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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해군 입대

초량교회 부속 건물에서 합숙소로 거처를 옮길 당시 해군에서 특별히 의과대학생이나 의예과 학생들을 의무 하사관으로 모집했다.

그 당시 의예과 학생이었던 나는 해군에 입대하여 진해에서 한달 동안의 기초 훈련을 받았다. 그때 교관들이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던 콤플렉스 때문에 대학생 훈련병들을 ‘기죽이기’ 위해 훈련을힘들게 시켰다. 밤중에 갑자기 비상을 걸어 훈련생들이 캄캄한 가운데 신발을 제대로 찾아 신고 나오지 않으면 돌멩이가 많은 운동장을 맨발로 뛰어 돌게 하여 피를 흘리게 한 일도 가끔 있었다.

기초 훈련 후에 의무 하사관 훈련을 3개월 동안 받았다. 하사관 훈련은 아주 고되고 심했다. 하사관 훈련을 시켰던 교관은 이북에서 온 의사였는데, 엄하고 까다롭게 시험을 자주 쳤다. 계급은 의과대학 학생들의 학년에 따라 결정되었다.
예를 들면 의과대학 3학년 학생들은 상사로 임명되었고, 나 같은 의예과 2학년 학생은 3등하사관으로 임명받았다.

그 후 진해해군병원에서회충검사 책임자로 복무하기 위해 한 달 동안 부산에 있는 미해군 병원선 리포스(Repose)와 컨설레이션(Consolation)에서 회충검사에 필요한 훈련을받았다.

그 당시 한국 해병대가 전선에서 많이 부상을 당해 나는반 년 동안 진해 병동에서 환자들의 치료를 도왔다.한국 해병대에 의무 하사관이 더 필요해 나를 아주 해병대로 편입시켰다. 그 후 나는 부산에있던 해병대 본부 의무과에 가서 인사행정을 보았다. 내가 글을 잘쓴다고 그쪽으로 발령을 낸 것이라 들었다.

해병대 본부에 있을 때는 부산 영도에 있는 절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는 가족에게도 가끔 찾아 갈 수 있었다.그러던 중 정부에서 의사배출을 증가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의예과 학생들과 의과 대학생들을 빨리 제대시켜 복교할 수있도록 하는 새로운 법안을 통과시켰다.

진해해군병원에서 의무병 삼조하사관 복장을 하고(19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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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의과대학 복학과 정신과와의 만남

의과대학 복학나는 일 년 반 만에 해군에서 제대하고 부산에 있는 임시 서울의대로 복교하였다. 우리는 모두 천막교실에서 공부를 했다. 캄캄한 천막교실 안에서 60촉의 불을 켜 놓고 책이나 그림 자료도 없이교수가 칠판에 그림을 그리면서 해부학 강의를 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다.

해부학 시험을 쳤는데 모두 낙제를하였다. 학생 대표들 몇이 쌀가마를 사 들고 교수집을 찾아가 탄원도 하고 하여 재시험을 친 일이 있다. 그래서 해부학 공부는 미국에와서 의사 면허시험을 칠 때 다시 철저히 해야 했다.

이때에 컬러사진으로 자세히 되어 있는 해부학 책을 여러 권 사서 책장에 꽂아 놓고 공부했었는데 이사할 때마다 피난시절의 천막교실 기억 때문에버리지 못하고 항상 가지고 다녔다.부산에서 복교하여 공부할 때 나는 가정교사도 하고 선거운동도 하여 학비를 벌었다.

한 여학생의 가정교사를 했는데 그의 아버지가 이화의대 소아과 교수로 비교적 부유하여 매일 그 집에 가서저녁을 먹고 공부를 시켰다. 이 학생은 후에 이화대학에 거뜬히 입학하였다. 학기 학비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수입이 필요했다. 선거운동을 하여 학비를 보충했다. 선거운동은 황성수 씨가 부탁하여당시 자유당 이승만 대통령 후보와 이시영 부통령 후보 선거 선전물을 벽과 전봇대에 붙이는 일이었는데, 전남 순천까지 가서 이 일을 했다.

이렇게 하여 한 학기 학비를 벌곤 했다.서울의과대학에 다니는 동안에 종교 음악가인 박재훈 선생과시인 석진영 씨와 6개월 동안 석진영 씨 집에서 같이 합숙 생활을하며 기도와 성경 말씀으로 함께 수양을 했다. 그 당시 석진영 씨는박재훈 선생이 작곡할 수 있는 시를 많이 써 주고 박재훈 선생은 그시를 바탕으로 찬송가를 작곡하곤 했다. 집에는 피아노가 없어서주일이 되면 영락교회에 가서 자신이 작곡한 곡을 처음으로 쳐 보곤 하였다.

그들과 함께 살면서 나는 그 당시 신학자들의 영어 원서로 공부를 시켜주며 그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곤 하였다. 그 후 석진영 씨는 미국에 와서 「복음의 전령」이라는 잡지를 출판하며 자신의 글을 연재하다가 10년 전에 돌아가셨다. 500곡 이상의 찬송가와 종교음악을 작곡하신 박재훈 선생은 목사가 되어 현재 캐나다 터론토에 계시며 요즘 유관순을 주제로 한 오페라를 작곡하셨다.나는 필그림 합창단에서 테너 파트를 맡았었다. 음악가 이동훈 선생이 필그림 합창단을 지휘하셨다. 그 당시 같이 공연을 준비하던 필그림 합창단 단원으로는 박재훈, 이동훈 선생이 계시고 또다른 종교 음악가이신 장수철 씨도 함께 미국 순회공연을 기획하며준비했었는데 결국 실현하지는 못했다.

