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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I 편

(김익창 선생님의 부친 수기 계속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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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내가 중학교에 가기를 매우 원하고 있는 것을 아시고 집한 채 있던 것을 20원에 팔아 나의 학비를 조달하셨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다. 1924년 3월에 자격 없는 선생을 갈아달라고동맹스트라이크를 하였다. 나는 그때도 제 3학년 반장이었다. 동맹스트라이크의 지도자는 각 반의 반장은 물로 참가하였다. 그 관계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그 해 9월부터 수진면 미산동 명신학교교원으로 시무하고 이듬해 3월에 사직하였다.1924년 1월 20일에 신의주 진사정 3정목 3의 2번지로 이사하다.1925년 4월부터 1926년 1월까지 의주 태동 직조 공창의 서기로 근무하다.1925년 4월 9일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던 할머니가 별세하셨다.1925년 4월 17일에 의주 남문동 183번지로 이사하고 대성상점에서 26년 1월까지 서기로 근무하다.1926년 2월 15일, 사랑하는 부모, 동생을 떠나 일본 동경으로 떠났다. 모진 바람이 불던 날 동생들은 울고 아버지는 강변까지따라 나오셨다. 어머니, 누님, 나 세 사람이 빙차를 타고 압록강을내려와 신의주에 도착하였다. 2월 17일 누님과 같이 신의주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여 관부 연락선으로 하관(시모노세키)까지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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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기차로 20일 낮에 동경에 도착하였다. 그때 누님은 남편을 찾아 간 것이고 나는 둘째 매부 김선필(金善弼) 씨의 소개로시바공원 부흥국 출장소 측량인부로 고용되었다. 그때 임금은 1원80전으로 매일 지불되었다.1926년 5월 8일. 집에서는 안동현 7도구 2번통 2정목 2번지로 이사하였다는 편지가 왔다. 1926년 3월 6일 동경공과학교에 입학하고, 동년 9월 6일에 중앙 공학교 토목과에 전학하다. 1927년8월에 동교 토목과를 우등 4번으로 졸업하였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려고 하니 학교에서 졸렸다. 전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에 졸다가 내릴 정류장에서 내리지 못하고 종점에 가서야 정신을 차려 다시 타고 올 때도 있었다. 시험을 칠 때에는 위에 앉은 학생이 좀 가르쳐 달라고 옆을 찔렀다. 그러나 감시인이 있어 가르쳐주지 않고 나왔더니 그 학생이 시험치고 나와서 나를 원망하였다.우월감을 가진 일본 학생이 왜 가르쳐 달라고 했을까?1927년 9월에 평안북도청 토목과의 공수로 취직하였다. 일급은 1월 50전이다.1927년 12월 7일 안동현 6도구 남 3조통 2정목 경제 8호로이사하였다. 내가 도청에서 근무할 시절에 친구가 신의주 부청에서근무하는 주운봉(朱雲鳳) 양을 소개하였다. 본 집은 강계군 중강진이고 목사의 딸로서 신의주에서 양 어머니와 같이 살았다. 그렇게미인은 아니지만 내 마음에 들고 미인이라고 생각하였다. 몇 번 심방하여 황당한 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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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고 결국 김취곤 목사의 소개로 결정이 되고약혼식도 김목사가 주관하셨다.(1928. 10. 2.)1928년 12월 28일에 삼일 예배당에서 김취곤(金聚坤)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1929년 2월 23일에 약죽정13-3으로 이사하였으니 다시 고국에 돌아온 것이다. 서울에서 조선박람회가 열려 아내와 같이 신혼여행 겸으로 서울에 와서 구경도하고 아내의 친구 윤성상 씨 부부를 심방하였다.1930년 4월 22일 오전 11시에 첫 아들이 출생했다. 일본인산파를 부르고 체중은 750몸매라고 한다. 온 집안이 경사났다고즐거워하였다. 동년 6월 8일에 김취곤 목사에게 익창이가 유아 세례를 받았다.1930년 10월 23일 막내동생 권옥 양과 신랑 조명준(趙明俊)군의 결혼식을 삼일교회에서 거행하였다. 1931년 3월 11일 부친이 별세하셨다. 내가 출장 중에 별세하여 운명하시는 것을 지켜보지 못하였다. 별세의 전보를 받고 눈을 헤치며 산길을 걸어 기차를타고 돌아왔다. 시체가 된 아버지를 볼 때의 슬픈 감정이야말로 다할 수 없다. 운명하실 때에 나를 찾았었다고 하였다. 일생 동안 여유 있는 생활을 못하시고 돌아가실 때까지 고생하시던 아버지! 그러나 온순하고 정직하고 신앙이 독실하신 아버지는 몸은 썩어 없어졌을 것이나 영혼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복락을 누릴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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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4일 장례식을 필한 후 신의주 공동묘지로 안장하였다.