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7 10:24
맥아더 숭배
by온기철 James Ohn12분전
국민일보에서
1950년 9월29일 정오 국회의사당에 이승만과 맥아더 가 들어 왔다. 한국 고위 관리들과 미군장성들이
미리 착석 하고 있었다. 단상에는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와 고위 장성들, 그리고 오스트리아 태생의
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가 앉자 있었다.
맥아더는 “대통령님, 신의 자비로운 은혜로 인류의 희망과 열망의 기준인 유엔의뜻에 따라 싸워서
고도 서울을 해방 시켰습니다. ... 유엔 지도부를 대신하여 당신 정부의 그자리를 다시 찾아 드리니
헌법에서 규정한 당신의 임무를 더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 했다.
이승만은 “내가 어떻게 나 자신과 한국 국민의 영원한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했다. 이 행사가 진행 되는 동안 밖에서는 아직도 포탄 맞은 건물들이 타고 있었다.
맥아더는 내가 서울을 찾아 주었으니 나라를 잘 다스리라고 당부 했고 이승만은 이에 감사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는 답례 였다. 마치 서울이 인공의 손에서 완전히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것 처럼 보이나
결코 그렇지 않다. (This Kind of War)
9.28 서울 수복은 인천상륙 작전의 성공을 의미 했다. 간만의 차이가 심한 인천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서울을 다시 빼앗은 맥아더는 영웅이 되었다. 기세가 등등 해진 맥아더는 1950년10월1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인공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북진 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중공군은 압록강을 넘어
인공으로 들어 오고 있었다.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에 대한 정보를 무시 했다.
아니 중공군이 들어 온 다 해도 미군이 능히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판단 했을 것이다.
중공군은 미군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알고 들어 왔지만 미군은 적군에 대한 정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추운 날씨에 대한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북한의 산악 지대에 대한 전투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무지 몽매한 장군의 행태 였다. 명예라는 허왕된 욕망에 눈이 어두운 장군의 전형 이었다.
미군과 국군을 포함한 전 유엔군은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무참히 패 했다.
국군이 이미 점령한 원산에 대대적인 상륙 작전을 전개한 맥아더의 코미디에 가까운 쇼는 항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다.
유엔군을 격파한 중공군은 자신만만 해 졌다. 1950년12월30일, 미군이 38선을 넘어 인공을
멸망시키려 한 것 처럼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남진 했다.
1950년1월3일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서울에서 총 퇴각을 명령 했다. 그리고 유명한 1.4 후퇴가
시작 되었다. 인천상륙 의 영광이 사라지는 날 이었다. 서울은 1950년6월27일에 인공 치하에
들어간 지 3개월 후인 9.28일에 대한민국이 다시 들어 오고 3개월 여 만인 1951년 1월4일에 중공군에게
점령 당 했다. 그리고 3월15일에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 했다.
진짜 서울 수복은 1951년3월15일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1950년9월28일을 서울 수복 기념일로
기억 한다. 왜 그럴까? 아마 인천 상륙 작전과 맥아더 숭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 해 본다.
중공 측의 총 사령관 저우엔라이는 전쟁 초기에 인천 상륙을 예상하고 전쟁 중 미해군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 하면서 소련과 인공에게 인천상륙 가능성을 알려 주었다. 그는 인천상륙 작전을 막을 려면
약 10만대군이 필요하다고 판단 했다. 만약 10만 병력이 없으면 무조건 퇴각하라고 인민군에게 충고 했다.
(위키피디아)
낙동강 전투에서 고전하고 있던 인민군은 10만병력을 인천에 배치 할 수가 없었다.
괴멸된 인민군은 무조건 퇴각 했다. 이를 유엔군은 아무 생각 없이 추운 날씨에 험악하기 짝이 없는
산악지대로 따라 갔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실수였다. 모든 기동을 차로 하는 미군과 발로 하는
중공군의 싸움이 잘해야 외길 밖에 없는 산악지대에서 벌어 졌다.
맥아더는 저우언라이 의 꾀임에빠진 것이 아닐 까? 바로 유인작전 말이다.
인천상륙 작전은 맥아더의 쇼였고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는 그의 진면목이였다.
원산상륙작전은 상영되지 못한 그의 쇼였다. 1950년9월28일이 맥아더 쇼의 한장면이었다고 한 다면
1951년3월15일은 현실의 서울 수복이었다.
온기철 James Ohn은퇴 의사
온기철의 브런치입니다. 역사를 주제로 한 수필을 쓰고 있습니다. 본직은 의사이고 취미는 골프와 역사 공부입니다. 지루한 역사를 재미있게 이해시키기위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
2021.09.27 11:06
2021.09.27 15:18
Before 9.28, Walton Walker was the field commander in Korea.
