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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내가 겪은 6.25

2016.06.24 15:15

민공기 Views:695

내가 겪은 6.25


민공기
 

1950년 봄 6년제 중학을 졸업한 나는 두달후 6월28일 서울에 입성한 북한군 점령하에 3개월간의
악몽 같은 도피 생활을 시작으로 한국전쟁을 겪었다. 그 3년 동안 수만명의 사람들이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또 다시 남으로 인민군 으로 국군으로 피난민으로 오고 또 갔다. 그 중 에는 열 아홉살
의 나도 있었다. 전쟁 동안 에 나는 많은것 을 보았고 많은것을 느꼈다.

해병대 소위로 임관 한지 한달만 에 전사한 친구, 포로 수용서 에서 만난 동창생, 인민의용군 에서 나를 구출해주고 이북 으로 간 “빨갱이” 친구…

전쟁 을 통해서 나는 우리가 선택할수 업는 우연의 우리 삶에 미치는 막강한 힘을 알게 되었다.
 

이 수기는 한국전쟁 첫번 째 해 1950년 초여름 부터 1951년 여름까지 격동의 1년동안 내가 겪은
한국전쟁 일지다 .

 

65년 전 한국. 그때 이런일이 있었다. 이런사람들이 있었다.

 

7월초 나는 체부동 한 골목 에서 동네 민청원 과 인민군에게 잪여서 청운국민학교에 있던 인민의용군
집합소로 강제 연행 되던중 우연히 지나가던 중학동창생 김군(옹진출신 민청 요원 이었다)의 힘으로
빠저 나오게됬다. 그 친구가 나에게 남긴말은 지금도 기억하고있다. “미국 놈 들 이 이 전쟁에 이렇게
대대적 으로 참전한이상 우리 공화국의 승산은 업다.나는 끝까지 인민군하고 같이 행동 할수밖에업는
처지지만 너는 미군이 다시 서울에 올때 까지 잘 피해있어.” 나는 이후 김군을 다시 만나지 못한다.
만일 이때 김군이 나를 구출 하지 안했으면 필경 나의 운명은 달라젔을 것이다. 정치이념 보다 우정
으로 나를 도와준 김군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9월 28일 서울이 수복 되던 날 청운동 우리집은 미군 대포 직격탄을맞고 지붕이 날라 갔지만 다행이
지하실에 도피 했던 우리가족 인명피해는 없었다. 포격이 끋 난 새벽 우리집 앞을 인왕산쪽에서 아직

소년 티 의 인민군 병사가 발에서 피를 흘리며 울면서 내러왔다. 북쪽으로가는 길을 무러 보는 그에게
나는 말없이 북악산쪽을 가리켜 주었다. 1950년 9월 28일 드디어 서울은 해방되었다.

 

10얼 초순에 나는 통역장교 시험을 치고 군에 입대하고 서울 명동 성당에 설치된 열락장교단 훈련소
에서 두달동안 훈련을 받었다. 입대 했을때 10월초 압록강까지 파축지세 로 진격하던 UN군은 중공
군의 인해참전 으로 청천강에서 장진호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고 12월초순에는 전군이 다시 남으로
후태하고 있었다.

 

육군 열락장교(통역장교 전신) 6기생 으로 임관한 우리는 육군 본부와 함께 군용 열차로 안동경유
대구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대전에 신설된 국군 11사단에 배속명령을 받았다.
50년 12월24일 대구역에서 육군본부에서 보낼 jeep차로 대전에 있는 사단사령부를 찾아가라는
것이다. 역앞 광장에서 차를기달리는동안 나는 처음으로 전쟁과 전장을 강력히 느끼게하는 장면을 본
다. 역내 platform에는 원주-횡성 (그때의 최전방 전선)행 군용열차가 연기를 뽑으며 대기중이었고
역전 광장에는 보충대대 에서 트렄으로 게속 운송되온 수백명의 신병들이 소대로 중대로 편성되어가
고 또 딴 트록으로 운송되온 신임 소위들이 한명씩 소대장 으로 배치 되어갔다. 편성이 끋난 부대는
곧장 대기중인 열차로 움지겨 갔다.

 

대전 으로 가는 국도 에는 북쪽으로가는 차량 수 보다 남쪽으로 후퇴하는 수가 압도적으로 많었다.
추풍렁 부근에 왔을때 저녁한눌에 불꽃을 뽑으며 타올라오는 초가집을 돌라싸고 허탈감에 빠진듯
whisky를 병채로 마시고있는 미군 수십명을 만났다. 내 jeep를 보자 그중 한명이 “Hey lieutenant,
we are going back to Japan. No more Korea! Sayonara! ” 하고 외첬다. 완전한 패잔병의 모
습이었다.

게속 대전으로 달리면서 미국이 한국을 포기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을 느꼈다.
 