비석도 세웠으나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1931년 5월 15일 부로 지방토목기수로 승격하다.(월급은 53원)1932년 1월 12일 여아 익란이 출생하였다.1932년 10월 25일 운정정 9-3번지로 이사하였다.(가격 450원) 동년 11월 3일 동생 권순 양과 안문봉 군이 삼일교회에서 김취곤 목사의 사회로 결혼식을 거행하였다.1933년 12월 5일에 영변 토목관구로 전근하여 영변면 동부동 628 오관준 씨 댁에 거주하다.1934년 3월에 개천면 삼포리에 있는 논 2,254평, 밭 690평을 1,084원에 매수하였으니 우리로서 처음으로 토지를 산 것이다.1934년 10월 25일에 자성군 중강면 중지동 336번지에 있는 논2,215평을 1,250원에 매입했다. 그러나 그 후 그것을 팔아 학비를조달했다.(동경유학)1935년 2월 27일에 2남 익성이가 출생하였다.(영변에서)동년 4월 동경 유학을 목적하고 지방 토목기수를 사명하고 4월 15일에 동경에 도착하여 숭실학교 동창생인 김관주 씨가 경영하는 숭학뇨에 유숙하였다. 동경 물리학교 고등사범과에 입학하려면갑종중학을 나와야 함으로 상업학교 야간부 제 4학년에 입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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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9월에 아내가 세 아이를 데리고 김관주 씨와 같이 동경에 왔다. 임시로 숭학뇨에 거주하다가 풍도구 일출정에 있는 조선기독교회 건물로 이사하였는데 주일에는 20명가량의 교인이 오고오택관 목사와 김관주 씨가 인도하였다.1936년 3월 24일 동아상업학교를 우등 졸업하였는데 나까노교육회에서 상장을 받았다. 야간 상업에 다닐 때에는 임시공수로근무하였으나 동년 4월 15일에 사직하였다.1936년 4월 11일 소원하던 동경물리학교에 입학하였다. 물리학교는 오전만 가르쳤으나 오후 1시부터 밤 10시까지 복습하고 예습하는 데 시간이 늘 모자란다. 조용한 곳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근처 2층방을 세내어 서재로 사용하였다.1937년 2월 11일 익창이가 단독 및 대소장 간창으로 대변 볼때 출혈함으로 이께부끄로 병원에 입원하고 내가 또 가슴의 신경통으로 18일에 같은 병원에 입원하였다. 부자가 같은 병원에 누워 있을 때에는 기가 막혔다. 나는 교육자가 되기를 항상 갈망하였다. 내성질에 맞지 않는 토목일. 하루라도 빨리 소원을 성취하려고 경제적 여유가 부족한 내가 가족을 데리고 외국에 와서 공부한다는 것이 어리석었는지 모른다. 할 수 없다. 35세의 노학생이 어려운 수학 공부를 밤낮 하였으니 병이 나지 않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사람이 성공하는 데는 의지만 가지고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 힘든 것을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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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밀한 계획을 세우고 중간에 넣고 자신만만하게 백절불굴하는 정신으로 또는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실천 역행해야 될 것을새삼 느꼈다. 할 수 없다. 내 몸이 허락하지 않는다. 토목이 나의 본직일런지 모른다. 본업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소원이던 학업을 중지하고 영변 토목관구 주임에게 복직할 의사를 전하였더니 이내 환영한다는 회답이 왔다. 하나님 은혜로 부자가 함께퇴원하고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다시 영변 토목관구에서근무하게 되었다.1937년 4월 익창은 영변 공립보통학교 제 1학년에, 익란은영변 유치원에 입학하였다.1938년 3월 익란이가 유치원을 졸업하다.1939년 1월 1일에 익풍이 출생하다. 동년 6월 30일부로 토목기수로 승격하고 본 도청에 근무하게 되었다.1942년 9월 17일. 처가 자궁암으로 도립병원에 입원하고 2차 수술을 받은 결과 완치하여 11월 9일 퇴원하였다. 의사란 귀한존재다.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매 수술할 때는 긴장하여 땀을 흘리면서 자기의 온갖 힘을 발휘한다.1943년 4월 익창이 정주 오산중학교에 입학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온갖 시설을 구비하고 기숙사가 있어 한 방에 상급생과 같이있게 하여 공부를 지도하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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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가 있어 종교 교육을 할 수 있으며 조용하고 분위기가 좋아 공부하기에는 퍽 좋은 곳이다. 이승훈 씨가 설립자이고 조만석 씨가 한때 교장으로 계셨고 민족정신을고취한 유명한 학교이다.1943년 5월 평안북도 토목 기사직을 사직하고 만주 안동현근동공업주식회사에 입사하였다. 여태껏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처음으로 영리회사에 들어온 것이다. 