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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겨울

2014.02.01 06:22

노영일*68 Views:3777



겨울

병원에서 온 전화가 곤한 잠에 빠진 나를 깨운다. 당직 레지던트에게 치료방침을 지시하고 다시 잠을 청한다. 그러나 정신은 점점 말똥말똥하여져 잠이 오질 않는다. 전에는 전화를 받고도 금새 다시 잠에 빠지곤 했는데 나이 탓인가. 한번 잠을 깨면 다시 잠들기가 힘들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였다. 아내는 곤히 잠들어 있다. 뒤척뒤척 하다가 아무래도 잠이 오질 않을것 같아 침실을 살며시 빠져 나와 서재로 간다. 애꿎은 콤퓨터만 두들기다가 그도 시들하여 커텐을 열고 창밖 뒷뜰을 내려다 본다. 겨우내 쌓인 눈이 나무 그루터기를 덮고, 희미한 초생달빛은 싸늘하게 눈위에 내려앉아 있다. 심술궂은 바람은 쌓인 눈가루를 이리 몰았다 저리 몰았다 하며 장난질을 치고,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무가지가 제법 흔들리는것을 보면 바깥 바람이 꽤 센 모양이다.

유튜브에서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골라 틀어놓고 방의 불을 끈다. 얼어 붙은 뒷뜰을 내려다 보며 나 나름의 환상에 빠진다.




긋나잇 (Gute Nacht): 오월에는 꽃이피고, 그녀는 사랑을 이야기하였고, 그녀의 어머니는 결혼을 이야기 하였다. 그러나 나는 지금은 사랑을 잃어버리고 나그네의 몸이 되어 길을 떠난다. 세상은 슬픔으로 가득차고 길은 눈으로 덮혔다. 개마저 짖어댄다. 그대의 꿈이 깨지 않도록, 그대가 편히 쉬도록,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살며시 문을 닫는다. 언젠가는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알수 있도록 문앞에 “긋나잇”이라고 써놓고 간다.

풍향기 (Die Wetterfahne): 아름다운 그녀의 집 지붕위에 있는 풍향기를 바람이 희롱한다. 마치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나의 마음을 비웃는듯 하다. 내가 미리 알았으면 이 집에서 사랑을 구하려 하지 않았을 텐데.

얼어붙은 눈물 (Gefrorne Traenen): 뜨거운 가슴에서 솟아난 눈물이 얼음이되어 내 볼을 흘러내린다.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구나. 아 따뜻했던 눈물아 너는 이제 차갑게 얼어 붙었구나.

얼어붙음 (Erstarrung): 그녀와 함께 팔장끼고 거닐던 초원. 지금은 눈에 덮혀 자취조차 없어졌네. 그녀의 발자욱을 따라 눈밭을 헛되이 헤맨다. 그녀의 모습도 내 마음속에 차갑게 얼어 붙었네.



보리수 (Der Lindenbaum): 성문앞 우물곁에 서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아래 단꿈을 꾸었네. 가지에 사랑의 말 새기어 놓고서 기쁘나 슬플때나 찾아온 나무밑. 그러나 지금 캄캄한 고요속에 그 곁을 지난다. 차가운 바람이 나의 모자를 날려 보낸다. 나뭇가지는 술렁이며 벗이여 이곳에 그대의 휴식이 있다고 말을 걸어온다.

홍수 (Wasserflut): 넘쳐 흐르는 눈물은 계속 눈 위에 떨어지고, 나의 슬픔은 눈속에 빨려 들어간다. 봄이 되면 눈도 얼음도 녹아 내 눈물을 그녀의 마을까지 실어가리라. 그녀의 집앞에 이르면 내 눈물이 뜨거워 지리다.

냇물위에 (Auf dem Flusse): 즐겁게 흐르던 냇물이 딱딱한 얼음옷을 입고 차갑게 누워있다. 그러나 그 얼음 밑에는 얼음을 깨려는 빠른 물살이 넘치고 있지 않는가. 얼어 붙은 냇물위에 그녀의 이름을 새겨본다.



회상 (Rueckblick): 나는 지금 거리를 빠져나가고 있지만 이 거리는 나를 맞아 주었던 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때는 그녀의 두눈도 빛났었지. 이미 모든것은 지나가 버린것. 그러나 다시 한번 그녀의 집앞에 멈춰설수만 있다면!

도깨비불 (Irrlicht): 깊은 골짜기 저편에서 도깨비불이 나를 부르고 있다. 기쁨도 슬픔도 모두 도깨비불의 장난이다. 나는 상관하지 않고 나가련다. 길은 결국 어딘가로 통해 있겠지.

