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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이철수 사건의 진실

내가 이렇게 소수민족의 정신의학에 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던 1973년 6월 3일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는 살인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에 차이나타운에는 갱들의 충돌에 의한 살인사건이 자주 일어나 경찰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시장 등 정치인들은 경찰국장에게 압력을 가하여 빨리 범인을 잡으라고 독촉을 하였다.

경찰은 한인청년 이철수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체포하여 재판에 넘겼다. 1심과 2심에서 모두 혐의가 인정된 이철수는 선고를 받고 교도소에 있었다. 교도소에 있던 중 이철수는 우연히 백인 갱과 라틴계 갱 사이의 싸움에 말려들게 되었고 또 다시 살인범으로 몰려 사형수가 되어 샌 퀀틴(San Quentin) 감옥의 데스롤(death roll)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에 샌프란시스코 정신건강센터 등 봉사기관에서 일하던젊은 봉사자들이 데이비스에 있는 우리 집에서 수영파티를 하게 되었다. 이 모임에서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 내외가 이 사건에 대한 내용을 처음으로 자세히 알게 되어 새크라멘토 지역의 이경원, 유재건, 데이비드 루 등 커뮤니티 활동가들을 우리 집에 초대하고 이 사건에 대해 의논하였다. 이 모임에서 이철수 구명전국후원회가 발족되었다. 회장에 유재건 씨, 그리고 부회장에 나의 아내그레이스가 선출되었다. 이 날이 1978년 3월 4일이다.

새크라멘토의 《새크라멘토 유니언》(Sacramento Union)
저자가 이철수 구명할 때 이철수에 대한 판화를 새겨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어 모금운동을 했던 작품. 1981년.

신문기자로 있던 이경원 씨는 이철수 사건과 관련된 모든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을 4~6개월 동안 꼼꼼히 조사하여 이철수가 무죄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는 이 사실을 “혼동으로 잘못 잡힌 차이나타운의 소년”(A Case of Mistaken Identity in AliceWonderland)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연속 보도하였다. 이후 재판과정의 부당성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기사를 읽은 많은 사람들이 분개하여 들고 일어났다. 특히 하버드, 예일, UC 버클리 등대학 캠퍼스와 한인 커뮤니티에서 이 사건에 대한 재판이 불공정하고 이철수가 억울하게 형을 받았다는 여론이 조성되었고 후원회가전국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결성되었다.

특히 유재건 씨와 그레이스가 전국 각 지역 다민족교회와 단체를 방문하며 이철수 사건을 알리고 모금운동을 하였다. 그 당시 모두 17만 달러가 모금되었다. 이철수 씨는 다시 재판을 받고 무죄가확정되어 감옥에서 1983년 8월 24일 ‘즉시 석방명령’을 받았다. 그때까지 수많은 한인봉사자들이 5년 6개월 동안 봉사하였다. 이 사건이 아시안 아메리칸 커뮤니티가 연합해 활동을 하면 효력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계기가 되었고, 한인사회의 1세, 2세, 3세가 힘을 모으면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역사적인 계기가 되었다.

25. 나의 은퇴와 정신과 석좌교수 설치

나는 2006년에 가주 데이비스 의과대학에서 35년간의 임상정신과 교수직을 은퇴하였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이 학교에서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보급이 된 다문화정신의학 프로그램이 은퇴 후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하여 정신의학과 주임교수와 의논을 하였다. 그는석좌교수 자리를 설정하면 이 프로그램이 계속 유지 발전될 수 있는데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나는 그레이스에게 석좌교수 설정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때는 우리가 은퇴 후 데이비스의 집을 정리하고 기후가 좋고 친척과 친구들이 많이 있는 남가주로 이사를 하려고 준비하던 중이었다. 집을 팔고 남가주 실비치 레저월드(Seal Beach LeisureWorld)에 조그마한 집을 하나 마련했는데 25만 달러가 남아 있었다. 우리는 이 돈을 학교에 기증하기로 했다.

학교 당국에서는 깜짝 놀라 당장 1백만 달러의 매칭 펀드(matching fund)를 내놓고 다문화정신의학 석좌교수(Lukeand Grace Kim Endowed Professorship in CulturalPsychiatry) 자리를 설치하였다. 이어 인사위원회(SearchCommittee)가 발족되었고 전국적으로 석좌교수 선발광고를 냈다. 동부의 하버드, 예일, 조지 워싱턴 등 일류대학에서 경험을쌓은 유능한 교수들이 지망하였다. 많은 지원자 가운데 3년 동안의 선발 과정을 거쳐 샌프란시스코 가주의대(University ofCalifornia, San Francisco) 교수로서 다문화정신의학계의 권위자로 전국적 명성을 갖고 있는 프랜시스 루(Francis Lu) 교수가선정되었다. 현재 루 교수가 이 학교에서 이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다. 아시안 아메리칸으로서 유능한 루 교수가 석좌교수로 선정된 것에 대하여 대단히 기쁘고 만족스럽게 생각한다.다문화정신의학 석좌교수로 프랜시스 루 교수가 선정되어 2009년부터 일하고 있다.

26. 맺는 말

한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무척 중요한 시기인 유년기와 청년기를 나는 한국의 급격한 변화와 혼란 속에서 고난을 겪으며 자랐다.
일본의 36년 식민정치, 제2차 세계대전, 한국의 분단, 북한의 공산당 독재정치, 남한에서의 6.25 한국 전쟁 등의 급격한 변화는 극심한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켰고, 나의 모든 생활과 가치관을 혼돈스럽게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까지 생존하고 더 굳세게 살 수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가족의 사랑, 이웃과 친구들과의나눔의 정, 음악에 대한 애정, 그리고 나의 강한 생존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음악에 애착을 가지는 이유는, 나의 강한 생존력에음악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 음악이없었다면 메마르고 우울한 감정을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80년이라는 나의 긴 일생을 되돌아 생각해 볼 때, 많은 고생과 곡절로 가득 찬 일생이었지만, 이만큼 사회봉사와 전문분야에서공헌할 수 있었고, 또 우리 두 아들이 아무 사고 없이 잘 자라 좋은가정을 이루고, 그들이 건강하고, 신앙으로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보호하시고 축복해 주신 데 대해 우리는 진정으로 축복받은 가정이라고 생각하며 감사할 뿐이다.특히 아내 그레이스를 만나 결혼한 것에 대해 감사하고 매우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우리가 약혼하기 전에 6년 동안 긴 세월을 기다리며 매주 태평양을 건너 편지를 나누던 사랑은 지금도 변함이없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기다렸던 보람으로 우리는 서로를 사랑으로 격려하며 인생의 동반자로 또 같은 생의 목적과 가치를 가진 동지(comrade)로서 긴 여정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의 섭리가 아닐 수 없다.

김석춘 씨와 같은 참전용사들 때문에 대한민국이 살게 되었고, 지금과 같은 경제대국으로 자랄 수 있었고, 김연아와 같은 대한민국의 스케이팅 선수가 올림픽에서 “피겨 스케이트의 여왕”이라는칭송까지 받으며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

버락 오바마(Barack H. Obama) 미국 대통령은 요즈음 연설할 때마다 자주 한국과 미주한인의 성공담을 예를 들며 미국이한국 사람들에게 많이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오바마 대통령의 현직 참모와 보좌관 그리고 내각 고위관료 중에 한국 사람이 많이 있다. 내 큰 아들 데이비드 성철 김(David Sungchul Kim)은 현재 미 연방 교통부 차관보로 충실하게 일하고 있고, 둘째아들 성우(Danny Sungwoo Kim)는 널리 알려진 컴퓨터회사에서 IT 디렉터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오랫동안 살다 보니 한국의 고유한 전통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음식, 특히 김치, 된장, 고추장에 대한 입맛은 더 깊어지고, 온돌방의 따뜻함 또한 그리워진다. 현재 2백만의 한인들이 미국에 와서 정착하여 각계에서 많은 공헌을 하며 모범 민족 집단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을 생각할 때 새삼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저자의 장남 데이빗(성철)이 오바마 행정부의 교통부 차관보로 임명되었다.

