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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선친의 발자취 (Updated Final Version)

2015.01.16 05:32

정관호*63 Views:3828


선친의 옛 발자취를 찾어서



Exhibit 1: Williston Seminary 본관 정문 - 촬영시기  1913년.
장소  Williston Seminary, Easthampton, Massachusetts.
이 사진은 나의 선친께서 10여 년간의 미국 유학시기에 찍었던 학급사진이며 장소는 Williston Seminary 의
건물정면이었다. 선친은 뒷줄 우측 끝으로부터 세 번째 학생이다. 이 사진이 선친의 학창시절에 남긴
유일한 사진이며 또한 미국 유학의 증거물이다. 이 학교는 4년제 Boarding school이다.




Exhibit 2:  본인 정관호와 아들 Henry Chung의 사진 - 촬영시기 1985년 여름방학
장소 Easthampton Town Library의 정문. 주소: 9 Park St. Easthampton, MA 01027
이 사진과 Exhibit 1에 나오는 건물외곽은 완전히 동일하다. 옛 학교 건물은 없어지고 거기에
새 학교 건물로 대치되었다. 그리고 학교 이름은 이제 Williston Academy였다.
이 건물은 잘 보존되어 우리 부자가 길고 긴 72년 세월 후에 방문하였을 때에는 Town Library였다.




Exhibit 3: Williston Seminary 본관 정문촬영 백주년 가족기념일 - 촬영일 2013년 8월 31일
이 때가 선친의 학급사진 촬영이후 100년이 되었다. 좌측부터 손자, 본인, 둘째아들과 맏아들이다.
이제 학교 이름은 Williston Northamton School이고, 도서관은 Emily Williston Memorial Library이다.




Exhibit 4: Full View of Emily Williston Memorial Library의 입구 - 촬영일 2013년 8월 31일
사진 촬영이 끝난 후 나 혼자서 사람 없이 비어있는 건물입구를 찍었다.




Exhibit 5: Our couple in front of this entrance - 촬영일 2014년 6월 19일
우리가 오래간만에 New England tour 한 후 귀가하는 길에 6월 18일에 Northampton에 위치한
Clarion Hotel에서 하룻밤 자고 19일 오전에 학교동창회사무실을 방문한 후, 도서관입구에서 사진을 찍었다.
내가 이곳 방문하기 네 번째이고, 집사람은 두 번째로 왔지만 도서관입구에서의 사진은 처음이다.




Exhibit 6: Admission Center - Williston Northampton School, 촬영일 2013년 8월 31일
주소: 19 Payson Ave, Easthampton, MA 01027
100주년 기념일 August 31, 2013에 Campus Tour 할 때 찍은 사진 몇 장 아래에 싣는다.



Exhibit 7: Entrance to an indoor Gym. 촬영일 2013년 8월 31일



Exhibit 8: With Mr. Jeffrey Pilgrim in front of an old building. 촬영일 2013년 8월 31일



Exhibit 9: Another old building, Memorial Hall. 촬영일 2013년 8월 31일




Exhibit 10: The oldest School House - 촬영일 2013년 8월 31일



Exhibit 11: Grandfather's 60th birthday photo - 1935
My father was standing right behind grandfather, my mother behind grandmother.
조부님 회갑연 사진 1935년. 부친은 조부님 후면에, 모친은 조모님 후면에 서 계셨다.


. . .

선친의 사진이 거의 없다. 원래 사진 찍기를 좋아하지 않으셨지만, 그보다도 전쟁당시 1951년 1월 4일
서울 철수 때 남쪽으로 걸어서 떠났고, 1953년 여름에 휴전된 후에도 귀가하지 못하다가 1954년 3월 초
아버님 장례 끝내고 귀가하니 집을 비운 후, 도적들의 만행으로 집은 쑥밭이 되었고, 여기 저기
널렸던 것을 모았지만 쓸만한 건 다 없어졌기 때문이다. 선친께서 1925년 두번 째 미국에 오셔서
뉴욕시에서 찍으신 사진 4장이 있어서, 갖고 왔다. 위 사진 두 장은 돌담 앞에서, 좌측 사진은 혼자서,
우측 사진은 친구분과 함께 찍으신 사진인데, 그 분이 이희경선생님으로 추정된다.

이번 2015년 1월 6일에 New York Historical Society에 가서 네장 사진을 모두 감정받고,
모두 Central Park안에 있는 유명한 Belvedere Castle에서 촬영하였음을 확인하였고,
나는 곧 걸어가서 그 Castle에 가서 찍은 사진 4장을 아래에 실렸다.

Exhibit 12: Father standing before a stonewall. 아버지의 제2차 도미, 연도 1925년
여기서 돌담은 끝난다. 그 우측으로 descending staircase가 있는 듯하며, Protective wooden fence로 막혔다.
사진 자체가 희미한데, 뒤에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이전에 혹시 Hudson River가 아닌가 추측도 했었다.

Exhibit 13: Father and his friend at the same place.
이 사진은 Exhibit 12와 같은 사진인데 친구분과 함께 찍으신 사진이다.



. . .

