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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민비 그리고 서재필 #3/5

 

러시아의 남하와 영국의 거문도 점령  

 

러시아는 제 2 차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곤경에 처해있을 때 중제 

에 나서서 북경조약을 체결하게 한 댓가로 브라디보스토크가 있는 연해주를 청나라로 넘겨 받았습니다. 북경조약이 맺어진 1860 년 이후로 조선은 두만강을 경계로 러시아와 접경하게 됩니다. 부동항이 없는 러시아는 이제 조선을 넘겨다 보기 시작합니다. 

 

영국은 러시아와 패권 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임오군란 이후 더욱이나 갑신정변 이후에는 조선은 청나라에 직접적인 지배를 받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고종은 슬그머니 러시아를 끌어 들여 청나라를 견제해 볼려고 했습니다.  

 

이 낌세를 알아차린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하고 청나라에게 알림니다. 러시아가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달갑지않게 여겼던 청은 이를 환영했습니다.  

 

청은 이사실을 조선에 알렸습니다. 물론 조선조정은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했다는 사실을 한달 동안이나 모르고 있다가 청이 알려주어서야 알아차렸다고 합니다.  

 

원세개(위안스카이); 조선최고의 권력자, 대원군의 귀국 

 

1885 년 10 월 5 일, 갑신정변을 제압한 위안스카이는 청나라에 돌아 갔다가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텐진에 구금되어 있던 대원군을 대동했습니다.  청이 대원군을 구금에서 풀어주어 조선에 돌아오는 것을 민비는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청은 민비의 반대를 무시하고 대원군을 귀국시키자, 친 대원군 세력을 철저히 제거했습 니다. 한달 사이에 무려 30 명을 죽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위안스카이는 조선의 감국이 됩니다. 조선의 왕을 감독한다는 뜻입니다. 고종은 완전한 허수아비였습니다. 그는 조선의 궁녀를 대려다 농락했고 고종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훗날에 신해혁명으로 선출된 대통령 손문으로 부터 대통령 직을  양보받아 망국 청 나라를 접수한 인물이 바로 조선 감국 위안스카이 입니다.  

 

향후 1894 년 청일전쟁 때 까지 청나라의 조선통치는 약 10 년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영국군 거문도 철수, 베베르 공사 와 손탁 입국  

 

1887 년 2 월 27 일 약 2 년 동안 조선의 거문도에 머물렀던 영국군은 러시아가 청국에게 조선을 점령할 계획이 없음을 선언하자 철수했습 니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고 청은 조선의 장악력에 러시아의 방해가 없어진 셈입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베베르 공사가 부임하면서 사교계의 여왕 손탁 (Antoinette Sontag)이 들어와 손탁 호텔을 운영하는 등 외교관, 정치인들과 사귀어 소위 친러파라는 소위 정동파를 만듭니다. 

 

19 세기 중, 후반의 한반도 정세와 사회  

 

우편제도, 신문, 전신제도, 전기 등 근대 국가의 문명의 이기가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근대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 이화학당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러한 표면적인 발전은 전혀 일반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왕을 비롯한 위정자들은 국방을 튼튼이 하여 외침으로 부터 국민을 보호하고 안으로는 국민의 복지를 위해서 일을 해야 했으나 국방을  하기에 앞서 외세에게 나라의 이권을 내주어서 자기 정권 유지를 할려고 했고, 국민을 착취하여 재산을 축척했습니다.   

 

양반관료들은 관직을 돈을 받고 팔았고 돈을 써써  한자리 얻은 관리들은 부당한 세금을 걷우어 본전과 이익을 챙겠습니다. 고종과 민비의 궁중 예산 낭비로 인한 적자를 매꾸기 위해서 고종 자신도 관직을 팔았습니다.  

 

일본을 비롯 한 여러나라와의 통상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어서 외국으로부터 싸고 좋은 물건들이 범람하여 가내 수 공업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이 팔리질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청나라의 조선 지배는 청나라에게 엄천난 특권을 주는 경제 정책을 강요 받았고 조선 상인보다 청나라 상인들이 더 많은 권리를 가지고 

상행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인천의 차이나 타운과 짜장면집, 호떡집 등은 원세계와 같이 들어온 중국 사람들이 만들었습니다.  

 

목구멍에 풀칠을 할 수 없게 된 백성들은 많은 사람들이 도적 떼에 가담하여 전국에 도둑이 출몰했다고 합니다.  

 

식량이 없어서 나무 껍질을 먹은 사람들이 대변을 누다가 항문이 찢어지는 경우가 생겼는데 이를 보고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 하다”고 했다고 합니다.  

 

1894 년 조선  

 

임오군란, 갑신정변은 일본세력을 청이 물리치고 조선에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게한 사건들이었습니다.  또다시 권불 10 년의 그 10 년 쯤 되던 해가 1894 년 입니다. 동학란, 청일전쟁, 갑오경장이 한꺼번에 일어났던 해입니다.  

 

동학 농민 혁명 

 

양반과 상민을 차별하는 반상제도는 소수의 양반이 다수의 백성 (상민)들을 착취하는데 십분 이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인내천을 교시로 하는 동학사상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뜻이었고 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는 백성들간에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습니다.  

