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1.27 08:11
16. 해군 입대 초량교회 부속 건물에서 합숙소로 거처를 옮길 당시 해군에서 특별히 의과대학생이나 의예과 학생들을 의무 하사관으로 모집했다. 그 당시 의예과 학생이었던 나는 해군에 입대하여 진해에서 한달 동안의 기초 훈련을 받았다. 그때 교관들이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던 콤플렉스 때문에 대학생 훈련병들을 ‘기죽이기’ 위해 훈련을힘들게 시켰다. 밤중에 갑자기 비상을 걸어 훈련생들이 캄캄한 가운데 신발을 제대로 찾아 신고 나오지 않으면 돌멩이가 많은 운동장을 맨발로 뛰어 돌게 하여 피를 흘리게 한 일도 가끔 있었다. 기초 훈련 후에 의무 하사관 훈련을 3개월 동안 받았다. 하사관 훈련은 아주 고되고 심했다. 하사관 훈련을 시켰던 교관은 이북에서 온 의사였는데, 엄하고 까다롭게 시험을 자주 쳤다. 계급은 의과대학 학생들의 학년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 후 진해해군병원에서회충검사 책임자로 복무하기 위해 한 달 동안 부산에 있는 미해군 병원선 리포스(Repose)와 컨설레이션(Consolation)에서 회충검사에 필요한 훈련을받았다. 그 당시 한국 해병대가 전선에서 많이 부상을 당해 나는반 년 동안 진해 병동에서 환자들의 치료를 도왔다.한국 해병대에 의무 하사관이 더 필요해 나를 아주 해병대로 편입시켰다. 그 후 나는 부산에있던 해병대 본부 의무과에 가서 인사행정을 보았다. 내가 글을 잘쓴다고 그쪽으로 발령을 낸 것이라 들었다. 해병대 본부에 있을 때는 부산 영도에 있는 절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는 가족에게도 가끔 찾아 갈 수 있었다.그러던 중 정부에서 의사배출을 증가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의예과 학생들과 의과 대학생들을 빨리 제대시켜 복교할 수있도록 하는 새로운 법안을 통과시켰다. 진해해군병원에서 의무병 삼조하사관 복장을 하고(1951년)
17. 의과대학 복학과 정신과와의 만남 의과대학 복학나는 일 년 반 만에 해군에서 제대하고 부산에 있는 임시 서울의대로 복교하였다. 우리는 모두 천막교실에서 공부를 했다. 캄캄한 천막교실 안에서 60촉의 불을 켜 놓고 책이나 그림 자료도 없이교수가 칠판에 그림을 그리면서 해부학 강의를 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다. 해부학 시험을 쳤는데 모두 낙제를하였다. 학생 대표들 몇이 쌀가마를 사 들고 교수집을 찾아가 탄원도 하고 하여 재시험을 친 일이 있다. 그래서 해부학 공부는 미국에와서 의사 면허시험을 칠 때 다시 철저히 해야 했다. 이때에 컬러사진으로 자세히 되어 있는 해부학 책을 여러 권 사서 책장에 꽂아 놓고 공부했었는데 이사할 때마다 피난시절의 천막교실 기억 때문에버리지 못하고 항상 가지고 다녔다.부산에서 복교하여 공부할 때 나는 가정교사도 하고 선거운동도 하여 학비를 벌었다. 한 여학생의 가정교사를 했는데 그의 아버지가 이화의대 소아과 교수로 비교적 부유하여 매일 그 집에 가서저녁을 먹고 공부를 시켰다. 이 학생은 후에 이화대학에 거뜬히 입학하였다. 학기 학비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수입이 필요했다. 선거운동을 하여 학비를 보충했다. 선거운동은 황성수 씨가 부탁하여당시 자유당 이승만 대통령 후보와 이시영 부통령 후보 선거 선전물을 벽과 전봇대에 붙이는 일이었는데, 전남 순천까지 가서 이 일을 했다. 이렇게 하여 한 학기 학비를 벌곤 했다.서울의과대학에 다니는 동안에 종교 음악가인 박재훈 선생과시인 석진영 씨와 6개월 동안 석진영 씨 집에서 같이 합숙 생활을하며 기도와 성경 말씀으로 함께 수양을 했다. 그 당시 석진영 씨는박재훈 선생이 작곡할 수 있는 시를 많이 써 주고 박재훈 선생은 그시를 바탕으로 찬송가를 작곡하곤 했다. 집에는 피아노가 없어서주일이 되면 영락교회에 가서 자신이 작곡한 곡을 처음으로 쳐 보곤 하였다. 