이 날 그 곳 gift store에서 내가 갖고 온 사진을 보였더니, 그 곳 여직원이 대단히 감명을 받았다. 이 직원이
이 Castle에서 촬영한 사진이었음을 다시 확인하여주었고, 내가 그에게 이 두 사진촬영장소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안다고 한 후 그 직원이 다른 여직원을 데리와서 우리 셋이 눈이 심하게 내리는 밖으로 나갔다. 처음 직원은
나에게 서 있을 위치를 정해주었고, 둘 째 직원은 내 Camera로 내 사진을 찍었다.
주소: Belvedere Castle, Central Park, 79th St, New York, NY 10021

Exhibit 14: 좌측 사진. 내가 바로 그 돌담 끝에서 약간 거리를 두고 섰는데, 돌담이 5층임을 보여주었고,
내 뒤에는 Staircase이며 그 아래에는 Iron fence로 막았다. 현재 눈이 많이 내렸다. 그런데
그 배경은 Hudson River가 아니고, Turtle Pond였다. Jan 6, 2015

Exhibit 15: 우측 사진. 이번에는 내가 돌담앞에 서서 찍은 사진인데, 돌담을 더 잘 보여주며, 돌담위에는
석주를 만들어 세웠다. 90년의 세월은 갔지만, 이곳은 바로 위의 Exhibit 12 and 13의 장소임이 틀림없다.
"아버지, 춘호가 아버지께서 사진 찍으셨던 바로 그곳에 90년 만에 와서 사진을 찍습니다." 2015년 1월 15일

나의 이름에 관한 설명: 출생시 조부님께서 관호(觀鎬)로 이름을 지어서 호적에 올리셨는데, 모친께서 내가 6세경에
갑자기 이름을 춘호(瑃鎬)로 고치셨다. 그때부터 고등하교 삼학년까지 춘호로 통하였다가 대학 입시 지원할 때
호적등본에 아직도 관호로 되어있어서 불야불야 다시 관호로 고쳤다. 부친은 항상 "춘호야" 하고 나를 부르셨다.





Exhibit 16: 이 사진은 나머지 두장 사진 중의 첫 장으로 선친께서 다른 친구분과 찍으신 사진인데,
이번에는 불순한 일기관계로 이곳을 찾지 못하였으나, 다음 방문 시에는 이 장소를 반드시 찾겠다.
중요한 Landmarks가 몇 개 있다. 첫째 좌측에 Castle, 둘째 Stonewall, 셋째 앉으신 벤취 우측에
석주 등이며 마지막으로 두 분 앉으신 앞에 인도가 보인다. 또 주목해야 할 것은
Castle 본관과 Tower가 우측-좌측의 배열이다. Belvedere Castle 1925





Exhibit 17: 선친과 이희경 선생님 사진이며 전 사진과 똑같다. Belvedere Castle, 1925





Exhibit 18: Front View of Belvedere Castle. 앞의 두장 사진에서 좌측에서 멀리만 보였던
Castle로 접근하여 바로 정면에서 찍은 사진 두 장이다. 여기서 본관과 Tower의 배열이 이번에는
좌측-우측이다. 그 이유는 아버지 사진(Exhibit 16 과 17)은 Castle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찍었고,
이번 나의 사진은 Castle 건물의 정면을 향하는데 남쪽을 향하여 찍었기 때문이다. Jan 6, 2015





Exhibit 19: Front View with movement to the west. 내가 Front Yard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서북쪽에서 동남쪽을 향하여 촬영하였다. Jan 6, 2015





Exhibit 20: 뉴욕 한인 교회. 촬영일 Sep 8, 2014. 촬영인 정관호
이 주소는 633 West 115th Street, New York, N. Y. 이다. Williston Seminary 재학시기에 이곳에서
방을 세들어서 주소로 삼으셨고, 아버지의 셋째 삼촌과 함께 쓰셨다. 내가 이곳을 지금까지 3 번이나 찾았다.
첫번은 1971년 경에 Bronx-Lebanon Hospital, Bronx, N. Y.에서 근무할 때이며, 장소만 알아 두었다.
그 후 2014년 9월에 찾아서 문의하려고 하였으나 문이 잠겨서 돌아갔고,
금년 2015년 1월 6일에 비로소 목사님과 만나서 여러가지 정보를 얻었다.





Exhibit 21: 뉴욕 한인 교회 건물 사진 오래된 4층 건물이다 . 촬영일 Sep 8, 2014. 촬영인 정관호
나의 감회: 교회안에 “강변에 앉아 울었노라: 뉴욕한인교회70년사”란 글이 있다. 이를 보니, 나는 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께서 한일합방 당시 두 분이 우셨던 일이 떠오르면서 나 역시 비애를 금할 수 없었다.
아마 많은 우리의 선인들께서 나라를 잃은 후 Hudson River를 굽어보는 언덕에 앉아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많이 울었을 것이다. 하루 아침에 나라없는 국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백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이 후손은 그때의 강개함을 억제할 수 없다.





Exhibit 22: 1913~1914년간 선친의 University of Pennsylvania 재학시절인 주소이다.
3911 Pine Street, Philadelphia, PA. [From the Recent Street View of Google Maps]




. . .


Exhibit 23 (좌측 사진)and 24(우측 사진): 두 분의 독사진 두 장.
Exhibit 23는 아버지 재학시절 사진임에는 틀림없지만 연도 미상이다.
Exhibit 24는 아버지의 숙부되시는 정지환(鄭芝煥), Jewhan Chung의 학교사진이며 역시 연도 미상이다.
내게는 종조부(從祖父)가 되시니, 쉽게 작은 할아버지라고 칭한다. 영어로는 Granduncle이다.
미국에서 대학교육까지 마치시고 귀국 후 지병으로 일찍 돌아가셨고, 후손이 없다.
1879년 8월 16일에 출생하셨고, 1916년 7월 24일에 졸하셨다.
삼촌과 조카 두 분이 함께 10여년을 이역 만여리 타국에서 사셨으니, 두 분 사진을 사진을 나란히 올린다.




