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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6사단의 春川방어전

金炯植(월간조선) - 2015.06.25 04:19

국군이 3일간 버티었기 때문에 포위, 섬멸을 면하고 반격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春川-洪川 지역을 공략한 人民軍 2군단은 개전 당일 春川을 점령, 48시간 이내에 水原 지역으로 진출하여 서부전선으로 침공한 인민군 1군단과 함께 서울 지역에서 國軍의 主力을 섬멸하려 했다. 그러나, 국군 6사단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春川은 6월28일이 되어서야 함락돼, 인민군의 단기 작전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春川-洪川 전투의 승리로 국군은 戰列을 정비할 시간을 벌고 이후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 유엔군과 함께 大反擊을 개시할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6사단의 奮戰은 冷戰體制의 기점이 되었던 한국전쟁의 전개 양상을 뒤바꾼 世界史的 戰鬪였다

잊혀진 전쟁에서 再評價되는 전쟁으로

1950년 6월25일에서 1953년 7월27일까지 한반도를 초토화시켰던 전쟁은 韓國戰爭(한국전쟁)으로 불린다. 한때는 6·25 동란, 6·25 사변으로 通稱(통칭)되었다. 전쟁은 보통, 국가와 국가끼리의 전투인데 북한은 反(반)국가단체이지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動亂(동란), 事變(사변)이란 말을 쓰게 되었다. 그런데 이 전쟁엔 북한뿐 아니라 중공, 소련,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16개 유엔 회원국이 참전했다. 동란이나 사변이란 말로써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이 국제전을 제대로 담을 수가 없다. 그러는 사이에 미국에서 쓰던 「Korean War」란 말이 번역되어 들어와서 「한국전쟁」으로 불려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주체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전쟁」이란 명칭은 생경하다. 미국인들이 남북전쟁을 「미국전쟁」이라 부르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 땅에서 치러진 전쟁을 외국인처럼 「한국전쟁」으로 부를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연재물에서는 국제적 시각에서 통용되는 한국전쟁이란 명칭과 국내적 시각의 6·25 동란을 절충하여 「6·25 전쟁」이란 말을 주로 쓰고 한국전쟁이란 말도 겸용하기로 했다.
6·25 전쟁은 규모면에서나 영향력면에서 20세기의 4大(대) 전쟁 중 하나이다. 1,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및 월남전 가운데 가장 적게 연구된 전쟁이라고 하여 미국에선 「잊혀진 전쟁」으로 불린 것이 6·25 전쟁이었다. 동서 冷戰(냉전)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舊(구)소련과 중국 쪽의 비밀문서가 많이 발굴되어 그 全貌(전모)가 드러나면서 한국전쟁은 이제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 그 의미가 「재평가되는 전쟁」으로 바뀌고 있다. 한국전은 스탈린이 주도한 전쟁이었고, 그 결과는 실패였으며, 그 실패의 결과는 소련권의 붕괴로 40년 뒤에 나타났다는 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국에서 6·25 전쟁은 戰史(전사)중심으로 연구되었다. 복잡한 전투 地圖(지도)와 전투 설명이 많이 나오는 사무적인 딱딱한 글은 읽는 이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안겨주었다. 이 전쟁은 군인들만의 전쟁이 아니라 민족의 체험이었고 세계의 체험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휴전 중의 열전」이다. 이 전쟁의 체험자들이 사라져가고 있는 시점에서 내년에 한국전쟁 50주년을 맞는다.
月刊朝鮮(월간조선)은 새로운 자료와 취재, 그리고 보다 넓은 관점에 기초하여 이 전쟁의 규모와 질량과 깊이와 영향력에 걸맞은 「민족과 세계의 체험」으로서 이 전쟁을 재구성·재조명·재해석해보려 한다. 6·25 전쟁의 체험자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단편소설감 하나씩 정도는 갖고 있다. 이 연재물은 그러한 민족의 집단적 回顧錄(회고록)이기를 희망한다.

戰略的 승리

春川-洪川 지역에서 보여준 6사단의 성공적인 방어전은 한국전쟁의 물꼬를 튼 「전략적 승리」였다. 국군 6사단이 6월27일까지 春川(춘천)을 방어함으로써 북한 인민군 2군단이 開戰(개전) 당일 춘천을 점령한 후 48시간 이내에 水原(수원)에 진출, 국군의 퇴로를 차단함과 동시에 국군 전후방을 분리, 인민군 1군단으로 하여금 서울 지구에서 국군의 主力(주력)을 섬멸하도록 한 북한 인민군의 작전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같은 6사단의 승리는 1950년 6월28일 開戰(개전) 후 3일 만에 서울에 입성한 북한 人民軍(인민군)이 그 파죽의 여세를 몰아 계속 남진하지 않고 왜 7월1일이 되어서야 漢江(한강)을 건넜는가 하는 한국전쟁 최대의 미스터리를 풀어주는 열쇠」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金暎浩(김영호) 성신여대 교수의 견해를 들어보자(金暎浩,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 참조).
『6사단은 인민군의 춘천 지역 점령을 3일간 지연시키는 戰功(전공)을 세웠다. 이 전공은 단순히 춘천 전투라는 일개 지역 전투에서의 승리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북한의 전쟁 계획을 좌절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한국전쟁 초기의 가장 중요한 승리 중의 하나이다. 이 춘천 전투에서 실패한 결과로 인민군은 수원 지역을 계획대로 장악하는 데 실패하게 되고 국군의 한강 방어선이 구축됨으로써 인민군은 그 귀중한 3일간을 서울 지역에서 지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蘇鎭轍(소진철) 원광대 객원교수 또한 춘천-홍천 지역 공략의 실패로 인민군의 전체적인 작전계획은 좌절되었다고 지적한다(蘇鎭轍, 「한국전쟁의 기원」 참조).
『인민군의 主攻(주공)부대(3사단, 4사단)는 6월28일 새벽 국군의 「미아리 방어선」을 격파하고 서울에 입성하는 전과를 올려 공격 개시 후 3일 이내에 서울을 점령한다는 「3일 작전」이 외견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양 助攻(조공)부대가 미리 서울 남방과 동남방에 진출해 서울을 全面 포위한다는 전략임을 감안해 볼 때 성공하지 못한 작전이었다. 서부 조공부대인 인민군 6사단이 48시간 이내에 金浦(김포)평야 진출에 성공한 반면, 동부 조공부대인 인민군 2군단은 6월28일 새벽이 되어서야 춘천을 점령, 결과적으로 「3일 작전」 전체의 실패를 초래했다. 인민군이 서울 입성 후 3일간 머문 이유도 인민군 2군단의 작전 실패 때문이다』

