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English
                 

대원군, 민비 그리고 서재필 #4/5

 

민비의 친러정책과 정동파의 집권 

 

일본이 러시아에 굴복하는 것을 본 민비는 일본과 개화파를 밀어낼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정동구락부라는 모임 소속 친러, 친미 정객들을 대거 입각시켜서 친일 개화파들을 밀어냈습니다.  

 

이 정객들을 정동파라고 했는데,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같이 조선에 온 손탁이라는 여인이 만든 사교단체 정동구락부 인사들입니다. 정동은 미국, 영국 등 외국 공사관 밀집 지역이었습니다 . 손탁은 정동에 호텔을 운영하며 외교관들과 조선정객이 어울릴 기회를 주었 습니다.  그들은 친구미, 반일, 친민비 성향의 인사들이었습니다.  

 

박영효 민비 시해 음모 실패와 일본 재 망명  

 

민비는 일본과 개화파들이 장악하고 있는 군국 기무처의 힘에 밀려나 자기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는 신세에서 벋어날려고 1894 년 여름부터 급진 개화파를 살해할 계획을 세웁니다. 

 

민비는 러시아 공관과 접촉하여 개화파 말살계획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 계획이 대원군에게 발각되었습니다. 대원군은 일본 공사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접촉하여 민비 살해계획을 세우기 시작습 니다.  

 

해가 바뀌고 시모노세끼조약후 삼국간섭으로 대세가 일본에서 러시아 쪽으로 넘어가자 민비는 박영효를 비롯한 개화당을 쓸어버릴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실이 박영효 귀에 들어 갔고, 1895 년 7 월, 생명의 위험을 느낀 그는 민비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박영효는 일본 공사관을 찿아가 병력을 요구한 다음 유길준에게 자기 계획을 알렸습니다.  

 

박영효는 유길준을 믿었습니다. 왜냐면 유길준도 대원군과 같이 일본측과 접촉하여 민비 제거를 계획하고 있었고 이사실을 유길준이 자기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왜 그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유길준은 고종에게 중간에 사람을 넣어서 밀고했습니다.  

 

 7 월 6 일 고종은 즉시 경무사 이윤용에게 박영효 체포령을 내렸 습니다. 이윤용은 담장을 사이에 둔 이웃이었고, 그는 즉시 담장 넘어로 체포령을 알린 다음 움직였습니다. 7 월 7 일 포졸이 박영효 집에 도달했을 때는 박영효는 이미 한강을 통행하는 작은 증기선에 타고 있었습니다.  

 

대원군은 공덕리 대원군 별장 아소당에 가택연금돼 있었고 일본 공사관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면서 민비 시해 계획을 논의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유길준 대원군 파에게 포섭되다. 

 

유길준은 일찌기 박규수 문하에서 김옥균등과 같이 수학했던 개화파 중에 한 사람이었고,  조선인으로써 최초로 일본, 미국에서 유학한 근대 문명을 이해할 수 있는 드문 인물이었습니다. 

 

1894 년 갑오경장의 개혁 안은 유길준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합니다. 대원군은 손자 이준용을 통해서 유길준을 포섭했습니다.  결국 유길준은 대원군, 이준용이 주도하는 민비 암살 계획에 참여하게 되나 명성황후 암살 전후까지 개화파 인사들은 그와 대원군의 관계를 몰랐습니다.  박영효의 민비  암살 계획 폭로 후 민비와 고종의 개화파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그는 본겨적으로 이 계획에 참여하게 됩니다. 

 

민비 시해사건(을미 사변)  

 

1894 년 10 월 4 일, 유길준이 의주 관찰사로 좌천되었습니다.  그의 지방관직 발령으로 이제 개화파는 전부 내각에서 축출된 셈이었 습니다. 바로 그날 일본측은 대원군과 접촉하여 10 월 8 일 새벽에 거사 할 것에  합의했습니다. 

 

죽기 전날 밤에 민비는 척족 민영준이 궁내부 대신에 내정된 것을  축하하는 연회를 베풀고 있었고, 같은 시각에 민비를 살해한 장본인 인 일본 낭인들은 진고개 파성관에서 한성신보 기자들과 한잔하고 있었습니다. 

