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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역사에 대한 사고

 

  못 살던 시대에 배운 역사는 외세의 압력과 어설 픈 현실을 감추려는

  자존 심 살리기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쓸 때 없는 자존심을

  걷어 치우고 역사를 사실 대로 받아 들여 미래를 설계 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 한다.

 

  "사대교린"은 조선 외교 정책의 근본 이었다. 큰 나라를 섬기고 조선 보다

  못 하다고 생각 했던 여진과 일본과는 강경 책과 유화 책을 적절히 사용

  하여 평화를 유지 하자는 의도 였다.

 

   온 세상의 중심이 명 나라 였다고 믿었 던 당시의 조선 사람들은 명나라

   와 주종 관계만 잘 유지 하면 통상, 외교, 국방이 다 해결 될 것이라고

   믿었다.

 

   약 200년 동안 조선은 별 다른 변고 없이 평화 롭게 지냈다. 제대로 된

   군대도 없이 말이다. 교린은 주위 나라가 조선 보다 약 했을 때는 고분고분

   하게 조선의 말을 들 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조선 보다 강 해 졌을 때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 졌다.  천하를 통일 한 풍신 수길은 중국을 칠

   터이니 길을 내 놓으라고 하며 조선을 침략 했다.

 

   군대 하나 변변히 없는 조선은 큰 소리 치는 신립 장군을 내 세워 일본군을

   막아 볼려고 했다. 신립은 배수진을 처서 이들과 전투를 벌린다. 훈련 없이

   농사만 짓던 조선 군은 일본군 만 보면 도망 쳤기 때문 이었 으리라.

 

   선조는 경복궁을 버리고 줄 행랑을 친다. 뒤에 남아 있는 백성들은 완전히

   무시 한 체 신하와 궁녀 만 대동 하고 말이다. 그리고 명에 원군을 청 했다.

 

   평양에서 선조는 명의 원군을 맞이 하며 감지덕지 한다. 그리고 작전권을

   완전히 명 군에게 달라는 명 장군의 요구에 의이 없이 수락 한다. 마치 6.25

   때 이승만이 경무대를 뒤로 하고 한강 다리 건너 면서 맥 아더에게 작전권을

   주고 건어 온 다음 다리를 파괴 하는 꼴 아지 하고 대동 소이 하다.

 

   4군과 6진을 설치 하여 여진족을 다스 렸던 조선은  한 동안 별일 없이 잘 지냈다.

   그 들 또 한 약 한 상태로 그대로 남 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임진 왜란으로 소진 한

   명 나라가 감당 하기 어려운 금나라가 탄생 한 것이다.  천하의 대국 명나라를

   철석 같이 믿고 있던 조선은 누루하찌의 위협에 어쩔 줄 을 모른다. 임진왜란

   때 그렇게 당하고도 외침에 대비 하지 않고 멍청 하게 있다가 금의 침략을 받고

   나라가 쑥 받이 된 다음에야 사대를 하는 수 없이 청 에게 하기 시작 했다.

   대상만 다르 지 중국과의 주종 관계는 계속 되었다.

 

   조선 인구의 약 2%는 진짜 양반 즉 사대부 였다.이들은 병역 의부 가 없다. 세금도

   내지 않 았다. 그리고 수많은 노비를 거느 렸다. 그들이 소유 한 농토는 이 노비들이

   농사를 지었다. 노비는 사고 팔 수 있었으며 그들의 커다란 재산 목록 이었다.

  

   이들에 대한 교육은 결론 적으로 과거 시험 공부 였다. 그들의 고용 기회는 오직

   관료가 되는 것이 었다. 다른 교육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민(양반이

   아닌 일반 백성)들에게는 변변한 교육 제도가 없었다.