봉급은 351원이니 공무원보다는 배가 넘는다.1944년 7월 중국 장하현 수리 조합 촉탁으로 측량과 설계 공사를 감독하다.1945년 4월 가네야마 씨와 토공을 청부 맡아 순조롭게 공사를 진행하여 이익이 많이 남았다.1945년 4월 익풍이 배화 유치원을 졸업하고 약죽국민학교에입학하다.1945년 8월 15일. 36년간 일본의 통치를 받다가 해방이 되고 독립국이 되었다. 8월 16일 수리 조합 이사와 같이 신경으로 공사금을 받으러 가려고 대호산에 왔다가 일본이 항복하고 조선이 독립이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그리하여 그날 밤으로 트럭을타고 신의주 집으로 돌아왔다.한국이 독립된 것은 해외에서 독립투사들이 운동한 힘도 있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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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에 의하여 제 2차 대전이 끝난 후다시 말하면 대동아권을 부르짖던 일본이 패망한 후 4거두 즉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소련의 스탈린, 영국의 처칠 수상, 중화민국의장개석 총통의 얄타회담에 의하여 한국의 독립이 허락된 것이다.자기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고 남이 가져다 준 독립이다. 4천년 역사를 가진 단일 민족을 두 토막으로 갈라놓은 것이다. 큰 나라들이 자기 마음대로 갈라 놨으니 민족의 비극이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소련은 3.8선 이북에 공산 정권을 세우고, 이남은 미국에 의하여 민주주의 정부를 세운 것이다.1945년 9월 평안북도 인민위원회 토목과 도로 주임으로 근무. 이듬해 1월에 건설과 차석으로 피임되니 그때 인민 위원장은 백영렵 목사요, 건설과 과장은 오석환 씨였다.1946년 3월 28일은 토지개혁을 위하여 각 지방으로 출장 가는 날이다. 나도 책임을 맡게 되었는데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마 전 애국자이신 백 목사를 사직케 하고 공산주의자로 대체케 하였다. 자유를 찾아 이남으로 탈출할 것을 결심하였다. 마침 이남으로 이사 가는 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교섭한결과 짐 없이 한 사람만 타라는 허락을 받았다. 그리하여 3월 27일밤 손틀 재봉틀 하나만을 가지고 배를 탔다. 그날 밤으로 떠나려던배가 사정이 있어 신의주 부두에서 자게 될 때에 보안 서원이 왔다갔다 하는 곳에서 발각되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이 되었다. 이 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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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가면서도 용암포로 이사 간다고 한 것이다. 그 이튿날 새벽에 신의주를 떠나오다가 밤중에 비가 내리고 폭풍이 불어 배가 전진할 수 없어 연안에 닻을 내렸다. 그러나 바람이 세어 닻줄이 갈리기시작하더니 한 20분만 더 바람이 계속하였다면 닻줄이 끊어져 배는 만경창파에 표류했거나 파선되었을 것이다. 2, 3일 후 초도에 도착하여 정박 중 보안서원에게 발견되었다. 나는 배 밑에 있고 뚜껑을 덮은 널판 위로 보안서원의 구두소리가 뚜걱뚜걱할 때에 내 마음은 아찔아찔하였다. 그러나 선주가 잘 교섭한 결과 진남포로 끌려가지 않고 서울을 향하여 배는 계속 전진하였다. 신의주에서 떠난 지10일 후인 4월 7일 마포 부두에 도착 상경하였다.가족은 5월 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신의주에서 가족들이 헌옷을 입고 얼굴에는 검은 것을 묻히고 평양으로 이사 간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보안서원이 지키는 3.8선을 무사히 넘어와서 가족이모이게 된 것이 다행이다. 평동에 있는 처남댁에 임시 동거하였다.1946년 5월 익란이 숙명여고 2학년에, 익성이 덕수국교 5년에, 익풍이 덕수국교 1학년에 편입하다.1946년 6월 7일 태평양운수주식회사 취체역 총무부장에 취임하다.1946년 9월 익창이 경성공립중학교 고급 제 1학년에 입학하다. 동년 2월 30일 동양공업학교 강사를 6개월 만에 사직하다.1947년 4월 토목 건축업 우일사에 취직 토목기사로 월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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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00원을 받다. 1947년 9월 익성이 서울중학교에 입학하였다.1948년 8월 15일 미군정을 폐하고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다. 동년 11월 전남 광주군 송정읍 장암리 영산축제공사 현장 대인으로 임명되었다.1949년 8월 27일 중구 봉래동 1가 27-9의 집을 사고 이사하였다. 동월에 아내가 3인 합동으로 영양 식당을 경영하기 시작하였다.1949년 9월 익창이 서울중학 제 6학년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의예과 제 1학년에 입학하다.1950년 4월 영월철도공사 기술주임으로 가게 되었다. 동년 5월 익란이 숙명여중 제 6학년을 졸업하고 이화대학교 미술부 제 1학년에 입학하다.1950년 6월 25일 6.25사변. 악몽 같은 6.25! 북괴군은 소련 지원의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남한을 공격하였다. 