그들과 함께 살면서 나는 그 당시 신학자들의 영어 원서로 공부를 시켜주며 그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곤 하였다. 그 후 석진영 씨는 미국에 와서 「복음의 전령」이라는 잡지를 출판하며 자신의 글을 연재하다가 10년 전에 돌아가셨다. 500곡 이상의 찬송가와 종교음악을 작곡하신 박재훈 선생은 목사가 되어 현재 캐나다 터론토에 계시며 요즘 유관순을 주제로 한 오페라를 작곡하셨다.나는 필그림 합창단에서 테너 파트를 맡았었다. 음악가 이동훈 선생이 필그림 합창단을 지휘하셨다. 그 당시 같이 공연을 준비하던 필그림 합창단 단원으로는 박재훈, 이동훈 선생이 계시고 또다른 종교 음악가이신 장수철 씨도 함께 미국 순회공연을 기획하며준비했었는데 결국 실현하지는 못했다. 후에 미국에 와 있을 때, 버펄로에 선명회어린이합창단을 이끌고 공연을 오셨던 장수철 씨와반가운 재회를 할 수 있었다.서울 귀환과 정신과와의 만남내가 부산에서 본과 2학년 때 우리 가족이 모두 서울의 봉래동 집으로 돌아왔다. 서울 의대와 대학병원 본관은 전쟁 중 인민군과 미군이 번갈아 사용했었는데 내가 복교했을 때는 다시 서울대학병원으로 회복되었다. 그때 나하고 같이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의과대학에 입학한 친구 김익산이 심한 우울증으로 많은 어려움을겪고 있었다. 이 친구는 북에서 내려온 누이와 함께 있다가 누이가결혼하게 되어 혼자 살면서 외로움을 많이 탔다.그 당시에 우리 집에도 자주 오고 나와 친하게 재냈었는데 본과 4학년 때 칠판에 말이 되지 않는 이상한 시를 쓰곤 했다. 이 친구가 4학년 때 조울증이 심해져 정신과 병동에 입원했는데 내가 자주 면회를 갔었다. 이때 정신과 주임교수 남명석 교수가 나에게 관심을 두더니 자기 방을 하나 줄 테니 와서 엑스턴(extern)을 하라고 하였다. 그전에는 안과에 관심이 있었는데 남선생을 만난 후에 정신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남 교수는 내가 미국 유학을 올 때 나에게 임상심리학을 전공하고 와서 자기와 함께 서울의대에 임상심리학과를 만들자고 하였다. 이것이 내가 미국에 와서 임상심리학으로 박사학위를 하고 정신과 레지던트(resident)를 하게 된 배경이다. 정신과병동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던 내 친구 김익산은 그 후 잘 치유되어일생 동안 외과의사로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다가 얼마 전에 타계하였다. 우리 가족들의 이야기어머니가 납치되신 후 아버지는 혼자서 부모의 역할을 하시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 서울 환도 후 가족들이 모여 의논하고 아버지께 재혼을 권유하며 간곡히 말씀드렸다.“아버지, 저희 때문에 너무 고생하셔요. 이제 저희 걱정은 그만하시고 새 어머니를 모시고 사셔요.”“아니다. 나는 절대로 재혼을 하지 않겠다.”아버지는 완강히 버티셨다. 그러나 자녀들과 친척들도 계속 아버지를 설득했다.“아버지, 이 집안에는 아버지를 내조해 주실 어머니가 꼭 필요해요. 그래야, 우리 자녀들이 각기 자신의 길을 가죠.”내가 미국에 오기 직전에 아버지는 뜻을 굽히시고 재혼을 하셨다. 새 어머니는 부산 해운대에서 고아원을 맡아 운영을 하셨는데 내 처남 김영선의 아버지가 소개를 하셨다. 새 어머니는 평양에서 기독교 계통 여학교를 나오셨다. 서울에 와서는 대한부인회에서일을 하셨다. 새 어머니의 배경이 친어머니와 비슷하셨다. 새 어머니가 오셔서 가족을 잘 돌봐 주셨고, 특히 막내 익풍이를 사랑하셔서 막내가 많이 따랐다. 후에 두 분이 우리 집에서 가까운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서 사셨는데 아버지는 교회 장로로, 어머니는 권사로 활동을 많이 하셨다. 어머니는 성인학교 영어교실에 다니셨고 몇년 동안 개근상을 받으셨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시고 아픈 교인들을 심방하셨다. 