휴식 (Rast): 지금 몹시 지친 나는 숯굽는 오두막에서 휴식의 장소를 찾았다. 그러나 내 몸은 쉬지않고 싸움을 계속해온 마음의 상처로 쓰라리다.

봄날의 꿈 (Fruehlingstraum): 나는 꿈을 꾸었다. 오월에 피는 싱그러운 꽃들을. 나는 꿈꾸었다. 즐겁게 새들이 지저귀는 푸른 들판을. 그러다 닭 울음 소리에 두 눈을 떳다. 내 주위는 춥고 캄캄하다. 지붕위에는 까마귀가 울고있다. 저 유리창에 나뭇잎을 그린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꿈꾸던 사람을 비웃을까? 한 겨울에 꽃을 본 사람을? 나는 꿈꾸었다. 오직 사랑만을, 아름다운 소녀를, 뜨거운 정열과 키스를, 기쁨과 행복을.



고독 (Einsamkeit): 전나무 가지 끝에 부드러운 미풍이 스치면, 맑은 하늘에 음울한 구름이 지나간다. 무거운 내 발걸음으로 내 길을 간다. 밝고 행복한 삶을 스치고 지나, 외롭고 누구하나 반기는 이 없이. 아, 이 고요한 대기여, 밝은 세상이여! 태풍이 휘몰아 칠때도 이렇게 비참하지는 않았다.

우편마차 (Die Post): 거리에서 우편마차의 나팔소리가 들려온다. 어찌 이다지도 설레이는가, 내 가슴이여? 우편마차에는 너에게 올 편지도 없을텐데. 어찌 까닭없이 두근거리는가, 내 가슴이여? 그래 우편마차는 그 마을에서 왔다. 내 사랑하는 그녀가 사는 곳. 내 가슴이여! 우편마차를 한번 보고 싶은가? 그마을 소식을 듣고 싶은가, 내 가슴이여?

백발 (Der greise Kopf): 서리가 내 머리에 흠뻑내려 백발을 만들었다. 나는 노인이 되었다고 얼마나 기뻤던가. 그러나 어느덧 다 녹아 버리고 본래의 검은 머리로 돌아왔다. 젊음이 나를 괴롭힌다. 아직 무덤까지는 얼마나 먼가.



까마귀 (Die Kraehe): 그 거리를 떠날 때부터 줄곳 한마리의 까마귀가 나를 따라 온다. 언제나 떠나지 않고 내 머리위를 맴돌고 있다. 까마귀여, 괴이한 까마귀여, 나를 놓아주고 싶지 않은가? 까마귀여, 끝까지 따라와 내 마지막 날 무덤에서 너를 보게 해 다오.

마지막 희망 (Letzte Hoffnung): 여기저기 나뭇 가지에 단풍든 잎이 남아있다. 나무 앞에 발거름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희망을 걸고 잎사귀 하나를 지켜본다. 아 그 잎마져 떨어지면 내 희망도 따라 떨어진다. 나 또한 대지에 몸을 던져 희망의 무덤에서 울것이다.

마을에서 (Im Dorfe): 개가 짖고 사슬이 울린다. 사람들은 모두 잠자리에 든채, 평소 지니지 못한 갖가지 것을 꿈 꾼 뒤, 좋건 싫건 원기를 되찾는다. 다음날 아침이면 모두 사라진다. 이제 그들은 분수껏 즐기고 나머지 소망은 잠자리에서 찾기 바란다. 잠 이룰 줄 모르는 개여, 나를 짖어 내 쫓으라! 이 잠의 시간에 나를 쉬지 못하게 해다오. 온갖 꿈을 다 꾸어 본 내가 잠든 사람들 틈에서 무슨 볼일이 있겠는가?



폭풍의 아침 (Der stuermische Morgen): 폭풍이 부숴버린 하늘의 회색빛 구름 조각. 구름 조각은 처절한 사투에 지쳐 하늘에 흩날리네. 붉은 번개불이 그 사이로 번쩍이고, 이것은 내 가슴 속에 있는 소용돌이치는 아침과도 같다.

환상 (Taeuschung): 친숙한 한 줄기 빛이 내 앞에서 춤을 춘다. 그 빛을 여기저기 뒤 쫓는다. 얼음과 밤과 공포 저편에 즐겁고 따뜻한 집을 보여준다. 거기 사랑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 거짓 환상만이 내 유일한 차지이다.

이정표 (Der Wegweiser): 어째서 나는 다른 나그네들이 택하는 길을 피해 눈 덮힌 바위 산의 은밀한 오솔길을 찾는가? 이정표가 거리의 방향을 가리키며 길가에 서 있다. 그리고 나는 끝없이 방황을 계속한다. 휴식처를 찾아 쉴 사이 없이. 문득 내 눈앞에 꼿꼿이 서 있는 이정표를 하나 본다. 거기 내가 가야할 길이 있다. 누구 하나 돌아온 사람이 없는 그 길이.



