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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목단 頌

2011.05.18 12:31

김창현#70 Views:10044


목단

                                                            김창현




목단꽃 피는 오월이다.비 개인 아침,바람에 바짝 마른 풀 먹인 세모시 서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은 얇은 진홍빛이 목단 꽃잎이요,꽃잎에 형언하기 어려운 짙은 향내 내품는 황금빛이 목단 꽃술이다.꽃잎 결은 얇은 한지 주름을 방금 다림질한 듯 하고,꽃술 향은 금분(金粉)에 매화향 용뇌향 사향을 섞은 것 같다.화려한 꽃빛과 고귀한 향기가 사람을 압도한다.

이 목단이 푸른 잎새 너울너울 손짓하여 정원으로 나를 불러낸다.날더러 뜰에 나와 자신의 포로가 되라 하고,아름답고 고귀한 자태에 감격하여,조용히 무릅 꿇고 배례하라 한다.


목단은 머리에 봉황과 용 새긴 용잠(龍簪) 봉잠(鳳簪) 꽃고,금실에 비취(翡翠) 곡옥(曲玉) 단 사슴뿔 모양 관(冠) 쓰고,과대(銙帶)에 무지개빛 요패(腰佩) 치렁치렁 늘어뜨리고,양쪽 귀에 금귀고리 장식한 여왕같은 권위가 있다.시녀에게 일산(日傘) 받치게 하고,어가(御駕) 호위하는 붉은 옷의 별감,조례복 입은 문신,투구 갑옷 입은 장수에 둘러쌓인 위엄 있는 여왕폐하 같다.


그래서 화왕(花王) 목단이 나타나면,기화요초들이 문득 빛을 잃고,스스로 초라한 신하가 된다.누가 순서 정한 것도 아닌데,황실 위엄에 몸 움츠리고,품위 앞에 조용히 머리 조아린다.

고귀한 푸른 빛으로 일본 궁성(宮城)을 은은하게 만들던 붓꽃이 제일 먼저 시녀처럼 목단 발치에 엎드리고,건강한 어린 소녀의 부드러운 볼 같이 귀엽던 연분홍 영산홍도 목단의 둘러리 자처하고 몸을 낮춘다.진보라빛 겉면과 하얀 속살이 안팎으로 겹친 화판(花瓣)의 큰 꽃을 가지 휘도록 단 자목련도 얼굴 붉히고 뜰 한 켠에 숨고,개나리 진달래 살구꽃 같은 속가(俗家) 미인들은 목단이 오기 전에 진작 사라져버린다. 


향기 있는 꽃들도 마찬가지다.난이 맑음을 자랑하고,박하가 시원함을 자랑하고,오동이 격조를 자랑하고,야래향 만리향 천리향 백단 장미 울금향이 각각 석청(石淸)같이 깊고 은밀함을 자랑하지만,달빛을 사향으로 버무린듯한 목단의 고귀하고 짙은 향 앞에선 풀이 죽고만다.

이슬 맺힌 목단꽃 향내는 뜰을 적시고 사람의 오관을 적신다.그 향은 피부를 뚫고 들어가 중풍이나 혈관계 질환을 고치는 사향처럼,귀부인이 몸에 지닐 최상급 향인 것이다.

  

옛부터 화가들이 부귀목단도(富貴牧丹圖) 그렸지만,그림이 어떤 것은 엄청나게 비싼 까닭에,나는 고서화 대신에 목단을 침실 앞에 심어놓고 즐긴다.굵은 목단 군식(群植)은,5월이면 살아있는 향기와 빛깔을 나에게 선사한다.눈으로 생동감 나는 봉오리,활짝 꽃잎 펼친 모습,낙화를 자세히 감상하고,코로 바람 타고 침실에 마음대로 넘나드는 진동하는 향기를 느끼면서,나는 스스로의 선택에 스스로 만족한다.


목단을 보면 나는 서라벌의 한 미인을 생각한다. 나는 당태종이 나비 없는 목단 그림을 보내,후사가 없는 선덕여왕을 향기 없는 꽃으로 조롱했다는 야사(野史)를 믿지 못한다.우선 당시 고구려와 대치 중이던 당나라 입장에서는,遠交近攻之策이란 말처럼 신라와는 가까이 해야할 시대상황이었다.

주렴계가 ‘애련설(愛蓮說)’에서,‘自李唐來 世人甚愛牧丹(당나라 이씨 왕조 때부터 사람들이 심히 목단을 사랑하였다)’라 하였으니,당나라 때 목단 재배가 유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선덕여왕이 미인이라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오히려 당태종은 정략적으로 계림(鷄林)의 여왕을 목단같은 미인으로 빗대어,은근히 목단 그림과 목단씨 세 되를 보낸 것으로 추론해볼 수도 있다.꽃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은, 대개 목단 피는 때는 철이 일러 나비가 드물고,보통 목단은 대개 향이 짙지만,극소수 대형 품종은 향이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면, 별 이상할 것도 없다.

 

5월이면 목단이 피었다 속절없이 뚝뚝 진다.목단은 화려함의 극치에서 요절하는 미인같다.미인박명(美人薄命)의 운명을 지닌 가인(佳人)같다.목단이 남긴 향기와 빛은 허공에 아른거린다.그러나 5월은 모란 만나고 헤어진 것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가.비록 모란의 시인 영랑이 ‘찬란한 슬품의 봄’을 노래할지라도.

                                                                                                          (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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