할아버지의 80세 생일 파티에 모였던 네 손자손녀들.왼쪽부터 Jaisohn, Jeffrey, Luke, Tessa손자 Jeffrey와 Luke의 화랑도 시범

저자 김익창(Luke I.C. Kim)의 약력

1930. 4. 22: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출생.
1943: 평북 정주 오산중학교 입학.
1945: 해방 후 신의주 동중에 편입.
1946: 월남하여 서울고등학교에 편입.
1949: 서울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의예과 입학.
1950-52: 해군에 입대, 후에 학창 복귀 제대.
1956: 서울의대 졸업, 미국 유학.
1960: 애리조나대학 임상심리학 박사학위 취득.
1961-67: 뉴욕 주 Buffalo와 California주에서 임상심리학의포스트닥 휄로우 정신과 레지던트 수료하고, 후에 캘리포니아의 Napa State Hospital과 Vacaville MedicalFacility에서 공동 정신과 레지던트 훈련을 완수함.
1967-97: Vacaville Medical Facility의 Chief ofResearch and Staff development. 후에는 ChiefPsych iatr ist로서, 캘리포니아 주 교 도국에 속하 는Vacaville Medical Facility 등에서 정신과 과장으로환자치료, 연구, 지도.
1977: 미국 정신과 전문의사 Board certified psychiatrist의자격 취득
1979: 재미 한인정신과의사협회(Association of KoreanAmerican Psychiatrists)를 창설하고 창립회장으로 선출.
1 9 9 7: 미정신과 의사협 회(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의 “궁포 수 아시아 상”(Kun-Po Soo Award, Asian American Award) 수상.
1971-2006: University of California Davis 의과대학에서 임상정신과 교수로 35년 동안 가르치다가, 2006년에Clinical Professor of psychiatry로 은퇴.
1974-2006: Yolo Community Mental Health Clinic에서part-time psychiatrist로 근무.
2006: 데이비스 가주 의과대학(UC Davis School of Medical)에 Luke & Grace Kim Endowed Professorship inCultural Psychiatry(다문화 정신의학 석좌교수직) 설치.2006-이후: 데이비스 가주 의과대학 (UC Davis Schoolof Me d ici ne), 미국 정신과의사협회 ( A mer ic a nPsychiatric Association), 가주 의회(CaliforniaState Senate and Assembly) 등 여러 사회단체로부터공로상 수상.2006: 은퇴 후 남가 주 은퇴촌으 로 이사하고 계속 후배지도(mentoring)와 사회봉사.

김익창의 저작활동

1970년부터 Sierra Mission of Presbyterian Church,USA의 Oral History 연구위원으로 봉사

Joe Tupin, Luke I.C. Kim, et al. “Long-termUse of Lithium in Aggressive Prisoners. ”Comprehensive Psychiatry Vol. 1, No. 14, July/August, 1973.L u k e I .C. K i m, M.D., P h .D.
 
“ P s y c h o s o c i a l Development of Korean American Children”, a cheaper in Psychosocial Development of Minority Children. Johnson-Powell, Morales,Yamamoto, J. New York: Brunner-Mazel, 1979.

한인 초기이민 구전 역사책(Korea Kaleidoscope: EarlyKorean Pioneers in U.S.A., 1982)의 출판위원.

Keun H. Yu, M.D. and Luke I.C. Kim, M.D., Ph.D.“ The Growth and Development of Korean-A me r i c a n C h i l d r e n .” T h e P s y c h o s o c i a l Development of Minority Group Ch ild ren,Gloria Johnson Powello, M.D. ed. New York:Brunner/Mazel, Inc., 1983. Pp. 147-158.

C, Kiefer, Luke I.C. Kim, et. al. The Journal ofGerontological Society of America Vol. 25, No.5, 1985.

Luke I.C. Kim, M.D., Ph.D. “Psychiatric Care of Korean Americans.” Culture, Ethnicity & Menta l Il l ness, Albert C. Gaw, M.D., ed .Washington, D.C. and London: American Psychiatric Press, Inc., 1992. Pp. 347-375.

Lu ke I. K im, M.D., Ph.D. “Korea n Ethos.” T he J o u r n a l o f K o r e a n A m e r i c a n M e d i c a l Association Volume 2, Number 1. 1996. Pp. 13-

W.J. Kim, D. Rue, and Luke I.C. Kim. “KoreanAmerican Children”, a chapter in TranscultrualChild Psychiatry. G. Johnson-Powell and J.U.Yamamoto. New York: Wiley & Sons Publisher,1997.

Stanley Sue and Luke I.C. Kim. “Evaluating and Understanding Asian Americans in ForensicSetting.” G. Johnson-Powell and J. Yamamoto.eds. New York: Wiley & Sons Publisher, 1997.

Luke I.C. Kim and Grace Kim. “Searching for the Defining a Korean American Identity in a Multicultural Society.” Korean American  Woman: From Tradition to Modern Feminism.Young L. Song and Ailee Moon, ed. Westport,Connecticut and London: Praeger, 1998. Pp.115-125

Lu ke I.C. K im. “ The Mental Health of Korean American Women”, Korean American Women:

145

From Tradition to Modern Feminism. YoungL. S on g a nd A i le e Mo on, e d. We s t p or t,Connecticut and London: Praeger, 1998. Pp.209-223.

Luke I.C. Kim. “To Name Our Feelings: SearchingOut Korean Psychology, Ethos and Emotions.”Korean Quarterly Vol. 3 No. 4. St. Paul, MN,2000.

이 외에 다수 학회 발표논문 및 연구보고서.

부록 I
1. 박관옥 여사 이야기
2. 모랫말의 평화를 깬 전쟁(유의영 교수가 겪은 한국전쟁)
3. 한국전쟁 참전용사 김석춘의 전투일지
4. 프랭크 다야크의 이야기5. 러셀 풀턴의 이야기

1. 박관옥 여사 이야기

“기적의 배”를 탄 박관옥 여사는 6살 때 함께 피난 나왔던 부모를 흥남 부두에서 잃고 헤매다 떠밀려 배를 타고 대구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대구에 와서도 5-6개월이나 부모를 찾아 헤매다 기적적으로 간신히 만나게되었다. 부모를 잃고 찾아 헤매던 5-6개월이 어린 여섯 살의 박관옥 여사에게는 얼마나 길고, 큰 시련과 힘든 시간들이었음을 그녀의 눈물의 고백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함흥에서 살았다. 전쟁 당시 내가 살던 곳은 학교 근처였고 대한민국 국군들이 많이 주둔해 있었다. 그래서 나의 어머니는국군들의 점심을 정성껏 해 드렸다. 군인들이 은혜를 많이 입어서이남으로 내려가면서 우리 가족을 모두 같이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어느 날 군인들이 부대가 이남으로 후퇴하는데 그 다음날 우리를 데리러 오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그들은 작전 계획이 변경되어 밤중에 갑자기 떠나서 우리를 데리러 오지 못했다.우리는 흥남으로 가야만 배를 탈 수 있었다.