 

 낭인들은 일본의 열혈 애국청년들이었 습니다. 일류대학 출신들로 무예를 연마하여 국가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조폭과는 거리가 먼 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95 년 10 월 8 일 새벽 5;30 에  일본 낭인과 조선 훈련대 병력은  경복궁으로 침입하여 침전인 옥호루에 있는 민비를 시해했습니다. 민비를 칼로 벤 장본인은 물론 일본 낭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본병력을 지휘한 인물은 일본공사 고로였고 조선병력을 지휘한 장본인은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이었습니다. 우범선은 임오군란 직전에 신식군대 별기군 교관이었는 데, 그는 중인 출신이었고 생도 들은 양반집 자제들이었습니다. 생도들은 교관에게 반발을 했고 교관의 지시를 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생도들을 모아 놓고 장황한 연설을한 후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그 후 친일정권에 의해서 창설된 훈련대 대대장을 맏게 되었으나, 고종과 민비는 훈련대를 해체할려고 했습니다. 불만에 찬 우범선을 고로가 포섭한 것입니다.  을미사변 후 일본으로 망명해있던 우범선은 자객 고영근에 의해서 암살되었습니다.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는 우범선의 아들입니다. 

 

거사날 새벽 3 시, 공덕리 별장을 습격한 일본 낭인들은 경비병들을 제압하고 그들의 옷으로 변장한 후 반 강제로 대원군을 데리고, 훈련대 병사들과 같이 경복궁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비 시해 직후, 친일 내각 재 집권  

 

러시아의 삼국간섭에 힘입어 친러정책으로 정권을 잡았던 친러파는 민비가 대원군-개화파-일본에 의해서 제거되자, 일본은 일단 대원군을 떠받들고 개화당 인사들을 대거 재 집권시켰다. 당시 친러파였던 이완용이 물러나고 만년 재상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내각이 들어섰습니다.  박영효, 서광범등이 다시 내각에 들어 오고 유길준은 내무대신에 임명되었습니다. 

 

고종 공포에 떨다.  

 

민비가 정적인 대원군과 개화당 그리고 일본 세력에 의해서 사살되자 고종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자기 주위에는 자신이 물리치려고 했던 세력이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일본공사는 고종을 위협했고, 대원군은 자기를 죽이고 대원군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만들려는 음모에 시달렸습니다.  

 

심한 불면증으로 밤을 뜬 눈으로 세우고 궁중에서 만든 음식을 먹지 않고 언더우드 부인이 직접 가지고 온 음식만 먹었 습니다.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식기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쇠로 열어서 식사를 했습니다.  

 

서재필 귀국  

 

민비가 시해된지 두달 여 만인 1895 년 12 월 25 일 미국으로 망명 했던 서재필이 귀국했습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지 무려 11 년이 지난 후 였습니다.  

 

서재필은 이미 조선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필립 제이슨이라는 미국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백인 아내와 결혼한 미국 시민이었습 니다. 

 

서재필은 미국 시민이었고 미국의사였다.  

 

1895 년,  센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 그는 낮에는 막 노동, 밤에는 YMCA 에서 영어공부를 했으며 주말에는 교회에 나갔습니다. 교회 신자의 소개로 탄광업으로 돈을 번 독지가인 John Hellenbeck 을 알게 되었습니다.  

 

1886 년 9 월에 헬렌벡은 서재필을 펜실바니아주 윌키스 바레에 있는 Harry Hillman Academy 고등학교에 입학시켜 주었습니다. 필립 제이슨이라는 이름도 헬렌벡이 지어주었 습니다.  

 

22 살은 동료들 보다 훨씬 많은 나이였습니다. 그는 언어 장벽과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학생 대표로 졸업연설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후 대학 준비과정인 콜롬비안 대학 예과 코크리안 스크울 야간부에 입학했습니다. 예과를 마치자, 헬렌벡은 신학대학에 가서 목사가 되어 조선에 돌아가 선교활동을 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이것을 서면으로 약속하면 학비를 전액 부담하겠다는 조건부 였습니다.  

 

서재필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조선에서 대역죄를 지은 망명객 이어서 돌아가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고, 7 년 후에 자기 마음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법관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미 입학허가가 나온 라파얕 대학에 들어가 막노동을 하여 학비를 조달할려고 했으나, 학자금 부족으로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운 좋은 서재필  

 

워싱톤에 있는 육군 군의감 도서관에 일본과 중국에서 수집한 의학 서적 5000 여권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이것을 정리할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적임자는 일본어, 중국어와 영어에 능통해야 했습니다. 

 

모교인 힐맨 아카데미 교장댁을 방문하고 있던 모 교수가 서재필에게 이 정보를 알려주었고 그는 도서관장에게 소개장을 써주었습니다. 

 

이 소개장을 들고 도서관을 찿아가자, 성경구절을 일본어와 중국어로 번역해 보라고 했습니다. 한문과 일본어 그리고 영어에 능통했고 이미 크리스찬인 그에게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습니다.  

 

무려 월급 120 불이라는 좋은 직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서재필은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콜롬비안 대학 의학부 야간반에 입학했습니다. 지금의 조지 워싱톤 대학 전신으로 워싱톤 D.C. 에 있었 습니다. 1892 년 3 월, 조선인 최초로 미국의사가 되었으니, 나이 28 세였습 니다.  