 

1890 년대에도 천주교는 국가에서 인정을 해주었으나 동학교는 인정 해주지 않았습니다. 반상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교를 인정해주면 양반들이 자기들 특권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1892, 1893 년에 동학교도들은 교조 최제우의 누명을 풀어 주고 동학교 탄압을 중지해 줄 것을 요구하는 집회가 삼례를 기점으로 하여 충청도 보은에서는 2 만내지 8 만명이 운집하는 대규모의 

집회가 여러 날 계속되었고  금구와 밀양에서도 작은 집회가 있었습니다. 

 

전봉준, 조병갑에게 반기를 들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중앙 관료들이 알아주는 백성 수탈의 명수였습 니다. 백성들로 부터 걷우어 들인 세금과 뇌물을 중앙 관료들에게 잘 바쳐서 노른자위 지방 관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고부는 비옥한 농토와 바다를 끼고 있어서 포탈할 산물이 풍부했습니다. 

 

1894 년 2 월 26 일 전봉준은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에 반기를 들고 그 동안의 평화적인 시위를 한단계 뛰어넘는 농민들로 구성된 반군을 지휘하여 각 고을을 공격, 점령하기 시작했습니다. 

 

보부상들이 사용하던 사발통문으로 방을 부처서 반군을 모았습니다. 그들은 전주성을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할 것을 목표로 하고 정부군과 싸웠습니다.   

 

하필이면 왜 호남에서? 

 

조선 전국의 논 30.8%가 호남에 있었고 쌀의 42.3% 가 호남에서 생산되었 습니다. 탐관오리들이 수탈하기 가장 좋은 지역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아 호남에서 벼슬 살게하는 것이 소원이다” 할 정도로 관리들이 선호하는 지역이었습니다. 19 세기 말에 전라도 관리의 대부분이 서울과 충청도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전주성 점령과 청에 원군 요청 

 

1894 년 5 월 10 일, 그러니 동학난이 발발한지 3 개월 만에 홍계훈이 정부군 800 명을 청나라 군함에 실고 군산에 들어옵니다.  

 

12 년 전 임오군란때, 상궁으로 변장한 민비를 등에 없고 궁을 빠져 나가 민비가 반군의 칼날을 피하게 한 장본인이 홍계훈입니다. 

 

조선은 아직도 원세계가 지배하는 청나라 세상임을 상기하면 조선군이 청나라 군함을 이용함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나 마찬가지로 조선의 군인들은 농민인지 군인인지 모르는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요지음 세상으로 치면 예비군이 정규적인 훈련도 하지않고 있다가 전쟁이나면 차출되어 적과 싸우게 되는 꼴입니다. 800 명은 막상 동학군과 싸울 때는 겨우 470 명 만 남아있었습니다.  

 

이들은 악에 바친 동학군의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동학군이 전주성에 당도했을 때는 관료와 관군은 전부 도망가고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전주성이 동학군에게 점령당하자 조정은 크게 당황하여 청나라에 원군을 청합니다.  이때가 6 월 1 일, 그 다음날 일본은 출병을 결정 했습니다. 

 

닷새 후인 6 월 6 일 청군 1500 명이 아산으로 출발하고 다음날에 텐진조약에 약속된 대로 일본에게 통고했습니다. 

 

전주화약과 동학군 자치정부, 집강소 설치  

 

홍계훈은 정부군을 재정비하여 동학군을 공격했고 이 전투에서는 동학군이 패배했습니다. 성안의 식량은 고갈되어 갔습니다. 때는 모내기할 농번기였습니다. 농민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6 월 11 일 그들은 새로 부임한 전주감사 김학진과 화약을 맺고 전주 성을 내줍니다. 

 

전주성을 나온 동학군은 모 심으러 집에 돌아가지 않고 남쪽으로 후퇴하여 각 고을을 점령하고 집강소를 설치합니다. 혁명군의 정부라고 할 수 있는 집강소는 호남 일원 행정관청 안에 설치되었고 고을의 수령은 자연히 허수아비가 되었습니다. 

 

마치 일 세기 전 프랑스혁명을 방불케하듯 12 개의 행정요강을 발표 하고 이를 시행했습니다. 탐관오리의 죄를 조사하여 처벌함, 

노비문서 소각, 천인 대우 개선, 청춘과부 재가 허용. 토지 균등 분배 등을 골자로 했습니다.  

 

아이로니칼한 것은 비슷한 개혁이  한 달여 후 중앙정부에서 개화파 주도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청일전쟁 

 

청군이 조선에 파병되자 일본 또한 군대를 보냈습니다. 뜻밖에 반군이 전주에서 철수하자, 조선정부는 양국에 군대 철수를 요구 했으나 일본은 이미 청과의 일전을 각오하고 있었고 이 계획을 하나 하나 진행해 나갔습니다. 