흥남부두로 가려면 강을 건너야 했다. 부두로 가는데 북한 인민군들이 총을 쏘면서도망가는 피난민들을 죽이려 했다. 이 와중에 우리 가족은 뿔뿔이흩어졌다. 나는 부모님과 헤어져 언니와 함께 따로 떨어졌다. 언니와 나는 흥남부두로 가서 LST라는 배를 타려 했다. 처음에는 군인이 너무 많아서 우리를 배에 못 올라가게 했다. 그래서 언니와 나는 다시 집으로 가서 숨어 있었다. 그런데 우리 집에 자주 오시던 진 대위님이 배를 탈 수 있다는소식을 갖고 오셨다. 언니와 나는 그분을 따라 부두로 나갔다. 군인들은 우리의 짐이 너무 많다며 다 가지고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옷가지 몇 개만 챙겨서 배에 올랐다. 그때는 사람들이 너무 배가 고파 그냥 바닷물을 떠 와서 먹었는데 어린 나는 물이 너무 짜서먹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나의 부모님은 다른 배를 타고 동해안 묵호에서 잠시 섰다가 다른 배로 갈아타고 거제도로가셨다고 했다.우리 집에서 항상 식사를 하시던 진 대위님이 부모님을 잃은언니와 나를 잘 돌봐 주셨다. 언니는 그 당시 16살이었다. 진 대위님은 나와 언니를 너무 귀여워해 주셔서 어디든지 데리고 다니셨다. 그래서 우리는 진 대위님과 함께 직접 전쟁터도 많이 다녔고 전쟁터에서 미군들이 뻘건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것도 많이 봤다. 잔인하고 무서웠던 전쟁터가 어린 내겐 너무 충격적이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서늘하고 끔찍하다. 밤에는 항상 어디든 암호를 대고 다녀야 했다. 군인들이 너무 많아서 배식할 때 밥을 삽으로 퍼줬다. 어린 내게 그것은 더러운 밥이었기에 잘 먹지 못했다. 진 대위님은 더 이상 나와 언니를 전쟁터로 데리고 다니는 것이 우리에게 너무 고생이라 생각하시고 대구에 있는 그의 지인에게보내 주셨다. 대구에 있을 때도 진 대위님이 계속 쌀과 돈을 보내주셨다. 진 대위님은 우리 자매에게 진정 하나님이 보내 주신 천사였다.

그렇게 대구에서 언니와 내가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안전하게 있을 때, 거제도로 피난하셨던 아버지께서 두 딸을 잃어버렸다고 그가 아는 군인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를 진 대위님이 보시고 아버지께 연락을 하셨다. 그렇게 진 대위님을 통해 부모님과 연락이 닿아 장승포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의 고모부는 일본에서 공부하신 의사이시다. 고모와 고모부가 장승포에 피난을 와 계셨다. 우리가 배를 타고 장승포에 있는 고모 댁에 들렸다가 거제도로 가려고 하는데, 거제도에 계셨던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러 대구에 가는 길에 장승포에 오셨다. 그래서 장승포에서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아버지를 붙잡고 언니와 나는 너무너무 기쁘고 감격하여 한없이 울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생각한다. 5-6개월 만에 만난 부모님이었다. 서로 고생이 너무 많았다. 우리를 다시 찾고 난 다음 어머니는 그 와중에 모든 가족이 다남으로 피난을 올 수 있었던 것에 너무너무 감사하시며 항상 감사기도만 하셨다. 집에 불이 났는데도 우리 가족이 다 함께 있는 것에감사하셨다. 어머니는 모든 일에 평생 감사만 하며 사셨다. 우리 어머니는 예수를 안 믿는 가정에서 시집 와서 지금은 너무너무 기도를 많이 하시는 권사님으로 아직도 한국에 살아 계신다. 95세이시다.장로님이셨던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께서는 기독교인이면서 독립운동가셨다. 감옥에 잡혀 가셨다가 해방이 되어 나오시면서 건강이 악화되어 돌아가셨다. 이북에서 아버지가 금방을 하셨다. 그래서 해방되었을 때 금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힘들게 살지는않았다.매일 밤 우리는 가정예배를 드렸다. 하루는 밤에 쌀이 없었다. 그래도 그날도 우리는 어김없이 가정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가정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에 보니 문 앞에 쌀가마니가 있었다. 이게 웬일인가 해서 하나님께 감사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옆집에 살던 다른가정이 보내 준 것이었다. (그 가정도 매일 찬양 소리가 넘치는 가정이었다) 옛날에 그 집에 쌀이 떨어졌을 때 우리 어머니가 쌀을 나눠주셨었다. 그 날 그 집에서 쌀을 갚으러 왔다가 우리가 예배드리는것을 보고 그냥 놓고 갔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잊고 계셨었다.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통해 또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구나.”
어머니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셨다. 우리를 잃었다가 다시 찾으신 후 우리 어머니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셨다. 두 딸을 잃었다 찾은 기쁨에 평생을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사셨던 우리 어머니를 보며 하물며 잃은 영혼들을 다시 찾으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기쁘실까 생각해 본다. 소년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서울의 집을 수차 왕래하며 옷가지를 날라 가계를 보탰다. 그래서 유 교수는 서울과 시골 안팎의 상황과 어려움을 경험하고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2. 모랫말의 평화를 깬 전쟁(유의영 교수가 겪은 한국전쟁)
유 교수의 이야기;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열두 살이었고 양정중학교를입학한 지 1개월도 안 된 때였다. 일요일 아침 주일학교를 마치고교회마당에서 아이들과 함께 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그때 고등부학생 하나가 집에서 라디오를 가지고 와서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북한의 야크기 편대가 날아와 영등포역으154 사선을 넘어서로 향하던 화물차를 공격하였다. 기찻길이 교회 바로 옆에 있었기때문에 기관총을 갈겨대는 소리가 진동을 쳤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기겁해서 교회 앞에 있는 우리 집으로 뛰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사흘이 지났다. 6월 28일 자고 있는데 한강다리를 폭파하는소리에 모두 놀라 잠이 깨었다. 새벽 2시 30분이었다. 그날 아버지, 어머니, 동생 다섯, 우리 집에서 일을 하던 순돌이 누나, 그리고 연희대 1년생 넷째 삼촌 등 모두 열 식구가 간단히 짐을 챙겨 바로 남쪽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피난민들과 군인들로 가득 찬 경부가도를 따라 밤과 낮을 꼬박 걸어 수원까지 갔다. 우리 쪽 비행기가잘못 알고 수원비행장을 폭격하여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우리 일행은 수원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잠깐 쉬었다. 예배당안팎이 피난민들로 가득 찼다. 안성 주례에 어머니 육촌오빠가 살고 계셨는데 그쪽으로 가자고 하여 우리는 용인 쪽으로 빠졌다. 밤낮을 걸어 용인읍까지 갔는데 인민군이 들이 닥쳤다. 밤새도록 인민군과 아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따꿍따꿍, 타다다닥, 꽝’ 하는 소총소리, 기관총소리, 포탄 터지는 소리가 계속되었다. 총소리는 새벽이 되어 잠잠해졌다. 두어 시간 기다리다가, 우리가 대피했던 예배당 뒤 굴속에서 나왔다. 예배당은 높은 언덕 위에 있어서 동네가 내려다 보였다.어른들 몇 사람과 함께 예배당 앞마당으로 나가 동네 상황을살폈다. 저 밑에 밭 사이로 군인들이 총과 장비를 메고, 대포가 달린 수레를 끌고. 드문드문 사이를 두고 종대를 만들어 이동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국군인지 인민군인지 구분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언덕 위에 갑자기 나타난 우리를 보고 섰다. 잠시 후 그중 한군인이 앉아 총 자세로 총구를 우리에게 겨누었다. 우리들은 기겁을 해서 다시 굴속으로 뛰어 들어갔다.한 시간 남짓 지난 것 같은데 굴 입구에서 번개치는 소리가 났다. 총소리였다.“모두 손을 들고 나오라.”호령을 듣고 다들 손을 들고 나오는데 인민군 네댓 명이 총구를 우리들에게 향하고 동네 여자 한 사람과 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동네 한 가운데 있는 기와집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인민군들이 앉아 총을 닦으며 쉬고 있었다. 동네 여자들 몇명이 그 집 뒤주에 있던 쌀과 반찬거리를 챙겨 아침밥을 짓고 있었다. 인민군들이 다른 곳에서도 사람들을 데려 왔다.그들은 남자 어른들을 따로 떼어 심사를 하였다. 삼촌은 연희대 신분증을 보여 주니까 조사하던 인민군 장교가 반갑게 말했다.
“연희대학생이시군요. 나는 고려대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는 삼촌을 돌려보내 주었다. 어떤 젊은 사람 하나는 인민군이 권총을 들이대고 다그쳤다.
“너 경찰이지?”“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젊은이는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대답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젊은이에 대해 증언을 해 주었다.
“그 사람은 동네에서 트럭을 끄는 운전수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젊은이도 죽을 고비를 넘겼다. 다음은 아버지의 차례였다.
“나는 서울에서 피난하여 온 목사입니다.”
“따라오시오.”
그들은 아버지를 따로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우리는 그들이아버지를 어떻게 하는 줄 알고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얼마 후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그러나 얼굴이 백지장 같으셨다.다음날 새벽 우리 가족은 짐을 반으로 줄여 등에 메고 읍내를빠져 나가려는데 두 명의 인민군 병사가 순찰을 하고 있었다. 우리쪽 경비행기 한 대가 낮게 떠 정찰 비행을 하였다. 인민군 순찰병들이 처마 밑으로 급히 피하면서 우리에게 소리쳤다.
“빨리 피해.”
비행기가 지나간 다음에 우리는 둑으로 나가 안성 쪽으로 하루종일 걸어갔다. 한참을 가다가 아버지가 삼촌에게 먼저 가라고 하셨다. 어머니가 발이 부어 우리 일행은 빨리 걸을 수 없었다. 삼촌은 작별인사를 하고 빠른 걸음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신 청주로향하였다. 안성 주례에 도착했는데 그곳 도로에는 아직도 중부전선에서 후퇴하는 긴 국군 차량행렬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 사시던 어머니 육촌오빠 댁에 머물렀다. 며칠 후 행길 쪽으로 나가 보니 북쪽의 인민공화국 국기가 걸려 있었다. 안성에 며칠 더 머물다가 우리 식구는 다시 용인 쪽으로갔다. 어느 높은 산을 넘어 산골짝 작은 동네에 도착했는데 그곳에는 국군 패잔병들이 있었다. 멀리서 우리를 쳐다보는 그들의 모습이처량하게 보였다. 이들이 인민군에게 잡히면 어떻게 되나 염려스러웠다.우리는 계속 북쪽으로 걸어 용인읍을 지나 메주고개를 넘는데인민군 대부대가 자동차, 쌍두마차, 대포와 장비를 실은 수레를 끌고 밀면서 우리와 반대방향으로 산을 넘고 있었다. 남쪽의 전선으로 향하는 후속부대인 것 같았다. 사람들이 중국 팔로군에 있던 인민군부대라 하였다.용인구읍이라고 하는 어느 한적한 시골 동네에 도착하였다.우리는 비어 있는 초가집 예배당 한쪽에서 서울에서 피난 온 다른두 가정과 함께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3개월을 숨어 지냈다. 피난때 가지고 나온 어머니 옷을 곡식과 바꾸어 먹었다. 그것이 모두 떨어지자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서울 우리 집에 숨겨 놓은 옷을 가지러 영등포로 갔다. 아버지는 집에서 좀 떨어진 교인 댁에 숨고 내가혼자 집으로 가서 마루밑에 숨겨 놓았던 옷을 가지고 나와 아버지와 함께 용인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우리 집에는 교회 사찰집사님 댁이 다른 피난민 몇 가정과 함께 묵고 있었는데 이 집사님이 고맙게 9.28 수복 때까지 우리 옷을 지켜 주셨다. 아버지와 함께 옷 보따리를 등에 지고 어느밭을 지나는데 농부들이 새참을 먹고 있었다. 아버지가 이야기를해서 밥 한 그릇을 얻어 나를 먹이셨다. 아버지도 배가 고프셨을 텐데 나에게만 먹으라고 하셨다. 그 후 시일이 지나자 내가 가져 온 옷가지가 다 떨어져 또 한번 아버지와 함께 서울길을 나섰다. 집 가까이 와서 아버지는 신길동의 어느 교인 댁에 머물고 나 혼자 도림동 우리 집으로 갔다. 동회 앞을 지나는데 새문안교회 장로님으로 오래 계시다가 우리 동네로 이사 오신 나이 많은 장로님을 만났다. 나를 보시더니 동회 앞벽에 붙어 있는 인민공화국 헌법조항이 담겨 있는 벽보를 가리키며말씀하셨다.
“인민공화국에도 종교가 자유라고 쓰여 있느니 아버지에게 빨리 와서 교회를 돌보시라고 전해 다오.”
그런데 이어서 만난 우리 집 옆에 사시던 아저씨는 다른 말씀을 귀띔해 주었다.
“이 동네에서 사람들이 아버지를 찾고 있으니 절대로 이 근처에 오시지 말게 해라.”
장로님 말씀을 들었으면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격이 될 뻔하였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혼자 10살, 7살짜리 동생 둘을 데리고 세번 더 용인구읍과 영등포 집을 왔다 갔다 하며 옷을 가져다가 곡식으로 바꾸어 먹으면서 우리 식구가 연명을 했다.