남한에서는 미군이 완전 철수하고 대한민국 군대가 좀 있었으나 무기가부족하고 훈련이 부족하여 쫓기기 시작하였다. 수도 서울이 괴뢰군에게 점령되고 한강다리는 한국군에 의하여 절단되었다.1950년 6월 28일 영월철도 현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려고 친구 3,4인과 같이 서울을 향하여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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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쌀을 한 말씩 짊어지고 여비는 만여 원밖에 없었다. 오다가 배가 고파 농가에서 보리 찬밥을얻어먹으니 그렇게 맛있는 밥을 처음 먹어 보았다. 오다가 날이 저물어 농가에 들러 재워 주기를 청하였으나 방이 없다고 곡간 보릿짚을 쌓은 곳을 빌려 주었다. 그리하여 낮에 비를 맞아 축축한 의복을 입은 채 한밤을 쉬고 나니 보릿짚에서 난 적은 벌레가 내외에 많이 붙어 큰 곤란을 받았다.대전에 도착하여 서울로 떠나려고 하였으나 경비가 심하여 서울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다. 대전에 있는 하숙집에서 1주일을 묵다가 여비가 떨어지면서 각자 행동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부산행 기차를 타고 피난민을 수용한다는 부산진국민학교로 갔다.피난민이 만원이 되어 들어갈 방이 없어 운동장에 스프링코트를 깔고 누웠다.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니 별이 반짝였다. ‘나의 신세가이렇게 되었나! 집에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뜬 눈으로 밤을 밝히고 아침에 요행으로 마루방 한 구석에자리를 얻게 되었다. 식사는 쌀과 보리를 반씩 섞은 주먹밥 한 덩이와 소금 조금씩을 하루 세 번 받아먹고 생명을 유지하였다.며칠 후 제주도로 보낸다고 하더니 통영국민학교를 수용소로정하였다. 이 학교는 높은 계단 위에 있었는데 하루에 주먹밥 세 개도 점점 양이 작아졌다.1주일 지나고 나니 아래 내려갔다가 계단을 올라오는 것도 다리에 힘이 없어 겨우 올라 올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이곳에 오래 있다가는 병신이 되겠다고 생각하고 부산으로 배를 타고 왔다. 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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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찾아가니 예배당 유치원이 만원이라 할 수 없이 뜰에 자리를정하려고 하던 차에 숭실학교를 졸업하였다는 한 피난민이 자기 옆에 끼우라고 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르겠다. 종교학교에 다닌사람이 아무래도 인정이 있는 듯하다. 그 사람과 매일 자취를 하면서 같이 있다가 빵(이미가와야끼)을 구워 팔자고 합의가 되어 빵 굽는 기계를 사고, 숯과 풍로와 밀가루를 준비하여 시장에 나가서 구워 놓았다. 하루 종일 있어도 팔리지 않았다. 2일간을 헛고생 끝에기계를 밑져서 팔고 장사를 중지하였다.생활이 곤란하던 중 미군 통역의 소개로 가까이 있는 미군 부대의 인부로 채용이 되었다. 일이라는 것이 여러 인부가 뜰을 청소하는 일이다. 하루 몇 번 쓸면 되니 일하고는 쉬운 일이다. 식사는미군과 꼭 같이 먹인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궁하던 판에 많이 먹었다. 1주일을 먹고 나니 배에 기름이 졌는지 식사가 줄고 양식이 싫어졌다. 어떤 사람이 미군부대에서 식빵을 굽는 일을 하면 수입이많다고 하여 그곳으로 전직이 되었다. 기계로 반죽하는 것이라든지빵을 부풀게 하고 구워내는 것이 퍽 재미있었다. 금방 구워낸 것을먹는 것은 별미다. 얼마동안 일하던 중 북괴군이 패하여 서울을 철수하고 부산서 서울까지 파괴된 기찻길을 수리하는 공작대원을 모집하였다. 공작대원은 서울을 빨리 갈 수 있다고 하여 나는 목수의명목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명칭이 목수이지 나는 측량하는일만 하였다.1950년 10월 10일, 선발대로 서울에 왔다. 그러나 웬일일까? 8월 28일 아내가 나간 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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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신사가 새벽에 와서 내가 부산에 있는데 내게서 소식이 있으니 나가서 이야기하자고 데리고 나간 후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다고 한다. 들은 바에 의하면 바로 우리 집 앞에 있는 봉래여관주인인 노파는 진짜 빨갱이라고 한다. 집사람의 사상을 시험하기 위하여 공산당을 비판하였는데 집사람이 거기에 넘어가서 같이 공산당을 좋지 않게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노파는 이 사람을 그냥 두었다가는 불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상부에 연락하여 끌어다가 처치한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른 사람들은 다 피난 가는데 집에서는 내가 현장에서 돌아온 후 같이 피난 가려고 기다리다가 할 수 없이 서울에 머무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익창이는 공산군에 끌려 갈 것을 두려워하여받침 아래에 지하실을 파고 그 속에 숨어 있다가 시내 친구 집에 피신하였다. 