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正喜선생의 호는 秋史, 阮堂을 많이 썼다고 하고 별호가 100여개 있다고 합니다.(위키백과)
秋史 金正喜의 제주 유배지에 가보았습니다.
유배지에서 거처하던 집
출생 | 1786년 6월 3일 조선 충청도 예산현 입암면 용궁리(현 대한민국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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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56년 10월 10일 조선 경기도 과천현 동면 주암동(현 대한민국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 과지초당 |
국적 | 조선 |
별칭 | 추사, 완당 |
학력 | 1819년 순조 19년 문과급제 |
직업 | 성리학자, 실학자, 고증학자, 서예가, 화가, 금석학자 |
부모 | 김노경 / 기계 유씨 |
김정희(金正喜, 정조 10년(1786년) 6월 3일(1786년 6월 28일) ~ 철종 7년(1856년) 10월 10일(1856년 11월 7일)는 조선 후기
의 대표적인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 실학자이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
(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등이다. 노론 북
학파 실학자이면서 화가, 서예가였다.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그
는 또한 난초를 잘 그렸다.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설서, 예문관검열을 지냈다. 그뒤 삼사의
언관을 거쳐 효명세자의 사부로써 보도하였으며, 1823년 규장각대교가 되었다가 충청우도암행어사로 나갔다. 그뒤 의정부의 검상
(檢詳), 1836년(헌종 2년) 성균관대사성과 병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났으나 헌종이 즉위 초, 김정
희 자신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 1840년(헌종 6)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석방되었다. 1851년(철종 2)에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에 대한 영의정 권돈인의 예론(禮論)으로 예송 논쟁이 벌어지자 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1853년
풀려났다.
추사와 완당이라는 호를 많이 사용했으나 그밖에 100여개 넘는 별호를 사용했다. 당색으로는 노론으로 외척이었지만 벽파나 탕평당
에 들지 않고 북학파가 되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친족이었고, 양어머니 남양홍씨를 통해 남연군과 이종사촌간이 된다. 실학
자 박제가의 문인으로 연암 박지원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흥선대원군과 박규수, 효명세자는 그의 문인들이었다.
秋史 글씨
http://search.daum.net/search?w=img&q=%EA%B9%80%EC%A0%95%ED%9D%AC%20%EA%B8%80%EC%94%A8&DA=IIM
추사 김정희 유배지
https://www.google.co.kr/search?q=%EC%B6%94%EC%82%AC+%EA%B9%80%EC%A0%95%ED%9D%AC+%EC%9C%A0%EB%B0%B0%EC%A7%80&newwindow=1&hl=ko&rlz=1T4PLXB_koKR614KR615&tbm=isch&tbo=u&source=univ&sa=X&ei=91SsVN7XN5Tn8AWdnoCoCQ&ved=0CCkQsAQ&biw=1920&bih=878
충남 예산군에 있는 김정희 묘.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서화가인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의 묘로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88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예산여행/ 시,서,화에 능한 추사 김정희 묘와 기념관|작성자 고운님
2015.01.07 02:20
2015.01.07 03:45
관심을 가지고 보았지만 막연히 둘러보았습니다.
추사체란 머리에 남는 인상은 있지만 과연 어떤 것인지 개념이 잘 안 섭니다.
다만 서예의 대가로서 자유자재로 마음내키는대로 붓대를 놀릴 수 있는 것이 과연 명필이라고 생각됩니다.
경우와 사정에 따라 그에 맞는 글씨체가 다양하게 나오는가봅니다. 모르는 사람이 함부로 긴 얘기하기도 송구스럽습니다.
귀양살이를 걸핏하면 갔는데 이분도 유배생활을 70여년 생애중 13년을 했다고 하지요.
제주에서의 8년 3개월동안 그의 학문이 깊어졌다고 합니다. 가시울타리 밖을 못 나가게 한 숨막히는 귀양살이이었나봅니다.
흘러온 역사에서 서로 어긋나면 강자가 약자를 유배시켰던 것 같은데, 근대 우리 사회에서는 사법부에서의 판결에도 인권운운 하고 항거하지요.
현 정치인들 중에 옥살이한 것이 훈장인듯 자부심을 갖는 것과 옛 유배생활과는 그 내용에서 차이가 많을듯싶습니다.
황규정 선생님, 감사합니다.
서예를 하시는 선배님이시기에 추사의 유배지에 있는 고택을
방문하신 감회가 남달으셨으리라 믿습니다.
秋史體로 유명한 서예가 김정희는 물론 우리역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분들치고 귀양가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당시의 서로 헐뜯고 파벌을 만들어 빚어진 이런 사회현상을
돌아보면 'What a waste!'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