 

    사고 팔 수있었던 조선 시대의 노비는 전 인구의 약 30-40% 였다. 나머지가 상민

   이었고 농민의 대부분은 소작인이 었다. 토지의 대부분은 2%인 양반이 가지고

   있었다. 2%의 지배 계급이 98%의 인구를 착취 한 셈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조선의 구조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에 만들 었다고 재야의

   학자들이 반성 하면서 내 세운 것이 실학이다. 이 실학자들의 생각은 전 세계를

   앞서 가는 획기 적인 사상 이었다. 그러나 우민 정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양반중심의 한문 교육은 이들의 생각이 대중을 파고 들 아무런 장치가 없었다.

 

    우리는 세종대왕의 동상을 광화문 앞 세종로에 세워 놓고 민족의 영웅으로 대접

    하고 있다. 한글이 세계에서 제일 가는 과학 적인 글자라고 의시 댄다.

    아마도 한글 처럼 배우기 쉬운 글자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해방 직후

    글자를 아는 한국인은 전 인구의 27%에 불과 했을 까?

 

     그 답은 바로 사대에 있다. 한글 만들 당시 한글을 옹호 하는 주장 보다는 버리

     자는 주장이 압도 적이 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이 편리하고 기적 같은

     글자는 약400여년 동안 묻혀 있다가 대한제국 광무개혁 때에 야 공식 글자로

     인정 받았다. 중국을 하늘 처럼 받들 던 우리 선조들은 한문을 고집 했다.

     그래야 그들 만이 유식 한 사람들이고 피 지배계급을 마음 대로 착취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금속활자를 구텐베르그 보다 먼저 만들었다고 뻐긴다. 한문으로

     금속 활자를 사용 하면 나무에 글자를 파서 찍는 것 보다 훨씬 불편 하다.

     반면에 한글은 아주 편리하게 프린팅를 할 수 있다. 수만자 중에서 골라야 하는

     한문과 28개를 짜 맞추면 되는 한글이 비교가 되겠는 가? 한글 대신 한문을 선택한

     양반들은  금속활자를 무용 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도꾸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은 약 200년 동안 전쟁을 하지 않고 막부시대를

     이끌어 천하태평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인물이다. 덕분에 조선은 영,정조 시대라는

     중흥기를 보낸다. 그러나 실학을 무시하고 성리학을 고집 하는 수구 보수 세력은

     외척세력이 왕권을 좌지우지 하는 세도 정치로 나라를 토탄 에 빠트린다. 

 

     1860년 대에 대원군이 집권 하여 경국대전을 들여 다 보며 영정조 시대로 복귀 하는

     수구 적인 개혁을 하는 동안 일본은 탈 아시아를 목표로 하는 명치 유신을 단행 했다.

     무시하던 교린의 대상 일본이 다시 강 해지기 시작 한 것이다.

 

     조선이 아편전쟁으로 세상의 중심이 중국에서 유롭으로 옮겨 가는 것을 모르고 수구적인

     개혁에 매달리고 있는 동안 일본은 시대 조류에 맏는 개혁으로 강한 나라가 돼 버린

     것이다. 임진왜란의 역사적인 교훈은 다분히 일본의 침략을 예고 하고 있었다. 교린국이

     강해 졌지 않은 가?

 

     힘이 없는 조선은 청, 일본, 러시아 사이에서, 이쪽 저쪽으로 의지 세력을 옮겨 가며 다른

    세력을 막아 볼려고 안간 힘을 쓰다가 결국 망 하게 된다. 그렇게 높이 받들던 중국과 대동

    소이 하게 말이다. 속국임을 보여 주듯이 말이다.

 

     외세에 의지 해서 평화를 유지 할려는 생각은 마치 병을 치료 하는 데 근본을 다스리지 않고

     증상을 없앨려고 하는 것과 흡사 하다. 임시 방편일 뿐만 아니라그 그 후에 치루어야 할 댓가

     는 엄청 난 것이 된다. 마치 증상 치료가 죽음을 재촉 하듯이....

 

     항구 적인 평화는 "부국 강병" 밖에 없다. 이것은 18-19세기 실학자 들이 주장 하던 옛날

     이야기 이다. 건실한 경제와 강한 군대가 있어야 제대로 된  외교도 할 수 있고, 외국의

     간섭 없이 국익을 관철 할 수 있다.

 

By 온기철*71May 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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