일생 동안 자녀들을 자상하게 돌보아 주신 아버지는 94세까지 건강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이 매부의 아버지(김연수 박사)는 한국에서 중국으로 파견된 최초의 의료선교사였다.익란은 첫 아이를 낳고 엄마로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서양화 전공으로 졸업하였다. 그 후 숭의여고에서 35년을 미술교사로있다가 은퇴하였다. 여동생의 첫 아기가 어렸을 때는 내가 가끔 가서 기저귀도 갈아 주고 업어 주기도 했는데 지금은 서울의 새문안장로교회 이수영 목사 사모가 되었다. 평생 동안 미술활동을 한 익란은 대한민국 4, 6, 8, 9회 국전에 입선했고, 그의 작품들은 한국미술협회전, 한국여류화가전, 한국기독교미술인전 등 많은 미술전을 통해 발표되었다.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파리에서 있던 단체전에도 그의 작품이 전시되었다.내 동생 익성이는 부산 피난시절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상대에 입학하여 서울로 와서 졸업을 하였다. 졸업 후 1960년미국에 와서 남일리노이 대학(Southern Illinois University)에서 경제학 석사 를 끝냈다. 이어서 뉴올리언스의 툴레인 대학(Tulane University)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한 후 뉴욕의 뉴욕,뉴저지, 코네티컷 3개 주 광역권 개발회사에서 경제 분석가로 일을하다가 은퇴하였다. 익성이는 나에 비해 상당히 외향적이고 활동적이어서 뉴욕지역의 US Junior Chamber of Commerce 회장등 커뮤니티 활동을 많이 하였다.막냇동생 익풍(Paul Kim)은 부산 피난 시절 서울중학교에입학하여 서울 복귀 후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익풍은 고등학교 졸업 후 임원식 씨가 지휘하던 KBS교향악단의 플루트 주자로 2년간 활약하였다. 군대 복무 후 1962년에 미국에 와 버클리가주대학(UC Berkeley)에서 건축학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일생을 건축가로 활동하고 있다. 졸업 후에 뉴욕에서 5년간 유명한 건축회사에서 경험을 쌓고 로스앤젤레스로 옮겼다. 익풍이 설계한 건물 중에는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 잘 알려져 있는 옥스퍼드 팰리스 호텔(Oxford Palace Hotel), JJ 그랜드 호텔(JJ GrandHotel), 로텍스 호텔(Rotex Hotel) 등이 있고, 나성영락교회의김계용 목사 교육관, 나성침례교회 교육관 등이 있다. 최근에는 유명한 피겨 스케이터 미셸 콴(Michelle Kwan)의 동서 아이스 스케이트장(East West Ice Palace, Artesia)과 세리토스 장로교회(Cerritos Korean Presbyterian Church)의 교육관도설계했다. 또 가든 글로브에 있는 아리랑 갤러리아 쇼핑센터(A RGalleria Shopping Center)와 라마다 호텔(Ramada Hotel)등을 설계했다.2010년 저자 팔순 파티에서의 4남매. 왼쪽부터 저자, 익란, 익성, 익풍 18. 국제적십자사와 포로교환
이 국제 적십자 팀은 ‘유엔군 참전 국가들의 적십자 대표’와 ‘북한과 중공의 적십자 대표’로 구성되었다. 이때 남한의 적십자사 대표는 후에 외무부장관을역임한 이범석 씨였다. 그때 적십자 팀에는 긴급 상황 발생 시 북한과 연결하는 유일한 전화기가 있었는데, 그 전화를 나와 미군 하사관 한 사람이 책임을 지고 있었다. 둘이서 교대로 전화 옆에 간이침대를 놓고 자면서 전화를 지키고 있었다. 포로교환과 관계된 긴급상황이 발생하지 않아 특별히 전화통화를 할 필요는 없었다.또 포로 교환 시 남북 양쪽 인계소를 왔다 갔다 하며 포로 인수인계 절차가 규정대로 무난하게 진행되는지를 감독하는 일도 하였다. 숙소에서 북쪽과 남쪽의 인수인계소를 헬리콥터로 왔다 갔다98 사선을 넘어서하면서 일을 했다. 북쪽 인수인계소에 가면 북측 기자들이 영사기를 내 얼굴에 바짝 들이대고 5분씩이나 사진을 찍으며 위협을 하였다. 북쪽의 인계소에 오는 인민군 포로들은 도착하는 즉시 하나같이 새로 입고 온 옷을 팬티만 빼 놓고 전부 벗어 던지면서 외쳤다.“이 더러운 양키 옷들 필요 없다.”그리고 그들을 접수하는 인민군 장교 앞으로 가서 여러 구호를한참 목청이 터지게 부르는 쇼를 하였다.
