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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선각자

2017.08.30 10:51

노영일*68 Views:278

 
선 각 자
 
창밖에 비가 내린다. 모처럼 세웠던 주말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 TV를 틀었다. 위성방송 EBS 에서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정월 (晶月) 나혜석 (羅蕙錫)의 일생에 관한 다큐멘타리가 방영되고 있었다. 몇번째 재방송인듯 한데 나는 처음 보는 것으로 나의 흥미를 자극한다.

그녀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였을뿐 아니라 문필가 였고, 특히 여성해방과 여권운동의 선구자였다. 그러나 도덕성의 문제로 기피의 대상이되었다가 최근에 재 조명되는 작가이다. 나는 그녀의 예술이나 도덕적인 평가보다 그녀의 일생에 더 흥미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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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은 1896년 용인군수 나기정의 2남3녀중 둘째딸 (넷째)로 유복한 가정에 태어 났다. 총기와 미모를 겸하여 진명여고를 일등으로 졸업하고 당시 일본유학중이던 오빠의 권유로 동경여자 미술전문학교 서양화부에 진학한다.

유학중 천재 시인 최승구를 만나 첫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최승구는 고향에 집안에서 정해준 처가 있었으며 폐병환자였다. 양가의 반대가 격렬했다. 최승구의 집안에서는 본처와의 이혼은 절대 않되고 첩으로 들어올려면 들어오라고 하였다. 물론 대가집인 나혜석의 집에서는 유부남에 폐병까지 앓고 있는 최승구와의 결혼은 절대 반대였다. 최승구의 병이 악화되어 고향인 전남 고흥 으로 요양을 갔다. 나혜석이 고흥까지 병문안을 갔다가 동경으로 돌아온날 최승구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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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의 소개로 게이오 대학 법학과에 유학중이던 김우영울 알게 되었다. 김우영은 상처한 전처와의 사이에 딸하나가 있었다. 나혜석은 그의 끈질긴 구애를 거절한다. 나혜석은 실명, 필명, 가명으로 신문과 잡지에 많은 글을 썼다. 첫사랑의 상처를 안은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정신여고 미술선생이 된다. 과년한 딸을 빨리 시집보내려는 아버지의 집요한 강요를 피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어릴적 부터 부모의 애정없는 생활을 지켜본 그녀는 어머니와 다른 인생을 살고자 했다. 춘원 이광수, 염상섭과도 교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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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은 3.1 만세사건에 연루되어 5개월간 감옥살이를 한다. 그때 김우영이 변호사로서 나혜석을 도와 준다. 이를 계기로 석방된후 화려한 결혼식을 올린다. 김우영은 나혜석의 개성을 이해하는 훌륭한 외조자로 이결혼은 모든 사람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결혼후 조선과 일본에서 유수한 미술 전람회에 입선, 특선을 하고 개인전도 하였다. 3남 1녀의 자식들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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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그들은 구미 여행을 떠난다. 만주, 러시아, 유럽, 미국을 둘러 보고 나혜석은 파리에 머물며 미술공부를 하고 김우영은 베를린에서 법학공부를 하게된다. 파리에 가기전에는 사실적인 수법으로 인물과 풍경을 그렸으나 파리 체제중 후기인상파, 야수파, 표현파의 영향을 받아 화풍이 많이 바뀌었다.

파리에 체류할 당시 천도교령 최린을 만난다. 이는 그녀의 인생을 뿌리채로 흔들어 놓았다. 그는 박식하였고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최린과의 만남이 잦아지고 함께 유럽여행까지하며 불륜의 관계로 빠져 들어갔다. 최린은 나혜석에게 김우영과 이혼하면 자기가 일생을 책임지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혜석은 김우영과의 이혼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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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후 최린과의 불륜관계를 알게된 김우영은 이혼을 강요한다. 2년간의 별거후 마음이 달라지면 재결합한다는 조건부로 합의이혼을 한다. 그러나 김우영은 곧 재혼을 한다. 나혜석은 최린을 찾아 갔으나 출세욕에 사로잡혀있던 그로부터도 버림을 당한다. 그녀는 “이혼 고백서” 라는 글을 신문에 발표하고 최린을 정조유린죄로 고소를 하였다. 이것은 당시 대형 스캔달로 신문에 보도 되었다. 얼마간의 위자료를 받고 소취하를 하였으나 그로 인하여 나혜석은 문란한 여자라는 낙인이 찍혀 가족과 사회로 부터 버림받는다. “나는 남편을 속이고 다른남자를 사랑한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편과 정이 두터워 지리라 믿었을 뿐이다. 가장 진보적인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할 감정이다”고 썼다. 그러나 이는 프랑스 남녀연애관의 연장 이었으며 조선사회에는 절대 통용될수 없는 자유연애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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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개인전은 파리를 날리고 그림을 사 주는 사람이 없었다. 전에 그녀의 그림을 샀던 사람들도 그녀의 그림을 떼어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그녀의 집에 불이나 소장했던 작품들이 다 불타 버렸다. 가지고 있던 돈도 다 써버리고 친구인 수덕사 일엽스님을 찾아가 중이 되려 하였으나 그도 받아주지를 않았다. 이혼후 줄곳 아이들을 그리워했다. 집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기도 했고 큰딸 나열을 만나러 개성까지 갔다가 허탕치고 돌아오기도 했다. 김우영이 자식들에게 어머니를 절대 만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파킨손병에 중풍까지 걸려 요양원을 전전하다가 어느 추운겨울날 길가에서 행여 병자로 쓸어져 죽었다. 그녀의 나이 53세 때였고 그녀의 유해는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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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수많은 글들 속에서 그녀의 내면세계를 엿볼수 있다.