大反擊의 기틀이 되다

맥아더는 그의 회고록에서 『전쟁 발발 후 인민군이 수원 지역을 중심으로 전선을 형성한 10일간이 가장 중요한 기간이었다』면서, 『만약 인민군이 美軍(미군) 개입의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서울에서 지체하지 않고 바로 한강을 도하하여 밀고 내려왔다면 戰況(전황)은 예측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金暎浩교수의 이어지는 설명.
『트루먼 대통령이 6월30일 美 지상군의 투입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판단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 바로 6월29일 맥아더가 바탄(Bataan)이라는 전용 비행기를 타고 수원 비행장에서 직접 도착하여 지프를 타고 한강 이남으로 가서 서울 지역의 상황을 직접 시찰하고 쓴 보고서였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북한의 애초 전쟁계획이 춘천 지역에서 차질을 빚지 않았다면 수원 지역은 이미 인민군에 의하여 장악되어 맥아더는 수원 비행장을 사용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춘천 지역에서의 6사단의 戰功은 이후의 한국전쟁 전개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全(전) 세계적 차원에서 전개된 냉전 대결에서 스탈린의 의도를 한국전쟁 초기에 최초로 좌절시킨 世界史(세계사)적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인민군이 서울에서 3일간 지체함으로써 敗退(패퇴)를 거듭했던 국군은 전열을 정비, 한강 南岸(남안)에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후 국군은 戰力(전력)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戰線(전선)을 뒤로 이동, 大反擊(대반격)의 기틀이 되었던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는 데 성공, 북한의 단기결전 계획을 저지할 수 있었다.

선제타격작전

북한 인민군의 남침은 인민군 지휘부가 설계한 것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혁혁한 武勳(무훈)을 세워 「英雄(영웅)」 칭호를 받은 소련의 바실리예프 중장이 작성한 이른바 「선제타격작전」에 따른 것이었다. 이 작전계획서에 따른 인민군의 침공 계획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인민군 제1군단의 최정예인 제3사단과 제4사단을 主攻부대로 하며, 이들 부대는 제203전차 연대의 지원 아래 議政府(의정부)-서울線(선)으로 남진한다. 인민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을 서부 助攻부대로 하여 開城(개성)-汶山(문산)-서울線으로 남진한다. 제2군단 주력인 제2사단과 제7사단을 동부 助攻부대로 하여 華川(화천)-春川(춘천)-洪川(홍천)의 축선으로 각각 남진하게 하고, 제5사단과 유격부대인 제766부대, 陸戰隊(육전대) 제549부대는 동해안의 국군 전선 돌파와 후방 상륙으로 해안선을 장악한다.
이리하여 제2군단 主力(제2사단, 제7사단)이 서부전선의 제1군단을 도와 春川 전면을 돌파한 다음 서울 동남방으로 우회하여 水原-利川(이천)선에서 서울 부근 국군의 퇴로를 차단함과 동시에 국군의 전후방을 차단하고, 제1군단으로 하여금 서울 지구에서 국군 主力을 섬멸하도록 한다. 이 모든 작전은 공격 개시 후 72시간 내에 끝내야 한다>
이 「선제타격작전」에 동원된 人民軍의 총병력은 약 9만명이었다. 이 작전에는 약 6백 문의 야포와 1천 문의 박격포를 갖춘 7개 보병사단과 1백50대의 소련제 T-34 탱크를 보유한 1개 기갑여단 및 2개 기갑연대가 참가했다. 반면에 38선을 따라 배치된 국군 병력은 4개 보병사단과 1개 독립 연대가 전부였다. 국군은 약간의 장갑차를 가지고 있었을 뿐 T-34와 같은 탱크는 한 대도 없었다.
火力(화력)과 人力(인력)면에서 인민군에 절대 열세를 보인 국군이었지만 1950년 6월25일은 일요일이라 상당수의 장교와 사병들은 외출 중이거나 휴가 상태였다. 인민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국군 각 사단의 실제 병력은 1개 연대씩에 불과했던 것이다. 인민군은 거칠 것 없이 밀고 내려왔다. 甕津(옹진)반도의 국군 제17연대는 새벽 5시에 인민군 3경비여단과 6사단 14연대의 공격을 받고 위태롭다는 보고를 올렸고, 그로부터 30분 후에는 국군 7사단이 인민군 3사단과 4사단의 공격을 받고 抱川(포천)과 東豆川(동두천)으로 퇴각하게 되었다.
또한 오전 6시30분에는 한국군 1사단이 인민군 1사단의 탱크 공격을 받고 후퇴중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인민군 6사단은 오전 9시 開城을 점령하고, 인민군 主攻부대의 하나인 3사단은 하루종일 진격해 국군의 수도방위 거점인 議政府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인민군은 서부전선에서 목표 이상의 전과를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春川-洪川 지구에서 일어났다. 이 지역의 공략을 맡은 인민군 제2군단(군단장 金光俠 소장)에 내려진 임무는 제2사단은 開戰 당일 오전 중에 서울 동북부 거점인 春川을 점령하고, 제7사단은 개전 당일에 洪川을 점령하여 국군 제6사단(사단장 金鐘五 대령)의 퇴로를 차단하라는 것이었다. 나아가 춘천과 홍천을 점령한 후 신속히 水原으로 진출하여 한강 이남을 차단, 국군의 주력부대를 서울 지역에서 협공, 궤멸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春川-洪川 지역 전투에서 인민군 2군단은 국군 6사단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인민군 주력부대가 서울에 입성한 6월28일이 되어서야 春川을 점령할 수 있게 되었다. 춘천 지역 전투에 투입되었던 인민군 2사단(사단장 李靑松 소장)은 북한군 내에서 최우수 사단으로 선정될 만큼 정예부대였고 洪川 지역에 침공한 인민군 7사단(사단장 全宇 소장)은 기갑연대의 지원까지 받아 막강 화력을 갖춘 부대였지만 각각 국군 6사단 제7연대(연대장 林富澤 중령)와 제2연대(연대장 咸炳善 대령)의 성공적인 防禦戰(방어전)으로 인민군 2군단 자체가 와해될 지경에 이르렀다.
7월4일 春川-洪川 지역 전투가 마무리되자마자 소련 군사고문단장 바실리예프와 스티코프 대사는 스탈린에게 인민군 조직의 대대적인 개편과 지휘관의 교체를 요구하는 電文(전문)을 보내게 된다. 스탈린이 이 개편안을 승인한 후 춘천-홍천 지역의 인민군 지휘관들은 전원 교체되었다. 군단장 金光俠(김광협) 소장은 2사단의 참모장으로 강등되었고 후임엔 金武亭(김무정) 중장이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 2사단 李靑松(이청송) 소장은 崔賢(최현) 소장으로, 7사단 全宇(전우) 소장은 崔忠國(최충국) 소장으로 각각 교체되었다. 특히 인민군 7사단은 敗戰(패전)의 汚辱(오욕)을 씻으려 부대 명칭도 12사단으로 개칭했다. 춘천-홍천 지역의 전투는 그만큼 인민군에게는 충격적이고 심각한 패배였던 것이다.