“우리는 김일성 장군에게 충성을 다하겠습니다.”그러면 북쪽에서 포로를 인수받으러 온 장교가 대답했다.“동무들, 조국의 품에 들어오기까지 수고가 많았소.”그들은 김일성 만세를 부르는 의식을 진행했다.그런데 다음 날 보면 벗어 던진 옷들을 다 싹 쓸어가 없어졌휴전회담 1953. 4.다. 그때 필리핀 적십자 대표가 이 광경을 보고 비웃는 말을 한 것이 생각난다.“저 사람들은 옷을 경계선 북쪽으로만 던진다.”자신들이 버린 옷을 밤에 몰래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남쪽에는 무슨 특별한 단체적 의식이 없었고, 받아들이는 장교가 돌아오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는 간단한 인사와 함께 이름과 군번 등만 개별적으로 체크하고 인수하였다.기자들이 남쪽 인계소로 온 미군 포로들에게 질문 공세를 펼쳤다.“북한의 포로수용소에서 어떻게 지냈습니까? 지금 기분이 어떻습니까?”“돌아와서 기쁩니다.”옷을 벗어 던지는 인민군 귀환 포로둘 어떤 기자가 포로들에게 물었다.“미국에 대해 알고 싶은 소식이 있소?”이 말을 듣고 한 사람이 물었다.“마릴린 몬로가 요즘은 어떻게 지내지요?”또 한 사람은 야구에 대해 물었다.“ 요즘 뉴욕양키스가 월드 시리스에서 승패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이것이 북으로 가는 포로들과 남으로 오는 포로들의 대조적인장면이었다. 포로들이 자기 쪽으로 인계인수되기 직전에 포로생활 중 부당한 취급이나 어떤 불평이 있으면 국제적십자 팀에 보고하는 절차가있었다. 북쪽으로 가는 포로들 가운데는 적십자 팀에 보고할 것이있다고 인터뷰를 요청하는 사람이 많았다. 적십자 팀에서는 그들의불평을 일일이 듣고 모두 기록을 해야 할 책임이 있어서 많은 시간을 들여 기록을 하였다. 그들은 길게 줄을 서서 불만사항을 늘어놓았다.“약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의사를 보기 원해도 들어주지 않았다.”“음식이 신통치 않고 잠자리가 안 좋았다.”그들은 한결같이 자기들이 비인도적인 취급을 받았다고 불평했다. 나는 통역관으로 일일이 이를 영어로 번역했고, 대표들이 번역한 대로 모두 기록하였다. 그러나 북에서 남으로 온 포로 중에는적십자 팀에 인터뷰를 요구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포로교환이완료된 후 북한적십자 팀 대표는 포로들이 불평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 안건에 대한 특별회의가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국제적십자 팀은 그 요구를 받아들여 특별 합동회의가 열렸다.북측에서는 포로들이 비인도적인 취급을 당한 내용을 모두 전세계에 발표해 알리는 공동성명을 내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UN측적십자대표들은 저들이 부당하다고 보고한 것이 다 미리 짜고 한 거짓말이 분명하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다. 그래서 이에 대해 대표들이 옥신각신하였다. 결국 북측이 퇴장한다고 일어서면서, 남쪽도 동시에 퇴장하여 이것이 국제적십자 팀 합동회의의 마지막이 되었다. 당시 남쪽 적십자사 대표가 이범석 씨였는데 이를 모두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후에 나에게 말해 주었다. 그 후 이범석씨는 1983년 외무장관으로 전두환 대통령을 수행하여 미얀마의랑군을 방문 중 대통령경제특보, 재무장관 등 17명의 주요 인사 및경호원들과 함께 북한 김정일의 지시에 의한 테러리스트의 폭탄을맞아 세상을 떠났다.