그러나 병들어 고통을 당하다가 아무래도 서울에서는 피신하기가 곤란하여 부여에 있는 친척집으로 피난하였다. 서울이 탈환되고 피난민이 속속 들어오게 되어 익창이도 퉁퉁 부은 발로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에 수입이 없어 생계가 곤란하였다. 익란이와 남대문 시장에 나가서 채소 장사를 하였으나 잘 되지않아 중지하였다.1950년 12월 25일. 패전하고 쫓겨 갔던 공산군이 중공의 응원을 얻어 다시 이남으로 진출하여 서울이 다시 위험하게 되었다.정부에서도 피난을 권하였다. 어머니가 친척 아이들과 같이 집을보시도록 하고 가족들이 영등포에서 화물차 지붕 위에 타고 오다가중간 어떤 정거장에서 쉴 때 익란이가 소변 보려고 내려오다가 떨어져 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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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거장 대합실까지 업고 가 의자에 뉘였더니 약 30분 만에 깨어났다.부산역에 도착하여 갈 데는 없고 나 혼자 첫 번으로 신세를 졌던 초량교회로 찾아갔다. 역시 만원이라 들어갈 방이 없어 뜰에 홑이불을 둘러 자리를 만들고 며칠 동안 밖에서 생활하였다. 바람이불 때는 먼지가 덮이고 추워서 곤란을 당하다가 간신히 유치원 방한 모퉁이에 끼우게 되었다.그때 나는 미군 물자를 나르는 부두 노동을 하였다. 일이 매우힘들지는 않으나 육체노동을 하지 않던 나로서는 시간이 가지 않고하루가 퍽 길었다. 그때 익창이도 하루 부두에 가서 드럼통을 굴리는 일을 하고 돈을 벌어서 내 앞에 내 놓았다. 매우 피곤한 얼굴이다. 나는 마음이 아팠다.그때 내가 근무하던 우일사 사장이 부산으로 피난 와서 토건업을 시작하려고 그 전 사원을 소집하고 합숙소를 만들었다. 익란이 보고 식사를 좀 도와 달라고 하며 그 합숙소에 얼마동안 있다가익란이는 상업은행에 취직하였으며 우리는 영도 절간 담과 절 사이에 공지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지붕을 만들었다.밑바닥은 가마니를 깔고 문도 가마니를 달아서 임시 거실을 만들었다.익란이는 늑막염으로 은행을 그만 두었다. 그 당시 익창이는입대(1951.01.27)하여 해군 1조가 되어 진해해군병원에 근무하게되었다. 입대하려는 피난 가족과 작별하고 부산부두에서 배를 탈때에 익창의 눈시울이 붉게 된 것을 볼 때와 훈련 중 면회 갔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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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하며 모두 배고파하는 광경을 볼 때는 마음의 고통을 느꼈다.그때 익창이와 같이 훈련을 받던 김영선 소위가 익창의 편지를 가지고 심부름을 왔다. 이때 익란이와 알게 되고 편지가로 몇 차례 왕래하다 결국 중매 약혼이 성립되었다.1951년 11월 대전에 가 유하면서 교통부의 철도 용지도면을한 장에 얼마씩 받기로 하고 시작하여 다음 해 5월까지 하였다.1952년 3월 익풍이 영선국민학교 졸업하고 4월에 서대문중학교에 제 1학년 입학하다. 동월에 익성은 서울고등학교 제 3학년에편입하다. 1952년 5월 익창이 서울대학교 의학부 제 1학년에 입학하였다. 1953년 7월 익창, 익성은 영선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익풍은 학습을 받았다.동년 8월 11일 서울에 복귀하다. 동년 11월 영암선 제 7공구철도공사 기술주임으로 가다.1953년 10월 15일 익란과 김영선 군의 결혼식을 종로예식장에서 거행하다.1954년 11월 익풍이 세례를 받다. 1955년 4월 익풍 서울고등학교 제 1학년에, 익란은 서울미술대학 중등교원 양성소에 입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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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4월 19일, 김영선 부친의 소개로 부산 적기교회 교인김영자 집사가 나와 결혼하기 위하여 상경하다.1955년 11월 영월 제 10공구 철도공사 기술주임으로 출장하다.1956년 3월 익창 서울의대 졸업하고 4월 16일에 의사고시에합격하다.1956년 6월 5일 익창이 미국 유학차 부산에서 해군공사 서해호 편으로 출항하다.1956년 12월 1일 과천 저수지 설치공사 현장대인으로 가다.1957년 3월 익성이 상대경제과 졸업하고, 익란이 서울미대중등교원양성소를 졸업하다.동년 4월 익란이 숭의여중 미술교사로 취임하다.동년 9월 익성이 입대하여 논산 훈련소와 광주 포병 학교에서훈련을 받다.1958년 3월 익풍이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 건축과에 입학하였다.동년 4월 익창이 애리조나대학원을 졸업하다. 1959년 8월28일 익성이 미국으로 출발. 일리노이대학원에 입학하였다.1959년 10월 동해 북부선 제 4공구공사 기술주임으로 출장하다243. 1960년 3월 익풍이 한양공대 건축과 2년 수료하다.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항의하는 데모를 강화하자 이승만 정권은 물러났다.1960년 5월 6일 익풍 입대하여ㅇ 가평통신대대에서 근무하다.1960년 8월 30일 성북구 정릉동에 신우주택을 신축하고 이사하다.
1960년 6월 1일 익창이 애리조나대학원에서 심리학 박사를획득하였는데 주 논문은 “임상 분해에 있어서의 더 게쉬탈드 심리검사에 관한 연구”1960년 7월 익창이 버펄로주립병원의 레지던트로 근무하다.