후에 미국에 와 있을 때, 버펄로에 선명회어린이합창단을 이끌고 공연을 오셨던 장수철 씨와반가운 재회를 할 수 있었다.서울 귀환과 정신과와의 만남내가 부산에서 본과 2학년 때 우리 가족이 모두 서울의 봉래동 집으로 돌아왔다. 서울 의대와 대학병원 본관은 전쟁 중 인민군과 미군이 번갈아 사용했었는데 내가 복교했을 때는 다시 서울대학병원으로 회복되었다. 그때 나하고 같이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의과대학에 입학한 친구 김익산이 심한 우울증으로 많은 어려움을겪고 있었다. 이 친구는 북에서 내려온 누이와 함께 있다가 누이가결혼하게 되어 혼자 살면서 외로움을 많이 탔다.그 당시에 우리 집에도 자주 오고 나와 친하게 재냈었는데 본과 4학년 때 칠판에 말이 되지 않는 이상한 시를 쓰곤 했다. 이 친구가 4학년 때 조울증이 심해져 정신과 병동에 입원했는데 내가 자주 면회를 갔었다.

이때 정신과 주임교수 남명석 교수가 나에게 관심을 두더니 자기 방을 하나 줄 테니 와서 엑스턴(extern)을 하라고 하였다. 그전에는 안과에 관심이 있었는데 남선생을 만난 후에 정신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남 교수는 내가 미국 유학을 올 때 나에게 임상심리학을 전공하고 와서 자기와 함께 서울의대에 임상심리학과를 만들자고 하였다. 이것이 내가 미국에 와서 임상심리학으로 박사학위를 하고 정신과 레지던트(resident)를 하게 된 배경이다. 정신과병동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던 내 친구 김익산은 그 후 잘 치유되어일생 동안 외과의사로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다가 얼마 전에 타계하였다.

우리 가족들의 이야기어머니가 납치되신 후 아버지는 혼자서 부모의 역할을 하시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 서울 환도 후 가족들이 모여 의논하고 아버지께 재혼을 권유하며 간곡히 말씀드렸다.“아버지, 저희 때문에 너무 고생하셔요. 이제 저희 걱정은 그만하시고 새 어머니를 모시고 사셔요.”“아니다. 나는 절대로 재혼을 하지 않겠다.”아버지는 완강히 버티셨다. 그러나 자녀들과 친척들도 계속 아버지를 설득했다.“아버지, 이 집안에는 아버지를 내조해 주실 어머니가 꼭 필요해요. 그래야, 우리 자녀들이 각기 자신의 길을 가죠.”내가 미국에 오기 직전에 아버지는 뜻을 굽히시고 재혼을 하셨다.

새 어머니는 부산 해운대에서 고아원을 맡아 운영을 하셨는데 내 처남 김영선의 아버지가 소개를 하셨다. 새 어머니는 평양에서 기독교 계통 여학교를 나오셨다. 서울에 와서는 대한부인회에서일을 하셨다. 새 어머니의 배경이 친어머니와 비슷하셨다. 새 어머니가 오셔서 가족을 잘 돌봐 주셨고, 특히 막내 익풍이를 사랑하셔서 막내가 많이 따랐다.

후에 두 분이 우리 집에서 가까운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서 사셨는데 아버지는 교회 장로로, 어머니는 권사로 활동을 많이 하셨다. 어머니는 성인학교 영어교실에 다니셨고 몇년 동안 개근상을 받으셨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시고 아픈 교인들을 심방하셨다. 일생 동안 자녀들을 자상하게 돌보아 주신 아버지는 94세까지 건강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꿈에 아버지가 흰 옷을 입으시고 빨리 오라고 하신다.”3개월 후 어머니는 이 말씀을 남기시고 병원에서 주무시다가아버지를 따라가셨다.이야기가 좀 빗나갔지만 서울에 돌아온 후 내 여동생 익란은자기 모교 숙명여고에서 잠시 사무원으로 일을 했다. 익란은 얼마있다가 진해에서 나와 함께 해군기초훈련을 받던 치과의사와 결혼을 하였다. 둘이 만나게 된 것은 내가 해군에 있을 때 훈련이 끝날때쯤 휴가를 받아 그 친구와 함께 부산 영도 피난민 수용소에 있는우리 집으로 가면서부터였다. 그 친구가 익란과 서로 좋아하게 되어 데이트를 시작하고 결국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익란은 부산 피난시절 학교는 쉬고, 은행에서 일을 하며 내 학비를 벌었다. 매부는의무관 소령으로 제대하였다.

이 매부의 아버지(김연수 박사)는 한국에서 중국으로 파견된 최초의 의료선교사였다.익란은 첫 아이를 낳고 엄마로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서양화 전공으로 졸업하였다. 그 후 숭의여고에서 35년을 미술교사로있다가 은퇴하였다. 여동생의 첫 아기가 어렸을 때는 내가 가끔 가서 기저귀도 갈아 주고 업어 주기도 했는데 지금은 서울의 새문안장로교회 이수영 목사 사모가 되었다. 평생 동안 미술활동을 한 익란은 대한민국 4, 6, 8, 9회 국전에 입선했고, 그의 작품들은 한국미술협회전, 한국여류화가전, 한국기독교미술인전 등 많은 미술전을 통해 발표되었다.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파리에서 있던 단체전에도 그의 작품이 전시되었다.내 동생 익성이는 부산 피난시절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상대에 입학하여 서울로 와서 졸업을 하였다. 졸업 후 1960년미국에 와서 남일리노이 대학(Southern Illinois University)에서 경제학 석사 를 끝냈다. 이어서 뉴올리언스의 툴레인 대학(Tulane University)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한 후 뉴욕의 뉴욕,뉴저지, 코네티컷 3개 주 광역권 개발회사에서 경제 분석가로 일을하다가 은퇴하였다.

익성이는 나에 비해 상당히 외향적이고 활동적이어서 뉴욕지역의 US Junior Chamber of Commerce 회장등 커뮤니티 활동을 많이 하였다.막냇동생 익풍(Paul Kim)은 부산 피난 시절 서울중학교에입학하여 서울 복귀 후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익풍은 고등학교 졸업 후 임원식 씨가 지휘하던 KBS교향악단의 플루트 주자로 2년간 활약하였다. 군대 복무 후 1962년에 미국에 와 버클리가주대학(UC Berkeley)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일생을 건축가로 활동하고 있다. 졸업 후에 뉴욕에서 5년간 유명한 건축회사에서 경험을 쌓고 로스앤젤레스로 옮겼다. 익풍이 설계한 건물 중에는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 잘 알려져 있는 옥스퍼드 팰리스 호텔(Oxford Palace Hotel), JJ 그랜드 호텔(JJ GrandHotel), 로텍스 호텔(Rotex Hotel) 등이 있고, 나성영락교회의김계용 목사 교육관, 나성침례교회 교육관 등이 있다. 최근에는 유명한 피겨 스케이터 미셸 콴(Michelle Kwan)의 동서 아이스 스케이트장(East West Ice Palace, Artesia)과 세리토스 장로교회(Cerritos Korean Presbyterian Church)의 교육관도설계했다.