Exhibit 25: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본관 앞에서 사진. 촬영일 2015년 2월 16일. Henry는 우측에,
Connor는 좌측에 있으며, 부자가 이곳에 대학 순회 차 방문 중 College Hall 경내 Benjamin Franklin
동상 앞에 섰다. Henry는 이곳의 졸업생이고, Connor는 유서깊은 이 대학교에 관심이 크다.
이 벤자민 프랭클린의 동상은 1899년에 유명한 Strawbridge and Clothier Firm의 창립자,
Justus C. Strawbridge 로부터 필라델피아 시가 기증받아 설립하였으며, 현재 College Hall 경내에
위치하였다. 1913년부터 1914년까지 선친의 Wharton School 시기에 바로 이 동상을 보셨을 것이다.

내가 국민학교시절에 선친의 대학교 사진을 보았다. 넓은 운동장에 제복을 입은 학생들이 열을 지어
서 있었고, 대포가 몇 개 있었큰데, 대학생들이 군사훈련을 받는 것이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피란 후
귀가하였을 때에는 이미 모두 없어졌다. 나는 그곳이 당연히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교정이라고 믿는다.
이리하여 나는 아버님 대학교 사진을 보관하지 못하였으며, 이 손실이 너무 애석하다. 그래서 이번 아들과
손자가 대학교 순회 때 Pennsylvania 대학교 정면에서 사진을 찍어, 잃어버린 사진 대신으로 실었다.

 




A. 아버님 인적사항

성명: 정재원(鄭載謜), 영문 Jaone Chung
아호(雅號): 담재(淡齋)
출생지: 대한민국 경상남도 진주시
생년(生年): 1893년 8월 9일
졸년(卒年); 1954년 2월 20일

B. 아버님 미국행

이번에 출품할 가장 중요한 사진은 나의 선친의 옛 학교 정문 앞에서 찍은 학급사진이다.
아버님은 내가 고등학교 일학년 말에 대구에서 숙환으로 돌아가셨다. 그때가 1954년 2월이었는데,
우리가족은 피란시절에 부산에서 살다가, 1953년 여름에 휴전이 되어서 피란민들이 거의
모두 상경하였지만, 아버님 병환이 악화되어서 대구에 살던 누나에게 갔더니 그 당시
서부시립병원에 입원시켜 드렸고, 결국 그곳에서 돌아가시고 고향 경남 진주시 반성면
선산에 묻히셨다. 나는 막내 겸 외아들로 노부모 슬하에서 외롭게 자랐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님은 45세셨고, 내가 고등하교 1학년 때 아버님은 62세로 돌아가셨다.
아버님은 나를 어리게 보셨고 내게 자상하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 적이 별로 없었으며,
돌아가시기 직전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는 말씀만 하셨다.
아버님에 관한 이야기는 어머니를 통하여 옛날 이야기같이 들었다. 어머니 또한 연로하셨으며,
좋은 집안에서 한학(漢學)을 많이 배우셨으나 신학문은 배우실 기회가 없었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아버님은 십세경에 조부님께서 당시의 지식인 두 분에게 부탁하여 한분은
부친을 서울에서 일본 동경까지 대동한 후 그곳의 청산외국어학원(靑山外國語學院)에
입학하여 1년간 영어교습을 받으셨고, 또 그 곳 미국사람가정에 하숙을 하시면서 그 집
애들과 사귀어서 영어를 배우셨다.

일 년 후 1903년경에 다른 분께서 부친을 태평양 횡단 정기선을 태우고 일본에서 출발하여
미국에 도착하시고 대륙횡단기차를 타시고 뉴욕시에 정착하면서 그 분이 계획하였던대로
어떤 학교에 가서 입학시험을 보셨는데 실패를 하셨다. 그 원인이 영어시험의 실패였다.
그 학교에서 6개월 기한을 주고 재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그동안에 부친은 많은 노력을 하여서
결국 합격하셔서 공부를 하시게 되었다.

여러 해 후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상과대학 즉 Wharton School에 입학하셔서
공부를 하시다가 그 동안 학비 송금이 대단히 힘들어서 이 문제를 해결하시겠다고 1914년에
귀국하신 후 다시 미국으로 귀환하시려는 시점에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전 세계 해상 봉쇄령
(Global naval blockade)이 내려서 미국으로 오셔서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어서 한국에서
결혼하시고 가사를 돌보셨다.

그 후 1925년에 두 번째로 도미하셔서 학업을 재차 계속하실까 알아보았지만,
상황이 여의치 못해서 자신의 짐의 일부를 찾아서 돌아오셨다. 그 당시 미국여행은 모두
Trans-Pacific Liners(태평양 횡단 정기선)을 사용하였으며, 일본에서 미국까지 편도
30일이나 걸렸다고 한다. 이것이 내가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다음 부친에 관하여
어머니를 통하여 들은 그 곳 일화 몇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제1화. 부친이 미국에 도착하신 직후 Wright brothers의 최초비행이 성공하였다고 들었다.
그 때가 1903년 12월이었으니, 부친의 도착시기는 1903년이었고 12월 이전이었을것이다.

제2화. 더운 여름날 저녁때쯤 노인들이 의자를 들고 길가에 나와서 서로 지난 간 날의 이야기를 할 때
그 주제는 거의 다 남북전쟁이었고, 그들이 비교적 어린 나이에 소집되어 전투에 참가하였을 때
얼마나 무서웠던가하는 얘기들이었다.