 

Muriel Marry Amstrong 과 결혼  

 

그는 1890 년 6 월 미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1894 년 개업 의사로 일하던 때에 뮤리엘과 결혼했습니다. 미국 15 대 대통령 뷰캐넌의 누이의 딸이었습니다. 누이의 남편은 조지 암스트롱이었고 그는 미국 철도우편의 창시자라고 합니다.  

 

조선에서 천만리 타국에 온 서재필은 이제 미국시민, 의사이면서 미국 주류사회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그의 결혼 식에는 미국에서 이렇다 할 저명 인사 200 여명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가 15 세 때 조선에서 맞이한 명문 거족의 딸 광산 김씨를 생각했 을까?  젊은 혈기에 저지른 역적행위로 그 부인은 독약을 마시고 죽었고 2 살 난 아들이 굶어 죽었슴을 상기했을까?  여러 분들의 상상에 맏길 수 밖에 없습니다.  

 

서재필의 복권과 귀국 과정  

 

법무대신 서광범은 서재필을 복권시키고 학부대신 서리에 임명 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895 년 가을에 워싱톤을 방문한 박영효를 만나고 나서 귀국을 결심했습니다. 1895 년 11 월 10 일, 필라델피아를 출발하여 하와이, 일본을 경유, 인천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스승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선정부에서 주는 모든 관직을 거절하고 충추원 고문직을 수락했습니다. 당시 조선공사이면서 충추원 고문인 미국인 알랜과 똑같은 자격으로 고종을 보좌하겠다는 속셈이었습니다.  

 

귀국한 서재필의 태도  

 

조국은 그를 버렸습니다. 본인이 반역 죄인이라하여 아무 죄없는 가족과 친지를 죽이거나, 투옥시켰습니다.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으로 망명한 그를 죽일려고 고종은 끈질기게 자객을 보냈습니다. 조선인이라는 딱지는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 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개혁이 절실한데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갑신정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조국에 대한 증오와 원한이 쌓여있었습니다.  

 

그는 친구나 조선 사림들의 기대와는 크게 다른 태도를 보였습니다. 조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도 대부분 영어로 했습니다. 연설은  반드시 영어로 했습니다. 물론 통역을 항상 대동했습니다. 

 

전처와 생모의 산소에 가지 않았습니다. 갑신정변으로 인해서 평민이 되어 버린 양 아버지가 찾아왔으나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또한 같은 이유로 거지가 된 장인이 찾아왔으나 모른척 했습니다. 

 

고종을 만나러 갈 때 양복을 입고 읍소하지않고 악수로 인사했습 니다. 왕을 알현할 때는 안경을 착용할 수 없는데도 안경을 벗지 않고 고종을 만났습니다. 한국 이름을 사용하지않고 필립 제이슨 이라는 영어 이름을 썼습니다. 

 

서재필이 샌프란시코에서 이민생활을 시작할 무렵 돈을 보내 주었던 윤치호는 일기를 매일 썼습니다. 1898 년 1 월 15 일 “서재필의 미국인 친구는 서재필이 가까이 오는 거지를 발길로 차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고 그는 일기에 적고 있습니다. 

 

어느 날 윤치호가 왜 영어만 쓰냐고 물으니 한국말을 다 잊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서재필의 태도는 동료들의 반감을 샀 습니다. 

 

독립신문 창간  

 

정부 관료로 있는 윤치호와 유길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국고 보조를 받아 순 한글 신문인 독립 신문이 발간되어습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을 민중이 우매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국민계몽에 총력을 기울렸습니다.  

 

1896 년 4 월 7 일, 순 한글과 영어로 된 독립신문이 발간되었습니다. 한글 학자 주시경 선생이 처음으로 한글 띄어쓰기를 시작했습니다. 한글 3 면, 영어 1 면 이었 습니다. 

 

교육 확대, 산업발전 강조, 의무교육, 과학기술 도입, 식생활과 위생 개선 등을 주장했습니다. 중립외교를 주창했습니다. 유길준의 의견이 반영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민주주의 제도 도입을 위해서는 민중이 깨어나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국내외의 사정, 조정에서 결정한 사항을 보도했으며, 뇌물 수수, 관리들의 부정을 비판했습니다.  