李大鎔 중대장과 함께

지난 3월2일 오전 10시경. 고양시 원당역 만남의 광장에서 기자는 李大鎔(이대용·74·예비역 준장)씨, 趙達珍(조달진·71·예비역 소위)씨와 합류했다. 두 사람은 『6사단의 춘천-홍천 지역 전투를 답사하려는데 동행할 수 있겠느냐』는 기자의 요청을, 하던 일도 뒤로 미루면서까지 흔쾌히 수락한 터였다.
1948년 11월 육군사관학교 7기로 졸업한 李大鎔씨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는 중위 계급장을 달고 6사단 7연대 소속 1대대 1중대장직을 맡고 있었다. 趙達珍씨는 일본에서 자라다 해방이 되고 난 뒤 귀국하여 軍에 자원 입대, 6사단 19연대 3대대 소속의 일병이 되었다.
李씨는 춘천 지역에서 가장 치열했던 「玉山浦(옥산포) 전투」의 최일선에 섰고, 趙씨는 홍천 지역에서 가장 큰 戰果(전과)를 거두었던 「말고개 전투」에서 육탄돌격대장으로 인민군의 戰車(전차)를 맨몸으로 부수었던 주인공이다. 일행은 49년 전 生(생)과 死(사)가 넘나들었던 戰場(전장)으로 시간여행을 떠나기 위해 춘천으로 향하는 차량에 몸을 실었다.
전쟁이 뭔지도 모르고 태어난 기자는 일종의 답사 여행을 떠난다는 가벼운 기분으로 의자에 몸을 기대었지만 兩人(양인)은 좌석에 편히 눕지를 못하고 허리를 곧추 세우고 있었다. 그 때 그 현장으로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레였기 때문일까. 시계추는 어느덧 거꾸로 돌아 마치 전투가 벌어진 전선으로 떠나는 장병인 양 두 역전의 용사는 연신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京春街道(경춘가도)를 달리는 차 안에서 李大鎔씨는 천천히 1950년 6월25일 그 날을 회상했다(李씨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북진을 시작하여 압록강 지역까지 진격했을 때 국경 경비 중대장으로 경계 근무를 서다 중공군에게 포위돼, 1천5백리에 걸친 필사의 탈출극을 펼친 바 있다. 전쟁이 끝나고 1963년부터 駐월남 한국대사관에서 公使(공사)직을 수행하던 李씨는 1975년 4월 월남 공산화 때 포로가 되었고 만 5년 후인 1980년 4월 석방되어 귀국하였다. 한국화재보험협회 이사장직을 역임했다).

『비상이 걸렸습니다』

<1950년 6월25일 당시 나는 춘천시 죽림동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마침 일요일이라 춘천 도서관에 가서 책이나 읽으려고 고무장화를 신고, 카키 군복 상의에 雨衣(우의)을 입고 부슬비를 맞으며 집 문을 나섰다. 雨中(우중)에 어디선지 쿵쿵하는 포탄 소리가 들리고, 기관총 소리도 이따금 들려왔다. 나는 우리 부대가 사격훈련을 하는 줄만 알고, 계속 걸어서 춘천 공회당 앞까지 내려갔다. 이때, 어떤 군인이 철모를 쓰고 총을 맨 채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다름 아닌 1중대 전령 안기수 하사였다.
安하사는 거수경례를 하고 나서 헐레벌떡거리며 『비상이 걸렸으니 빨리 연대본부로 집합하라』는 1대대장의 명령을 전달했다. 북한 인민군이 남침했다는 것이다. 이 때가 아침 8시30분. 나는 입은 복장 그대로 연대로 갔다. 군화가 아닌 고무장화 차림이었다.
이런 비상은 그 전에도 자주 있었다. 연대 主力(주력)이 출동하려고 준비가 끝나면, 38선에 있는 부대로부터 「敵(적)은 다시 38선 이북으로 후퇴해버렸다」고 보고하는 것이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모였던 장교들은 김빠진 맥주 모양, 싱겁게 집으로 되돌아오곤 하는 일이 非一非再(비일비재)하였다.
나는 오늘도 그러려니 하고 연대본부로 갔으나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인민군이 오늘 새벽을 기하여 38선에서 전면 공격을 가하였고, 內坪(내평)에 있던 7중대는 적의 공격을 받아 통신이 끊어지고, 母盡橋(모진교) 쪽에 있던 9중대는 인민군의 기습을 받아 중대장 이래흥 중위가 전사하고 중대는 흩어졌다는 것이었다. 꼭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인민군의 포탄은 이미 춘천 시내 牛頭洞(우두동) 북부에 낙하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연대 본부에도 포탄이 쏟아질 판이었다. 나는 군화와 작업복을 가지러 하숙집까지 갔다 올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보급계 朴(박)중사를 불러 창고에 있는 것을 가져오라고 하였더니 군화 다섯 켤레와 작업복 상하 한 벌, 철모 하나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군화는 모두 작아서 신을 수가 없었다. 『신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느냐』고 했더니, 防寒靴(방한화) 한 켤레를 가지고 왔다.
나는 급히 대대장의 명령을 받고 중대원들에게 실탄을 분배케 하는 한편, 옷을 갈아입고 발에 맞는 방한화를 신었다. 부리나케 전투준비를 하면서 인원점검을 해보니 외출, 외박을 나가 돌아오지 않은 사병들과 휴가 간 사병들이 40명도 더 되었다.
나는 중대 선임하사관 이한직 상사에게 『외출자가 돌아오는 대로 전선으로 보내라』고 지시하고, 현장에 있는 중대원만 트럭에 태워가지고 昭陽江(소양강) 다리를 건넜다. 인민군이 쏘아대는 포탄이 앞길을 막으며 비오듯 떨어졌다. 적은 38선을 돌파하고 벌써 20리 이상을 진격한 셈이었다. 나는 부리나케 牛頭山(우두산)으로 중대원을 이끌고 뛰어 올라갔다. 牛頭평야 저멀리 전차(자주포)를 앞세운 인민군이 거대한 밀물처럼 들이닥치고 있었다>