제3화. 다음부터는 Williston Seminary 에서 일어났던 몇 가지 이야기를 싶겠다.
Massachusetts서북부 작은 시골에 동양학생 하나가 왔으니, 그들은 매일 놀렸고 부친은 매일
그들과 몸싸움을 하셔서 얼굴이 성할 날이 없었다. 1년을 거의 매일 싸우다시피 하니까 나중에는
그들이 “That's enough. No more fights or hassles."한 후 그들과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 당시 아버지의 싸움소식이 이 작은 학교에 큰 소문거리였다. 매일 아침 조회 때 담임선생님이
훈시 후 아버지를 보면 얼굴이 멍들거나 부었으면 정상으로 간주하는데, 어떤 때 얼굴이 말짱하면 짐짓,
“Jaone, what happened to you?"하고 놀렸다.

제4화. 부친은 목 뒤에 종기(furuncles)가 자주 나니까 선생님이 말씀하기를, “Jaone, watch
your nape." 그러면 반 친구들이 부친께, ”You better look at the back of your neck."하고
놀렸다. 당연히 선생님은 “To care for your neck." 의미하였지만, 장난꾸러기 학생들이
”Show me how you can look at the back of your neck." 하며 놀렸다.

제5화. 값비싼 기숙사에는 더운 물이 나오고 값싼 기숙사에는 찬 물만 나오는데 부친은 값싼 기숙사에
계셨고, 겨울이 대단히 추워서 1층에서 찬물로 세수하고 머리도 감고 3층까지 뛰어올라가는 동안 어떤
때에는 얼굴과 머리를 감은 물이 얼어서 방안에 활활 불타는 난로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면 얼마 후
얼음이 녹아서 수건으로 닦을 수 있었다.

제6화. 동네의 어떤 중년여인이 아버지와 친해져서 수양아들로 삼았다. 그는 어렸을 때 어떤 독신
목사집에서 일했던 하녀였는데, 목사가 죽을 때 전 재산을 그에게 남겨서 그것만 갖고서 독신으로
풍족하게 편안히 살았다. 또 어떤 부인이 부친의 나라가 Korea임을 알고 찾아와서 말하기를,
“I am so glad to see you. Your country is near China. My parents were from Hungary.
Our ancestors, Huns, lived north of China. So we are neighbors."

제7화. 부친이 청년기로 들어설 때 뉴욕에 한국동포가 얼마 있으면서 두 파가 있었는데, 하나는
남조선파, 또 하나는 북조선파이며 서로 알력이 심했다. 어떤 인연으로 이희경씨와 의형제를 맺었다.
그 분은 평안남도 순천인으로 독립유공자로 추모되었다. 그런데 두 분이 함께 행동을 하였기에
두 분은 이 두 당파에 들어갈 수 없었다. 파벌이 심한 우리 민족의 이야기다.
아버님 일화는 여기에서 끝내고 부친 학업을 찾는 나의 노력을 설명하겠다.



C. 부친의 학업기록 찾기

처음에 나는 내가 항상 들었던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 가서 부친 기록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때가 아마 1969년이었을 것이다. 내가 편리하게도 Resident training을 Philadelphia에 위치한
Pennsylvania Hospital에서 하고 있었다. 같은 도시에 있는 대학교 동창회에 가서 설명을 하였더니,
부친이 졸업생이 아니기에 동창회명부에는 찾을 수 없어서, 직원 두 사람이 나를 데리고 대학의
Archives에 가서 그들이 한 시간 이상의 노력 끝에 부친 Freshman record를 찾았다. 1913년~1914
년간의 기록이었다. 그러고 보니 부친이 1914년에 귀국하신 후 다시 교육을 계속하지 못하셨으니,
대학교육은 Freshman으로 끝난 모양이다. 여기서 전 학교인 Williston Seminary를 찾았다.

여러번 문의 끝에 현재는 Easthampton, MA에 위치한 Williston Academy임을 알게 되었다.
곧 가서 찾아보고 싶었지만 교육받는 기간이라 자유롭지 못했고, 그 후 Rochester, New York에 가서
개업하느라고 시간을 낼 수 없다가 1979년 여름 California에서 찾아온 처조카가 방금 Smith College
에 입학하여 날보고 학교기숙사까지 데려달라고 하여서 지도에서 찾아보니 그 대학이 위치한
Northampton과 Williston Academy의 Easthampton은 5 마일정도 떨어져 있었고,
그 방문일이 바로 일요일이었다. 하여간 나는 그를 대학기숙사에 내려놓고 Williston Academy를
찾아가서 동창회장을 찾았더니 마침 중대한 논의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어 나를 만나서
부친에 관한 사진을 두 장 복사해서 내게 주었고, 내가 갖고 온 학급사진을 자신이 복사하여서
가졌다. 그 때 그가 내게 설명하기를 현 학교건물은 옛 학교를 허물고 그 위에 새로 건축하였으나,
사진에 나온 정문은 현재 Town Library의 정문이니 내가 여기 Park St을 따라 북으로 300 ft 정도
가면 왼쪽에 있는 Library 입구가 바로 이 사진의 건물 입구라고 하여서 그곳을 통과하면서
그 도서관입구를 보았다. 이것이 나의 첫 번 Williston방문이었다. 그때가 1979년 8월말 대학 개학
전날이었다. 그 후 기회가 오면 그 도서관 정문 앞에서 우리가 사진을 찍겠다고 생각하였다.