또 가든 글로브에 있는 아리랑 갤러리아 쇼핑센터(A RGalleria Shopping Center)와 라마다 호텔(Ramada Hotel)등을 설계했다.2010년 저자 팔순 파티에서의 4남매. 왼쪽부터 저자, 익란, 익성, 익풍

18. 국제적십자사와 포로교환


내가 의대 본과 3학년 때 휴전 협상이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나는 그때 국제적십자 팀에 통역 겸 비서로 판문점에서 약 3개월간 일을 하였다. 휴전 협정 합의에 의하여 국제적십자 팀이 조직되고 이 팀이 포로 교환을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이 국제 적십자 팀은 ‘유엔군 참전 국가들의 적십자 대표’와 ‘북한과 중공의 적십자 대표’로 구성되었다. 이때 남한의 적십자사 대표는 후에 외무부장관을역임한 이범석 씨였다. 그때 적십자 팀에는 긴급 상황 발생 시 북한과 연결하는 유일한 전화기가 있었는데,

그 전화를 나와 미군 하사관 한 사람이 책임을 지고 있었다. 둘이서 교대로 전화 옆에 간이침대를 놓고 자면서 전화를 지키고 있었다. 포로교환과 관계된 긴급상황이 발생하지 않아 특별히 전화통화를 할 필요는 없었다.또 포로 교환 시 남북 양쪽 인계소를 왔다 갔다 하며 포로 인수인계 절차가 규정대로 무난하게 진행되는지를 감독하는 일도 하였다. 숙소에서 북쪽과 남쪽의 인수인계소를 헬리콥터로 왔다 갔다98 사선을 넘어서하면서 일을 했다. 북쪽 인수인계소에 가면 북측 기자들이 영사기를 내 얼굴에 바짝 들이대고 5분씩이나 사진을 찍으며 위협을 하였다.

북쪽의 인계소에 오는 인민군 포로들은 도착하는 즉시 하나같이 새로 입고 온 옷을 팬티만 빼 놓고 전부 벗어 던지면서 외쳤다.“이 더러운 양키 옷들 필요 없다.”그리고 그들을 접수하는 인민군 장교 앞으로 가서 여러 구호를한참 목청이 터지게 부르는 쇼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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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김일성 장군에게 충성을 다하겠습니다.”그러면 북쪽에서 포로를 인수받으러 온 장교가 대답했다.“동무들, 조국의 품에 들어오기까지 수고가 많았소.”그들은 김일성 만세를 부르는 의식을 진행했다.그런데 다음 날 보면 벗어 던진 옷들을 다 싹 쓸어가 없어졌휴전회담 1953. 4.다.

그때 필리핀 적십자 대표가 이 광경을 보고 비웃는 말을 한 것이 생각난다.“저 사람들은 옷을 경계선 북쪽으로만 던진다.”자신들이 버린 옷을 밤에 몰래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남쪽에는 무슨 특별한 단체적 의식이 없었고, 받아들이는 장교가 돌아오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는 간단한 인사와 함께 이름과 군번 등만 개별적으로 체크하고 인수하였다.기자들이 남쪽 인계소로 온 미군 포로들에게 질문 공세를 펼쳤다.“북한의 포로수용소에서 어떻게 지냈습니까? 지금 기분이 어떻습니까?”“돌아와서 기쁩니다.”옷을 벗어 던지는 인민군 귀환 포로둘그들은 포로생활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 했다. 대부분의 귀환포로들은 영양실조로 피로해 보이고 말도 별로 없었고, 자유의 세계로 돌아온 것만 기뻐하였다.

어떤 기자가 포로들에게 물었다.“미국에 대해 알고 싶은 소식이 있소?”이 말을 듣고 한 사람이 물었다.“마릴린 몬로가 요즘은 어떻게 지내지요?”또 한 사람은 야구에 대해 물었다.“ 요즘 뉴욕양키스가 월드 시리스에서 승패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이것이 북으로 가는 포로들과 남으로 오는 포로들의 대조적인장면이었다.

포로들이 자기 쪽으로 인계인수되기 직전에 포로생활 중 부당한 취급이나 어떤 불평이 있으면 국제적십자 팀에 보고하는 절차가있었다. 북쪽으로 가는 포로들 가운데는 적십자 팀에 보고할 것이있다고 인터뷰를 요청하는 사람이 많았다. 적십자 팀에서는 그들의불평을 일일이 듣고 모두 기록을 해야 할 책임이 있어서 많은 시간을 들여 기록을 하였다. 그들은 길게 줄을 서서 불만사항을 늘어놓았다.“약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의사를 보기 원해도 들어주지 않았다.”“음식이 신통치 않고 잠자리가 안 좋았다.”그들은 한결같이 자기들이 비인도적인 취급을 받았다고 불평했다.

나는 통역관으로 일일이 이를 영어로 번역했고, 대표들이 번역한 대로 모두 기록하였다. 그러나 북에서 남으로 온 포로 중에는적십자 팀에 인터뷰를 요구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포로교환이완료된 후 북한적십자 팀 대표는 포로들이 불평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 안건에 대한 특별회의가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국제적십자 팀은 그 요구를 받아들여 특별 합동회의가 열렸다.북측에서는 포로들이 비인도적인 취급을 당한 내용을 모두 전세계에 발표해 알리는 공동성명을 내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UN측적십자대표들은 저들이 부당하다고 보고한 것이 다 미리 짜고 한 거짓말이 분명하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다. 그래서 이에 대해 대표들이 옥신각신하였다. 결국 북측이 퇴장한다고 일어서면서, 남쪽도 동시에 퇴장하여 이것이 국제적십자 팀 합동회의의 마지막이 되었다.