영등포와 용인을오고 가는 길에는 여기저기 버리고 간 대포알이나 총알더미, 타다남은 트럭 잔해, 떨어진 비행기 잔해들이 있었다. 높이 떠서 폭탄을떨어뜨리며 비행하는 폭격기들과 낮게 떠서 목표물을 찾아 곤두박질하며 폭격하는 전폭기들을 보며 왔다 갔다 했다. 한번은 땅으로 내리박이 하며 포탄을 투하하던 전폭기가 다시올라가지 못하고 땅에 박혀 불에 타는 장면도 목격했다. 사람들이 인민군이 쏜 곡사포에 맞았다고 하였다. 영등포와 안양 사이의 국도와 철길에는 내내 송장 썩는 냄새가 가득했다.

9월에 들어서면서 비행기 폭격이 심해졌다. 인천 쪽에서는 함포사격 소리가 들렸다. 서울 쪽으로 가기가 어려워 아버지와 함께안성 쪽으로 갔다. 곡식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는 전쟁 중에도 장이 섰다. 옷가지를 밀로 바꾸어 아버지가 큰 자루를, 내가 작은 자루를 등에 걸머지고 용인구읍 피난지로 돌아오고 있었다.용인읍내 가까이 왔는데 미국 함재기 편대 4대가 갑자기 나타났다. 시골길에 아버지와 나 그리고 다른 사람들 서너 명이 읍내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비행기 편대가 우리들 위를 뱅뱅 돌았다. 그때 아버지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의영아! 논뚝으로 가서 서 있어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큰 소리로 말슴하셨다.
“여러분도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서 있으시오.”
비행기가 낮게 떠서 돌면서 우리가 군인들인지 민간인들인지를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비행기 파일럿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내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시 몇 바퀴 돌더니 메주고개 쪽으로 날아갔다. 어린아이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 그냥 간 것 갔다. 그쪽으로 간 배행기가 산꼭대기 길을 폭격하는 것이 보였다. 읍내를 통과하여 고갯길로 올라가는데 사람들이 부상당한 사람들을 수레에 싣고 급히 읍내로 향해 뛰었다. 산을 넘어 신갈까지왔는데 인민군 지프차가 멀리서 나타났다. 그런데 항공 편대가 동시에 하늘에서 나타났다. 비행기들이 곤두박질을 하며 사격을 가하였다. 지프차와 그 옆에 있던 가게가 박살이 났다. 우리들이 있던 지점에서 500m도 안 되는 거리였다. 지프차에 타고 있던 인민군 둘은 뛰어나와 집 뒤로 해서 산으로 도망했다.

