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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민비 그리고 서재필 #5/5

 

서재필의 청년 계몽  

 

서재필은 매주 배재학당에서 젊은이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인권개념, 사회계약론을 가르쳤습니다.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김규식등이 서재필의 강의를 경청했습니다. 이승만은 서재필에게 크게 감화를 받았고 김규식 등 과 함께 협성회라는 청년 단체를 조직했습니다. 서재필은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토론대회를 여는 등 청년들에게 토론 방식을 가르쳤습니다. 

 

만민 공동회  

 

독립문 건립을 위해서 관료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협회를 시민단체로 전환하고 대중 토론회를 주관했는데 이를 만민 공동회라고 했습니다. 토론회는 전국을 순환하면서 이루어졌는데, 1897 년 11 월 1 일에 열렸던 제 8 회 만민 공동회는 노비 해방운동이 주제였습니다. 많은 청중이 모인 자리에서 참가자 중에 대표가 찬,반 성토를 한 후 윤치호가 노비제도의 폐해와 비인간성을 성토하고, 서재필이 미국 흑인 노예제도의 참상을 살명한 후에 투표에 붙여서 다수 쪽으로 결론을 내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입헌 군주제 주장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통해서 입헌 군주제를 주장했습니다. 왕을 상징적인 존재로 하여 그 권한을  내각이 갖게하고 충추원을 의회로 바꾸자고 고종에게 건의했습니다. 일본과 보수세력 그리고 고종이 반대하여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아관 파천; 친러파의 쿠테타  

 

권력은 친일파 개화당에게 있었습니다. 일본은 개화당, 대원군과 내통하여 일국의 왕비를 시해한 후에 대원군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씨워서 나쁜 국제 여론과 조선 국내 여론을 무마하려 했으나, 상황을 직접 목격한 외국인들의 증언으로 여론은 일본측에게 불리하게 돌아 갔습니다. 이러는 중에 대원군은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했습니다. 일본에 대한 여론이 좋지않음은 개화당에게도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개화당이 추진한 단발령은 친일 개화당에게는 치명 타였습니다. 상투를 자르는 것은 부모가 준 신체를 훼손하는  불효 여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할 정도로 백성들의 반발이 거셌습니다.  

 

친러, 친미 정동파들은 이러한 반일, 반개화의 국민 감정과  고종의 공포에 떠는 상황을 이용하여 고종을 외국 공관에 모시고 자기들의 정권 탈환을 계획 했습니다. 미국공관으로 고종을 모실려고 시도했 으나 실패했습니다(춘생문 사건). 

 

 이범진과 심상훈은 러시아 공관과 긴밀하게 연락하여 고종을 러시아 공관에 모시는데 성공했습니다. 1896 년 2 월 11 일에 일어난 사건 이고 아관 파천이라고 합니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즉시 을미사적 전원을 살해할 것을 명령합니다. 을미사적이라 함은 민비 시해사건에 관련된 대신들을 지칭하는 것이었고 친러파의 정적 개화파들이었습니다.  

 

총리 대신 김홍집, 탁지부 대신 어윤중, 통상부 대신 정병하는 피살 되고 내무대신 유길준, 법무 대신 장박, 군부 대신 조희연은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어려운 때마다 정파에 크게 관계없이 내각 수반을 맏았던 김홍집은 길거리에서 관군의 칼에 맞아 죽은 후,  군중이 그의 시체를 한동안 끌고다니는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1890 년대 중반의 조선 사회상  

 

매관 매직이 국가의 시책이라고 할 정도로 성했습니다. 갑오개혁 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더 심해졌습니다. 궁핍한 왕실예산을 충당 하기 위해서 왕도 벼슬을 팔아먹었습니다. 

 

돈을 들여 관직을 받으면 부임지 백성들을 착취하여 축재를 했습니다.  양반과 상민으로 갈라놓은 소위 반상제도는 조선 건국이래 국가 구조의 근간이었습니다. 1890 년 대에 양반 인구가 전체 인구 대비 얼마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시대에 양반 인구는 약 2%로 알려져있습니다. 아마 이 때는 더 많았으리라고 추측됩니다. 아무튼 소수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양반들이 소유하고 있던 노비 인구가 30-40% 였다는 것입니다. 노비제도는 19 세기 이후로 점차적으로 이완되어 그 수가 19 세기 말에는 많이 줄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들은  양반들의 재산 목록이었고 사고 팔고 했습니다. 

