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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바보로 살기 싫어서

내 이름은 계나. 소설 『한국이 싫어서』의 주인공이야. 영화 ‘암살’의 안옥윤에게 이 글을 띄우는 이유는 어쩌면 우린 많은 얘길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야. 당신은 1930년대 광복군으로 싸우다 조선주둔군 사령관과 친일파를 저격하기 위해 경성에 잠입하지. 나는 거꾸로야. 2015년 호주 영주권자로 시드니에 살고 있어.

 내가 한국을 탈출하기로 마음먹은 건 소설에서 말한 대로야. “한국에서는 딱히 비전이 없으니까.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집도 지지리 가난하고, 그렇다고 내가 김태희처럼 생긴 것도 아니고….” 아프리카 초원에서 ‘만날 사자한테 잡아먹히는 톰슨가젤.’ 그게 서울에서의 내 모습이었지. 직장에 다니며 한순간도 행복하지 못했어. 앞으로 어떻게 살지 자신도 없었고. 이 사회에서 나 같은 을(乙)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갑(甲)의 소작인밖에 없어.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마름이야. 손에 쥐는 노임이라곤 빠듯하게 살면서 내 아이를 미래의 소작인으로 키울 딱 그 정도지.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보곤 해. 20~30년 전 안전기획부 비슷한 게 지금도 있는 거 아닌가.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분야에서 우민화(愚民化)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무슨 뜻이냐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시스템이 완벽하게 구축돼 있단 얘기야. 어려서부터 오로지 좋은 대학 가기 위해 학원들 뺑뺑이 돌고, 내신에, 수시에, 수능까지 매달리다 보면 소설책, 시집 한 권 읽기도 쉽지 않지. 그런 머리에서 무슨 새로운 생각이 나오겠어.

 대학 가면 달라지지 않느냐고? 서울대 다니던 친구가 그러더군. 다들 행정고시 공부하러 도서관에 산다고. 학점을 0.001점 더 따려고 서로 노트도 빌려주지 않는다고. 졸업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 취업 될 때까지 서류전형, 필기시험, 면접을 무한 반복하지. 나라 걱정하고 사회에 분노할 시간은, 당연히 없어. “헬(hell·지옥)조선”이란 한숨만 내뱉을 뿐이지.

 어렵게 직장에 들어가면 386 꼰대들이 “우린 신입 때 패기가 있었는데 너흰 왜 벌써 지쳐 있느냐”고 해. 솔직히 우릴 이렇게 만드는 데 부역한 게 누구냐고. 웃긴 건 그들 삶도 정상은 아니라는 거야. 그들을 묶는 건 술이고, 낭만은 노래방에만 있어. 술 진탕 마시고 꼬부라진 혀로 형님, 동생 하고서야 진짜 비즈니스가 시작되지. 매일 밤 야근에, 알코올에 찌든 뇌로 창조경제가 가능하겠어? 어차피 실무자의 소신 따윈 맹장 같은 거야. 자칫하다간 윗분들 판단이 뭔지 놓칠 수 있거든.

 군소리 없이 말 잘 듣는 사람들. 당신이 살던 시대의 황국신민이 그런 사람들 아닐까. 정치도 다르지 않아. 애국심을 요구할 게 아니라 애국하고 싶은 마음을 끌어내야 하는 거 아냐? 선거 때만 되면 국민행복시대다, 국민과 소통하겠다 하면서 개표가 끝나면 국민은 뒷전이지. 사람들 죽어나가도 꿈쩍 안 하고, 엄청난 의혹도 증거부족으로 끝이야. 내 한 몸 건사하기 정신 없는 국민이야 뭐, 금세 잊으니까.

 이게 우민화가 아니면 뭐냐고. 스포츠·섹스·스크린, 5공 때 ‘3S 정책’이 지금은 스마트폰 추가해 ‘4S 정책’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한국이 싫어서』를 읽는 것도 정작 이 땅을 뜨지는 못하면서 위안을 얻으려는 심정들일 테고, 『미움 받을 용기』가 베스트셀러인 것도 그럴 용기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뜻일 거고.

 그래. 세상이 바뀌지 않는 건 착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야. 나쁜 놈이 많아서가 아니라. 당신이 만주에서, 상하이에서, 경성에서 꿈꾼 나라는 이런 게 아닐 텐데…. 암살한다고 독립이 되느냐는 물음에 당신은 말했지.

 “그래도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내가 만약 한국에 돌아간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2015년의 우리가 계속 싸우고 있다고 알려주는 건 뭘까. 우리 모습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다른 톰슨가젤이 잡아먹힐 때 사자에게 맞짱은 못 뜨더라도 함께 비명이라도 질러주는 것. 그런 것일까. 내가 안 죽였다고, 나는 살아남았다고, 그러니 내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지 말고.

권석천 사회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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