玉山浦 대첩

일행을 태운 차량은 이윽고 춘천에 도착, 춘천 지역 전투의 하이라이트였던 「玉山浦 전투」 현장으로 찾아가기 위해 昭陽橋(소양교)를 건넜다. 서울의 한강대교를 옮겨 놓은 듯 아치형의 철골이 도열한 소양교 밑으로 동에서 서로 흐르는 소양강 물이 넘실거렸다. 가을 하늘만큼 깊고 푸른 색이었다(한국전쟁 당시 소양교는 인민군이 춘천으로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지금은 강폭이 더욱 넓어졌지만 당시에도 소양강은 평균 강폭이 2백 ~3백m에 이르고 수심이 깊은 천혜의 방어물이었다. 소양교를 중심으로 동쪽 牛頭里의 내다리 여울과 할미 여울, 서쪽으로는 가래모기 지점만이 간신히 걸어 건널 수 있었지만 이도 사람 목까지 물이 차는데다 물살도 세어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인민군의 전차가 춘천으로 진입하려면 소양교를 건너야만 했다).
昭陽江(소양강)은 소양교를 지나자마자 북에서 남으로 흘러 내려온 북한강을 만나 自盡(자진)해버린다. 소양강을 보탠 北漢江(북한강)은 남서 방향으로 머리를 돌려 더욱 壯(장)하게 서울로 서울로 흘러간다. 춘천시는 소양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중심으로 그 南岸(남안)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까 Y자를 오른쪽으로 45도 정도 기울이면 북한강과 소양강의 형태가 되고 그 오른편 공간에 춘천시가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소양교를 건너자 제법 광활한 평야지대가 펼쳐졌다. 牛頭평야라 불리우기도 하는 이 지대는 남북 6km, 동서 2km 정도의 개활지다. 이 북서편에 玉山浦가 있고 우편에는 해발 2백m가 못되는 호리병 형태의 牛頭山(우두산)이 남북으로 누워 있다. 옥산포 전투 당시 보리밭이었던 이 곳에서 북한 인민군은 1개 연대 규모 이상의 병력을 잃게 된다.
6월25일 새벽 4시 공격준비 포격에 이어 전차(자주포)를 앞세운 인민군 2사단은 38선 이남으로 진격한 지 30분도 안되어 춘천 공략의 제 1 난관이었던 母津橋(모진교·춘천 북쪽 13㎞ 지점의 북한강을 가로지르는 길이 2백50m의 다리로 북한강의 다른 이름인 모진강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모진교라 불리웠다. 1965년 2월20일 춘천댐이 생긴 이후 춘천호 물 속에 잠겼다)를 쉽게 손에 넣고 破竹之勢(파죽지세)로 달려왔다. 그러나 6월25일 오후 옥산포에 이르자 6사단의 강력한 저항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 큰 역할을 한 것이 포병대대의 활약이었다. 당시 포병대대장이었던 金聖(김성) 소령의 증언.
『보리밭은 누런데 적은 꺼멓게 파리떼 같아 구별이 용이했다. 조준이고 무엇이고 할 시간의 여유도 없이 쏘아대었다. 벌판은 인민군의 시체로 가득 찼다』
7연대 작전장교 李南浩(이남호) 소령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이미 사단 전투훈련까지 마쳤다고 하는데 步戰砲(보전포) 협동이 엉망이었다. 우리를 얕잡아 보고 침입했겠지만 애당초 그들은 지형 지물을 도외시했고 전술 따위는 없었다. 우리가 1개 연대로 적의 1개 사단을 막을 수 있었던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한다.

공세적 방어

자신감을 얻은 7연대장(林富澤 중령)은 옥산포 일대에 인민군이 더 증강되기 이전에 격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계속 밀리기만 하지 말고 공세적인 방어로 기선을 제압하라는 것이었다. 李大鎔 장군의 현장 해설.
『6월26일 오전 10시30분 경 1대대는 2중대(중대장 吳允石 중위)를 우두산 방어진지에 남겨 놓고 1중대(중대장 李大鎔 중위)와 3중대(중대장 金明益 중위)를 앞세워 옥산포에 집결 중인 인민군의 측방을 공격했다. 인민군의 급소를 기습적으로 때리는 공격이었다. 적은 전열을 갖추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후퇴하는 인민군을 신이 나게 쫓아 한참 공격하다 보니 옥산포를 지나 馬山里(마산리) 북쪽 어귀에까지 진출해 있었다. 戰車(SU-76 자주포. 소련군이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사용하던 T-24 전차 차체에 76.2㎜ 곡사포를 탑재한 것으로 개전 초기 국군 장병들은 인민군의 T-34 전차와 SU-76 자주포를 구분하지 못하고 모두 「전차」라고 불렀다. 최대 사거리 1만2천m, 장갑두께 최대 25mm, 중량 12.3t)도 다섯 대 노획했는데 뒷면에 여닫을 수 있는 문이 있었다.
그 안에 탑승한 인민군을 잡아 보니 복장은 비행기 조종사처럼 통으로 된 옷에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있었다. 50m 떨어진 지점에서 로켓포로 전차 뒤꽁무니를 쏘아보니 철갑이 뚫렸다. 살구를 먹으며 점심을 때우고 있는데 오후 1시경부터 인민군의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대대장으로부터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가 쓸 수 있을까 싶어 나머지 전차 4대는 그냥 놔두었는데 미처 부수지 못하고 후퇴하고 말았다』
이같은 아군의 기습적인 破碎攻擊(파쇄공격)이 몇 차례 되풀이되자 인민군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당일 春川 점령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병력의 손실만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右一線(우일선)인 서부전선에서는 인민군 1군단이 계획보다 빠르게 진격하고 있음에도 2군단은 고작 池內里(지내리), 柳浦里(유포리) 등 보잘 것 없는 작은 마을들을 점령했을 뿐, 춘천 공략은 제대로 안되고 막대한 손실만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전 당일 春川을 점령한다는 인민군 2사단의 主목표는 이미 물거품이 되었다.
인민군 2군단 공병참모로 이 전투에 참가했던 朱榮福(주영복·朱씨는 1950년 8월14일 金浦에서 美軍에 귀순했으나 전쟁포로 취급 당한 것에 불만을 느껴 휴전 후 中立國行을 선택, 인도와 브라질 등의 나라를 떠돌아 다녔다) 당시 인민군 소좌는 자신의 회고록 「내가 겪은 조선전쟁」에서 당시 2군단 지휘부의 표정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戰況(전황)이 신통치 않아 점심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정오부터 불길했던 전황이 더욱 악화되어 전체 요원은 신경을 집중했다. 무엇이 잘못되어 가는지 모두 안색이 좋지 않았다. 특히 군단장 金光俠(김광협) 소장과 참모장 崔麟(최린) 소장의 얼굴빛은 「흙색」이 되었다. 2사단 예하 모든 부대는 38선을 무너뜨리고 牛頭평야까지는 거센 파도와 같이 밀고 내려갔으나, 소양강 북쪽에서 제1차 총공격에 실패하고 玉山浦-泉田里(천전리)선에서 국군 6사단 7연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더 이상의 전진이 저지된 것이다』