 

7 월 23 일, 한양에 이미 들어와 있던 일본군은 조선군의 저항을 제압하고 경복궁을 점령했습니다. 완전히 허수아비가 된 고종과 민비 세력을 축출하고 대원군을 얼굴마담으로 하여 친일 개화파를 집권 시킵니다(경복궁 쿠테타). 이제 조선정계의 세력구도는 민비-친청 온건 개화파 에서 대원군-친일 개화파로 바뀐 꼴이 되었습니다. 민비가 그렇게 두려워하던 개화파와 대원군의 결탁이 눈앞에 전개된 것입니다. 12 년전 임오군란 때 청과 민비의 연합으로 권좌에서 물러 났던 대원군은 다시 절름발이지만 권력의 전면에 나선 것입니다. 7 월 27 일에 군국 기무처가 설치되고 소위 갑오개혁이 시작되었 습니다. 한양에서는 군국기무처가 갑오개혁, 호남에서는 집강소에서 동학혁명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894 년 7 월 25 일, 일본 군함은 이홍장이 심혈을 기울려서 만든 북양 함대를 충청도 아산 앞 바다에서 대파했습니다. 역사가들은 이를 풍도해전이라고 하고 청일전쟁의 시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860 년, 제 2 차 아편전쟁 이후로 시작된 이홍장의 양무개혁과 일본의 명치유신이 조선땅에서 그 결과를 증 하는 일전을 벌린 대리 전쟁이 청일전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반도와 같은 지정학적 위치에서 취약하기 그지없는 국력은 주위 강한 나라에게 전쟁터 제공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청일전쟁 외에도 임진왜란, 러일전쟁 그리고 한국전쟁도 일종의 대리전쟁이었습니다. 

 

7 월 28 일에는 성환에서 일본육군은 청군을 섬멸했고 청군은 평양으로 후퇴하여 전 병력을 집중시키고 일전을 기다렸습니다. 

 

8 월 26 일, 경복궁을 접령하고 고종을 제압한 일본은 별로 어렵지 않게 청과의 전쟁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조선이 제공할 것을 약속 받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나라에서 무려 20 만 대군이 필요로하는 물자를 제공했습니다. 일본은 평양전투에 필요한 토지, 건물, 전신을 징발했습니다. 그리고 동학란을 조일 합동으로 제압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9 월 15 일, 일본군은 평양성에 조선 안에 있는 병력과 본국에서 들어온 병력이 총 집결해있는 청군을 대파했습니다.  

 

한편 절름발이 권력을 잡은 대원군은 원래 일본이 요구하던 개혁에는 관심이 없었고 완전한 권력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민비를 폐비 시키기 위한 공작을 했고, 손자 이준용을 인사권과 병권을 장악하게 할려고 했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집권한지 한 달 후에 평양에 있는 청나라 장수에게 친일 개화파를 제거해 달라는 서한을 보냈 습니다. 평양전투 중에 이 서한이 일본군에게 넘어갔습니다. 일본은 이것을 빌미 믿을 수 없는 대원군을 퇴진시켰습니다.  

 

일본공사 이노우에 기로우, 개화파 귀국 허용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청을 제압하자, 민비-친청-온건 개화파가 무너지고 갑신정변 때 역적으로 몰려 일본에 망명해 있던 급진 개화파 세력이 정권의 전면에 나서게됩니다. 

 

1894 년 8 월, 10 년만에 박영효와 서광범이 귀국했습니다. 그들은 각각 내무대신과 법무대신에 임명되었습니다. 민비는 대원군이 군국 기무처 결정사항을 잘 이행하지 않는 등 일본과 개화파를 

좋아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박영효에게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 습니다. 민비는 박영효에게 관복을 지어주고 대저택을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박영효를 다리로 일본측과 친해져서 대원군을 밀어내고 자기가 실권을 잡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곧 원수지간이 될 이들은 당분간 밀월관계를 유지합니다. 

 

전봉준 체포  

 

1894 년 12 월, 7 일간 계속된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서 동학군은 섬멸되고 전봉준은 체포되었습니다. 동학 혁명은 무려 20 만명의 희생자를 내고 일단락 되었습니다.  

 

시모노세키 조약과 삼국간섭  

 

1895 년 4 월 17 일,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이토 히로 부미는 이홍장을 자기의 영토인 시모노세키로 불러서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그 첫번 째 조항은 “조선은 완전 무결한 독립국임을 선언한다.” 였습니다. 적어도 조선 500 년 동안 계속되어 왔던 중국의 종주국 노릇이 끝나는 순간 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하든 청이 왈가왈부 할 수 없다는 뜻이었습 니다. 그리고 청은 요동반도, 타이완, 펑우열도를 일본에게 양도 했습니다. 

 

그로부터 겨우 6 일 후 만주 진출에 심혈을 기우리고 있던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꼬두겨 일본에게 요동반도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습 니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를 상대할 만한 해군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요구를 들어주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은 나라 전체가 “와신상담”이라는 말로 위로하며 억울함을 달럤습니다. 그리고 훗날 러시아를 제압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이를 삼국간섭이라고 합니다. 

 

다음에 계속:

민비의 친러정책과 정동파의 집권
박영효 민비 시해 음모 실패와 일본 재 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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