1961년 2월 5일 모친이 어젯밤부터 신경통으로 앓으시다가밤중 연탄가스로 돌아가셨다.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어머니가 어제도 친구더러 오래 앓지 않고 죽기를 원하신다고하였다는데 별 큰 고통 없이 돌아가신 것은 좋으나 일생을 그리 여유 있게 살아보시지 못하고 또 내가 효도를 못하여 드린 것이 후회스럽다.1961년 2월 6일 오후 3시경에 눈을 떠보니 친척들이 둘러 서있고 내가 병원에 누워 있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내가 어젯밤에어머니와 아내와 한방에서 잔 것은 알지만 그 이후의 일은 전연 알
지 못하겠다.

244 사선을 넘어서

 아내의 말을 들으면 아침에 자기는 자리에 대변을 모르는 사이에 배설하고 간신히 일어나 보니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나는 눈을 뜨고 있기에 빨리 일어나라고 말했으나 듣지 못하는 같아흔들면서 깨워도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뒷집에 사는 소설가박경리 씨에게 연락하였더니 이내 택시를 불러 나를 자기 조카에게업혀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보냈다. 아내는 병원에서 버스 요금을꿔 익란에 연락하여 친척들이 왔다. 나는 오후 3시에 처음으로 정신이 들어 집으로 와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나도 연탄가스를 먹고 15시간 이상을 혼수상태에 있었다. 나는 그이후로 기억력이 나빠진 듯하다. 나의 생명의 은인인 박경리 씨를잊지 않고 해마다 연말에 문안을 간다.