당시 남쪽 적십자사 대표가 이범석 씨였는데 이를 모두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후에 나에게 말해 주었다. 그 후 이범석씨는 1983년 외무장관으로 전두환 대통령을 수행하여 미얀마의랑군을 방문 중 대통령경제특보, 재무장관 등 17명의 주요 인사 및경호원들과 함께 북한 김정일의 지시에 의한 테러리스트의 폭탄을맞아 세상을 떠났다.


19. 나의 아내 그레이스(전경자)와의 만남


그레이스와 나는 부산 피난 시절 오기형 교수가 지도하는 기독학생을 위한 협동관에서 만났다. 피난 중에 학생들이 모여 같이 예배드리고, 성경공부를 하고, 여러 가지 주제로 토론도 하며 성경을배우고 봉사도 하였다. 많은 대학생들이 모여 봉사활동을 하였지만, 그때만 해도 남학생과 여학생이 특별히 가깝게 지내거나 데이트하는 일은 없었다.우리는 서울에 돌아와서도 계속 영락교회와 협동관에서 만났지만 데이트는 하지 않았다.

하루는 문리대 뒤쪽에 있던 협동관에서 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에게 그레이스가 길이 컴컴하니 자기를 버스정류장까지만 에스코트해 달라고 하였다. 나는반갑게 그 요청을 받아들였고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이우리들 데이트의 첫 시작이었다. 그때까지 그레이스는 어떤 남자가데이트를 신청하여도 무조건 “No”였다.

그런데 나에게 동행해 달라고 하여 가슴이 뛰고 기뻤다.그레이스는 동료들에 비해 탁월한 미모와 명랑하고 외향적인성격을 가지고 있어 많은 남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그후 시공관에서 오페라 “카르멘” 공연이 있어서 내가 함께 가자고 초대를 했다. 처음에는 습관적으로 거절을 했다. 내가 다시 요청하니까 승낙을 했다.

오랜 데이트 끝에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오기 3개월 전에 약혼을 청했다. 그레이스는 결정을 하지 못하고 우리가 존경하는 서울사대 김석목 교수에게 함께 가서 의논을 드리자고 하였다. 우리의이야기를 들은 김 교수는 신중하게 의견을 주셨다.“미국에 유학을 가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데 약혼을 하고 갈필요가 있겠나? 시간을 두고 기다리다가 결혼을 하게 되면 하고, 한사람이라도 마음이 변하게 되면 접는 것이 좋을 듯하네.”우리 둘은 그 말씀에 동의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결국은 결혼을 할 것이라고 확신을 하고 있었다.

20. 단돈 100달러 들고 도전한 미국 유학


1950년부터 3년에 걸친 전쟁으로 금수강산은 폐허가 되고,국민들은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을 때, 나에게 꿈같은 소식이날아왔다. 미국유학신청 합격통지서를 받은 것이다. 그 당시 의사들은 모두 교환 비자로 미국을 갔는데 나는 문교부 시험을 쳐서 미공군 부인회의 장학금을 받아 학생비자로 가게 되었다.

나는 1956년에 200달러를 내고 화물선을 타고 미국으로 왔다. 배에서 선원들의 일을 함께 도와주는 대가로 싸게 배를 탈 수있었다. 그때 탄 배는 한국배였지만, 구조는 서양식이었다. 아직 수세식 변기를 쓰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아서, 우리가 쓰던 대로 변기위로 올라가 쭈그려 앉아 일을 보았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같이 갔던 유학생들도 다 나와 같이변기 위로 올라가 일을 보았다고 한다. 내 호주머니에는 단돈 100달러밖에 없었다. 부산을 떠난 배가 일본의 오사카 항구에 닿았는데 비가 왔다. 배에 같이 타고 가는 유학생들 여섯 명과 함께 거리구경을 나갔다. 나는 그곳에서 우산 하나를 1달러에 샀다.

또한 그곳에서 난생 처음 나체쇼를 봤다.부산을 떠난 지 3주 후에 배는 미국 오리건 주의 작은 어선촌뉴포트(Newport)에 도착했다. 이민국 직원이 오지 않아 3일간 배에 갇혀 있다가 수속을 마치고 드디어 화물선 생활을 끝내고 미국땅에 첫 발을 디뎠다.

그곳에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캘리포니아 주의 버클리에 도착하여 우리를 후원해 준 미 공군 장교 부인회원들을 만났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잔 후에 다시 버스를 타고 애리조나 주 투산에 있는 애리조나 대학에 도착하였다.나 는 애리조나 에서 1년 동안 메디컬 인턴십(medical internship)을 하고 임상심리학으로 3년 만에 박사학위를 끝냈 다.

애리조나에서 19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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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리조나에서의 인턴생활 1956년


쥐꼬리만한 인턴 월급으로 첫 번째 한 일은 그레이스에게 청색브로치를 사 보낸 것이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그레이스에게 선물을 남기려고 함께 백화점에 갔다가 예쁜 청색 브로치를 돈이 모자라 사 주지 못하고 얼굴이 새빨개져서 나왔던 것이 생각이 나서 인턴생활을 시작하여 월급을 받자마자 가장 먼저 청색 브로치부터 사서 그레이스에게 보냈다.

내가 미국 애리조나대학으로 임상심리학 공부를 위해 떠난 후그레이스는 같은 해 서울사대를 졸업하고 숭의여고 교사로 취직하였다. 내가 6년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교환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은 아쉽게도 소장하고 있는 편지가 없지만 그 당시에는 열렬한 러브레터를 주고받았다. 전화하기가 아주 어려운 때라 6년 동안에 한 번은 미리 연락을 하여 그레이스가 서울의 국제 우체국에 가서 3분간 통화를 하였다. 내가 미국에 와서 3년 동안 대학에서 공부만 하고 한국 사람이 없어 말을 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하는 한국말이 꼭 선교사들이 한국말을 하는 것  같이 들린다고 웃느라 하고 싶은 대화도 제대로 못하고 끝났다.