하루는 문리대 뒤쪽에 있던 협동관에서 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에게 그레이스가 길이 컴컴하니 자기를 버스정류장까지만 에스코트해 달라고 하였다. 나는반갑게 그 요청을 받아들였고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이우리들 데이트의 첫 시작이었다. 그때까지 그레이스는 어떤 남자가데이트를 신청하여도 무조건 “No”였다. 그런데 나에게 동행해 달라고 하여 가슴이 뛰고 기뻤다.그레이스는 동료들에 비해 탁월한 미모와 명랑하고 외향적인성격을 가지고 있어 많은 남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그후 시공관에서 오페라 “카르멘” 공연이 있어서 내가 함께 가자고 초대를 했다. 처음에는 습관적으로 거절을 했다. 내가 다시 요청하니까 승낙을 했다. 20. 단돈 100달러 들고 도전한 미국 유학
나는 1956년에 200달러를 내고 화물선을 타고 미국으로 왔다. 배에서 선원들의 일을 함께 도와주는 대가로 싸게 배를 탈 수있었다. 그때 탄 배는 한국배였지만, 구조는 서양식이었다. 아직 수세식 변기를 쓰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아서, 우리가 쓰던 대로 변기위로 올라가 쭈그려 앉아 일을 보았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같이 갔던 유학생들도 다 나와 같이변기 위로 올라가 일을 보았다고 한다. 내 호주머니에는 단돈 100달러밖에 없었다. 부산을 떠난 배가 일본의 오사카 항구에 닿았는데 비가 왔다. 배에 같이 타고 가는 유학생들 여섯 명과 함께 거리구경을 나갔다. 나는 그곳에서 우산 하나를 1달러에 샀다. 또한 그곳에서 난생 처음 나체쇼를 봤다.부산을 떠난 지 3주 후에 배는 미국 오리건 주의 작은 어선촌뉴포트(Newport)에 도착했다. 이민국 직원이 오지 않아 3일간 배에 갇혀 있다가 수속을 마치고 드디어 화물선 생활을 끝내고 미국땅에 첫 발을 디뎠다. 그곳에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캘리포니아 주의 버클리에 도착하여 우리를 후원해 준 미 공군 장교 부인회원들을 만났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잔 후에 다시 버스를 타고 애리조나 주 투산에 있는 애리조나 대학에 도착하였다.나 는 애리조나 에서 1년 동안 메디컬 인턴십(medical internship)을 하고 임상심리학으로 3년 만에 박사학위를 끝냈 다. 애리조나에서 1956년
애리조나에서의 인턴생활 1956년
한국을 떠나기 전에 그레이스에게 선물을 남기려고 함께 백화점에 갔다가 예쁜 청색 브로치를 돈이 모자라 사 주지 못하고 얼굴이 새빨개져서 나왔던 것이 생각이 나서 인턴생활을 시작하여 월급을 받자마자 가장 먼저 청색 브로치부터 사서 그레이스에게 보냈다. 내가 미국 애리조나대학으로 임상심리학 공부를 위해 떠난 후그레이스는 같은 해 서울사대를 졸업하고 숭의여고 교사로 취직하였다. 내가 6년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교환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은 아쉽게도 소장하고 있는 편지가 없지만 그 당시에는 열렬한 러브레터를 주고받았다. 전화하기가 아주 어려운 때라 6년 동안에 한 번은 미리 연락을 하여 그레이스가 서울의 국제 우체국에 가서 3분간 통화를 하였다. 내가 미국에 와서 3년 동안 대학에서 공부만 하고 한국 사람이 없어 말을 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하는 한국말이 꼭 선교사들이 한국말을 하는 것 같이 들린다고 웃느라 하고 싶은 대화도 제대로 못하고 끝났다. 오래 떨어져 있었으나 서로 보고 싶은 마음은 변하지 않았고 편지로교제가 더 깊어지고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다.내가 심리학 박사학위를 끝내고 미국 정신과 레지던트 훈련을마친 후에 본래는 서울로 돌아가 남명석 정신과 주임교수와 함께 서울의대에 임상심리학과를 개설할 계획이었으나 갑작스럽게 남 교수님이 타계하여 그 계획을 실행할 수 없게 되었다.그래서 귀국을 포기하고 뉴욕 주의 버펄로(Buffalo)에 가서임상심리학 포스트 닥터 펠로우십(Post Doctoral Fellowship)1년을 끝내고 정신과 레지던트(resident)를 시작하였다.