1961년 2월 7일 오후 1시에 한경직 목사의 주도로 어머니 장례식을 거행하고 영락교회 묘지에 안장하다.


245

2.  慶州 金氏 家係譜김


홍주(金弘主) → 김운택(金云澤) → 김이운(金利云) → 김인련(金仁鍊) → 김영호(金永浩, 친할아버지) → 김권직(金權稷, 아버지) → 김익창(金益昌, 본인) → 김성철(金聖喆, 장남)家主: (慶州)金仁鍊(김인련) → (慶州)金永浩(김영호) → (父)(慶州)金權稷(김권직) → (本人)(慶州)金益昌(김익창, LukeIkchang Kim)

婦人: (安東)張炳鍊(장병련) → (大邱)金永和(김영화) → (親母) (新安)朱雲鳳(주운봉) → (妻) (潭陽)田常玉(전상옥)(後母)(坡平)金英子(김영자)--------------------------------(父)(慶州)金權稷(김권직): 음 1902. 12. 1.(양 1903.1.10) ~1995. 1. 28.(93세)(親母)(新安)朱雲鳳(주운봉): ~ 1960. 8. 22.(북한에 의해 납치당하신 날짜)(後母)(坡平)金英子(김영자):

246 사선을 넘어서

1907. 11. 11. ~ 1995. 5.3.(83세)

1) 본인 (慶州)김익창(金益昌, Luke Ikchang Kim, 1930.)처 (潭陽)전상옥(田常玉, Grace Sangok Kim, 1931.)

장남 김성철(金聖喆, David Sungchul Kim, 1963.)처 서쥴리(徐쥴리, Julie Suhr, 1962. 서재필 박사 후손)큰손녀 Tessa Shin Hee Kim(김신희, 金信姬, 1994.)

큰손자 Troy Jaison Shin Young Kim(김신영, 金信英,1996.)
차남 김성우(金聖宇, Daniel Sungwoo Kim, 1965.)처 이은경(李恩敬, Janet Lee)
손자 Jeffry Shin Duk Kim(김신덕, 金信德, 2000.)
손자 Luke Shin Woo Kim(김신우, 金信宇, 2003.)

2) 여동생 김익란(金益蘭, 1932.) -김영선(金永善, 1924.)장녀 김귀원(金貴媛, 1955.) - 남편 이수영(李秀英, 1946)247손녀 이시내(李시내, 1981.)손녀 이시온(李시온, 1986.)손자 이시몬(李시몬, 1988.)차녀 김미경(金美慶, 1957.)장남 김철(金鐵, 1962.)

3) 남동생 김익성(金益成, Ike Kim, 1935.)처 전순봉(全順鳳, 1942)장남 김성태(金聖泰, Alexander Sung Tae Kim, 1971.)차남 김성주(金聖柱, Anthony Sung Joo Kim, 1972.)4) 남동생 김익풍(金益豊, Paul Kim, 1939.) - 처 전경옥(田敬玉, Kay Kyungok Kim, 1948.)장남 김성수(金聖秀, Edwin Sung Soo Kim, 1973.)차녀 김성아(金聖娥, Shanon Sung Ah Kim, 1978.)

248 사선을 넘어서


3. 新安 朱氏 家係譜

외할아버지 朱夏龍(1988. 3. 3. ~ 1942.) - 김낙경( ~1951. 1.)

1) 주운봉 - 사위 김권직김익창(본인), 김익란, 김익성, 김익풍

2) 주운성(주대벽) - 첫 며느리 이해룡주애선, 주봉릉, 주봉세, 주애실, 주봉경, 주봉우주운성(주대벽) - 둘째 며느리 차순령주 신, 주 연

3) 주운란 - 며느리 유정숙주봉덕, 주애나, 주능덕

4) 주운진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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