그 후 1985년 여름방학시절 맏아들 Henry가 11th grade를 마치고 College interview하느라고
Dartmouth College 방문 후, Brown University로 데리고 가던 도중 Williston Academy에 다시
들러 부친의 1909년부터 1913년까지 4년 성적증명서도 발급받고 곧장 그 도서관에 들어갔다.
시골 도서관답게 창문을 열어놓고 노인 서너명이 신문잡지를 보는 듯했다.

나는 Henry를 데리고 곧장 좌측에 있는 한 50대 여성 Librarian에게 가서 인사를 하고 우선 내가 가져온
부친 Class Photo를 보이면서 “Ma'am, can you recognize this photo?" 하니까 그 분이 이 고색이
창연한 사진을 보고 깜짝 놀라며, ”Ah! This is the old Williston School photo. It was taken
in the year of 1913, before I was born. The door in this photo is the same door
both of you just entered." 이때 내가 부친을 지적하면서, “This was my father,
and this boy is my son. We decided to visit this place with this door seen
in the old photo." 그 분은 많이 감동하였다. ”I have been living in this town
all my life, and once in a while some Willistonian children like you visited
the school to commemorate their parents or grandparents. It's so nice to have you.
If you have some time, may I bring some old Williston Seminary photos?" 그러고는 지하실에
내려가서 큼직한 box에 넣은 많은 사진을 갖고 와서 우리에게 보였다. 참으로 오래된 사진들이었다.

나로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지만, 부친이 보시면 얼마나 감개무량하셨을까! 사진들을 모두 보고
떠나기 전에 한 가지 부탁을 하였다. “I want to have photos taken in front of this memorable
door with my son. Could you take the photos for us?" 그는 선선히 응낙하고 우리 둘은 문 앞에
섰고 그분은 앞길 Park Street으로 내려가서 양 손을 들고 양 방향으로 오는 Traffic를 모두 정지시킨
다음 천천히 전진 후진하면서 사진을 몇 장 찍었고 좌우에 많은 차량이 섰어도 그분은 태연자약하게
자기 할 일만 다하였다. 나는 그 고마운 분께 많이 사례하고, 떠났다. 그 후 나는 퇴직한 후 이곳
Canandaigua Lake가에서 살고 있다, 가끔 내가 만일 Boston지역에 갈일이 있으면 이제는
여유롭게 들르려고 생각도 하였다.

그런데 지난 해 2013년 여름 나의 큰 며느리 Lillian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저희 집에 있는
Williston Class Photo 찍은 지 100주년이 되니 가족이 기념방문을 할 것을 내게 제의하였다.
나는 100주년이란 사실을 잊고 있다가 이 좋은 생각에 찬성하고 맏아들 Henry, 맏손자 Connor,
둘째 아들 James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이 학교개학직전 8월 31일 토요일에 가기로 계획하였고,
모두 James의 Manhattan 아파트에서 만나서 출발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토요일이라 학교와 도서관이 닫혀있겠기에 우리끼리 건물 밖에서 사진 몇 장만 찍고 오는 것이
너무 섭섭하여서 내가 학교동창회에 전화하여 Director of Alumni Relations인 Mr. Jeffrey Pilgrim과
통화하고 그날 12시에서 오후 1시 사이에 전화연락으로 Campus내에서 만났고 그가 우리를 데리고
교정과 Gymnasium을 포함한 건물내 campus tour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 걸어서
Emily Williston Memorial Library를 방문하고 그가 우리 넷의 사진을 찍어주었고, 나 역시
많이 감동하여서 금일봉을 학교기금에 기증하였다. 이것이 나의 세 번째 방문이었다.
떠날 때 좀 섭섭하였다. 또 다시 올 일은 없을 듯싶었다.

그런데 금년 6월 초에 아주 오래간만에 New England tour를 하였다. 처음에는 Concord, MA에 있는
Walden Pond에 가서 Henry David Thoreau의 복구된 Cabin을 찾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Bar Harbor, ME에 가서 이틀간 놀다가 귀가할 계획이었는데, 그 직행거리가 650마일에 주행시간이
10시간이 넘는다. 중간에 하룻밤 자고 오는 게 무리가 없겠는데, 특별히 선호할 도시가 보이지 않아서
Easthampton을 생각했지만 그 작은 동네에는 잘 곳이 없어서 Northampton의 호텔에서 자고 그
다음 날 다시 학교를 찾았더니, Mr. Pilgrim이 휴가 중이라 이번에는 다른 용건을 내어 놓았다.

그건 부친의 삼촌 즉 조부님의 셋째 동생이 어렸던 부친을 돌보려고 함께 미국에 오셨다가 결국
Colorado School of Mines 즉 콜로라도 광산대학을 졸업하셨다고 들었는데, 조회하여보니 그분은
Williston Seminary에 1906년부터 1910년까지 다니셨다는 게 발견되었다. 그 분의 함자는
정지환(鄭芝煥) 영문명은 Jewhan Chung이었다. 그 분은 귀국하셨으나 병환으로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고, 또 자손도 없었다. 그래서 그 분의 학교기록을 요청하여 전 기록을 받았다.
그분께서 먼저 1906년에 Williston에 입학하신 후 자기 조카님인 나의 부친을 1909년에
입학시키고 삼촌과 조카 두 분이 함께 Williston에 1909년-1910년 학기를 함께 다니셨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 Williston Northampton School은 나의 부친과 넷째 할아버지가
수학하셨던 나에게 유서 깊은 학교임을 알 게 되었다. 지금까지 이 도서관, 바로 이 문앞에서 우리
가족이 사진 찍기를 세 번, 빈 입구에서 찍은 사진 한 번, 모두 네 번 사진을 찍었다.