피난지의 집에 도착했는데 비행기 편대가 산속에 있는 절간을 폭격하는 것이 보였다.구해 온 밀을 말리기 위하여 마당에 널어놓았는데 네 살짜리동생 의선이가 배가 고파 그것을 집어 먹고 배탈이 났다. 밤새도록앓더니 아침이 되니까 정신을 잃고 경기를 보이며 무서워하는 소리로 덜덜 떨면서 신음을 계속했다. 아버지가 놀라셔서 의사를 찾기위해 여러 동네를 뛰어다니셨다. 몇 시간 후 의과대학 다니던 피난학생 한 명을 찾아 오셨다. 아버지가 의대생을 데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동생은 떨던 목소리를 멈추고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가 싸늘해진 의선이 시체를두루마리에 싸 뒷산으로 가시는데 제대로 걷지를 못하시고 비틀거리셨다. 석 달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많이 연약해진 어린 동생이 배탈을 이기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간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나슬프고 마음이 아프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경부고속도로의 신갈 인터체인지를 지날때면 어린 나이에 애처롭게 세상을 떠난 의선이를 생각하며 눈물을흘리곤 한다. 의선이가 떠난 다음날이 추석이었다. 그날 국군과 미군이 탱크를 몰고 동네 앞길까지 들어왔다. 하루만 일찍 왔어도 동생이 안 죽었을 것이다.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사업을 크게 하시던 외삼촌은 부르주아라고 잡혀가 처형을 당하셨다. 전쟁 때 아버지, 어머니,형, 동생, 삼촌을 잃은 가정은 우리 집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아는 사람들 가운데는 가족과 친지를 잃은 사람들이 많았다.

영등포 모랫말 우리 동네에 살던 내 친구들의 고등학교 또래형들은 인민군 점령 때 모두 군대에 자원입대 하였거나 끌려갔다.그중에 한 친구의 가정은 형제 사이의 사상대립으로 너무나 슬픈일을 당하였다. 형들은 북으로 가서 인민군 장교가 되어 나왔고, 연합군의 서울 수복 직후 아들이 인민군 장교라고 어머니는 처형당하였고, 아버지는 대전 감옥에서 돌아가셨고, 수복 후 국군대위가 되어 돌아온 큰 형은 어머니를 해친 동네사람을 찾아 직접 분풀이 한일도 있었다. 형들이 빨갱이라고 13살의 나이에 감옥에 잡혀 있던내 친구는 큰 형이 와서 꺼내 왔다. 서울 수복 후 우리는 수레를 빌려 피난짐을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집 반쪽이 직격탄을 맞아 박살이 나 있었다. 우리 집 현관과 목욕탕 자리에는 터진 대포알 파편이 널려 있었다.우리 집에 살던 사람들은 마당에 파 놓은 방공호에 대피해 있어서 화를 면하였다고 한다. 우리 집 위 언덕에 있던 예배당은 대포에 맞아 강대상이 있는 한쪽에 구멍이 났고 벽이 부서져 있었다. 예배당 마당에 인민군이 진을 치고 서울로 진격해 오는 연합군에 대항하여 저항을 하면서 예배당과 우리 동네가 폭격과 포격의 대상이되었고 많은 피해를 받았다.

공산군 점령 시 마루 밑에 숨겨 놓았던 우리 어머니 옷가지를지켜 주신 사찰집사님 아들이 부역을 했다고 수복 직후 잡혀 들어가 심하게 맞고 나와 앓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며칠이 지났는데 하루는 미군 스리쿼터가 인부들을 모집하려고 동네 행길에 왔다. 젊은 사람들을 뽑아 차에 태웠다. 미군이 안보는 사이에 내가 뛰어올라 안쪽으로 가 앉았다. 뽑은 인부들을 태우고 한참 가던 중 미군이 어린 나를 보고 말했다.
“너는 왜 탔니?”
내가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몰라 하자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아. 그대로 있어.”
차는 당산동에 있는 어느 큰 철공장에 도착했다. 그 공장이폭격으로 모두 부서지고 흐트러졌는데 그것을 미군이 쓰기 위하여정리하는 작업이었다. 나에게는 한 어른 인부를 도우라고 하면서일을 맡겼다. 점심시간이 되어 배식을 하는 천막으로 갔다. 미군부대에 소속되어 있는 한 한국군 병사가 나를 보고 자기가 먹던 양은식판을 씻어 주면서 앞으로 데리고 가서 배식을 받아 주었다. 그릇을 빌려 준 그 군인이 참으로 고마웠다. 초콜릿과 드롭프스도 줬다. 아마 내 나이 또래의 동생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전쟁 중 배가 고프던 차에 참으로 맛있게 잘 먹었다. 일이 끝났는데 임금을 주었다. 나는 아이라고 별로 일을 안 시켰는데 임금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주었다. 세상에 나서 처음 일을 하고 돈을 받아 보았다.

그 후 영등포국민학교에 주둔한 미군 공병대에서 약 한 달 동안 하우스보이로 있었다. 우리 교회 고등부 학생들 몇이 그 부대의통역으로 취직을 했는데 나를 그 부대 특무상사에게 소개하여 일을구해 주었다. 거기서 3개월 동안 굶주렸던 나의 몸이 영양보충을 했다.

12월에 들어서면서 북에서 피난민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피난민들이 목사님 댁이라고 많이 찾아왔다. 어머니가 어려운 중에 피난민까지 먹여 보내느라고 많이 수고하셨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울때에 우리 가족은 또 다시 두 번째 피난짐을 쌌다. 철도국에서 일하시는 집사님이 대구까지 가는 기차가 있는데 거의 마지막 차라고하였다. 철도관사에 있는 그분 댁에 가서 기다리다가 그분의 부인권사님이 짜 주신 장갑을 하나씩 받아 끼고 짐을 가득히 싣고 텐트로 덮은 기차 짐칸 위에 우리 식구는 자리를 잡았다. 빈자리가 없이피난민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군인들이 와서 젊은 사람들을 골라연행해 갔다. 제2국민병으로 데려간다고 했다. 추풍령 고개를 넘기 전에 황간역이 있다. 이곳을 지나 가파른고개를 올라가는데 화통이 힘이 모자라 기차가 섰다. 어른들이 모두 내려 기차를 밀었으나 올라가지 못하였다. 기차가 후진하여 황간역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다른 기차들이 짐칸 지붕 위에 피난민을 가득 채우고 서지 않고 지나갔다. 우리가 탄 기차 칸에는 중요한 군사장비가 있기 때문에 화통차가 하나 더 와서끌고 갈 것이니 걱정 말라고 정거장 사람이 안심을 시켰다.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 화통이 하나 더 와서 앞에 붙이고 출발하여 추풍령고개를 넘었다. 대구에 도착했는데 마침 아는 장로님사모님이 함께 내렸다. 그분이 주선해서 우리 일행은 역 앞에 있는어느 집에서 며칠을 지냈다. 하루는 이 분이 아버지에게 일본으로가자는 제안을 했다.
“우리 가족은 삼천포로 가서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가려고합니다. 우리와 함께 갑시다.”
“우리는 일본에는 가지 않겠습니다.”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그 다음날 전갈이 왔다.
“부산까지 가는 빈 차칸이 있으니 역으로 나오시오.”
자정이 가까운 밤 시간에 역으로 가서 바닥만 있는 평평한 화물칸 위에 짐으로 바람막이를 만들고 아버지가 식구들을 가운데 앉혔다. 찬바람을 뚫고 밤새도록 달린 무개차는 다음날 아침 부산역에 도착하였다. 영도다리가 바로 앞에 보이는 가파르고 긴 계단이 있는데 그중턱쯤에 고려신학교가 있었다. 계단 밑에는 번화한 거리가 있었는데 광복동 거리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계단 위쪽에는 공원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그곳 기숙사에서 약 두 달동안 지냈다. 하루는 같은 방을 쓰고 있는 피난민 가정이 화로 불을 피워놓고 생선을 구웠는데 동생 의찬이가 가스에 중독되어 죽을 뻔하였다. 나는 아랫동생 의경과 함께 신문도 팔고, 가판대에 껌, 드롭프스, 과자, 오징어 등을 놓고 팔기도 하며 지냈다.