서울로 돌아와 보니, 집은 폭격으로 없어졌고 많은 친구들이 사망했거나 북으로 납치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서울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그 당시 산에 숨어 살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서언을 했다. “주님, 제가 이 전쟁터에서 살게 된다면 제 인생을 오로지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로 일생을 바치겠습니다.” 약하고 병든 자, 나의 도움이 필요한 자, 인권을 잃어버린자, 즉 ‘사회정의’(social justice)를 위해 나의 생을 바치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때는 전쟁 중이니 학교보다는 군대에 들어가 나라를 위해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영락교회에 가서 목사님들께 말씀드렸다. “목사님, 제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로 일생을 바치겠다고 서언을 했는데, 지금은 전쟁 중이니 군대에 입대하여 나라를 위해 일을 하고 싶습니다.” 목사님들께서 반갑게 환영하시며 나의 이야기를 다 들으신 후에 말씀하셨다. “지금 나라가 위기에 빠진 것은 사실이지만 꼭 군대에 가는 것만이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것은 아니고 여러 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때 서울에 부모를 잃고 버려진 많은 전쟁고아들이 생겨 서울시에서 천여 명의 고아들을 데려다가 어느 초등학교 건물에서 돌보고 있었다. 영락교회에 계시던 박윤삼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지금은 전쟁 중이라 학교에 나갈 수도 없으니 큰 언니, 큰 누나로서 여기에 있는 고아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 더급한 일입니다.” “저희들도 학교 교복을 입고 배지를 달고 공부하고 싶어 요.” 그 무렵, 당시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던 지금의 내 남편으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나는 학교를 정부에 맡기고 도미하기로 결정했다. 친구 집에서 중학교 교장 부부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그교장 선생은 나에게 관심을 갖고 물었다. 남편 루크는 캘리포니아 에서 의사면허증(medicall license)를 받기 위하여 외국 의과대학 졸업생에게만 요구하는 기본 과학 시험을 보고 인턴십(internship)을 다시 해야 했다. 뉴욕에서 이미 모두 마쳤지만 캘리포니아에서는 따 로 요구했기 때문에 다시 1년을 더 해야 했다. 외국에서 온 의사들이 모두 겪는 어려움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로 옮겨 루크가 그곳에 있는 마운트 자이언 병원(Mt. Zion Medical Center)에서 인턴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교회에는 주일학교가 아직 없어 어린 아이들이 부모들과 같이 예배를 드리니 지루하고 힘들어 보였다. 나는 목사님과 의논한 후 선생님들을 모아 주일학교를 시작하였다. 22. 인종관계 개선에 앞장선 그레이스