D. 부친의 옛날 미국주소 찾기

(1) Williston Seminary 학교기록에 기재된 주소가 있다.
그 곳 주소는 633 West 115th Street, New York, N. Y.으로 되어 있었다.
부친께서 가끔 미국에서 사실 때 얘기를 하셨다. 뉴욕에서 부친과 자신의 삼촌이 큰 방을 세들었었고,
이승만박사(李承晩博士)께서는 작은 방을 세들어서 한 건물에서 6개월을 보내셨으며, 이박사는 그때
중년쯤 되셨고 부친은 한 20세가 되기 전이었다. 친해지셔서 농담도 하실 정도였다. 그 때 이박사는
프린스턴대학교에 제출할 박사논문준비를 하셨으니 이 때가 1910년으로 되어있다. 이박사는 또한
목사님이어서 부친을 세례 하여 드렸다. 나는 물론 그 거주지와 시기를 알지 못하였지만, 부친 고등학교
기록에서 상기의 주소를 찾을 수 있었다. 그 때는 1968년부터 1970년 사이에 Philadelphia에서
Residency 교육중이었고, 그 후에 1970년 7월부터 1971년 12월까지 Bronx-Lebanon Hospital
에서 Residency and Fellowship 교육을 받고 있을 때, 어느 일요일에 혼자서 차를 몰고 이 주소를
찾아갔더니, 놀랍게도 이 주소에 한국교회가 있었다. 그러고 부친이 그 곳에 계셨던 때가
1909년부터 1913년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고 믿지만 혹시 1909년 이전에도 계셨을 수 있었다.

하긴 2013년에 Williston School에 갔을 때 Mr. Pilgrim이 학교기록에 의하면 1930년대에
학교에서 어떤 문의편지를 이 주소로 보냈는데 회신을 못 받았다고 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부친,
작은 할아버님, 이승만박사 그리고 독립유공자 이희경선생님 등, 이분들이 이 장소에 같은 시기에
계셨을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작년 9월 9일에 New York Historical Society 담당관에게
이 주소가 그 당시에 무엇이었고 또 한국인 혹은 한국사회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문의하였더니,
그가 조회한 후 New York Times 기사를 발췌하여 내게 주었다. Aug 19, 1929일에
Rev. P K Yoon이 한국을 지배했던 일본을 비난했던 설교였고, 또 Aug 26. 1929일에
같은 윤목사님의 설교로서 서양과 동양의 최선의 문명이 공동으로 세계 평화를 이루기를 열망하는
글을 발견하였다. 그보다 좀 이르게, Aug 29, 1926일에는 Westside Residential Lease를
보도하였는데, 633 West 115th Street에 위치한 Four story 25 foot dwelling를
Houghton Company가 Lease한다는 소식이었다. 하긴 내가 그보다 하루 전날인 9월 8일
아침에 갔으나 문이 잠겨서 아무도 못 만났다. 그래서 이 교회사진 몇 장만 찍었다. 바로 이곳이
백여년전에 방금 청년이 되신 선친과 중년의 이승만박사가 6개월을 함께 지내셨던 곳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또 1910년 8월 29일에 한일합방이 되었을 때 부친과 그 삼촌 두 분이 얼싸안고
하루 종일 빈 방에서 우셨다고 하니 틀림없이 이 집이었을것이다.
나라잃은 백성이 된 슬픔으로 우셨다는 뜻이다.

그 후, 선친께서 제2차 미국방문하시고 귀국시 누구를 통하여 하와이에서 일본 첩자나
친일세력들로부터 피신중이셨던 이승만 박사를 마지막으로 만나셨다.

다음은 Korean Methodist Church의 역사를 Wikipedia에서 찾은 내용이다.
Korean Methodist Church and Institute는 1921년에 뉴욕시에 설립되었고, 그 현재 주소는
633 West 115th Street, New York, NY 이다.1910년 한일합방과 1919년 3 .1 운동이후 뉴욕시
지역의 한국인이 모여서 1921년에 3.1운동을 기념하고 추모한 후 교회를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처음 예배는 매디슨 애비뉴의 Methodist Church에서 거행하였고, 1921년 4월 28일에
교회설립일로 정하였고 1923년 4월 22일에 459 West 21st Street 에 위치한 빌딩으로 이사하였고,
1927년 현재 주소로 다시 이사하였다. 이 건물은 4층이고 25X100 feet이며, Columbia University와
인접하여있다. 이리하여 선친이 거주지 주소로 사용하였던 곳을 찾았다. 게다가 그 후 이곳에서
우리나라 광복의 뜻을 갖인 선인들께서 독립을 위해 여러가지 의거를 계획하셨던 곳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메일로 교회담당인과 미리 연락을 한 후, 이용보목사님과 예약을 한 후
1월 6일 오후에 그 주소에서 만나서 많은 의문을 풀었다. 우선 나는 목사님께 부친께서 틀림없이
1909~1913년까지 이곳을 주소로 사용하셨고, 또 이곳에서 여러가지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하였다.
또 1910년 한일합방을 알게 되었을 때 아버지와 후견인인 작은 할아버지 두 분은 서로 붙잡고
하루종일 방에서 우셨다고하였고, 또 1910년경에 이승만박사께서 이곳에 오셔서 박사학위논문을
6개월간 준비하셨는데 그 때 작은 방은 이박사께서, 큰방은 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께서 쓰셨다는 내용,
아버지는 20세이전이었고, 이박사께서도 40세 미만이셨는데, 두분이 아주 가까워져서 농담도 하실
정도였다는 내용, 이박사는 목사님이였기에 아버지를 세례해 드렸다는 내용, 그 후 1925년 부친이
미국을 방문하셨다가 귀국길에, 하와이에서 일제세력으로부터 피신하고 계시던 이박사를 아버지를
잠시 만나서 무슨 상의를 하신게 두분의 마지막 만남이었다는 내용을 모두 목사님께 설명하였다.