 

신문이 순 한글로 발간되었다는 것은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서재필이 얼마나 조선의 근본적인 약점을 파악하고 있었 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서울 세종로 한복판에 황금 빛의 세종대왕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가 만들었다고 하는 한글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에서 제일 과학적 이고 배우기 쉬운 글자입니다. 이 한글이 무려 500 년 가까이 일반  백성들에게 커다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역사 교과서, 정부 심지어 한글 박물관에서도  지적해 주지않고 “위대한 글자”라는 것만 강조합니다. 한글이 공식문자가 된 것은 대한제국 선포된 후였습니다. 그전에는 모든 문서, 책등은 거의 전부가 한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지식은 양반 집권층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자연히 백성들이 우매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독립신문은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한장 사서 서로 나누어 보았습 니다. 아니 글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들에게 읽어주었을 것 입니다. 해방 후인 1945 년에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전 인구의 겨우 27% 였다고 하니 당시에는 오죽 했겠습니까? 

 

독립문 건립    지금 독립문이 세워진 자리 근처에 영은문이 있었고 이문을 통과하면 모화관이 있었습니다. 청나라 사신이 영은문을 통과하면  모화관에서 조선 대신들이 그들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청이 조선보다 위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설이었습니다.  개화파 인사들은 조선이 일본이나 서양제국에 뒤떨어지게 된 원인이 오랫동안 중국에 예속되었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루 빨리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해야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 했습니다.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기 위해서 영은문 대신 독립문 설립을 추친했습니다.  

 

독립협회 결성  

 

독립문 건립을 추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단체가 독립협회였습니다. 1896 년 7 월 2 일에 이완용, 남궁억, 박영효, 김가진, 안경수등과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결성했습니다.  

 

1897 년 11 월 20 일, 개선문 축소판인 독립문이 영은문 앞에 세워 졌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1200 년 동안 속국이자  종으로 살아 왔다.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자주국가임을 천명한다.” 라고. 

 

서재필이 주도했던 독립신문, 독립문, 독립협회의 독립의 의미는 청나라로 부터의 독립을 의미했습니다. 나라가 일본에게 먹히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반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을 일본으로 부터의 독립으로 인식되어 왔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다음에 계속

서재필의 청년 계몽

만민 공동회  

 

 

No. Subject Date Author Last Update Views
Notice How to write your comments onto a webpage [2] 2016.07.06 운영자 2016.11.20 18091
Notice How to Upload Pictures in webpages 2016.07.06 운영자 2018.10.19 32222
Notice How to use Rich Text Editor [3] 2016.06.28 운영자 2018.10.19 5808
Notice How to Write a Webpage 2016.06.28 운영자 2020.12.23 43737
651 육군 방첩대. 미군 CIC, 그리고 김창룡 2024.04.17 온기철*71 2024.04.17 10
650 김구의 일생과 암살의 원인 2024.04.14 온기철*71 2024.04.14 14
649 1945년 8월 15일 오후 강릉 홍제정 안마을에서 [2] 2024.03.19 정관호*63 2024.03.24 70
648 이승만은 왜 김구를 제거 했을까? [1] 2024.03.17 온기철*71 2024.03.18 46
647 1945년 8월15일에는 서울에 아무일도 없었다. [1] 2024.03.13 온기철*71 2024.03.14 50
646 한국진공작전; Eagle Project and Napko Project [2] 2024.02.22 온기철*71 2024.02.28 90
645 일제의 김구 암살 공작과 밀정 [2] 2024.02.19 온기철*71 2024.02.22 78
644 장개석은 한국에 친중정부가 수립 되게 하려고 임정을 도왔다. [1] 2024.02.17 온기철*71 2024.02.24 88
643 1945년8월15일은 과연 해방이었을까? [2] 2024.02.06 온기철*71 2024.02.07 68
642 Pearl Buck 과 유일한 [2] 2024.02.02 온기철*71 2024.02.05 86
641 1947 년 Wedemeyer 사절단 방한과 미국의 대한정책 [1] 2024.01.28 온기철*71 2024.02.02 56
640 東北工程: 동북공정 [7] 2024.01.23 정관호*63 2024.02.06 275
639 해방정국 정치세력 [1] 2024.01.10 온기철*71 2024.01.12 68
638 1945-1948년 남한을 통치 했던 미국인들(미군정 요인들) [1] 2023.12.30 온기철*71 2024.01.09 72
637 당신은 여운형을 아십니까? [3] 2023.12.13 온기철*71 2023.12.14 86
636 History of L.A. Koreatown 2023.12.12 온기철*71 2023.12.12 78
635 唐詩長篇卷之上: 당시장편 권지상 [2] file 2023.12.11 정관호*63 2023.12.27 57
634 The American Occupation of Korea [2] 2023.12.02 온기철*71 2023.12.03 85
633 미국은 천조국일까? [1] 2023.11.21 온기철*71 2023.11.21 76
632 女真: 여진 [1] 2023.11.16 정관호*63 2023.11.16 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