남가주 실비치 은퇴촌으로 이사 온 이후에도 그레이스는 이곳 한인회 회장으로 봉사했고, 다문화축제를 4년 전에 시작하여 매년 실시하고 있는데 이 행사는 이 지역 커뮤니티에 많은 지지와 환영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은 활발한 봉사활동을 인정받아 그레이스는 2002년 한국정부로부터 동백장을 수상했다. 다음에 있는 악보는 내가 샌프란시스코에 온 후 인턴을 다시 하면서 이 일이 너무 힘들어 향수에 빠진 감정을 표현하여 내가 작사와 작곡을 한 곡이다. 23. 정신과 의사와 학자의 길 1970년에 나는 배카빌에 있는 주 교정국 정신병원에서 연구실장으로 취임했다. 그 당시 배카빌 정신병원은 미국에서 최고의 정신치료 및 재활센터로 법의학계에서 크게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미국과 세계 여러 곳에서 법의학 관계 학생, 연구원, 의사들이 단기간 연구와 훈련을 위해 많이 방문하였다. 같은 때 나는 나파주립병원의 정신의학부와 함께 가주 교도국의 정신과 레지던트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실시되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후 한국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Korean Ethos)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국인의 ‘정’ ,‘한’ ,‘체면’ ,‘눈치’ ,‘팔자’ ,그리고 ‘멋’ 등에 관한 논문을 많이 발표하여 미국 정신의학계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여러 번 상도 받았다. 그중에 미국정신의학협회에서일 년에 한 사람씩 뽑아 상을 주는 Kun-Po Soo Award(AsianAmerican Award)를 1997년에 받은 것이 나에게는 학자로서가장 보람 있게 생각된다. 저자의 집에서 찍은 가족사진. 앞줄 오른쪽부터 Jannet(둘째 Danny의 처),
[다음연재 예정] |
2012.01.27 09:16
2012.01.27 14:18
2012.01.29 07:39
Dr. Luke Ik Chang Kim is introduced in The Centennial History
of Korean-American Physicians in America at page of 188.
If they didn't, it could be their big mistake.
I was very impressed by their Love Story
and Mrs. Grace Kim's social engagement.
1.
이번에는 우리 동창분들을 내조하시는 사모님들의 어려운 이민 초기의 얘기가 실려져있읍니다.
지금 미국이민 이세로 자라 사회여러방면에서 확략하시는자녀분 분들뒤에, 집안 일을 살피고 얘들 교육시키고,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는데뒤바라지 하시느라고 고생하신 사모님들의 얘기는 귀중한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중 서울이 공산치하에 들어 갔을때 어머님이 공산당원에게 끌려가셔서
일생동안 어머님의 생사를 모르고 살아와야 하신 김선배님의 일생은
바로 한국 민족 비극의 표본일것입니다.
2.
제가 받은 글이 MS Word 인데, 옮기는중 page number 삭제, 주석 줄 마추기등, 제 힘껏햇지만
잘 못되데가 많을 테지만 이해해주시기 바람니다. 사진도 책을 사진기로 다시 찍어 몇개만 전재햇음을 여기 보고 합니다.
시골 집에 나무 심고 울타리 치러 며칠 가는데, 여기 읽기는 하는데, 며칠 동안은 쓰기하 힘들지요.
mobile internet service for Notebook 을 삿는데,
Labtop computer 로도 돼야 할것이니, 전화국에 알아 봐야겟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