He believed he would direct the northern invasion solely. But MacArthur
assumed commandership on his own. The western front toward Chungchun
river was under Walton Walker and the eastern front toward Jangjin reservoir
belonged to Diamond. Diamond was yes man to McArthur but Walker
was an excellent general. When McArthur received bad news on both
Changchun and Jangjin fronts, he completely lost his mind and did not know
what to do. And he ordered his troops retreat beyond 38 parallel immediately
without any serious strategic thought. Walker thought it was quite possible
to defend against Chinese in the middle between Changchun river and the
38 parallel. Because Chinese had serious supply problem, they could not
advance too far from 압록강. I think South Korea could have gained territory
at least up to 39 parallel if Walton Walker was in command. He died near Seoul
in December 23, 1950 in an autobobile accident. His contribution in Pusan
perimeter to the war was far greater than Inchon landing operation.
2021.09.27 21:37
https://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159&pn=0&num=31587
원산 상륙작전
대단히 완곡한 설명이다. 알몬드는 당연히 워커 휘하에 있어야 했다. 맥아더는 워커와 알몬드를 동과 서로 갈라 놓고 자신이 그 위에 야전 사령관으로 군림 했다. 인공 멸망의 공을 워커에게 주지 않고 자신이 독차지 하기 위함 이었을 까?
맥아더가 북진의 진로를 둘로 갈라 놓은 것 또한 큰 실책이었다. 북쪽의 동과 서의 교통과 통신은 산으로 가로 막혀 아주 불편 했다.
맥아더는 도쿄에서 기자들을 모아 놓고 자신의 작전계획을 자랑 했다. 자연히 소련은 쉽게 미군의 움직임을 파악 하고 대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적군에 대한 정보를 자신에게 유리 한 것 만 골라서 택 했다. G2 윌랜비(?)는 맥아더가 좋아하는 정보만 주었다.
서부 워커의 미8군과 원산 상륙 군그리고 동부 알몬드 군이 합쳐서 평양으로 진격할 적전 계획은 원산 상륙 지연으로 워커 군 만이 평양에 입성 했다. 중공군 개입을 전혀 예상하지 않은 맥아더는 중공군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중공군과 싸우기 시작 했다. 더구나 북한 지형과 기후에 관한 정보도 미약 했다. 월동 준비는 방한복 지급조차 충분하지 않았다.
헤아릴 수 없는 중공군의 출현과 미군의 어이 없는 패퇴는 맥아더와 트루만을 극도로 당황 하게 했다. 맥아더는 만주 폭격과 핵공격을 주장 했다. 투루만도 일단 원폭투하를 고려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영국을 비롯한 우방은 3차 대전을 원치 않았다. 유엔은 휴전을 종용 하기 시작 했다. 당시의 분위기는 9.11 후에 미국정부가 화가 나서 어쩔줄을 모르던 정황과 흡사 했을 것으로 짐작 된다.
맥아더의 침착하지 못한 발언은 당시의 중공군의 상항을 보면 웃긴다. 소총하나도 제대로 다 보급 받지 못 한 화력이 형편 없는 군대였다. 국민당과의 싸움에서 이긴지 겨우 일년이 된 나라였다.
식량과 무기를 적군을 털어서 충당할 요량으로 진격한 군대 였다. 보급이 제대로 안되어 항상 전전 긍긍 했다. 워커의 말대로 평지로 후퇴해서 반격 했으면 적어도 서울은 다시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개성과 웅진반도는 남한 쪽으로 들어 왔을 것이고 NLL도 없었을 것이다.
2021.09.28 10:18
It was sad that the war was run by the people who were away and had nothing to do
with the reality of the Korean front line. They were China, Soviet Union, and the USA.
What would they have cared about the hope, future, and well-being of the Korean people?
They were only working just for their own image, pride, and their status.
Actually, they had fun running the war games.
After all, what counts is what we have today, which is rather remarkable considering our past,
except we still don't have the unification.
2021.09.28 13:23
Things always happen when least expected. It is more so when
it is most important and serious. I think it is about time that
something drastic would happen in NK for Koreans' favor.
하지만, Harry Truman이 McArthur의 만주폭격을 거절했던 사실을 고려해야
되지 않을가요? MacArthur was severely disadvantaged and restricted at that point.
The bombing of Manchuria might have changed the mind of 주은래
and might have stopped or slowed down the southern progress of the Red China Army.
(The U.S. told Stalin that they would not bomb Red China and the Chinese knew it already.
And, therefore, to the dismay of Koreans, Truman had to refuse the bombing of Manchuria.
What a damn surprise and curse were that for Koreans!!)
Anyway, the failure of having successfully kept the North Korean territory
was the saddest regret we had to swallow probably forever even to this day?
The saddest part of the 6.25 Korean War...,
jointly orchestrated by the U.S. government and Douglas McArthur.
The U.S. had deserved the heavy casualties created by the U.S. themselves.
There was no one else to be blamed for that. Let history know the fact.
We all know that the U.S. always has had a history of "Not Finishing to the Very End"
of what they started in the beginning.
We all know what happened in Vietnam, Kuwait, Iraq, and Afghanistan.
Sadly, the same history of "being the quitter" repeats and repeats.
Those who helped the U.S. in the wars will get massacred as the result.
World War II was an exception and the last one the U.S had won and finish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