《부산일보》에 가서 신문이 나오는 시간을 기다려 나오자마자 받아 뛰어 다니면 많이 팔렸다. 국제시장에 있는 다방을 돌면서 팔았는데 사람들이 내교복을 보고 피난 온 중학생인 것을 알고 많이 사 주었다. 낮에 달력을 받아 팔기도 했는데 부산 토박이 내 나이또래가 "하나 도고"하면서 주먹으로 내 턱을 쳐 피를 흘린 적도 있다. 열두 살짜리 어린 가슴에도 타향살이의 한을 느끼면서 아무소리 못하고 그냥 지나갔다. 이때 부산에는 이북과 서울에서 밀려오는 피난민들로 포화상태였다. 우리가 묵고 있던 신학교 기숙사에도 피난민들이 꽉 차 어려운 일들도 발생했다. 현관에도 묵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모든공간이 꽉 차 있는 상황에서 새로 도착하는 목사님들 가정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이미 와 있던 사람들에게 신학교에서 공지를 했다.
“우리 신학교에서는 목사님들의 가족을 도와드려야 합니다. 목사님의 가족이 아닌 분들은 다른 곳으로 숙소를 구해 나가 주시기바랍니다.”
우리 가족이 있던 자리 바로 옆에 어떤 장로님 가족이 있었는데 좋은 분들로 우리와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그 장로님이 강력히항의를 하였으나 결국 다른 곳을 구해 나가셔야 했다. 이 일이 내 마음에 깊이 새겨져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 후 그 장로님이 내가 길에서 과자 파는 것을 보시고 나를 불러서 격려를 해 주셨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그 과자 내게도 하나 팔아라.”
부산에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물을 길어 오는 일이었다. 물을받기 위해 물이 나오는 곳을 찾아 여기 저기 다녀야 했다. 부산진까지 먼 길을 가서 걸어온 적도 있고 영도다리를 지나 영도에 가서 물을 길어 온 일도 여러 번 있었다.부산에 피난민이 계속 밀어닥치자 정부에서는 미군에게 부탁하여 부산으로 몰려 든 피난민의 일부를 제주도로 옮기도록 하였다.
“알려드립니다. 부산에는 더 이상 피난민들에게 숙식을 제공할 장소가 없습니다. 모두 짐을 싸 들고 부산 제2부두로 나오시기바랍니다.”
늦은 저녁이었는데 부두가 피난민들로 가득 차 있고 세상에서처음 보는 큰 배가 불을 대낮같이 켜 놓고 정박해 있었다. 사람들이몇 명씩 조를 짜서 대열을 만들었다. 몇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배를타기 시작하였다. 굉장히 많은 사람이 탔으나 몇 명이나 탔는지는알 수 없었다. 갑판 밑의 짐칸마다 가득히 피난민들을 태우고 배는떠났다.항해를 시작한 지 몇 시간 지나면서 배가 풍랑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멀미를 하고 토하기도 하였다. 나는그 배의 바닥 창고가 하도 답답해서 계단을 타고 짐칸 위로 올라갔다. 그 위에는 미군 한 명이 사람들이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었다. 내가 올라가 웃으니까 올라오면 안 된다는 시늉을 하였다. 물이 먹고 싶다고 하니까 저쪽에 가서 먹으라고 하였다. 물을먹고 여기저기 구경도 하고 다시 식구들이 있는 칸으로 내려갔다.시간이 몇 시간 또 지났다. 배가 제주도에 도착했다고 하여 모두 준비를 하고 갑판 위로 나왔다. 앞에는 성산포 끝에 높이 솟아있는 바위산이 보였다. 제주도 동쪽에 있는 성산포 외항에 우리를실은 미군 수송선이 정박해 있었다. 갑판 옆 난간 밖에 밧줄로 만든큰 망을 달아 놓고 그 중간마다 밧줄사다리들을 만들어 사람들을아래로 내리게 하였다. 미군들이 밧줄사다리 양쪽을 잡고 사람들이파도에 출렁거리며 떠 있는 상륙용 보트까지 안전하게 내리도록 부축하여 하선시켰다. 아이들과 노약자들을 한 명 한 명씩 들어서 다음 사람에게 인계하고 또 그 다음 사람에게 인계하여 보트에 내렸다.우리 식구도 그렇게 내려 상륙용 보트에 탔다. 자리가 찬 보트는 해변까지 달려 앞쪽의 난간을 바닥으로 내리고 사람들을 내려놓았다. 이야기를 들으니 성산포에는 일부만 내리고 다른 사람들은서귀포 등 다른 곳 여기저기에 내린다고 하였다.우리가 내린 곳은 모래와 작은 바위들이 섞여 깔려 있는 성산의 바로 옆 해안이었다. 바닷가에서 피난짐을 기다리는 사이에 아버지가 시내로 가서 방을 하나 마련하셨다. 성산포 주민들이 피난민이 온다고 집마다 모두 방을 하나씩 비워 놓고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묵은 집의 주인은 최 씨인데 아들은 군에 갔고 딸이 셋 있었는데 우리에게 친절히 잘 대해 주었다.딸들이 해녀인데 잡아 온 전복, 바다소라, 해삼 등을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우리가 도착한 후 몇 번 더 미군 LST 배가 와서 피난민을 내려놓고 갔다. LST는 우리가 타고 온 배에 비해 선체가 훨씬 적어 배가 직접 해안가까지 와서 앞의 아가리를 아래로 내리고피난민과 짐을 내렸다. 그곳에 내린지 얼마 안 되어 피난민학교가 세워졌다. 나는 이곳에서 평안도, 함경도, 서울, 인천, 부산 등 한반도 사방곳곳에서 온 아이들과 함께 공부도 하고 놀기도 했다.

성산포에는 부락에서 좀 떨어져 있는 밭 가운데 큰 창고 같은건물이 있었다. 그곳에는 육지에서 온 제2국민병들이 있었다. 제주도에서는 본토를 육지라 부른다. 이 사람들은 밖에 나오지도 않고그 안에 있었다. 밖에 나가면 도망갈까 봐 그 안에 가두어 놓은 것같았다. 가끔 죽은 사람을 동료들이 들 것에 메고 나와 멀리 가서파묻는 것을 나는 몇 번이나 목격했다. 내가 그때 중학교 1학년의어린 나이인데도 왜 멀쩡한 사람들을 붙들어다가 저렇게 방치하여굶어 죽이나 하고 분개했던 것이 생각난다. 이때에 남한 곳곳에서 제2국민병을 데려다가 1951년 1•4 후퇴 때 제대로 먹이지도 않고 덮을 것을 주지 않고 방치하여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거나 얼어 죽도록 방치한 일이 있었다. 국민방위군사령부의 높은 사람들이 이들에게 가야 할 옷과 부식비를 떼어먹었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이 말했다. 이 문제가 후에 크게여론화되었다. 국회진상조사위원회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1950년 12월 17일부터 1951년 3월 31일까지 이들이 유령인구를 조작하여 착복한 금품이 23억 원이었고, 쌀 5만 2천 섬이나 되었다. 이사건으로 신성모 국방장관이 물러나고, 방위군 김윤근 사령관, 윤익헌 참조장 등 최고 책임자들 5명이 총살형에 처해졌다.

