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24 13:19
http://news.joins.com/article/20464939
박보균 칼럼: 광개토왕비 우울한 진실
"조선의 성리학은 관념 위주다. 사실에 소홀하다. 비석이 무엇인지
알아볼 생각을 안 했다." - 윤명철 동국대 교수
"고비를 찿은 행위자가 (일본)육군 중위라는 점은 놀랍다. 이억만리
오지에서 그것을 찿았고 그걸 판독한 참모본부 무리들이 자기민족
에게 유리하도록 비문을 변조 했다면 지탄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들의 우국적 열정과 역사의 경도를 생각해 보아야한다."- 신봉룡
전 건국대 교수
1880년, 일본이 명치유신으로 탈 아시아를 외치며 유롭의 열강 같이
되려는 개혁이 한창일 때, 일본군 스파이 사코 가게노부 중위는 만주
를 누비며 그곳 을 탐사해서 지도를 만들고 있었다. 그는 당시에 항간
에 돌아 다니는 광개토왕비의 탁본을 접하고 그 고비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 조선 정부는 1888 년 일본정부의 발표 후에야 고비의 존재를 알게 되었
다고 박보균은 그의 칼럽에서 지적하고 있다.
일본이 명치유신이 한창일때 중국은 밖으로는 1,2차 아편전쟁
안으로 는 태평천국의 난 등 내란으로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를 회복해 볼려고 이홍장의 주도로 양무운동을, 사코의 스파이
활동이 한창일 때, 시도하고 있었다. 이 운동은 원래의 유교적인 사상,
청치제도는 그대로 유지하고 과학과 무기 기술만 열강의 것을 받아들여
습득하면 그들을 물리칠수 있다고 하는 이율 배반적인 개혁운동이었다.
계몽기를 거친 유롭은 산업화를 이루고 모든 면에서 청나라를 능가 하고
있었다. 일본의 명치유신은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 과학 기술, 무기
등을 유롭으로 부터 배워서 무든 분야에서 유롭과 똑 같은 나라로 변하고
있었다. 두나라는 청일전쟁에서 그 힘을 겨루는 데, 전쟁터는 조선과 서해
그리고 만주였다. 전쟁의 원인 제공 또한 조선의 동학란 이었다. 이 전쟁은
명치유신의 성공과 양무운동의 실패를 증명하듯 일본의 승리로 끝난다.
이와중에 조선은 무슨 일이 일어 나고 있었을 까? 1875년에 민비는 일본을
등에 업고 대원군을 권좌에서 물러 나게하고 전권을 장악 한다. 그 이듬해에
운요호 사건이 일어나고 곧이어 강화도 조약이 맺어 지면서 쇄국정책이
끝나고 문호를 개방하게 된다. 이 때부터 일본의 수탈은 시작 된다. 조선의
백성들은 자기나라의 탐관오리와 일본, 양쪽에서 수탈을 당하게 되어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짖고 베를 짜도 먹고 살것이 남지를 않았다고 한다.
1882 년에 한미 수교가 이루 지고 그 이듬해에 민영익이 주미 대사로 가게 되고
Lucus Foote가 주 조선 대사로 부임 했다.
이러한 일련의 문호 개방, 특히 일본과의 통상은 일본의 이익에 치중한
것이어서 백성들의 생활이 그야말로 기아 선상에 허덕이게 되어 동학란이
일어나게 되고 이는 청군과 일본군이 동시에 동학군 진압을 빌미로 조선에
들어와서 서로 충돌 함으로 써 청일전쟁(1894-1895)이 일어 나게 된다.
이 스파이의 지리탐사가 유용하게 쓰였을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우리 민족의 자존심인 광개토 대왕비가 일본 장교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그 비문을 그들이 왜곡했다는 시실은 우리를 경악 하게 한다. 더구나 고려와
조선의 우리 조상들에게서 이 고비에 대한 기록을 찿아 볼수 없다니, 참 한심
스러운 이야기 이다.
2016.08.24 10:41
2016.08.24 23:27
한 번 잃은 건 영원히 잃은 것. 그것을 성취하셨던 광개토대왕께 우리 후손은 사죄해야 하고도 남는다.
그 비문을 왜구의 종자가 변조하였어도 도리는 없다. 우리 땅 조차 모두 빼앗겼던 시절이었기에.
내가 초라하다면 내 조상이 어떠했다고 자랑할 필요조차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항상 근면하고 노력할 것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돈보다고 후세 교육에 노력을 다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2016.08.25 22:48
"For generations to come", 1 월 미국 대통령의 연두교서에서 자주 회자되는 말입니다. 조선의 지배층은 자기네 자손들의
번성을 위한 정치를 하느 라고 시대 에 대한 사명감을 망각한 넘어지 나라를 망처 먹고 자손 만대에 누를 끼치고 있습니다.
1776년은 정조가 왕이 되고 미국은 독립선언 을 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에서는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출간 합니다.
세 나라가 모두 시대에 걸 맞는 트랙에 있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로 부터 25년 후엔 조선은 마치 마라 톤 경주에서 달리기를 포기 하는 것 처럼 뒷 걸음질 치기 시작 했습니다.
"Government for the people, by the people, of the people" 한 나라는 세계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세계 최강의 나라가
되어있고 왕과 몇 세도가를 위한 정치를 한 조선은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습니다.
시대에 대한 사명감은 각 세대마다 무슨 특별한일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극히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원칙 입니다.
"Do just", "Do not corrupt." "Do not serve yourself, but serve the people."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시대에 대한
위정자들의 사명감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하나하나가 자손만대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않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중국본토의 민족 (즉 漢族)은 외부와 전쟁을해서 이겨본 적이 없는걸로 알고있읍니다.
언제나 이긴 쪽은 변방의 야만족속이었지요. 물론 만리장성조차 나미아미타불로 끝나고....
아마 중국의 유일한 승리는 Tibet인들에게 대한 승리 하나뿐일것입니다.
만일 Tibet인들이 들고 일어나 싸웠다면 그것도 참패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There was no war.
왜놈들도 약은짓도 많이하고 쌈도 많이 걸었지만 모두 좀도둑질로 끝나고 말었지요.
그런데 우리 한국인 (韓人)들은,고구려들 뺀다면,한번도 제대로 싸운적도 없지요.
깃껏 중국을 한번 친다고 나갔다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시작도 못한채 끝나고...
맨날 앉아서 우리는 주위의 강국에게 당했다고 울고만 지내고 있지요.
그래서 중국놈들이 우리를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빈정대고 있고
우리는 그걸 무슨 큰 자랑거리로 생각하고있는 바보들입니다.
왜 우리는 몽고족, 만주족 처럼 하지 못했을가요?
그러니 이제 남은것은, 우리는 죽어라하고 고구려가 韓人의 조상이였다고 우겨야 되며,
신라, 백제, 고려, 이조는 우리민족과는 상관없는 나라들이라고 시침을 뗍시다. ㅎ, ㅎ, ㅎ.
Olympic 금메달 9개도 사실은 高句麗사람들이 딴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