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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있기에 더욱 찬란한 아름다움

동양인 최초의 내셔널 지오그래픽 편집장 김희중

   
만개한 푸른 하늘에 봄의 기운이 느껴지던 5월이었다. 이른 아침에 찾아가 누른 벨소리에 손수 그가 문을 열었다. 에드워드 김(Edward Kim), 한국 이름으로는 김희중. 올림픽 공원의 전경이 보이는 깔끔한 그의 사무실에는 그 동안 그가 이룬 업적들이 나열돼있었다. 열일곱 살이라는 최연소의 나이로 개인 사진전 개최, 서방 세계 기자로서 최초의 북한 취재, 동양인 사상 최초의 내셔널 지오그래픽 편집장… '최초‘라는 어려운 과제를 그는 몇 번이고 이뤘다.
 

꽁꽁 잠긴 북한의 자물쇠를 열다

지난 1972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입사한 그는 남들보다 더 좋은 사진을 찍고자 했다. 그는 어느 누구도 북한을 취재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손수 김일성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람들은 북한에서 답장이 올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7개월 뒤에 북한에서 회신이 왔고, 우여곡절 끝에 그는 미국을 떠난다. 북한에 가기 위해. 소련 공항에 도착한 그에게 돌아온 것은 북한의 취재 거부였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이쯤에서 좌절하고 돌아갔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달랐다. 북한에 세 통의 설득 편지를 보내고 무작정 기다리기를 14일. 마침내 모스크바 대사관에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토록 오지 말라는데 기어이 오겠다는 사람, 구경이나 하고 싶다 그럽네다. 취재는 안되니 평양 가서 이틀만 쉬었다 가라요.” 그러나 이틀이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이 한달이 됐다. 결국 그는 성공적으로 북한 취재를 마친 것이다. 이 일화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부딪치는 그의 삶을 전적으로 보여준다.


▲ 김희중의 북한 취재를 통해 알려진 북한의 모습은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사진은 북한의 학생들이 교련 훈련을 받는 모습을 담은 것이다. /에드워드 김 포토 에세이
                                
‘매직박스’ 카메라와의 첫만남

그가 처음 사진을 찍게 된 계기는 중학교 3학년 때 그의 아버지께서 '매직박스' 라 내주셨던 한 대의 카메라였다. 그 카메라가 어떤 마술을 부리는지 알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걷다가 한 새댁이 갓 태어난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에서 그는 한없는 어머니의 사랑을 느꼈고, 반사적으로 카메라를 들었다. 갑자기 그 이후로 그의 눈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막 빠져나온 태아같이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다. 중학생이었던 어린 김희중에게는 카메라를 통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일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사진 과 함께하는 여름 방학을 보낸 그는 어느 일요일날에도 어김없이 카메라를 들고 신촌에 갔다. 지금과는 달리 신촌은 연세대학교와 이화여대를 빼곤 모두 논과 밭이었다. 거기서 그는 할머니 한 분이 대바구니를 들고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 사진은 수많은 어른들을 제치고 중앙일보 사진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수상한다. 이 일의 계기가 되어 그는 당시 중앙일보 사진부장이었던 이명동 씨로부터 사진을 배우게 된다. '작은 것은 크게 보고, 큰 것은 작게 보라' , 사진을 잘 찍는 법을 물어본 그의 스승이 한 대답이었다. 부분을 통해 전체를 표현하는 것과 같이 또 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이 말은 앞으로의 그의 사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 고등학교 1학년, 열일곱 살의 나이로 그는 그 동안 찍었던 사진들을 모아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는 그 당시에 굉장한 화제가 됐다.

짧지만 아련한 기억, 연세대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우리대학교 심리학과에 입학한다. 그 당시에만 해도 심리학이라는 학문은 매우 생소한 학문이었다. 그는 말한다. "딱히 깊은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저는 사춘기 시절부터 사람의 행동 동기에 대해 항상 의문을 가졌었지요." 멋을 아는 학생들, 아름다운 학교 교정과 열정적인 학교 교수님들, 마치 시골의 '미국 대학' 을 연상케 하는 자유로운 학풍으로 그는 연세대학교를 추억했다. 하지만 심리학과에 입학한 후 1년 동안 그가 마주친 것은 즐거운 대학 생활이 아닌 막연한 현실과 불안한 미래였다. 50년대 말,60년대 초의 우리나라는 고급인력을 수용할 능력조차 없는 가난한 나라였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방황하는 젊은이들, 민주화의 요구에 총칼로 응답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에 회의와 절망이 엄습해 왔다. 또한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그는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젊음의 날개를 자유롭게 펼치고 싶었던 소망이 가장 절실했다. 결국 전시회를 통해 인연을 맺었던 미국 대사 부부의 도움으로 뉴욕 대학에 장학생 자격으로 입학하게 된다.