『敵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駐북한 폴란드 武官이었던 파우엘 모나트의 회고록(「Russians in Korea」)에 따르면 인민군 2군단 참모장 崔麟 소장은 옥산포의 전투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2군단은 春川과 洪川을 돌파한 후 48시간 내에 서울의 동남부 지역(수원, 이천)에 진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공격 초기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진군 도로가 험악하고 국군의 반격은 우리가 예상한 것도 훨씬 강력한 것이었다. 그러나 상부(총사령부)에서는 이러한 어려움을 모르는 채 시간마다 나를 불러 督戰(독전)하고, 왜 예정시간에 맞추지 못하는지 꾸짖었다. 하지만 그들은 당초의 작전계획이 너무 무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국군 장병들이 이렇게 용감히 싸운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여러 群像(군상)들이 드러나게 마련. 일례로 7연대 소속 모 하사관은 인민군이 춘천으로 육박해 들어오자 부대 군량미를 빼돌려 가족들과 함께 부산으로 달아나기도 했다. 후에 그는 헌병에게 잡혔는데 군법회의에 넘기는 대신 다시 전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 죽을 각오를 하고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싸웠다고 한다. 李大鎔씨의 증언.
『1중대장이었던 나는 황해도 출신이었고 대대장은 경북 문경, 연대장은 전남 나주 사람이었다. 그 때는 지역감정 같은 것이 없었다. 모두 하나로 똘똘 뭉쳐 싸울 궁리만 했다. 사실 전투가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포탄과 총알이 퍼붓는 가운데 生과 死가 오간다. 이럴 땐 「조국을 위하여 내 한 목숨 기꺼이 바치겠다」는 마음보다는 「나와 마주하고 있는 敵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절박감이 필사적으로 싸우게 만든다.
수년간 많은 전투를 해보니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의 유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철저히 비겁해서 절대로 先鋒(선봉)에 나서지 않고 후방에만 남아 있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아예 목숨을 내놓고 敵陣(적진)으로 뛰어드는 사람이었다』

『昭陽橋를 폭파하라』

鳳儀山(봉의산·소양강 남쪽에 있는 춘천의 진산. 높이 350m)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金鐘五(김종오) 6사단장은 인민군 포격이 다시 심해지고 2개 대대가 방어진을 치고 있는 우두산의 우측 泉田里(일명 샘밭)로부터 적의 우회공격이 우려되자 더 이상 진지를 고수하기 힘들다고 판단, 牛頭山 일대의 병력을 철수시켜 소양강 남안의 방어진지를 중심으로 한 하천선 방어로 전환키로 했다.
이때 사단 공병대대장 朴正采(박정채) 소령은 소양교 폭파를 사단장에게 건의하였다. 그러나 통신이 끊겨 서부전선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사단장은 昭陽橋를 폭파할 경우 국군이 다시 반격할 때 큰 장애가 된다고 판단, 이 건의를 기각했다. 전황이 국군에게 유리하게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洪川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2연대로부터 전황이 여의치 않으니 포병을 지원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홍천이 함락되면 춘천이 포위 공격될 위험이 있어 사단장은 춘천 지역 방어에 투입되었던 16야전포병대대 3중대를 이날 저녁 홍천으로 급파했다. 사단은 홍천 지역의 인민군 일부 병력과 장비(인민군 7사단 2개 연대와 전차 10대)가 춘천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敵은 병력과 장비를 춘천으로 증가시켜 전력의 집중도를 높이는데 아군은 오히려 병력과 장비를 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 것이다. 李大鎔씨의 증언.
『해가 질 무렵부터 병력이 소양강을 건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洪川으로 떠나는 부대의 모습도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맥이 탁 풀려 싸울 의욕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屍山血河

6월27일 새벽 5시. 인민군은 일제히 봉의산 일대와 춘천 시내에 포탄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까지 계속된 이 포격으로 봉의산의 연대 관측소는 물론 제방을 끼고 배치된 진지들이 파괴되기 시작했고 춘천 시내는 불바다가 되었다. 동이 틀 무렵 잔뜩 흐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전 11시경 馬田里-牛頭里 일대에 전개하고 있던 인민군은 내다리 여울과 소양교에 병력을 집중 투입하여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7연대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모든 화기를 동원하여 집중 포화를 가했다. 소양교 위는 죽어 쓰러진 인민군의 시체로 더미를 이루고 소양강은 인민군의 피로 빨갛게 물들었다. 그럼에도 춘천 점령의 督戰에 내몰린 인민군은 동료의 시체를 밟고 무모한 진격을 계속했다. 2포대(포대장 李今烈 중위)는 숨돌릴 틈도 없이 포탄을 쏘아 대었고 8화기중대와 12화기중대는 총구가 녹아날 지경으로 사격을 가했다. 屍山血河(시산혈하), 인민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인민군의 공격이 계속되는 동안 육군본부와의 행정 통신이 재개되어 육군본부 행정 참모부장 金白一(김백일) 대령(작전 참모부장 겸임)과 金鐘五 사단장과의 통화가 이루어졌다. 다음은 그 통화 내용.
사단장 『서울은 어떠한가』
참모부장 『철수하려 한다』
사단장 『그러면 우리 사단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참모부장 『서부전선은 완전히 무너졌다. 6사단은 건재한가』
사단장 『그렇다. 나는 대대까지 장악하고 있고, 장비와 기동력도 있고, 砲(포)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참모부장 『그러나 전선의 균형을 위하여 당신의 판단에 따라 중앙선을 따라 지연전을 하라. 특히 접촉을 유지하면서 경계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잘못하면 驪州(여주) 쪽으로부터 포위될 우려가 있으니까…』
金鐘五 사단장은 이때야 비로소 全 전선의 전황이 불리하게 기울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이 통화 이전에는 6사단 장병들은 물론 사단장 자신도 『국군이 반격을 개시, 海州(해주)를 점령했다』는 방송 내용을 믿어 「춘천 死守(사수)」를 재차 다짐하던 터였다. 金鐘五 사단장은 춘천 방어보다는 전선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 현 방어선에서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며 홍천 이남으로 축차적인 지연전을 펼치며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오후 6시경 소강상태에 빠져 있던 전선은 각 대대가 순차적으로 철수한 직후부터 인민군의 포격으로 다시 불붙었다. 그러나 인민군은 대대적인 병력을 투입하지 않았다. 무모한 공격으로 워낙 심한 타격을 입은데다가 인민군 2군단 내부의 사정도 한몫 거들었기 때문이었다. 朱榮福씨의 증언에 따르면 『2사단의 좌익 분계선과 7사단의 우익 분계선이 서로 엉겨 문란해졌는데 이때 소련제 병기로 무장한 2사단의 한 연대가 미제 장비로 무장한 7사단(7사단의 장비 중에는 중국의 國共 內戰 당시 장개석 군대가 사용했던 미군 장비가 많았다)의 연대를 국군으로 오인해 공격한 결과 7사단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春川이 떨어지다