숙소 (Das Wirthaus): 길이 나를 무덤으로 이끌어 갔다. 여기 머물러야 겠다고 홀로 마음속에 생각했다. 초록빛 조화는 지친 나그네를 차가운 여관으로 인도하는 간판인 셈이다. 허나 나는 지쳐 쓸어져 죽을 지경이건만, 이 여관에는 남은 방이 없단 말인가? 오 무정한 주인이여, 나를 거절하는가? 그럼 다시 길 떠나야지. 나를 더욱 멀리 이끌고 가 다오. 충직한 내 지팡이여.

용기 (Mut!): 나는 쉬려고 묘지에 당도 했다. 그러나 이곳의 방도 다 찼다고 한다. 무정한 숙소여. 그러면 충실한 지팡이에 몸을 맡기고 앞으로 더 나아가자. 온갖 비바람에 맞서리라. 이땅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이 하느님이 되어야지.



환상의 태양 (Die Nebensonnen): 하늘에 있는 세개의 태양을 오랫동안 지긋이 바라 보았네. 그러자 그들도 나를 떠나지 않으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서있었네. 너희는 나의 태양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얼굴이나 비춰 주려무나. 얼마 전까지 나도 세개의 태양을 지니고 있었다. 가장 좋은 두개는 이미 저물어 버렸다. 저 세번째 태양마져 뒤따라 살아져 준다면! 차라리 어둠속이 내게는 훨씬 편하련만.



거리의 악사(Der Leiermann): 마을의 저편 어귀에 손풍금 켜는 사람이 서 있다. 얼음위를 맨발로 이곳저곳 비틀거리며 찾아 다니고 있으나 그의 작은 접시는 빈 채로 있다. 누구 하나 들으려 하지않고, 어느 누구도 눈여겨 보지 않는다. 노인이여, 저와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제 노래에 맞추어 손풍금을 연주해 주지 않겠습니까?



나는 여지껏 70번의 겨울을 지냈다. 나는 가장 추운 정초에 태어났다. 왜정말기 어머니가 나를 임신 하셨을땐 먹을것이 없어 콩깻묵으로 연명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허약하고 근기가 없다고 어머니가 늘 말씀하셨다.

학교에 들어가자 마자 6.25동란이 터졌다. 추운 겨울 콩나물 시루 같은 화물열차에 올라 타고 부산으로 피난갔다. 몇개의 주먹밥을 구하여 어머니는 우리들 부터 먹이셨다.

수복때에는 할머니와 고모들과 먼저 서울로 올라왔다. 미아리 고개 근처에서 살았는데 밤이면 인근 미군부대 병사들이 창문을 두들기며 “색시, 색시” 하곤했다. 그때까지 처녀이던 고모들과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공포에 떨던 생각이난다. 할머니는 박달나무 다듬이 방망이를 양손에 검어쥐고 “색시없어” 하고는 허름한 창문을 열고 들어오기만 하면 머리를 박살낼 기세였다. 그때도 몹씨 추운 겨울밤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내가 그들의 고장에와서 그들 틈에 섞여 살게 될줄이야.

겨울이면 창경원 연못에 가서 스케트를 탔다. 중량교 스케트장에도 자주 갔었다. 논을 얼려 만든 스케트장이 몇개 있었는데 날씨가 좀 더우면 얼음이 폭삭 가라앉아 수십명이 무릎까지 물에 빠지곤 했다. 여학생들 앞에서 급 커브를 돌아 놀래주며 장난 치던 생각도 난다. 좀 더 추운날은 광나루 한강에 나가 스케트를 탔는데 몹씨 추워 발에 동상이 걸리곤 했다. 몇년전 까지만해도 겨울이면 발 뒤꿈치가 근질근질 하곤했다.

고등학교 교실에서는 조개탄을 때어 시뻘겋게 달아오른 난로위에 도시락을 쌓아놓고 데우는데 맨 밑에 들어가면 누룽지가되어 새까맣게 타기도 했다.

나도 오월의 푸른 초원을 보았다. 새도 울고 꽃도 만발하였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앞에서는 잠시 발을 멈추기도 했다. 이제는 차고 얼어붙은 겨울여정을 준비해야만 할 때가 된 것인가? 거리의 악사가 은근한 눈길을 보내온다. 나는 황급히 손을 내 저으며 “혼자 가시요. 나는 아직 할일이 많소” 하고 소리쳤다.

스물네곡이 다 끝나고 나니 한시간이 넘어 흘렀다. 침실로 돌아와 다시 잠을 청했다. 날이 밝으면 할일이 태산같은데.

2014년 정월, 어느 추운 겨울날, 시카고에서 노 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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