젊은 시절 그녀는 입센의 인형의집에서 감명을 받은듯 하다. “인형의 가 (歌)“ 라는 시에서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인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이 되기를 거부하고 노라를 놓아 주라고 하였다. 젊은날의 노라부인을 열망했던 그녀는 현실사회에서는 자식을 두고 빈몸으로 쫓겨난 이혼녀에 불과했다.

자서전적 단편 “경희“ 에서는 “계집이라는것은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시부모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면 그만”이라 하는 아버지의 말에 “그것은 옛날 말이야요. 지금은 계집애도 사람이라 해요. 사람인 이상 못할것이 없다고 해요. 사내와 같이 돈도 벌수있고 벼슬도 할수 있어요. 사내하는것은 무엇이던지 하는 세상이야요.” 라고 했다.

“섣달대목, 초하루날“ 에서 “명절은 여자들에게만 일을 시키는 고통스러운 날“이라 했다.

“현숙 (玄淑)“에서 “우리둘은 반년간 비밀관계를 가져요. 반년후 신계약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결혼은 여성을 억압하고 옭죄는 족쇄이고 이혼의 비극은 여성해방으로 예방해야 하고 시험결혼이 필요하다” 고 했다.

김우영과의 결혼조건으로 “일생을 두고 지금같이 나를 사랑해 줄것, 그림 그리는것을 방해하지 말것, 시어머니와 전실딸과는 함께 살지 않을것, 그리고 신혼여행을 첫사랑 최승구의 묘지로 가서 비석을 세워줄것“을 요구했고 김우영은 이를 모두 수락했다. 이로 인하여 김우영은 남자 답지 않은 졸장부로 여겨졌다.

“모(母)된 감상기“ 에서 “아이는 엄마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고 하였다.

“신생활에 들면서”에서 “여성의 정조는 취미일뿐이지 도덕이나 법룰이 아니다. 배고프면 밥을 먹듯 성욕도 죄악이 아니라 보편타당한 가치” 라고 했다.

“이혼 고백서” 에서는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 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이외다. 내가 만일 당신네 같은 남성이었다면 오히려 호탕한 성품으로 여겼을 거외다.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때만 안아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기만 하는 인형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의 재가 될 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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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 예정이던 구미 여행이 1년 9개월이 되었다. 시어머니는 “자식새끼들을 팽개친 귀신들”이라 했다.

둘째아들 김진은 서울 법대 교수였다가 미국에 와서 일리노이, 캘리포니아등에서 대학 교수를 지냈다. 그는 노년에 “그땐 그길이 왜 그리 좁았던고“라는 책을 펴냈다. 그는 아버지 김우영이 당한 고통과 자기 소년시절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수치감등을 썼으나 이제는 어머니를 이해할수 있다고 했다. 다만 어머니가 조금만 절제를 하였었으면 하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한번은 허름한 노인이 학교에 찾아와 “내가 네 어미다하고 울면서 계속 말씀 하셨지만 저는 혼이 달아나 아무 얘기도 들리지 않았고 수업종이 울려서 교실로 돌아 갔다”고 했다.

한은 총재를 지낸 세째아들 김건은 고향인 수원에 나혜석의 거리를 조성하는데 주역을 맡았다.

거의 한세기 동안 도덕율에 묶여 금기처럼 묻혀있던 나혜석의 재 평가가 활발해 진것은 최근 20년 밖에 안된다고 한다. “에미는 선각자 였느니라“ “나혜석 전집“등 많은 출판물들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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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은 시대를 100년을 앞서 살았다. 그래서 모진 역풍을 맞아 쓸어졌다. 대개 혁명가, 선구자, 선각자, 위인들은 당대에서 모진 삶을 사는것이 보통이다.

여류 소설가 박경리는 운명하기 몇달전에 이렇게 말했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렇게 편안 한것을... 버리고 갈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역시 여류 소설가인 박완서는 노년기에 이렇게 썼다. “나이가 드니 마음 놓고 고무줄 바지를 입을수 있는 것처럼 나편한대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서 좋고 하고 싶지 않은것을 안 할수 있어 좋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한겹 두겹 책임을 벗고 점점 가벼워 지는 느낌을 음미 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나혜석이 불같은 삶을 살다가 폭풍에 사라졌다면, 박경리나 박완서는 조용한 인생을 물흐르듯 (上善若水) 살다가 갔다고 할수있다. 과연 어떤인생이 바람직 할가.

창 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린다.
 
2017년 8월  시카고에서  노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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