6월28일 새벽 8시. 인민군은 드디어 총공격을 개시했다. 7사단에서 투입된 T-34 전차 두 대가 그 뒤에 각각 1개 소대 병력을 거느리고 소양교 위에 올라섰다. T-34 전차에 대항할 무기가 없는 아군에게 그것은 대단한 위협이었다. 인민군의 시체더미로 메워진 소양교를 T-34 전차는 건너오기 시작했다. 인민군의 포격으로 호 속에서 아군 병사들이 쓰러지기 시작하자 하나 둘 진지를 이탈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잠시 후 인민군은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소양강으로 몰려왔다. 정오 무렵 마침내 그들은 소양교를 건너 봉의산 기슭 일부를 점령했다. 춘천에서의 지연전을 맡았던 7연대는 市街戰(시가전)을 펼치다 오후 2시 原昌고개(춘천-홍천간 도로의 첫째 관문으로 경사도가 가팔라 방어에 유리) 방면으로 철수했다. 春川은 인민군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6사단(7연대와 원주에서 지원 온 19연대)이 사흘 동안 춘천을 방어함으로써 「개전 당일 춘천 점령쭻수원 진격쭻서울 지역 국군 주력 포위 섬멸」이라는 인민군의 작전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6사단은 전략적 승리를 거둔 것이다. 李大鎔씨는 6사단이 승리할 수 있었던 原因(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요지로 설명했다.
『첫째, 有備無患(유비무환)의 원칙에 충실했다. 북한군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연대장의 지휘하에 壕(호)를 파기 시작했다. 춘천고등학교 학생들까지 이 일을 도왔다. 진지점령 훈련도 되풀이했다.
둘째, 공세적 방어로 대처했다. 6·25가 나기 전에 38선상에서 인민군과 전투를 해 보았고 이를 통해 「인민군도 별게 아니다」라는 자신감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인민군이 대거 몰려내려 왔어도 겁을 먹지 않았다. 특히 7연대 2대대 사병들은 西北(서북) 청년 출신들이 많아 북괴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했다. 공세적 방어로 최대의 전과를 올린 것이 옥산포 전투였다.
셋째, 砲兵(포병)의 화력 효과가 컸다. 인민군은 사람이 없는 곳에도 무작정 포를 쏴대었던 반면, 우리 포병부대는 전선의 가장 가까운 곳에까지 가서 포격을 했다. 그만큼 효과적이었고 낭비가 없었다.
넷째, 연대장(林富澤 중령)의 지휘통솔력이 탁월했다. 평소 사병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고 따뜻하게 보살폈는데 전투가 벌어지자 후방으로 빠져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최일선에 나와 독려했다. 존경하는 연대장이 포탄이 쏟아지는 戰場(전장)에 의연히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병들의 士氣(사기)는 백배 올라갔다.
다섯째, 地形(지형)의 유리함을 최대한 이용했다. 특히 강원도 지역은 산악지형이라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의 기동전은 그 효력이 반감된다. 우리 군은 이같은 利點(이점)을 십분 활용, 適材適所(적재적소)에 병력을 배치하고 기습전을 반복했기 때문에 소규모의 공격으로도 적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일병으로만 구성된 육탄돌격대

3월3일 李大鎔씨는 서울로 돌아가고 기자는 趙達珍씨와 함께 춘천의 동남방 30㎞ 지점에 위치한 홍천으로 이동했다. 춘천-홍천간 중앙고속도로는 험준한 강원도 산악지역을 시원스레 가르고 있었다. 커다란 S자를 그리며 높다란 고갯마루로 올라가는 도로는 수많은 교각 위에 얹혀 있었다. 교각 하나의 높이가 웬만한 건물보다 높아 보였다. 趙達珍씨는 연신 『이렇게 좋은 길이 뚫릴 줄이야』하며 지난 기억을 끄집어 내었다.
『내가 소속된 6사단 19연대 3대대는 홍천이 위험하다는 소식에 선발대로 6월26일 오후 춘천을 떠나 밤새 이 길을 걸어 6월27일 오후가 되어서야 홍천국민학교에 도착했다. 모두가 행군에 지쳐 기진맥진하고 있는데 연대장(閔丙權 중령)이 『전차 특공대를 편성하려고 하는데 지원할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다. 지원자가 30명쯤 되었다. 나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느니 장렬히 싸우다 죽으면 그래도 祖國(조국)을 위해 뭔가 했다는 보람은 안고 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지원했다. 해방되기 전까지 日本(일본)에서 자라 나라없는 설움을 톡톡히 겪은 것도 한 이유였다.
지원한 30여명 가운데 독자, 결혼한 사람, 老(노)부모를 모셔야 하는 사람 등을 추려냈다. 소대장이나 하사관들은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빠져나갔다. 「특공대에 지원하는 것은 제사날을 받는 것이다. 누군 목숨이 아깝지 않는가」 싶어 화가 났지만 속으로 삼켰다. 최종적으로 11명이 남았다. 모두가 일병이었다. 결국 일병 중에서도 선임자인 내가 이들 11명 육탄돌격대의 대장이 되었다』
趙일병의 얘기는 이어진다.
『연대장이 화랑 담배 1개피와 위스키 한 잔을 주었다. 遺骨(유골)을 대신하기 위해 손톱과 발톱, 머리칼을 잘라 하얀 종이에 싼 다음 이름을 새겨 연대에 남겼다. 트럭에 올라 말고개로 향하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얘기를 꺼내는 대원은 아무도 없었다. 술기운이 오르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랐다. 「이게 마지막인가」 하는 생각에 자꾸 고개는 하늘로 올라갔다. 슬펐다. 하지만 「갈 길은 이 길뿐」이라고 다짐하니 후회는 되지 않았다』
趙일병을 위시한 11명의 육탄돌격대가 배치된 말고개는 6월26일 사단으로부터 『왜 철수만 하느냐』는 질책에 於論里(어론리) 일대에서 무리한 반격전을 펴다 大敗(대패), 허둥지둥 후퇴한 2연대가 홍천 방어의 마지노선으로 택한 곳이었다. 哲亭里(철정리)와 城山里(성산리) 사이의 고개인 말고개(일명 馬峴이라고도 불리는 이 곳은 鄭씨라는 사람이 아버지 묘를 이 고개에 쓰고 난 뒤 사흘이 지나자 갑자기 천둥이 일어나고 묘가 뒤집히더니 그곳에서 龍馬가 나타나 고개를 넘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는 당시에는 전차 1대가 겨우 빠져나갈 정도의 좁은 도로(지금은 2차선 국도가 말끔하게 닦여 있다)를 중심으로 서쪽은 해발 2백30∼3백m의 봉우리가 연이어져 있고 동쪽은 깎아지른 절벽에 그 밑으로 華陽江(화양강)이 흐르는 천혜의 방어 지형이었다.
철수를 완강하게 부인하고 공격만을 주장하던 연대장도 이 지형을 직접 보고서 말고개 방어를 주장하는 金柱亨(김주형) 1대대장과 曺精練(조정련) 연대 작전주임의 건의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6월27일 아침부터 인민군은 자주포 2∼3대를 앞세운 1개 중대 규모로 말고개의 배치 상황과 강도를 탐색했을 뿐 본격적인 공격은 해오지 않았다. 대신에 하루종일 大口徑砲(대구경포)와 전차포를 난사하여 삼림이 울창하던 말고개 일대가 벌거숭이山이 되도록 포격을 해대었다. 洪川 지역을 공략하던 인민군 7사단은 병력의 일부를 춘천 공격에 돌렸기 때문에 전력을 아끼고 있었던 것이다.

