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3895574
(중앙일보 2015: 박상수 칼럼; 양반과 상놈)
https://mnews.joins.com/article/23375698?cloc=joongang%7Chome%7Cnewslist1
(중앙일보 2019: 조선시대 양반들은 1일5끼 대식가)
1910년 호구조사에의하면 양반인구는 전인구의 1.9%이고 도별 양반인구 비율은 다음과 같다.
충남 10.3%, 충북 4.5, 경북 3.8, 한성 2.1, 강원 1.1, 전북 1.0, 경기도 0.8, 함북 0.8, 전남 0.5
경남 0.4, 함남 0.4, 황해도 0.3, 평북 0.2, 평남 0.1
- 나무위키 에서
조선말기에는 갖은 수단을 써서 양반지위를 얻어 군역을 면제 받고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얻는
사람들이 많아 져서 어떤 통계에는 양반이 인구의 70% 로 집계되기도 하나 이것은 진짜 양반인
사대부가 아니다. 사대부들은 농장규모의 토지를 소유하고 평균 2-300명의 노비를 부려 농사를
지었다. 물론 가사일도 노비가 담당 했다. 성리학을 공부 하면서 기냐 이나를 따지며 풍류를 즐겼다.
백성은 전적으로 위정자인 자기들을 위해서 존재 했다. 중국만 잘 섬기면 국방은 별 문제가
없었다. 그야말로 적폐 중에 적폐였다.
세상이 꺼꾸로 된 모양이다. 요즈음은 자동차 노조가 적폐이다. 그들의 요구가 어디 까지 갈지 끝이
없다.
2019.02.16 07:08
2019.02.16 11:21
조선시대 한양의 도시 공간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현 세종로의 관아 공간과 종로의 상업 공간, 그리고 주거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중 주거 공간의 분포를 보면 종로 북쪽은 양반 관리의 주거지인 북촌(계동·가회동·원서동·안국동 등)이 있었으며, 중간의 청계천에는 중인 계층과 상인들이 누하동·적선동·사직동 방면에 살았다. 남쪽에는 하급관리와 세력이 없는 선비들이 남촌(회현동·필동 등)에 살았다. ‘남산골 딸깍발이’ 혹은 ‘남산골 샌님’이라는 말도 남산골에 살았던 선비들이 대체로 벼슬 자리가 없고 가난해 나막신을 신고 다녔지만 정신적으로는 고고한 기상을 지녔다고 하여 붙여진 별칭이다.
이처럼 남산의 북쪽 기슭은 맑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이루어 많은 사대부들이 저택과 정자를 마련했다. 이행, 이안눌, 조현명, 이유원, 정원용, 조인영, 정광필, 김석주, 박영원, 조용화, 윤정진 등 수많은 관료와 학자, 문인들이 남산에 살거나 남산을 찾아 풍치를 즐기고 남산을 노래한 시문을 남겼다. 조선조 유학자들에게 산수는 나를 비추어보고 수기(修己)하는 ‘경관 텍스트’로 인식되었으니, 이러한 산수에 대한 태도는 자연지리적 환경을 자아의 정립과 인격의 수양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었다.
(한겨레 21: 돌아온 산, 남산; 늘상마주하던 한양의 랜드마크)
좋은 질문입니다. 평소에 정확한 지식이 없어서 인터넽에 있는 정보를 참고로 올립니다. 세도 양반들이
주로 북촌에 거주 했으나, 남산에 거주하던 사대부도 많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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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재미있는 글이군요. 한가지 문의가 있어요. 에헴!
그러면 가난에 찌들다못해 한겨울을 나면 적지 않게 동사, 아사까지 했던
남산골 샌님은 어떤 양반쪽에 속하지요?
청빈하고 고귀한 양반 아닙니까?
Sincerely,
KH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