나머지가 보통사람 즉 상인이었습니다. 약 60%에 달하는 일반백성 들은 극소수 양반의 착취 대상이었 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은 만주와 연해주 지역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했습니다. 1882 년에 연해주 한인 인구가 만여명이었는데 러시아 사람은 겨우 8385 명이었다고 합니다. 1897 년에는 15 년 전의 두배가 넘는 2 만 5 천명이 되었습니다.  

 

영국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조선과 연해주를 비슷한 시기에 여행하면서 조선인들의 생활상을 관찰했습니다. 그의 저서 “코리아와 그 이웃 나라”에서 조선의 상황을 “특권계급의 착취, 가혹한 세금, 정의 부재, 쇠약해진 군주, 미신, 자원없고 음울한 더러운 나라”라고 서술했습니다. 발전할 수 없는 형편없는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연해주에서 조선인들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열심히 사는  것을 보고 완전히 생각이 바뀜니다. “조선 사림들은 자기의 노동의 대가로 얻은 이익을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제도와 과도한 세금을 징수 하지 않는 지도자가 다스린다면 언젠가는 번영하는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예견했습니다.  

 

고종의 경운궁 환궁 (1897 년 3 월 4 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동안 러시아 공사 웨베르는 조선 최고 의 권력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대신들은 모든 정사를 그와 상의해서 결정했습니다. 웨베르는 많은 이권을 따내는 대신 고종에게 친절하게 잘 대해 주었습니다. 그것도 고작 100 일, 갑자기 그들의 태도가 시덥지 않게 변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는 조선을 서로  나누어 먹을려고 협상을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은 러시아에게 38 선에서 분활하여 남쪽은 일본이 북쪽은 러시아 가 관장할 것을 제의했으나 러시아가 거절했습니다. 운명의 38 선 아디어는 일본이 시작했던 모양입니다.  

 

백성들의 여론과 독립협회의 요구, 러시아의 푸대접, 왕 호위병 훈련 완료 등 여건이 마련되자, 고종은 외국 공관이 주위에 많이 있는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왔습니다.  

대한제국 탄생  

 

1897 년 10 월 12 일 고종은 원구단에서 하늘에 고하고 황제에 등극 하면서 대한제국을 선포했습니다. 대한이란 말은 마한, 진한, 변한 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다음 달, 22 일에 민비 시해 2 년 2 개월 만에 민비를 명성황후로 추존 하고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요지음 돈으로 무려 110 억이 들었다고 합니다.  

 

대원군 사망  

 

1898 년 2 월 22 일, 주상이 보고싶다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대원군이 사망했습니다. 며느리 장례식이 치루어진지 일 년여 만입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대원군의 약력은 조선의 운명사이다. 조선은 완전한 유교주의 국가로서 중국의 오랜 역사의 반복과 다름 없다. 지금의 세계대세로 보면 조선은 유교국의 체제를 유지하는데도 모자란다. 대원군은 이러한 유교국가의 명군에 불과하다.” 

 

고종은 자기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고 먼 발치에서 쳐다 보았습니다. 자기 권력을 위해서 아들을 철저히 이용했고 아들의 아내까지 죽인 아버지를 보고 싶었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서재필 다시 미국으로  

 

1898 년 5 월, 서재필은 귀국한지 2 년여 만에 미국으로 다시 돌아 가야만 했습니다. 

 

그의 국수주의적인 생각과 왕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입헌 군주제 주장은 러시아는 물론 모든 외국 세력들과 고종에게 도전하는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미국 공사 알랜과도 서재필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통해서 외국 공사들의 부당한 조선 이권 취득 행위를 비판하는 것을 이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의 고종 앞에서의 예의없는 행위나 조선인을 무시하는 행동등은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샀습니다.  

 

양반 고위 관리들도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독립신문의 논조에 반감을 가졌습니다. 