또 한가지는 독립유공자이신 이희경선생님의 이야기인데, 그분은 선친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이며,
의사(Dr)이며 독립투사였으며, 독립운동차 중국과 한국에서 일하시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가
결국 병사하시고 또 우리나라 독립후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한가지 지적할 일은서울대학교
음대교수이며 Soprano인 이관옥교수는 이선생님의 외동딸이란 사실이다. 그런데 이선생님과
선친 두 분은 이곳에서 함께 6개월간 기거를 하셨는데, 이선생님이 요리를 하시고 아버지는 청소와
설거지를 하셨다는 내용까지도 설명하였다.

그러고 나서 목사님의 설명이 다음과 같았다. 이 장소에서 한인교회가 설립된 때는 1927년이었고,
그 전에 한인들이 오게 된 연유는 이곳이 기숙사였기 때문이다. 나를 데리고 4층을 모두 보여주셨는데,
기숙사처럼 각층마다 공동 Bathroom with shower room이 있었고, 기타 방은 3개였고, 아버지 말씀
처럼 큰방과 작은 방이 있었고 또 Fireplace도 있었다. 목사님이 내게 신도목록인 두꺼운 책자를
보여서 찾으니, 놀랍게도 “정재원”:서울출신, N.Y.U.에서 상과전공, 세례교인. 귀국."
그래서 내가 N.Y.U.를 정정해 달라고 하여 “펜실베니아 상과대학”으로 정정하고,
세례교인에는 “이승만박사가 세례함”이라고 추가하고 또 그 위에 “Jan 6, 2015 방문
오후 1:59분. 정관호 (막내아들)”
이렇게 기록하였다. [Exhibit 20, 21 참조]

(2) 다음에는 선친께서 1925년에 두 번째로 미국에 오셔서 해결 못하셨던 마무리 하셨다.
그리고 그 때 어떤 한국인 두 분과 사진을 넉 장 찍으셔서 갖고 오셨는데 한분은 이희경 선생님이셨다.
처음 두 장은 낮은 돌담 옆에서 혼자서, 그리고 이희경 선생님과 함께 찍으신 사진이며,
다른 두 장은 두 분과 번갈아 가며 나란히 벤치에 앉아서 찍으셨고, 건물과 붙어있는 탑이
제법 멀리서 보이는데, 어딘지 알 수 없어서 New York Historical Society에 두 번이나 가서
문의한 결과 두 번째 방문에 그 장소를 확인 할 수 있었다. 그곳은 Belvedere Castle 이라고 하며
Central Park내에 있었다. 그 주소는 Belvedere Castle, W 79th Street, New York, N. Y. 였다.
지난 1월 6일 눈이 많이 오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돌담을 찾아서 내가 그곳에서 사진 두 장을 찍었다.
그런데 두 번째 두 사진을 찍으신 장소 찾기는 불순한 날씨 때문에 부득이 다음 기회로 연기하였다.
아마 친구 두 분과 그 Castle정원에서 자리를 바꾸면서 두 곳에서 두 장씩 촬영하셨다고 믿는다.
[Exhibit 12, 13, 16, 17 참조]


E. 결론

아버님께서는 1903년경 십세 경에 동경에서 미국행 정기선을 타고 유학길을 떠나셨다.
처음 6년은 틀림없이 요즘말로 Elementary School에 다니셨을 텐데 그 정보는 도저히 찾을 수 없다.
내가 Williston School 동창회와 학적부에 여러 번 문의해보아도 전학교(former school)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대답뿐이다. 그러나 마지막 5년은 1909년~1913년까지 Williston Seminary에서
수학하였다, 1913년~1914년까지는 Wharton School, 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Freshman course를 마치셨다.


F. 아버님의 유산(Legacy)

내가 처음 Williston Academy를 방문했을 때 Henry는 11세, James는 8세로 Elementary School에
다닐 때였다. 그 날 그 곳 동창회장에게 내가 듣기만 했던 Boarding School인가 하고 문의하였더니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차 속에 있던 아이들을 보며 몇 살이냐고 묻고 만일 이 아이들이 자라서
고등학교 갈 때에 Boarding School(College Preparatory School과 동의어)을 고려하고 또
Williston Academy에 Apply할 경우에는 아버님의 재학사실과 동창회장 자신과 이날 만났던 일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학교에 제출하라고 대단히 친절하게 설명하였다. 그 때부터 나는 우리 두 아들을
Boarding School에 보낼 계획을 세웠고 또 그 다음에는 Ivy League College에 보낼 계획도 세웠고
결국 그 때 계획했던 대로 실현하였다. 아버님이 그 옛날 오로지 미국 교육을 받으시려고 이 먼 나라에서
십여년간 노력과 고생을 하셨고 그러면서도 대학교 교육을 끝마치지 못 하신 사실을 생각하여, 나는
더욱 분발하셔서 두 아들에게 좋은 교육을 받게 할 결심을 하게 된 결과이다.