무명용사의 玉碎

6월28일 오전 9시 먹구름이 잔뜩 낀 무더운 날이었다. 철정리 寒溪(한계)마을 북쪽 산모퉁이에 사이드 카 3대가 나타나고 그 뒤를 이어 전차 10여 대와 인민군을 가득 태운 트럭이 줄을 이어 남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인민군이 총공격을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寒溪마을의 哲亭橋(철정교)를 통과할 무렵 연대는 말고개 고지에서 집중 포격을 가했다. 인민군은 트럭에서 허겁지겁 내리기 시작, 전투대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寒溪마을 남서쪽 4백m 지점 개울가에 잠복하고 있던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느닷없는 기습 사격에 인민군이 우수수 쓰러졌다. 이들 기관총 사수와 부사수는 위치를 이동하면서 싸우다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이들 무명용사의 목숨을 건 저항으로 인민군 보병은 앞서간 전차와 합류하지 못하고 말았다. 당시 이들에게 주먹밥을 날라 주었다는 寒溪마을 주민 申萬鎭(신만진), 元承準(원승준)씨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전투가 끝나고 그 두 사람의 시신을 찾아 도로변 양지바른 곳에 안장했다. 매년 6월28일이면 그들의 묘에서 祭(제)를 올려 주었다. 그런데 1959년 美 2사단 공병대대가 도로 확장공사 중에 비석도 없는 이들의 묘를 밀어붙여 흔적도 없어지고 말았다』

『여기서 죽을 텐가, 가서 싸우겠는가』

기자가 寒溪 마을을 찾아 申萬鎭, 元承準씨를 수소문해보니 이미 그들은 故人(고인)이 되어 있었다. 주민 辛光鎭(신광진·69)씨가 이들 무명용사들이 싸운 지점을 가리키는 곳을 보니 휴게소 음식점이 덩그렇게 들어앉았을 뿐 그 사연을 알려주는 표식은 어디에도 없었다.
드디어 인민군 전차가 말고개 입구에 이르렀다. 고지의 병사들이 『전차다. 전차가 온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對전차포중대(중대장 李勳 중위)는 명령도 받지 않고 城山里(성산리) 쪽으로 철수하고 있었다. 격노한 咸炳善 연대장은 헌병대장 崔永喆(최영철) 대위에게 『빨리 가서 돌아오게 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李勳 중위가 도착하자 연대장은 『軍法(군법)에 따라 처벌받겠는가, 나가 싸워 戰功(전공)을 세우겠는가』고 물었다. 李勳 중위는 『죽기를 작정하고 싸우겠다』고 다짐하고 대원들을 이끌고 달려 나갔다.
이무렵 趙達珍 일병을 위시한 육탄 돌격대에게도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그런데 대원들 중에 그 누구도 먼저 나서는 이가 없었다. 보다 못한 趙達珍 일병이 수류탄을 집어 들었다.
『여기서 죽을 텐가, 가서 싸우겠는가』
그제야 대원들은 정신을 차리고 趙일병을 따라 말고개로 나아갔다. 육탄 돌격대는 도로변 배수로에 시체를 가장하여 누웠다.
『쿠르릉. 쿠르릉…』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검은 쇳덩어리가 말고개로 들어섰다. 이 때 對전차포 1번포가 발사되었는데 빗나가고 말았다. 인민군 선두 전차는 전차포를 휘갈겨 1번포를 파괴했다. 對전차포가 제거되자 인민군 선두 전차는 포탑을 열어젖히고 S자 굴곡지점을 통과하려 徐行(서행)하기 시작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말고개에 매복 중이던 對전차포 2번포 사수 金學斗(김학두) 하사는 1탄(철갑탄)을 전차 궤도에, 2탄(철갑탄)을 정면에, 이어 3탄(폭발탄)을 연속해서 명중시켰다. 화염에 휩싸인 선두 전차는 급정차하고 뒤따르던 두 번째 전차가 그 뒷면에 부딪쳤다. 이때 배수로에 누워 있던 趙達珍 일병은 쏜살같이 전차에 뛰어올라 수류탄을 집어 넣은 뒤 벼랑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趙일병은 다행히 소나무 가지에 걸려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뒤따르던 네 번째 전차는 당황한 나머지 華陽江 절벽으로 굴러 떨어졌다. 다섯 번째 전차가 뒤로 빠져나가기 위해 전차장이 포탑을 열고 뒷면을 살필 때 말고개에 매복했던 아군이 쏜 로켓포탄이 포탑 안에 정통으로 꽂혔다. 인민군 전차 10여대는 좁고 굴곡이 심한 말고개 언덕길에 갇혀 꼼짝달짝도 못하게 되었다.
『전차를 부셨다!』
『공격이다!』
2연대와 19연대 3대대 병사들은 앞다투어 전차에 올라타 수류탄을 터뜨렸고 전차 승무원들은 대부분 사살되었다. 趙達珍씨의 회고.
『특공대로 선발된 다음 M1 소총을 반납하고 81mm 박격포 실탄 2발과 수류탄을 지급받았다. 포탑이 열리는 것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전차에 뛰어 올랐다. 수류탄을 집어 넣은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다음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 멀리 강변을 따라 인민군 전차병들이 「내 죽으라」고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공연히 웃음이 나왔다』
말고개의 전차 섬멸전은 한국전쟁 개전 이래 한 장소에서 최대의 戰果(전과)를 거둔 전투였다. 무려 11대의 전차를 잃어버린 인민군은 이 타격으로 洪川 점령이 이틀이나 늦어짐으로써 춘천 점령 목표의 차질에 이어 인민군 2군단의 작전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전차 파괴의 戰功으로 2연대 對전차포중대 선임하사 金學斗 하사는 1계급 특진을, 19연대 육탄 돌격대 趙達珍 일병 외 2명은 2계급씩, 元根浩(원근호) 일병 외 7명은 1계급씩 특진을 했다. 특히 趙達珍 일병에게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 최초로 美 銅星勳章(동성훈장)이 수여되었다.