 

미국공사 알랜은 공사이면서 고종의 고문이었습니다. 그는 고종과의 친분을 이용하여 자신이 직접 이권에 개입했던 사업이 많았습니다. 서재필은 알랜의 부당한 행위를 비판했습니다. 그는 서재필에게 귀국 하라고 여러번 종용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미국에 있는 서재필의 장모에게 자신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서재필 부인 뮤리엘에게 보낼 것을 요청했습니다. 어머니의 전보를 받은 뮤리엘의 설득으로 서재필은 조선을 떠났습니다.  

 

미국 귀환 후 서재필  

 

그는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돌아오는 병원선 군의관으로 근무했습 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 의대 해부학 강사와 병리학 연구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의사일을 그만 두고 문방구 사업을 하여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러던 중 1919 년 3 월 1 일, 조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무척 기뻐 했습니다. 그렇게 세상 일을 모르던 조선 사랍들이 이제 깨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독립운동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자금을 써서 1924 년에 파산 선고를 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생계가 막연했는데, 마침 유한주식회사를 만든 유일한씨가 1925 년에 서재필에게 사징직을 맡겼습니다. 유한양행의 유명한 버드나무 로고는 서재필의 딸 뮤리엘이 도안했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미 병리학 전문의  

 

1926 년, 62 세의 고령으로 펜실바니아 의대에 입학하여 병리학을 

전공했습니다. 1929 년에 조선인 서재필은 최초로 병리 전문의가 되었습니다. 

 

1941 년에서 1945 년, 약 4 년 동안 징병검사 의무관으로 봉사하여 미 의회로 부터 공로훈장을 받았습니다. 20 세의 젊은 나이에 쿠테타 군을 지휘하여 고종에 반역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기적같은 일이였습니다.  

 

해방과 죽음  

 

1945 년, 해방 후 미군정은 이승만의 독주를 견제할 만한 인물을 물색하던 중 김규식의 추천으로 서재필을 초청했습니다. 1947 년에,  서재필은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인사들이 정치 참여를 종용했으나 모두 거절하고 미국인 자격으로 미군정 고문관으로 일 하다가 1948 년 9 월에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조국을 떠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 역사상 처음 얻은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 당하지 말라. 정부에 맹종하지 말고, 인민이 정부의 주인이며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 만이 평생 소원이다.” 

 

풍운아 서재필은 후두암과 방광암의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1951 년 1 월 5 일 향년 88 세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유골은 화장 되어 필라델피아 안장되어 있다가 1994 년 국립묘지에 모셔져 있습 니다.  

 

결론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있는 역사는 지나치게 일본의 침략 행위를 악으로 강조하고, 조선 정부의 부패와 무능으로 인한 취약한 국력 으로 제국주의 시대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점을 감추어서 자존심 살리기에 치중했다고 생각합니다.  

 

민비는 결코 명성황후 오페라나 연속극에 나오는 지혜로운 국모가 아니었고 권력 유지를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나라 살림 보다는 부정 축재에 더 관심이 많았던, 동 시대의 청 나라 서 태후에 버금가는 나쁜 왕비였습니다. 후자는 청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 이었고 전자는 작은 나라 조선을 일본에게 먹히게 한 많은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민비의 정적 대원군은 아주 간교하고 무자비한 권력의 화신이었습 니다. 그는 대중의 인기를 거의 죽을 때 까지 유지할 정도로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끈 질긴 권력에 대한 집착은 결국 민비 시해에 깊숙히 관련하게 했습니다. 

 

철없는 젊은 개화파들은 일본에게 철저히 이용당했습니다. 그들은 청이 조선 망국의 원인이라고 굳게 믿었고 일본 세력을 빌려서 청이 조선에서 손을 떼게 했으나, 청 대신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하는 데는 전혀 대책이 없었습니다. 일본, 개화파, 대원군은 모두 민비가 걸림돌이었습니다. 뇌화부동할 소지가 농후했습니다. 

 

갑신정변 후 서재필은 권력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가서 의사가 되어 주어진 인생을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조선사람들이 무식해서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고 무능한 고종을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조국에 대한 애증은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조선 사람들이 좀 더 계몽된 민족이기를 간절히 바랐고 조선이 독립국가이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국이 부를 때 마다 돌아와서 성의껏 도왔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절대로 그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본 받아야할 만한 인생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교육은 국민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 과거의 잘못을 반면교사로 삼아 현 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직시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풀린 자존심은 현 세대를 교만하고 나태하게 만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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