성산포는 참 아름다운 곳이었다. 물이 많이 빠질 때면 성산 뒤쪽 높은 절벽 밑까지 깊이 돌아갈 수 있는데 그곳에는 큰 전복과 주먹만한 소라들이 바위 밑에 붙어 있었다. 사람들이 장대기에 갈고리를 달고 헝겊으로 철렁거리는 줄을 만들어 낙지를 잡기도 하였다.맑은 새벽 바다 저쪽에서 솟아오르는 성산의 붉고 둥근 일출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구멍이 숭숭 뚫린 돌로 집집마다 담을 쌓았는데밭에도 담을 쌓았다. 바람이 많이 불어 집에도 밭에도 담을 싼다고하였다. 성산 꼭대기 분화구 분지에는 말들이 있었다. 그곳에 올라가 놀기도 하고 마른 풀을 베어 오기도 하였다. 잔모래가 있는 해안에서는 조개를 잡을 수 있었다. 쇠꼬챙이로바닷가 모래밭을 꾹꾹 누르면 조개껍질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많이잡지는 못했으나 가끔씩 잡히는 조개가 좋았다. 이른 봄 따듯한 날에는 성산밑 포구에서 미역도 감았다. 이곳은 바위와 자갈과 모래가 바람과 풍랑에 깎기고 밀려 맑고 깨끗한 바닷물결과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몇 년 전 서귀포에서 학회를 마치고 그 포구를 찾아보았다. 그곳에는 술과 해물을 파는 큰 기와집이 물가 바위 위에 놓여 있었다. 내 머릿속에 소중하게 간직되어 왔던 피난시절의 그 아름다웠던 모습이 처참하게 부서졌다.우리가 피난선을 타고 도착했을 때는 아직도 한라산에서 공산게릴라가 활동을 할 때였다. 밤에 가끔 총소리가 들렸는데 성산포근처 부락에 공비들이 와서 경찰과 전투가 있었다고 했다.

우리는 성산포에 약 두 달간 있다가 제주읍으로 이사를 했다. 몇 가정이 트럭을 대절하여 이삿짐을 싣고 갔다. 봄이었다. 제주읍에 도착하여 우선 서부교회 마당에 짐을 부렸다. 교회 본당과 마당에 처 놓은 천막에는 피난민들로 가득 찼다. 우리가 여름 피난 때묵었던 수원교회 목사님 댁 내 나이 또래의 예쁜 딸아이를 그곳에서 다시 만났다. 너무 반가웠다. 당시 제주도에는 육지 여러 곳에서 온 피난민들이 15만 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 숫자는 당시 제주도민 전체 인구보다도 더 많은 숫자였다. 부산, 인천, 원산 등에서 미군 수송함, LST, 한국 해군배를 타고 온 사람들도 있고, 다른 여러 곳에서 민간 통통배를 타고 온 사람도 많이 있었다. 제주읍에 도착한 지 며칠 후 아버지가 제주읍 삼도리에 방을 구하여 이사를 했다. 가까운 곳에 제주농업중학교가 있었는데 서울에서 고아 천 명을 미군 공군기로 공수해 와 있었다. 헤스 대령이공군기를 동원하여 데려왔다고 했다.

우리가 살던 집에서 얼마 되지 않는 곳에 삼성혈이 있었다. 제주도민의 조상 고, 부, 양 씨가 나왔다는 전설의 세 구멍이 그곳에있었다. 키가 큰 오래된 소나무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아버지는 나를 오현중학교에 입학시키셨다. 어느 날 아침 조회시간에 내 나이 또래의 아이가 단에 서서 어려웠던 한라산 공비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반공 교화였다. 공비토벌에서 잡힌 아이라고 하였다. 그 아이가 불쌍해 보였다. 저런 나이 어린 아이를데리고 다니면서 그런 연설을 시켜야 되는가 생각이 되었다. 몇 주 다녔는데 피난중학교가 그 학교 교정에 천막을 치고 시작되었다. 나는 다시 새로 시작한 피난중학교로 옮겼다. 피난중학교에서 다음해 이른 봄 서울로 돌아갈 때까지 1, 2학년 과정을 모두 마쳤다. 다른 여러 학교에서 온 학생들이 모여 함께 공부를 했다. 서울에서 오신 좋은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다. 특히 영어 선생님과 대수 선생님으로 부터 많이 배웠다. 그때기초를 잘 다져 나는 중고등학교 전 과정에서 영어와 수학이 제일재미있었다. 한번은 대수 선생님이 칠판에 문제를 풀면서 공식에 약간의 혼동이 있었다.
“선생님, 계산이 잘못된 것 같은데요.” 내가 지적을 했더니 “이놈아,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라고 하시며 껄껄 웃으셨다. 경복중학교에서 가르치시던 대수 선생님과 숭의학교에서 가르치시던 영어 선생님이 나를 많이 격려해 주셨다. 이 선생님들의격려는 내가 공부에 취미를 붙이는 데에 큰 힘이 되었다.제주읍에 있을 때 물이 많아 좋았다. 부두에서 가까운 산지에는 사시사철 찬 지하수가 바위 속에서 콸콸 솟아나왔다. 물이 깨끗하고 차고 맛이 좋았다.

제주항 부두가 방파제로 둘러싸여 있는데이쪽 부두에서 내항을 가로질러 맞은편 방파제까지 헤엄을 쳐 가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평화선 안으로 들어왔다가 우리 해안경비대에게 붙잡혀 온 일본어선 한 척이 내항 가운데에 정박해 있었다. 학교친구들과 방과 후 용담에 가서 용대가리바위 꼭대기까지 올라가 바다로 다이빙을 하며 놀았다. 사라봉에도 올라가 놀았다. 물이 빠졌을 때 바닷가를 따라 사라봉 절벽 밑에까지 멀리 갔다가 갑자기 물이 들어오고 천둥 번개가 쳐서 무서워 급하게 뛰어 항구 쪽으로 돌아온 생각이 난다. 그 해 가을까지는 한라산에 공산 게릴라가 완전히 소탕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한라산 기슭까지 가서 나무를 해오기도 하였다.

중공군 포로수용소가 제주읍 공항근처에 있었다. 미군트럭이중공군 포로들을 싣고 도청 앞길을 지나가곤 했다. 그들은 ‘장백산줄기줄기 피어린……’ 노래를 목청이 터지도록 크게 부르며 도청 앞길을 지나갔다. 꼭 한국 사람들같이 노래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만주의 조선족들로 구성된 중공군 포로들이었다.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이 저렇게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는 것이 이상하였다. 1952년 3월 나는 먼저 서울로 떠나신 부모님을 따라 동생들을 데리고 이리호로 부산까지 가서 기차를 타고 영등포 집으로 돌아왔다. 전쟁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영등포에는 이 아이들을 모아 돌보는 고아원이 많았다. 문래동에는 영생보육원이 있었다. 이 보육원에 있던 아이들이 모두 우리가 다니던 도림교회에 나왔다. 그중에 한 아이 문관호가 나와 친해졌고 자주 우리 집에 와서 놀았다. 나는 이 아이와 일생 동안 가까운 친구로 지내고 있다. 그는 우리 어머니가 중매를 해서 결혼을 했고 그의아들은 목사가 되었다. 문관호는 장로가 되어 오랫동안 도림교회에서 봉사하다가 몇 년 전에 은퇴하였다.

휴전이 끝날 때까지 우리 집 앞 철로 연변에는 전선에서 실려온 국군과 미군을 치료하는 미군 간이 기차병원이 있었다. 어떤 날은 실려 온 부상병이 차고 넘쳐 철로연변에 침대를 놓고 치료를 하기도 하였다. 영등포국민학교에는 터키군이 있었다. 그 옆의 공장에는미군 전사자를 처리해 냉동을 해서 보내는 병참부대가 있었다. 신길동 우신국민학교는 유엔군 병원으로 사용되었다. 대방동에 있는 서울공업중고등학교에도 미군부대가 있었다. 이때는 서울의 대부분학교들을 미군과 다른 유엔군 부대가 쓰고 있었다. 문래동에 있는여러 방직공장에도 미군부대가 있었다. 영등포에 있던 대부분의 학생들이 대방동 천막교실에서 실시되었던 연합중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사람들은 이 학교를 훈육소라 불렀다.