오래 떨어져 있었으나 서로 보고 싶은 마음은 변하지 않았고 편지로교제가 더 깊어지고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다.내가 심리학 박사학위를 끝내고 미국 정신과 레지던트 훈련을마친 후에 본래는 서울로 돌아가 남명석 정신과 주임교수와 함께 서울의대에 임상심리학과를 개설할 계획이었으나 갑작스럽게 남 교수님이 타계하여 그 계획을 실행할 수 없게 되었다.그래서 귀국을 포기하고 뉴욕 주의 버펄로(Buffalo)에 가서임상심리학 포스트 닥터 펠로우십(Post Doctoral Fellowship)1년을 끝내고 정신과 레지던트(resident)를 시작하였다.

이때에 그레이스에게 미국에 와서 결혼을 하자고 청혼을 했다.그래서 우리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6년간의 편지 데이트를 한 끝에 1962년 5월에 뉴욕 버펄로의 어느 작은 장로교회에서 병원의친구들과 그곳에서 만난 한인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물론 부모님과 친척들은 참석하지 못했다. 당시의 경제적 어려움과 한국사회의 혼란 속에서 미국여행이 거의 불가능했었다.애리조나대학 임상심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1960년.


21. 커뮤니티 액티비스트, 그레이스 (Community Activist, Grace)


나의 아내 그레이스는 미국에 온 후 데이비스 고등학교(Davis Senior High School)에서 교사로서 24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사회 활동도 많이 하여 ‘사회 활동가’가 되었다. 특히 청소년을 돕는 일을 많이 하였다. 그는 《한국일보》에 “Dear Grace”라는
“디어 애비”(Dear Abby)와 같은 질문 응답 형식의 칼럼을 매주 한번씩 1980년부터 1990년까지 10년간 기고하여 이민자들의 청소년 문제와 가정문제 등에 관한 이해를 도왔다.
그레이스는 한국전쟁 때부터 고아들을 돕는 일을 했다.


그레이스의 말을 빌려 한국과 미국에서의 그의 활동과, 미국에서의 우
리들 두 사람의 삶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겠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나는 서울대사대 1년생이었다. 우리는 식구들과 함께 서울 근교에 있는 양평의 어느 산속으로 피난을 가서 숨어 있었다. 서울 수복 후에
서울로 돌아와 보니, 집은 폭격으로 없어졌고 많은 친구들이 사망했거나 북으로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서울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그 당시 산에 숨어 살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서언을 했다.
“주님, 제가 이 전쟁터에서 살게 된다면 제 인생을 오로지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로 일생을 바치겠습니다.”
약하고 병든 자, 나의 도움이 필요한 자, 인권을 잃어버린자, 즉 ‘사회정의’(social justice)를 위해 나의 생을 바치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때는 전쟁 중이니 학교보다는 군대에 들어가 나라를 위해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영락교회에 가서 목사님들께 말씀드렸다.
“목사님, 제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로 일생을 바치겠다고 서언을 했는데, 지금은 전쟁 중이니 군대에 입대하여 나라를 위해 일을 하고 싶습니다.”

목사님들께서 반갑게 환영하시며 나의 이야기를 다 들으신 후에 말씀하셨다.
“지금 나라가 위기에 빠진 것은 사실이지만 꼭 군대에 가는 것만이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것은 아니고 여러 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때 서울에 부모를 잃고 버려진 많은 전쟁고아들이 생겨 서울시에서 천여 명의 고아들을 데려다가 어느 초등학교 건물에서 돌보고 있었다.
영락교회에 계시던 박윤삼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지금은 전쟁 중이라 학교에 나갈 수도 없으니 큰 언니, 큰 누나로서 여기에 있는 고아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 더급한 일입니다.”
박 목사님은 나를 아이들 있는 곳으로 데려가셨다. 건물안에는 어린 고아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나는 다시 생각할 여지도 없이 그 날 당장에 그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기로 결심하고 일을 시작하였다. 오빠에게도 알려 주어 같이 일을 시작하였다.
나는 아이들의 머리를 깎아 주고, 세수를 시키고, 업고 다니면서 밤낮 우는 아이들을 돌보았다. 교실에서 가마니를 깔고 모두 자는데 어찌나 추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밤에 자다가 악몽을 꾸고 우는 아이를 업어 주고, 안아 주고, 화장실에 같이 가고, 오줌 싸면 닦아 주고, 옷을 갈아 입혔다. 또한 추운 겨울이라 아이들의 손과 발이 얼어 아프고 피가 나서 어떤 때는 걷기조차 힘들었다. 그러나 항상 기쁘고 감사하게 이 아이들을 위로하고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것이라 생각한다.
중공군이 개입하여 다시 서울에서 후퇴할 때에 미 공군 헤스 대령(Col. Dean E. Hess)의 도움으로 고아들을 제주도까지 비행기로 수송했다. 그때 나도 함께 제주도로 가서 고아들을 돌보며 지냈다.

“서울사대가 부산에서 다시 개강되었으니 이제 돌아와서 다시 복학하여 공부를 시작하라.
이런 메시지가 담긴 부모님의 편지를 받고, 내가 떠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아이들이 울며 매달렸다.
“선생님, 가지 마셔요. 우리는 선생님이 필요해요.”
우는 아이들을 차마 두고 올 수 없어서 미루고 미루다가 1년 후에야 겨우 울면서 제주도를 떠나 부산으로 갔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고아나 한국 입양아에 관심이 많아 10만 명이 넘는 해외입양아와 그 가족들이 모이는 단체(KAAN: Korean American Adoptee and Adoptive Family Network)를 돕고 있다.

서울사대를 졸업하고 숭의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는 버스를 타고 용산에서 내려 집에 가고 있는데, 청소년들이 길에서 칼부림하며 싸우고 있었다. 나는 뛰어가서 그 아이들을 말렸다.
“얘들아, 칼을 가지고 싸우면 위험하다. 무슨 일 때문에 다투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 하렴.”
그 중의 몇 아이들이 나를 보고 놀라 반가워하며 말했다.
“선생님, 저희들은 제주도 고아원에 있었는데 너무 배가 고프고 재미가 없어서 도망 나왔어요.”
“그랬구나. 그동안 너희들도 자라고 얼굴이 많이 변해 알아볼 수 없구나. 하지만 정말 반갑다. 그렇지만 이렇게 또래 친구들하고 싸우고 살면 안 되지.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도와주면 좋겠니?”