내가 배속된 11사단 사령부는 그후 대전에서 전주 남원을 거 처서 51년3월 동부 전선 으로 이동할때
까지 지리산일대의 게리라 소탕전에 참가했다. 그때 지리산 게리라부대는 낙동강까지 남하했다가 UN
군의 인천상륙 후 입산한 인민군 정기군과 6.25전 1948년에 있었던 여순-순천 반란 사건때 입산한
구 빨지산 의 혼성부대 였다. 51년2월 어느날 남자 한명과 여자두명 의 포로가 사단 사령부에 연행
되왔다. 나와 비슷한 20대 동년배의 그들. 남자는 서울대 수의과대학 을 다니던 의용군출신 이었고
여자대원은 카키색 인민군복 밑에 아직도 순천여고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치열한 좌우 이데오로기 대립 밑에서 포로를 심문하고 포로로서 심문을 받든 그때 우리세대의 슲은
인연을 지금도 다시 생각해 본다.

 

우리 부대는 51년 3월에 대구 에서 중 장비를 공굽 받고 동해안을 따라 북상했다.
4월초 양양에 있을때 뜻밖에 나의 형 민헌기 군의 소위가 찾아왔다. 서울의대 졸업반 이었던 형은
우리 사단 서쪽에 인접한 3군단 3사단에 야전 방역 대원으로 배속 됬던것 이다. 서울에서 입대한 후
소식이 끊어젔던 형을 전선에서 무사히 만나서 참으로 반가웠다. 틐히 걱정했던 부모님 가족들이 부
산 동래에 무사히 피난 하셨다는 소식에 크게 안심이 됬다.

 

형이 도라간지 한달후 5얼중순에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있었다.
한국전사 기록에도 남아있는 중공군 제2춘기공세 이다. 내가 있던 한국군 1군단(11사단, 수도사단)
이 있던 동 해안쪽은 비교적 무사 했으나 우리와 인접한 산악지대의 3군단 예하 3사단 과 9사단은 큰
타격을 받고 와해 상태 가 됬다.

 

그러나 형이 있는 의무대 는 후방에 있으니까 괜찮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넌데 5월27일경 형의
의대 동기생이며 3사단에 같이 있는 김소위가 나를 찾아왔다. 인제 군 현리 부근 험준한 산골짝 좁은
길을 후태 하던 야전 방역대가 포위공격을 받고 나의 형을 위시해서 전원 비탈진 산으로 기어올라
피신 했으나 그후 대 부븐 인원이 행방불명 이라는 것이다.

 

그중 포위망을 뚫고 사러나온 하사관의 이야기 론 나의 형은 사살 됬거나 포로가 됬을것이라 했다.
중공군 포위공격 이 있은지 벌서 일주일이 지난 지금 사라나올 사람들은 다 나왔을것이었다.
내가 흔히 통역을 맡으고 있던 사단장(오덕준 준장)은 나의 이야기를 듣고 강릉에 설치된 3군단
낙오병 수용소에 가서 형을찾아보고 부산에게신 부모님을 위로해드리고 오라고 시간을 허락해주었
다. 그러나 형은 수용서 에도 없었다.

 

3사단 야전 방역대 의 재 편생 지시를 받기위해서 육군본부가 있는 대구로 가는 김 소위 일행과 강릉
을 출발 대관령으로 향했다. 도중 도로옆 우물이 있는 농가집에 들려서 휴식 하기로했다.
형의 행방불명 소식에 슲어 하실 부모님 생각을 하면서 정신없이 앞에 놓인 도로를 보고있는데
대관령 쪽에서 야전공병대 트럭이 강릉쪽을 향해서 내려오고 있었다. 내앞을 지나가는 순간 트럭 뒤
에 서있는 흑 투성이 작업복 차림의 장교가 내 시야에 close up 됬다.

 

그 순간 “형!”, ”민 소위님!” “야 헌기야!” 우리 일행은 모두가 소리 지르면서 트럭뒤를 쫓아 나갔다.
다행히 정말로 다행히 우리 고함을 드른 형이 트럭을 멈추개 하고 뛰어내렸다.

 

이렇게 해서 우리형재는 동부전선 대관령에서 기적적으로 다시 만났다.
 

65년이 지난 지금 서울의대 명애교수 의학박사 민헌기는 88세로 서울에 건제하다.
 

3년전 2013년 6월에 우리 온 가족이 한국에 갈 기회가 있었다. 4박 5일의 동해안 일주 마지막날 내
가 그때 51년5월 에 그부근에 있었던 설악산을 찾아갔다. 짙은 안게속을 케이블 카 정류장 가까히 있
는 신흥사 를 구경하고 돌아오느 길에 내 딸 Kathy가 “Dad,there is a kind of war memorial.”
이라 아르켜 주었다.

 

설악산기념비700.jpg

 

“설악산지구 전적비” 가 안게 속에 보였다.
“1951년 5월에 설악산 지구에 진입한 중공군 과 인민군 을 반격 격퇴시킨 국군 1군단 산하
11사단과 수도사단의 전적을 기념한다” 는 짧은 비문을 읽으면서 설악산 넘어서 대관령 산속에서
있었던 젊었을 때의 우리 형제의 상봉을 생각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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