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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속초에 가신다면

2012.10.10 12:12

김창현#70 Views:7270


속초에 가신다면


                     김창현

  속초는 아름다운 도시다. 설악산과 동해 바다가 은밀히 숨겨놓은 진주 같은 도시다. 

 속초에 가신다면 무엇부터 볼 것인가? 달빛부터 보아야한다. 달빛이 신선봉에서 화암사로 내려와, 영랑호와 바다에 비친, 그 부드럽고 광활한 누리에 가득한 광경을 보면서, 울산바위 밑을 밤 깊도록 거닐어보아야한다. 월하(月下)에 경전 읽는 소리 들으면 마음이 탈속(脫俗)해지고, 월하에 시를 논하면 운치 표묘하여 속세를 떠나고, 월하에 미인을 보면 번뇌 한없이 높아진다고 한다. 신흥사 극락보전과 부도(浮屠)에 비치는 달빛은 탈속한 친구와 감상하기 좋고, 기러기떼 허공을 나르고 하얀 갈대 덮힌 송지호 화진포 달빛은 시를 아는 친구와 감상하기 좋으며, 영금정 암벽에 밀려오는 은파는 연인과 함께 보아야 제격이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너무 밝아서 사람에게 답월(踏月)을 강요하거나, 끝내 잔 들어 마시게하는 달빛만이 진정한 달빛이다. 그때 차 속에서 '에딛 삐아프'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샹숑 '고엽'(枯葉)을 들어보라. 인생이 월광(月光)에 흩어지는 푸른 담배연기 같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안개를 보아야 한다. 안개는 잊혀진 시간을 떠올리는 하얀 커텐이다. '아야진' 커피숍 창가로 가보라. 거기 안개가 선박의 마스트 가리고, 허공을 가리고, 먼 바다 위 희미한 등불을 가리고, 우리의 추억을 가린다. 낮선 이국 홀로 헤매는 정취를 일으킨다. 안개는 속초의 모든 곳을 신비롭게 만든다. 한치 앞 분간하기 힘들만치 해무(海霧)에 덮힌 미시령고개, 늦가을 홍시 달린 감나무를 비치는 장산리 공항의 푸른 써치라이트, 여운포 밤바다 드라이브 길에서 보는 오징어잡이배 푸른 어화(漁火)가 끝없이 신비로운 것은, 속초에 수시로 안개 짙은 밤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단풍을 보아야 한다. 천하 제일 단풍이 어딘가 묻지마라. 한계령(寒溪嶺) 단풍을 보아야 한다. 이른 아침 하얀 안개가 산허리에 감겨 눈부시게 피어오르는 한계령에 가보라. 젖은 바위와 계류 굽이굽이 수정 물결 위에 떨어지는 단풍의 비는 만산홍엽(滿山紅葉)인데, 안개는 조용히 수묵화를 그리고 있다. 이때 다정한 사람의 손 잡고, 수억년간 한 점 티끌까지 씻은듯 깨끗한 암벽에서 꽃처럼 낙하하여 벽옥(碧玉)같은 물에 하나씩 떨어지는 단풍잎들을 보라. 두 사람이 선경 속 인물이 되었음을 느낄 것이다.
 
선녀탕과 용소폭포 주전골 만경대 단풍은 어떤가. 이 근처 나무 모두가 화가이다. 사람을 화려한 파스텔화 속으로 걸어가도록 만든다. 나무는 화폭(畵幅)인양 산에다 온갖 물감을 칠해 놓는다. 가만히 보면, 나무도 화가처럼 선호하는 색이 있다. 백양나무는 노란색, 옻나무는 붉은색, 굴참나무는 갈색 톤 이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빛깔은, 오십대 여인의 미소처럼 너무나 은은한 노란 은행 잎, 밤 깊은 카폐 여인의 루즈 보다 붉은 벗나무 단풍이다. 


 
  다음은 물빛을 보아야 한다. 단풍과 물빛의 하모니를 모르면 속초에 못가본 것이다. 어성전 법수치리 면옥치리 현리를 아는가. 천하제일 물빛이 여기 있다. 속초는 물이 자랑이다. 물이 청옥인양 그리 깨끗할 수 없다. 옥류는 바위 위에서 바이올린 현처럼 부드럽게 구비쳐 내리고, 폭포는 은구슬로 한없이 깨어지고, 들판에서는 흰구름 비치는 투명한 거울이 된다. 투명 크리스탈 잔에 담고싶은 것이 현리의 물빛이다. 단풍은 얼음처럼 찬 물 위에 노랑과 주홍의 비단무뉘 수놓는다. 독한 술인양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간혹 피라미가 황혼의 수면에 튀어오를 때면, 문득 보들레르의 '가을의 쏘넷' 한구절 툭 떠오른다. 면옥치의 물빛은, 봄물은 시적이고, 가을물은 사색적이란 말 생각나게 한다. 산 가득 벛꽃이 물에 뜨 흐르는 그 광경은, 절로 이태백의 시를 떠올리게 한다.