“저희들도 학교 교복을 입고 배지를 달고 공부하고 싶어 요.”
“그렇구나.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니?”
“저희는 밤에는 정거장에 가서 자고, 배가 고프면 굶기도하고, 참을 수 없으면 어쩔 수 없이 훔쳐서 먹기도 해요.”
그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너무 가슴 아프고 안타까웠다.
나는 그 날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들과 의논하고 우리 친구들과도 의논을 했다.
“전쟁 때문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굶주리면서 길거리에서 배회하는 것이 너무 가엽어 보여요. 할 수 있다면 야간 직업학교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우리도 기꺼이 동참할게.”

오빠, 동생, 교사 친구들, 의과 대학생, 선배, 후배들 약20명이 자원 봉사를 하기로 하고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지역 국회의원이었던 황성수 의원과 경찰서장을 방문하여 나의 계획을 설명했다.
“길에서 배회하는 고아들을 위해 야간직업학교를 열고 싶습니다. 저희를 좀 도와주시겠어요?”
“젊은이들이 그런 훌륭한 뜻을 세우다니 장합니다. 우리도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황의원의 배려로 자유당 사무실 건물을 무료로 쓰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직접 나와 함께 용산의 공장들을 방문하여
사장들을 설득하는 데에도 힘을 보태 주셨다.
“사장님, 길에서 배회하는 아이들에게 야간직업학교를 세워 공부할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아이들을 몇 명씩 공장에서 낮에는 기술을 가르치고, 먹고 잘 수 있게 해 주고, 밤에는 우리 학교에 나와 공부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시겠어요?”
“좋습니다. 저희도 적극적으로 협조하겠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용산직업학교가 시작되었다.

한미재단과 각 중고등학교가 앞장서서 도와주었다. 부모님께서는 재정적인 도움을 주셨고, 선배와 후배들은 낮에는 각자의 일을 하다가 밤에 와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무료 봉사를 기쁨으로 하였다. 신문 잡지에서도 잘 보도해 주어 이 학교가 많이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이 이 학교에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었다.

용산직업학교는 국회의원의 도움으로 국유지를 얻어 학교건물을 짓고(기숙사, 공장, 중고등학교 등) 확장하기로 하고, 또 정부의 도움으로 미 8군과 한미재단 등의 후원을 받아 건축을 시작하려는 큰 꿈을 갖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비용을 들여 설계도 하였다. 그러나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잘 되었지만 우리의 꿈과 계획은 큰 타격을 받았다.

그 무렵, 당시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던 지금의 내 남편으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나는 학교를 정부에 맡기고 도미하기로 결정했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도움을 많이 주신 미국 할머니 한분이 계셨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친절한 할머니 지넷 톰슨 (Ms. Jeanette Thompson)의 집에 세를 들어 살면서 그 분의 사랑과 지도로 빨리 미국을 배우게 되었다. 나를 마치 친딸처럼 스스럼없이 대하며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아들 하나, 딸 둘을 두신, 거의 80살이 된 그 할머니는 남편이 돌아가시고, 혼자서 살았다. 그런데 그의 외아들이 2차 대전 때에 어느 태평양의 섬에서 전사하여 매우 슬퍼하며 외롭게 살고 있었다.

그때 남편이 될 루크(Luke)가 그의 집에 방을 얻어 살고있었다.
“때로 루크가 내 아들처럼 보여요.”
그 할머니는 종종 루크에게 식사도 해 주고 한 가족 같이대했다. 내가 결혼하러 미국에 왔을 때에도 그 할머니는 나를 마치 자신의 친딸 같이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 할 머니는 나에게 미국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장을 볼 때에는 세일하는 것만 골라서 시장보기, 옷감 사서 자기 옷을 만드는 것부터 모든 것을 만들어 쓰기, 청소하는 법,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부활절 등 미국 명절 음식 만들기, 오븐, 세탁기 사용법 등 나는 모든 것을 짧은 시간에 배울
수 있었다.

1년이 지난 후, 남편이 캘리포니아에 좋은 직장이 생겨 이사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차로 운전하여 미국을 횡단하였다. 캘리포니아에 오다가 일리노이 주(Illinois)에서 차가 눈에 미끄러져 언덕 밑으로 처박혀 어려운 일을 당했다. 높은 산악지대라 인적이 없고, 캄캄하고, 추웠다. 몇 시간 후에 제설차가 와서 차를 끌어 올리고 우리를 구해 주었다. 나는 그때 큰 아이를 임신했을 때라 많이 걱정을 했으나 후에 아기가 건강하게 잘 출생해 감사하게 생각했다.

떠날 때는 춥고 눈보라 치는 곳이었는데 캘리포니아의 배카빌(Vacaville)에 도착하니 꽃이 만발한 따뜻한 봄이었다. 동양인도 많고 날씨도 아주 좋았다. 큰 아들 데이비드 (David)를 키우면서, 동네 친구들과 여러 가지 정보도 교환하고 교회(미국장로교회) 생활도 재미있었다. 2년 후에 둘째 다니엘(Daniel)이 생겨 두 아이의 엄마로서 아주 바쁘게 지내 며 많은 것을 배우고 보람 있게 지냈다.

친구 집에서 중학교 교장 부부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그교장 선생은 나에게 관심을 갖고 물었다.
“한국에서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네, 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있었습니다.”
“정말입니까? 캘리포니아에서는 교사들이 너무 부족합니다. 우리 학교에서도 좋은 교사를 찾고 있습니다. 부인께서도 주 교육부에 교사 자격증을 신청해 보십시오.”
며칠 후 교장 선생님은 신청서를 가지고 우리 집으로 오셨다.
“저도 가르치고 싶지만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자신이 없습니다.”
“그것은 걱정하지 마시고 신청해 보세요.”
교장 선생은 나에게 계속 신청서를 낼 것을 권했다. 그 당시 나는 영주권은 받았으나 시민권은 없었다.

