장 원세개는 고종과 일본공사 다케조에에게 쿠테타 세력을 진압할 것을 통고 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다케조에에게 청군과 충돌 하지말 것을 지시했습니다. 다케조에는 개화파들과의 약속과는 달리 전혀 싸우지 않고 슬그머니 후퇴해 버립니다. 12 월 6 일 3 일만에 쿠테타 세력은 원세계에 의해서 완전히 제압되고 개화파는 반역죄를 지은 역적이 되었습니다.  

 

황영식과 박영교는 청군에 의해 참살 당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친척들은 삼족이 멸하는 참혹한 처벌을 받게됩니다.  

 

 서재필의 역활과 가족들의 피해  

 

서재필은 사관생도와 쿠테타 병력을 직접 지휘했습니다. 따라서 일본군과 협조하여 요인 살해에 직접 참여했습니다. 쿠테타 진압 군으로부터 궁을 수비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습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삼족이 다 죽거나 중형을 면치 못하는 대역죄를 지은 것입니다. 친 아버지 서광효는 투옥된 후 자결하였고 어머니와 3 형제는 사약을 받거나 사람들이 살해했습니다. 부인은 친정을 찾아 갔으나 아버지는 대역죄를 지은 죄인의 아내라고 집 밖에서 극약을 주어 돌려 보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기생으로 여생을 보내지 않으 려고 목숨을 끊었습니다.  2 살 난 아들은 굶어 죽었습니다. 딸은 노비가 되었다가 풀려났으나 행방이 묘현합니다. 보성의 친 외가는 몰락했지만 생명은 부지했습니다.  

 

갑신정변의 배후; 후꾸자와 유키치 

 

사실상 후꾸자와 유기치가 이끄는 일본 진보파가 김옥균을 앞세워 일으킨 쿠테타였습니다. 후쿠자와는 3 년 동안 조선의 개화파를 지원, 기획, 지휘했다고 합니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일본 진보파에게도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개화파를 연결 고리로 삼아 조선을 근대화시켜 일본이 이권을 차지할 수 있는 구도에서 구미 국가의 제국주의식 식민지화 정책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망명 한달 동안은 일본 측이 잘 보호해주고 친절했으나, 쓸모없는 신세가 된 조선의 망명객들은 헌 신짝처럼 버려집니다.  

 

서재필의 후회와 좌절, 일본의 천대, 조선의 자객; 미국 망명  

 

이제 갓 20 살이 된 서재필은 앞 뒤 가리지 않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 같은 자신의 경솔한 행위를 깊이 후회했습니다. 국민들은 아직도 위정 척사파들의 외세에 대한 경외감에 휩싸여 있었는데 일본을 끌어 들여 개혁을 단행하려 했고 구테타 계획 자체가 허술했음을 뉘우쳤습니다.  

 

자신의 불장난 같은 행위로 인한 가족, 친지들의 참혹한 불행은 서재필의 가슴을 메어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 아무 죄없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중죄를 가한 조국에 대한 증오가 쌓이기 시작 했습니다.  

 

일본은 이들을 푸대접 했고, 더구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았습니다. 조선은 끝임없이 일본 정부에게 이들의 소환을 요구했고, 고종은 자객을 보내어 이들을 암살하려고 했습니다.  

 

서재필, 서광범, 박영효; 샌프란시코로  

 

이렇게 일본에서 위험해지자 이들은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피신했 습니다. 1884 년 12 월 13 일에 인천을 떠난지 약 6 개월이 된 1885 년 5 월 26 일 요꼬하마를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에 6 월말에 도착 했습니다. 공주의 남편 박영효는 미국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곧장 일본으로 돌아오고 서광범은 언더우드가 써준 소갯장을 들고 뉴욕으로 떠났습니다. 그래서 서재필은 이제 혼자 남아서 이민생활을 개척해 나갑니다.  

 

서재필의 샌프란시코 생활과 윤치호의 도움  

 

한국 사람이라고는 눈을 씻고 볼래도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인종차별 또한 극심한 시대였습니다. 돈도 없었고 영어를 못했던 서재필은 직장 구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처음 얻은 일은 광고전 붙이기였습니다. 평균 5 마일 정도 커버 했는 데, 서재필은 10 마일에 걸처서 전단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각종 잡일을 하던 중 윤치호와 연락이 되어 그는 서재필에게 우편환으로 생활비를 보내 주었습니다.  

 

온건 개화파의 득세와 텐진조약  

 

갑신정변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청과 일본이 싸워서 청이 승리한 셈입니다. 임오군란때 대원군을 밀어낸 친청 세력인 온건 개화파는 더욱 그 세력을 굳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일본이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테타군 진압 과정에서 공사관이 소실되었고 일본인 사상자가 발생한 것을 빌미로 조선에게 손해배상 요구, 사과, 공사관 부지제공등을 약속받은 한성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일본 진보파가 조선의 개화파를 앞세워 일으킨 정변을 청의 젊은 장군 원세개가 진압한 후 이홍장은 자기 영토인 텐진에 이토 히로부미를 불러 텐진조약을 체결합니다. 이 조약의 골자는 양국 군대가 조선에서 철수하고 앞으로 파병을 할 때는 서로에게 통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885 년 4 월이었고 이 조약이 체결되는 동안 대원군은 같은 도시 텐진에 연금되어 있었습니다. 동양 삼국의 거물이 한 도시에 있었 으나 국력은 그들의 입지를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 조약을 청일 전쟁의 빌미로 이용하게 됩니다. 

 

미국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1884 년 9 월 20 일, Horrace Newton Allen 이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정변이 일어나던 날 우정국 낙성식 때 크게 부산을 당한 민영익을 치료하여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되고 왕과 왕비의 시의가 되었습니다. 광혜원과 제중원을 창설하는 등 처음 5 년간은 의료 선교사로 일했습니다. 그 후 7 년간 공사관 서기 그리고 8 년간 공사로 봉직했고 동시에 고종의 고문이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미국에 이로운 조선의 사업과 자신의 치부를 위한 사업에 많이 관여 했습니다. 자연히 조선이 많은 손해를 보았습니다. 서재필은 이것을  비난했고 그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Horrace Undrwood, Henry Appenzeller, W.B. Scranton, Mary Scranton 등이 1885 년에 입국 합니다. 

 

다음에 계속:

러시아의 남하와 영국의 거문도 점령 

원세개(위안스카이); 조선최고의 권력자, 대원군의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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