'두 사람이 술잔을 대하니, 산꽃이 피네.
한잔 들게 한잔 들게 또한잔 들게.
나는 취하여 잠을 자려하니 그대는 잠깐 돌아갔다가,
내일 아침 생각나면 거문고 안고 오라' 

  꽃빛 물빛이 얼마나 고우면 그대로 산에서 잠들려고 하겠는가. 이런 최상의 물빛을 본 후라야 물소리를 논할 자격이 있다. 선림원 폐허의 석등(石燈)과 삼층석탑 위로 초생달 뜬 밤, 구룡령에 가서 혼자 물소리를 들어보라. 고요한 물소리가 사람의 심금을 깊이 울린다. 언제였던가. 이곳 물소리를 들으러 오던 한 숙녀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물소리 가슴에 울리고, 남대천 뚜거리탕은 아직도 따끈하건만, 아! 잔 건네던 그녀의 흰 손은 보이지 않는다. 

  다음은 설경을 보아야 한다. 눈이 하지에 녹는다고 설악((雪嶽)이요, 바위가 눈처럼 희다고 설악이다. 산 아래는 단풍이 한참 붉은데, 산 위는 은백의 봉우리가 청자빛 하늘을 이고 있다. 백설은 기암절벽의 노송과 고사목(枯死木)과 청댓잎을 더 격조있게 만든다. 청화빛 하늘 밑에 백자빛 눈 덮힌 산의 단색 대비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청화백자의 깊은 멋을 처음 깨닫게 한다. 진경산수(眞景山水)란 이런 것이다.

 설악의 가장 인적없는 설원(雪原)은 어디인가? 외로운 사람은 용대리 산림욕장엘 가볼만 하다. 거기 계류가 푸른 결빙 위에 육각 보석같은 눈의 결정을 찍어놓은 것을, 낙엽교목 설화(雪花)의 궁전에 안개가 무시로 지나가는것을, 그 미답(未踏)의 설야(雪野)에 눈바람 멀리 흩어짐을 한번 볼만하다. 녹차 한잔 마시며 호반(湖畔)의 눈내리는 풍경 보기엔, 영랑호가 제일이다. 지붕까지 쌓인 눈에 집이 반쯤 묻히고, 푸른 사철나무 울타리에 붉은 열매가 맺혀있는 모습이 영랑호의 서정이다. 찻집 유리창 밖 눈 덮힌 매화 너머로 신선봉 미시령 황철봉 대청봉 보라빛 연봉이 보이는데, 그 중 가장 장관인 것은 하늘로 치솟은 토왕성빙폭(氷瀑)이고, 낮엔 아껴두었다가 달 아래서 볼만한 곳은 기암(奇巖) 울산바위의 설경이다. 
 
 속초에 가신다면 무슨 꽃을 볼 것인가. 신(神)이 살던 정원의 폐허던가. 속초는 처처(處處)의 꽃이 다 아름답다. 향냄새 젖은 낙산사 홍련암 뜰의 붉은 해당화, 필레약수의 자주빛 금낭화, 비룡폭포 오르는 절벽의 푸른 금강초롱, 미시령 눈밭의 보라빛 얼러지꽃, 대청봉에 피는 하얀 에델바이스, 알프스 3번 파브릭코스 전동차 범퍼 위로 덮히던 분홍 코스모스. 용아능선의 푸른 용담꽃, 하얀 구절초, 노란 삼지구엽초, 매발톱꽃 등 기화요초(琪花瑤草)는 그대로 천상화원을 보여준다. 송이 향기만 말하지 말라. 자생 야생화 향기가 송이보다 향기롭다. 향수(香水)도 오히려 부끄럽다. 속초는 꽃도 여승인양 기품있는 향기를 풍긴다. 

   속초는 실낙원일 것이다. 천상을 지상에 재현한 신의 작품일 것이다. 신선이 살다간 유허일 수도 있다. 나는 매번 속초를 그리 단정한다. 여하간 신기루처럼 떠오르는 속초, 파도가 쏠베지송을 부르는 속초를, 나는 항상 피안의 땅처럼 그리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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