주 교육국에서는서울 사대의 성적표, 졸업증명서, 한국의 고등학교 교사 경력을 모두 100% 인정하고 크레디트(credit)를 주었다.
“미국 헌법과 영어 시험에 합격하고 앞으로 미국 시민이 되겠다는 약속만 하면 교사자격증을 발급해 드리겠습니다.”
그대로 모든 절차를 거쳐 유치원부터 12학년까지 가르칠수 있는 임시 자격증이 나왔다. 그래서 나는 경험을 얻기 위해 초등학교에서 대리 교사(Substitute Teaching)로 시작하여 가끔 학교에 나가 가르쳐 보았다. 가르치는 것을 워낙 좋아 했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가르칠 수 있었다.

남편 루크는 캘리포니아 에서 의사면허증(medicall license)를 받기 위하여 외국 의과대학 졸업생에게만 요구하는 기본 과학 시험을 보고 인턴십(internship)을 다시 해야 했다. 뉴욕에서 이미 모두 마쳤지만 캘리포니아에서는 따 로 요구했기 때문에 다시 1년을 더 해야 했다.

외국에서 온 의사들이 모두 겪는 어려움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로 옮겨 루크가 그곳에 있는 마운트 자이언 병원(Mt. Zion Medical Center)에서 인턴을 시작했다.
월급이 백 달러($100)라 가족의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 당시 집세가 백 달러였다. 그때는 서울의 가족들에게도 조금씩 도와야 할 형편이었다.
우리는 살기가 너무 어려워 내가 학교에 교사로 취직하려했었다.

한 학교에 면접을 하러 갔는데 교장 선생님이 내 이야기를 듣고 충고해 주었다.
“지금 부인께서는 아이들이 어리고, 아이들에게 엄마가 꼭 필요한 때이니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생활비는 병원에서 빌려 쓰십시오.”
그래서 아이들이 자랄 때까지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았다.
교장의 충고에 대해 지금까지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생활비는 병원에서 대출을 받아 썼는데, 갚는 데 15년이 걸렸다.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생활은 배카빌에서 보다 복잡했지만 한인감리교회도 있고 한인 학생들도 많이 있어서 좋았다. 우리 가족은 송정률 목사가 시무하시는 상항감리교회에 다녔다.

그런데 이 교회에는 주일학교가 아직 없어 어린 아이들이 부모들과 같이 예배를 드리니 지루하고 힘들어 보였다. 나는 목사님과 의논한 후 선생님들을 모아 주일학교를 시작하였다.
루크는 인턴십을 끝내고 나파 주립 정신병원(Napa State Hospital)에서 1년 반 동안 정신과 레지던트 훈련을 마쳤다. 레지던트 훈련을 마치고 1968년에 샌 루이스 오비스 포(San Luis Obispo)로 이사하게 되었다.

남편이 그곳의 주 교정국 소속 병원에서 2년간 근무하는 동안 나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California State Polytechnic University,San Luis Obispo)에서 상담학과 아동발달학으로 교육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때 한국의 친정어머가 오셔서 4살, 2살짜 리 아이들을 키워 주시고 살림까지 맡아 주셨다. 일제 강점기때 평양신학교를 나오신 어머니는 교회일과 자녀들, 손자들 키우시는 일에 사랑과 희생으로 일생을 바치시고 2001년에 92세로 로스앤젤레스에서 돌아가셨다.

내가 1969년 12월에 공부가 끝나자 남편 루크가 배카빌로 돌아가게 되어 데이비스(Davis)에 첫 집을 사고 이사하였다. 데이비스는 대학촌이라 진취적이고 문화적인 소도시이다. 나는 욜로 카운티(Yolo County)의 헤드 스타트(Head Start) 프로그램(저소득층 어린이를 위한 취학전 교육 프로그램) 책임자로 있으면서 데이비스 가주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 Davis)의 계속교육반(Continueing education)에서 부모를 위한 아동교육 과목을 가르쳤다. 남
편과 나는 미국연합장로교회의 장로로 소속교회, 노회, 총회 의 여러 분과위원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데이비스에 살고 있을 때 나는 새크라멘토 한인회 회장으로도 봉사하였다.

가족사진, 1985년, 왼쪽으로부터 성우, 저자, 그레이스, 성철(장남)""

22. 인종관계 개선에 앞장선 그레이스


그레이스는 탁월한 미모와 대화기술, 외향적인 성격 등으로 어려서부터 지도자적 자질을 보여 주었다. 데이비스 고등학교에서는필수과목으로 성교육, 스트레스 관리, 건강관리, 재정관리, 시간관리, 감정관리 등 여러 가지 생활에 필요한 관리방법을 가르쳤다.데이비스 고등학교에서 한 백인 학생이 베트남 학생을 살해한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이 인종혐오범죄로 판결이 났다.

그레이스는종합교육 구내의 모든 학교와 시청 안에 인종관계위원회(HumanRelations Committee)를 설치하도록 요구하였다. 시 의회와 교육구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법으로 공포하였다. 이 법으로 모든 학교가 인종관계위원회를 조직하여 인종관계를 개선하고, 인종혐오범죄의 예방책을 만들게 되었다. 그레이스는 각 학교를 방문하여 이법이 잘 시행되도록 세미나 교육프로그램 등을 실시하였다. 그 이후에 데이비스 고등학교에 “Friendship Day”를 정하여 인종관계의개선을 도모하였다.

이때 그레이스는 새크라멘토 한국학교 교장을122 사선을 넘어서역임하였고, 그 지역한인회 회장으로도 봉사하였다. 한인 1.5세와2세들의 전국 조직인 한미연합회 이사, 그리고 후원자로 26년간 도우면서 새 세대 지도자 양성에 힘을 썼다.그레이스는 지역교회의 장로로서 활약했고, 미 연합장로교총회의 여러 위원회에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70년대에 미국연합장로교 소속 한인교회가 350개가 있었다. 그레이스는 총회 협조위원회(Korean American Consulting Committee ofPresbyterian Church USA)의 의장으로 총회 소속 한인교회들의 교역자 평생교육, 주일학교 교재 출판, 한영찬송가 출간 등의
사업을 돕는 일을 하였다.