서울공업중고등학교 뒤편에 있던 성남중학교에서는 미군이 일찍 퇴거하여 나는 집으로 돌아온 직후 이 중학교 3학년에 편입되었다. 그 당시 꼿꼿한 군인으로 유명했던 예비역 김석원 장군이 이 학교 교장이었다. 추운 겨울 어느 날 소련의 독재자 조세프 스탈린(Joseph V.Stalin)이 죽었다. 김 교장은 스탈린이 죽은 다음날 아침 조회시간174 사선을 넘어서에 전교 학생들을 교정에 정렬시키고 말씀하셨다. “스탈린이 죽었다 만세!” 김교장은 직접 크게 선창하고 학생들에게 복창을 시켜 만세를부르게 하였다. 스탈린은 전쟁에 필요한 무기와 장비를 북한에 원조하여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게 한 장본인이다. 나도 따라 만세를 불렀다.

1953년 봄까지 한강을 건너 서울시내로 가려면 도강증이 필요했다. 꼭 필요한 사람만 가게 했다. 휴전이 가까워지면서 한강 도강이 수월해졌다. 나는 그해 4월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리동의 양정고등학교로 복교하였다. 나는 그 후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1963년미국에 유학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68년부터40여 년간 California State University, Los Angeles에서교수생활을 한 후 은퇴하였다.

“기적의 배”를 탄 박관옥 여사는 6살 때 함께 피난 나왔던 부모를 흥남 부두에서 잃고 헤매다 떠밀려 배를 타고 대구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대구에 와서도 5-6개월이나 부모를 찾아 헤매다 기적적으로 간신히 만나게되었다. 부모를 잃고 찾아 헤매던 5-6개월이 어린 여섯 살의 박관옥 여사에게는 얼마나 길고, 큰 시련과 힘든 시간들이었음을 그녀의 눈물의 고백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함흥에서 살았다. 전쟁 당시 내가 살던 곳은 학교 근처였고 대한민국 국군들이 많이 주둔해 있었다. 그래서 나의 어머니는국군들의 점심을 정성껏 해 드렸다. 군인들이 은혜를 많이 입어서이남으로 내려가면서 우리 가족을 모두 같이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어느 날 군인들이 부대가 이남으로 후퇴하는데 그 다음날 우리를 데리러 오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그들은 작전 계획이 변경되어  밤중에 갑자기 떠나서 우리를 데리러 오지 못했다.우리는 흥남으로 가야만 배를 탈 수 있었다. 흥남부두로 가려면 강을 건너야 했다. 부두로 가는데 북한 인민군들이 총을 쏘면서도망가는 피난민들을 죽이려 했다. 이 와중에 우리 가족은 뿔뿔이흩어졌다.

나는 부모님과 헤어져 언니와 함께 따로 떨어졌다. 언니와 나는 흥남부두로 가서 LST라는 배를 타려 했다. 처음에는 군인이 너무 많아서 우리를 배에 못 올라가게 했다. 그래서 언니와 나는다시 집으로 가서 숨어 있었다.그런데 우리 집에 자주 오시던 진 대위님이 배를 탈 수 있다는소식을 갖고 오셨다. 언니와 나는 그분을 따라 부두로 나갔다. 군인들은 우리의 짐이 너무 많다며 다 가지고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옷가지 몇 개만 챙겨서 배에 올랐다. 그때는 사람들이 너무 배가 고파 그냥 바닷물을 떠 와서 먹었는데 어린 나는 물이 너무 짜서먹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나의 부모님은 다른 배를 타고 동해안 묵호에서 잠시 섰다가 다른 배로 갈아타고 거제도로가셨다고 했다.우리 집에서 항상 식사를 하시던 진 대위님이 부모님을 잃은언니와 나를 잘 돌봐 주셨다. 언니는 그 당시 16살이었다. 진 대위님은 나와 언니를 너무 귀여워해 주셔서 어디든지 데리고 다니셨다.그래서 우리는 진 대위님과 함께 직접 전쟁터도 많이 다녔고 전쟁터에서 미군들이 뻘건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 것도 많이 봤다. 잔인하고 무서웠던 전쟁터가 어린 내겐 너무 충격적이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서늘하고 끔찍하다. 밤에는 항상 어디든암호를 대고 다녀야 했다. 군인들이 너무 많아서 배식할 때 밥을 삽으로 퍼줬다. 어린 내게 그것은 더러운 밥이었기에 잘 먹지 못했다.진 대위님은 더 이상 나와 언니를 전쟁터로 데리고 다니는 것이 우리에게 너무 고생이라 생각하시고 대구에 있는 그의 지인에게보내 주셨다. 대구에 있을 때도 진 대위님이 계속 쌀과 돈을 보내주셨다. 진 대위님은 우리 자매에게 진정 하나님이 보내 주신 천사였다.

그렇게 대구에서 언니와 내가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안전하게 있을 때, 거제도로 피난하셨던 아버지께서 두 딸을 잃어버렸다고그가 아는 군인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를 진 대위님이 보시고 아버지께 연락을 하셨다. 그렇게 진 대위님을 통해 부모님과 연락이 닿아 장승포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나의 고모부는 일본에서 공부하신 의사이시다. 고모와 고모부가 장승포에 피난을 와 계셨다. 우리가 배를 타고 장승포에 있는 고모 댁에 들렸다가 거제도로 가려고 하는데, 거제도에 계셨던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러 대구에 가는 길에 장승포에 오셨다. 그래서 장승포에서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아버지를 붙잡고 언니와 나는 너무너무 기쁘고 감격하여 한없이 울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생각한다. 5-6개월 만에 만난 부모님이었다. 서로 고생이 너무 많았다.

우리를 다시 찾고 난 다음 어머니는 그 와중에 모든 가족이 다남으로 피난을 올 수 있었던 것에 너무너무 감사하시며 항상 감사기도만 하셨다. 집에 불이 났는데도 우리 가족이 다 함께 있는 것에감사하셨다. 어머니는 모든 일에 평생 감사만 하며 사셨다. 우리 어머니는 예수를 안 믿는 가정에서 시집 와서 지금은 너무너무 기도를많이 하시는 권사님으로 아직도 한국에 살아 계신다. 95세이시다. 장로님이셨던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께서는 기독교인이면서 독립운동가셨다. 감옥에 잡혀 가셨다가 해방이 되어 나오시면서 건강이 악화되어 돌아가셨다. 이북에서 아버지가 금방을 하셨다. 그래서 해방되었을 때 금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힘들게 살지는않았다. 매일 밤 우리는 가정예배를 드렸다. 하루는 밤에 쌀이 없었다.그래도 그날도 우리는 어김없이 가정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가정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에 보니 문 앞에 쌀가마니가 있었다. 이게 웬일인가 해서 하나님께 감사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옆집에 살던 다른가정이 보내 준 것이었다.(그 가정도 매일 찬양 소리가 넘치는 가정이었다) 옛날에 그 집에 쌀이 떨어졌을 때 우리 어머니가 쌀을 나눠주셨었다. 그 날 그 집에서 쌀을 갚으러 왔다가 우리가 예배드리는것을 보고 그냥 놓고 갔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잊고 계셨었다.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통해 또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구나.”어머니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셨다. 우리를 잃었다가 다시 찾으신 후 우리 어머니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셨다. 두 딸을 잃었다 찾은 기쁨에 평생을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사셨던 우리 어머니를 보며 하물며 잃은 영혼들을 다시 찾으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기쁘실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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