7배 이상의 戰果

6월29일 현재 국군을 통틀어 한강선 이북에서 방어진지를 고수하고 있던 부대는 오직 6사단뿐이었다. 6사단은 38도선에서 20∼25㎞ 남쪽인 府司院(부사원) 고개-말고개선에서 인민군을 저지하고 있었다. 春川-洪川 지역 전투에서 거둔 6사단의 승리는 앞서 언급한 대로 개전 당일 인민군 2군단으로 하여금 春川을 점령, 水原으로 진출하여 서울 지역에서 국군 주력부대를 포위, 섬멸하려 했던 인민군의 작전계획을 송두리째 무너뜨렸고 이는 국군이 戰力을 재정비,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유엔군과 함께 大反擊을 할 수 있게 한 기틀이 되었다.
이 후 6사단은 지연전을 펼치며 原昌고개, 洪川, 原州, 忠州로 축차적인 철수를 해나갔다. 전투를 치르면 치를수록 국군의 손실보다 인민군의 손실이 더욱 커져갔다.
春川-洪川 전투의 死傷者數(사상자수)가 국군이 1천명(실종자수가 약 1천3백명으로 잡혀 있지만 실종자의 대다수가 이후 원대복귀한 것으로 나타났다)이 되지 않았던 반면, 인민군은 무려 6천7백여명에 달해 7배 이상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밝혀졌다. 장비면에 있어서도 인민군 화력의 대표격인 戰車(T-34 전차 및 SU-76 자주포)가 18대 파괴되었다. 이같은 손실을 입은 인민군 2군단은 부대 자체가 와해될 지경에 이르렀고 각 지휘관들은 1950년 7월 들어 전원 교체되고 말았다.
春川-洪川 지역 전투를 유심히 살펴보면 인민군의 실수도 많았고 국군의 판단착오도 더러 있음을 볼 수 있다. 지형을 고려하지도 않고 무턱대고 진격하는 무모함, 개전 당일 春川 점령이라는 애시당초 달성 가능성이 없는 작전계획을 수립한 전략상의 過誤(과오), 국군의 저항력을 과소평가한 인민군 지휘부의 傲慢(오만) 등이 북한측 失敗의 原因이었다면 열악한 통신 장비로 인한 지휘계통 마비, 빈번한 부대교체와 훈련미비로 인한 戰力의 감퇴, 교량(母津橋, 昭陽橋 등)을 파괴하지 못하고 적이 火力(화력)을 집중함에도 아군의 병력을 차출한 지휘관의 판단 착오 등은 우리측의 부담으로 던져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春川-洪川 지역의 방어를 위해 보여주었던 6사단 장병들의 피와 땀은 한국전쟁사에 영원히 기록될 값진 것이었다.
병력규모 1 대 4, 화기 1 대 6(전차 0 대 66)의 절대 열세 속에서도 6사단은 승리했다. 有備無患, 공세적 방어, 지휘관의 통솔력, 지형상의 이점 등등 그 승리의 原因은 다양하고 복합적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투는 반대되는 두 意志(의지)의 대립, 곧 두 정신적 힘의 충돌이지 물질적 충돌만은 아니다』는 군사 전략가 듀 피그의 말처럼 6사단 장병들에게 「싸우겠다는 意志」가 있지 않고서는 6사단의 승리란 성립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 意志는 어디서 나왔는가.

戰爭은 現實이다

박격포탄을 등에 짊어지고 맨몸으로 전차에 달려 들었던 趙達珍 일병은 『나라 없는 설움이 뭔지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고, 李大鎔 중대장은 『敵을 죽이지 않고는 내가 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生과 死가 찰나로 넘나드는 전쟁의 현장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實感(실감)할 길이 없다. 혹자는 『밤하늘을 밝히는 포탄의 閃光(섬광), 총소리가 빗발치는 전투 현장이 가져다 주는 짜릿한 긴장…죽지만 않는다면 전쟁만큼 황홀한 광경도 없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말을 위한 말일 뿐이다. 戰爭은 사람을 죽여야만 되는 상황이다. 趙達珍씨의 증언.
『전쟁을 치르면서 사람의 목도 베어 보았다. 목은 두부 자르듯이 하면 잘려지지 않는다. 곡괭이로 내리치듯 찍어 순간적인 힘을 가해 그어야만 잘린다. 말고개에서 육탄 돌격대를 한 이후로는 계속 특공대로 남아 다이나마이트를 몸에 걸치고 다녔다.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갈수록 힘이 들어 한번은 전투 중에 四肢(사지)를 허공에 대고 뻗었다. 총알에 맞아 후송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총알은 비켜가기만 했다. 옆에 있던 분대장은 고개를 들자마자 그만 총에 맞아 죽고 말았다. 「싸우는 게 내 운명이구나」 싶었다』
어쩌면 전쟁은 인류가 집단적으로 저지를 수 있는 狂亂(광란)의 최대치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인간을 죽여야 하는 전쟁은 가급적이면 없어야 할 비극이다. 그러나 戰爭은 정치의 연장이자 국가의지의 관철 수단인 한 결코 회피만 할 수도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强軍(강군)을 육성하고 國防(국방)을 튼튼히 하는 것은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을 막기 위한 것이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 준비를 하라. 보다 센 힘에 대해서는 아무도 감히 이를 공격하거나 侮蔑(모멸)하지 못한다」-베게테우스, 「로마 軍事 교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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