외로움과 절망으로 수놓아진 뉴욕 생활

귀가 먹먹할 정도로 굉음을 내며 달리던 비행기가 첫 바퀴를 땅에서 이륙하는 순간, 비행기의 창가의 유리창을 통해서 바라본 하늘과 바다를 보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편으로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찬 한편 두려움도 무시하지 못했다. "내가 선택한 이 길이 과연 올바른 길이었나" 아무도 해답을 줄 수 없는 질문을 끝없이 던지는 와중에 20대의 꿈많은 그는 뉴욕에 첫 발을 디딘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가 머물렀던 호텔은 좁고 더러운 방에 낡은 침대 하나가 달랑 놓여 있었다. 그제서야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막연히 '미국' 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그렇게 시작한 그의 뉴욕 생활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외로움' 이었다. 오늘날에는 미국에서도 길가다가 한국인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그 당시에 외국에서 동양인을 만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웠다. 대학에서 어학원 과정을 다녔었지만 불완전했던 영어는, ‘그에게 있어 소통의 단절로 미지의 세계였던 뉴욕 사회를 공포로 여기기에 충분했다. 낡은 호텔에 누워서 낯선 천장을 볼 때마다 그는 끝없는 외로움과 미래에 잠을 설쳤다. 그러던 그는 그의 짐을 뉴욕 대학 사물함에 두고 워싱턴 광장 한복판에서 노숙을 시작했다.

워싱턴 광장에서는 오늘날에 히피라고 부를 수 있는 비트닉들과 어울려 지냈다. 예술가를 지망하지만 가난하고 무절제한 그들이 두려웠을 법한데, 적어도 그들은 유색인종인 ‘김희중’을 차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들과 손쉽게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을 따라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아무데서나 잠을 자고, 공원 분수대에서 몸을 씻었으며, 먹는 것은 파티 장의 과자 부스러기가 전부였다. 원하는 자유를 마음껏 누렸지만 비참하다면 처절할 정도로 비참한 인생이었다. ‘너는 고작 이런 생활을 하려고 미국에까지 왔느냐’ 는 질문이 끝없이 그의 마음속에 울려댔다. 누구라도 그런 지경이 되었더라면 정신이 황폐해지고 좌절했을 것이다. 이때 아버지란 존재는 그를 파멸로부터 지켜줬다. “항상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라” 라고 말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은 언제나 그에게 힘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돈을 벌기 위해 찾아간 곳은 사진을 찍을 당시 많이 보았던 사진 잡지 「Life」 지의 본사였다. 비록 일거리는 찾지 못했지만 레스터라는 비서와 인연을 맺게 되고,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그동안 잊고 있던 그의 사진에 대한 열망을 북돋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녀의 조언을 듣고 전공을 포토저널리즘으로 바꿔 텍사스 주립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오랜 방황의 끝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도박장의 화장실 청소부가 되어

그러나 시련은 곧 그에게 다시 찾아왔다. 미국에 올 때 가지고 왔던 돈이 결국 바닥이 난 것이다. 할 수 없이 벼랑 끝 마지막 희망으로 구한 일자리는 도박장의 화장실 청소부였다. 오전에는 깨끗해 보이는 화장실이었으나 새벽 2~3시가 되면 화장실 여기저기에 게워내는 만취한 손님들의 토사물에 난장판이 됐다. 그는 이 모습에서 인간의 썩어 문드러진 욕망을 보는 듯 했다. 매일 매일 계속되는 고된 일, 그의 몸에서 빠지지 않는 더러운 토사물 냄새.  그럼에도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지옥같던 그를 지탱하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꿈에 대한 열망, 어떠한 장애에도 굴복하지 않는 용기였다. “자신의 꿈을 지킬 수 있다면 어떤 상황도 부딪쳐 이겨낼 수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남들과 같이 잘 때 자고, 먹을 때 먹고, 놀 때 논다면 당신은 결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래는 현재의 결과이다

그렇게 그는 1년 여 동안의 일로 학비를 벌 수 있었고, 힘들었던 이 순간 이후부터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가진다. 이전의 고생을 보상하듯 그 뒤에 그의 노력은 빛을 발하게 된다. 훗날 그의 어떠한 고난에도 부딪쳐 이겨내는 그의 빛나는 삶은 본 신문을 다 채우더라도 부족할 것이다. 그는 말한다. “당신은 지금 현실 생활에 만족하고 있습니까. 현실에 모든 것이 불만족스럽다면 미래도 역시 불만족을 느낄 확률이 높을 것입니다. 현재 자신이 맡은 직분에 최선을 다하세요.” 미래는 현재의 결과이므로 현재에 최선을 다하라는 그의 말에 내심 가슴이 찔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때로는 우리들은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성공하기를 바랄 때가 많다. 사진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사진에 대한 이야기는 좀처럼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직업을 위해, 꿈을 위해 어떠한 고난도 헤쳐 나갔던 그의 이야기를 통해 인생을 허송세월을 보내는 20대들에게 경종을 울렸기를 바란다.

/글·사진 송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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