일본계 마이크 혼다가 주 하원의원이었을 때 그레이스는 그와함께 위안부 문제로 같이 일하면서 가깝게 지냈다. 혼다 의원은 후에 연방 하원의원으로서 연방의회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혼다 의원은 또 연방법으로 “한국의 날”을 제정하여 선포하게 하는 데 앞장섰다.
또 그레이스는 주 상하원 의원으로 출마하는 후보자들의 인종문제에 대한 성향을 조사하여 소수민족의 권리에 호의적인 후보자를 도와 선거운동을 하는 소수민족연합체를 결성 운영하였다. 메리 정 하야시(Mary Chung Hayashi)가 하원의원으로 출마했을때, 많이 도와주어 첫 여자 한인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아내 그레이스가 시작한 실비치 다문화축제 준비위원들. 앞줄 왼쪽부터 네번째가 그레이스

남가주 실비치 은퇴촌으로 이사 온 이후에도 그레이스는 이곳 한인회 회장으로 봉사했고, 다문화축제를 4년 전에 시작하여 매년 실시하고 있는데 이 행사는 이 지역 커뮤니티에 많은 지지와 환영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은 활발한 봉사활동을 인정받아 그레이스는 2002년 한국정부로부터 동백장을 수상했다. 다음에 있는 악보는 내가 샌프란시스코에 온 후 인턴을 다시 하면서 이 일이 너무 힘들어 향수에 빠진 감정을 표현하여 내가 작사와 작곡을 한 곡이다.

23. 정신과 의사와 학자의 길

1970년에 나는 배카빌에 있는 주 교정국 정신병원에서 연구실장으로 취임했다. 그 당시 배카빌 정신병원은 미국에서 최고의 정신치료 및 재활센터로 법의학계에서 크게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미국과 세계 여러 곳에서 법의학 관계 학생, 연구원, 의사들이 단기간 연구와 훈련을 위해 많이 방문하였다. 같은 때 나는 나파주립병원의 정신의학부와 함께 가주 교도국의 정신과 레지던트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실시되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내가 교도국의 정신과 주임이 되었을 때 당시 유명했던 중범찰스 맨슨(Charles Manson), 대통령 후보 로버트 케네디를 살해한 서핸 서핸(Sirhan Sirhan), 30명 이상의 농장노동자를 살해한 완 코로나(Juan Corona) 등 강력범들의 정신 상태를 분석평가하고 심리요법을 실시하였다.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 교수로 있던 LSD의 선도자 티모시 리어리(Timothy Leary)가 마약범으로실형을 받아 교도소에 있었는데 내가 그를 3년간 연구 조교로 썼다. 그는 나에게 앞으로 사람들이 가서 살 외계 우주의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가는 몽상의 사람이었다.

같은 때 나는 데이비스의 가주의대 정신과 임상교수로 있으면서 임상심리학과 법의학에 관한 세미나를 많이 하였다. 당시의 그곳 주임교수였던 조 튜핀(Joe Tupin)과 함께 폭력적 정신병환자를 대상으로 치료약 리티움 카보네트(Lithium Carbonate)의 효능에 대한 초창기 연구를 실시하였다. 그때 내가 쓴 논문인 “미주한인의 정신치료”(Psychiatric Care of Korean-Americans)는 그 후 미국 다문화 정신의학 분야에서 기본적 독서목록이 되고 있다.
(Luke I. C. Kim, “Psychiatric Care of KoreanAmericans”, in Albert C. Gaw, ed. Culture, Ethnicityand Mental Health. London: American PsychiatricPress, Inc. 1993. Pp. 347-376.)

이후 한국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Korean Ethos)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국인의 ‘정’ ,‘한’ ,‘체면’ ,‘눈치’ ,‘팔자’ ,그리고 ‘멋’ 등에 관한 논문을 많이 발표하여 미국 정신의학계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여러 번 상도 받았다. 그중에 미국정신의학협회에서일 년에 한 사람씩 뽑아 상을 주는 Kun-Po Soo Award(AsianAmerican Award)를 1997년에 받은 것이 나에게는 학자로서가장 보람 있게 생각된다.

나는 1979년에 한미한인정신과전문의협회(Association of Korean American Psychiatrists)를 창
설하고 600명 멤버의 초대회장을 지냈는데 이 협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또 미국정신의학회 아시안 아메리칸 분과 에서 발 행하 는《Asian American Psychiatric News》의 편집장을 5년간 했다. 이와 같은 추세와 함께 미국정신의학협회(AmericanPsychiatric Association)의 정신과 전문의 자격 소위원회에서는 다문화정신의학 과목을 정신과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필수과목으로 설정하게 되었다.

지금은 미국에서 정신과 전문의가 되려면 누구나 이 과목을 택하여야 된다. 내가 문화정신의학(Cultural Psychiatry)에서 강조한 점은어떻게 하면 동양과 서양의 가치와 문화적 차이와 공통점을 이해하여 이를 정신의학 분야에 적용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과거의 미국정신병 치료에 대한 연구는 주로 백인들의 경험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백인이 아닌 사람들의 우울증이나 그 이외의 정신질환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에 상당한 제한이 있었다.

나는 아시안 아메리칸정신의학자로서 우선 동양의 독특한 가치나 사고방식 그리고 문화적 특성을 연구하여 이를 정신질환의 진단과 치료에 적용할 수 있는제도적 장치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Cultural Psychiatry’는 비교적 새로운 분야의 정신의학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정확하고 적절한 한국어  단어가  없다. ‘Cultural  Psychiatry’를  직역하면  ‘문화정신의학’이나 ‘문화적정신의학’으로 번역이 되는데, 사실은 ‘다민족, 다문화를 비교 연구하여 그 지식을 임상적으로 응용하자는 것’이 정확하게 표현된 전문적 ‘정의’(definition)이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는 ‘다문화 정신의학’ 또는 ‘비교문화 정신의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DSCF0054.JPG

저자의 집에서 찍은 가족사진. 앞줄 오른쪽부터 Jannet(둘째 Danny의 처),
Jaffrey(Danny의 첫 아들), Luke(Danny의 둘째 아들), Jaisohn(David의 아들),
Tessa(David의 딸), Julie(David의 처), David(첫째 아들), 저자, Grace, Danny(둘째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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