다음은 아버님의 일화 한편이다. 내가 소학교 아래학년시절 일이다. 나는 별로 우수한 생도가 못되었다.
그래도 노력하여 가끔 100점짜리 시험답안지를 들고 집에 와서 아버님께 보일 때 아버님은 내게,
“춘호야, 백점보다 팔십점이 더 좋은 것이다. “ 하셨던 말씀을 여러 번 들었다. 나는 다른 과목보다 수학
(예전에는 산술이라고 불렀다.)을 잘 하였다. 그런데 왜 하필 80점이 100점보다 더 낳았다고 하셨는지
그 뜻을 몰랐지만 아버님께 그 이유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 후 지인들에게 잡담할 때 이 이야기를 하면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내가 이 지역에서 개업하고 병원에 Attending Physician으로
일할 때 그 때가 좋았던 세상이었다. 내 환자를 회진한 후 환자 Charts를 들고 Nursing Station에 가서
Progress notes and Orders를 쓴 후 옆에 있는 담당 Nurse에게 Charts를 주면 간호원들은 내게 의례
”Want some hot coffee?" "Yes, please." 하고 주는 Coffee를 마시며 잡담을 한다. 어느 날 한가할
때 우연히 아버님의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아직도 왜 Grade A보다 Grade B를 더 선호하셨는지
모른다고 말했더니, Mary라고 하는 중년 Nurse가 대뜸,
“Don't you know, Dr. Chung? Your father wanted you to be an all-American boy with
a well-rounded personality. He didn't want you just to be a so-called bookworm."

아무도 대답을 못했던 나의 반생의 의문을 Mary가 풀어주었다. 아버님은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고 세속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는 걸 대단하게 생각지 않으셨던 분이었다.
이게 나의 아버님의 유산이다.

또 한가지 기억나는게 있다. 아버지께서 소년시절에 세례를 받으셨고, 이번에 처음으로 아버지가
뉴욕한인교회 신도명단에 세례교인으로 되어있음을 알게 되었다. 가끔 말씀중에 God 인용을 하셨다.
나는 나면서부터 어머니께서 나를 데리고 절에 가셔서 항상 불자이었다.
아버지께서 부산 피란시절에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 세상에 모든 종교는 다 좋은 것이다. 네가 어떤 종교를 택하든지 진실하게 믿으면 된다.”
그 말씀을 나는 나의 며느리들에게 하여주었다. 이 또한 아버지의 유산이다.


G. 부친의 말년

미국유학은 1914년에 송금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일시 귀국하셨다가 뜻밖에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도미와 귀교가 불가능하게 되어서 결국 학업을 끝마치지 못하셨다. 하지만 독자 중에는
그 후에 어떻게 지나셨는가하는 의문이 생기겠기에 그 후의 행적을 요약하려고 한다.

이리하여 조부께서는 부친께 가사를 전담하시도록 명하셨고 또 모친과의 결혼도 곧 하셨다.
또 많은 친구도 사귀게 되셨고 중요한 일은 YMCA의 초대영어교사가 되셨으며 그때 제자 중 많이
알려진 분이 영문시인 수주 변영로선생, 성균관대학교수 성재 이관구선생, 기상대장 이원철박사였다.
그 외에도 많은 문인, 지사, 사상가와 교류를 하셨고 그들 모두 반일인사 혹은 항일투사였었다.
그 후 개인재산을 써서 국외 수출과 기타 사업을 하셨으나, 모두 실패하셨다.
일제시대에 반일인사가 사업을 하려니 될 수 없었다. 결국 중년시기에 가세는 기울어졌고, 부친은
일본경찰로부터 요시찰인(要視察人)명단에 올라서 항상 고등계형사가 배치되었다. 얼마나 고생하셨느냐
하면, 돈이 다 떨어진 후 친우 두 세분과 함께 단골 찻집에서 만나서 냉수만 마셨다고 들었다. 해방 후
부친이 정계에 들어가실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부친은 그들 즉 정계에 들어간 분들과 뜻이 맞지 않는다고
하시며. 생계를 위하여 개인회사에서 근무하셨고, 가족은 항상 궁핍한 생활을 면치 못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육이오동란이 일어나서 다음 해 1951년에 부산에서 피란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때 연세는
이미 육십이 가까뒀으나, 쉬고 계실 수 없어서 계속 일을 하시다가 1953년에는 잘 알던 미국인의
소개로 마지막 직장이 되었던 완월동에 위치한 ‘부산아동자선병원’에서 행정 병원장으로 일하시다가,
지병의 악화로 "좀 더 치료도 받고 일을 계속하시라"는 미고문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사직하셨다.
그 후 대구에서 살던 셋째 누님에게 가셔서 대구서부시립병원에 입원하셨고 다음 해 1954년 2월에
돌아가시고, 유해는 고향인 진주 일반성면에 위치한 선산에 모셨다. 아버지는 만석부호의 종손으로
태어나셨고, 자기 재산으로 10여년 미국 유학하셨고, 패가하신 이후부터 줄곧 곤궁하게 사셨다.

내가 연전에 집 이야기를 영어로 써서 아이들에게 남기려할 때 나의 글을 도와주었던 영어선생
Merry Ewing이 내게 묻기를, "Was he an intellectual?" 나는 아니라고 했고,
"He was a person of principle." 이라고 하였으니, 자신의 원칙대로 사셨던 분이란 뜻이다.





외아들 정관호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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