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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SNU MD -우리들의 자화상

2011.07.23 10:37

오세윤*65 Views:5825






       방학동 은행나무 

                                                                        오세윤


    나무도 나이가 들면 주름이 깊다. 방학동 은행나무. 수령 팔백 사오십년, 키 24미터, 둘레 여섯 아름 반의 커다랗게 구새 먹은 거목. 사방으로 뻗은 가지들이 둥그스름 부드러워 모진 데가 없다. 우람한 둥치 깊게 패인 골을 따라 빗물이 흐른다. 스승을 떠올리게 하는 노목, 나무 앞에 선다.

    낮은 목책으로 둘려진 나무는 아파트단지 동북쪽 경계에 홀로 덩그렇게 서서 길을 사이에 두고 건너 연산군 묘를 더덜뭇 비껴보고 있다.

    공교롭게도 나는 스승이 돌아가시던 해 이곳으로 이사해 처음 이 나무를 봤다. 첫 대면에서부터 나는 나무에 빠져들고, 나무의 모습에서 스승의 뜻을 찾아 되새기는 버릇을 갖게 됐다.

    故 장기려(1911~1995) 교수, 관후한 의료와 겸허한 봉사로 일생을 산 의사. 본과시절이래 의사의 표상으로 가슴 깊이 지녀오는 스승을 회억한다.

    목책에 접한 단지 경계에는 반길 높이로 돌 축대를 쌓고 그 위에 키 낮은 쥐똥나무를 심어 울타리를 했다. 안쪽에 벤치 두개, 앉아 나무를 감상하기 딱 알맞은 높이.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벤치에 나앉는 아침이 부쩍 더 많아졌다.

    세 동이 절卩자형으로 앉은 작은 단지, 서쪽 담장에 면해 펼쳐진 두 정보의 너른 밭이 야트막한 동산으로 안침하게 둘려지고 그 너머 북한산의 세 거봉이 먼 듯 가깝다.

    바람소리 새소리가 일상적인 곳. 석양녘의 하늘빛이 아득한 곳. 는개라도 오는 아침이면 진경산수眞景山水 화폭 속을 만보하듯 망연해지고 마는 한갓진 산 밑 동네. 봄빛 흐드러진 시야가 온통 푸르러 선연하다.

    희읍스름 주름 깊은 등걸 군데군데 수액 병을 매달고 힘겹게 겨울을 난 나무가 연 이틀 내린 봄비로 기색이 달라졌다. 거무스름 생기가 돌더니 기지개를 켜듯 푸릇푸릇 여린 잎을 피워낸다. 짚 앞 서향바지로 선 대추나무처럼 고집스레 잎을 틔우지 않던 나무도 봄 햇살은 차마 내치지 못하는 정의情誼였던 듯. 하기야 생명 있는 것치고 부드러움을 거부할 자 감히 뉘 있으랴.

    등치 다르게 나무는 잎이 작다. 10년생 20년생의 어린 나무들보다 잎의 크기가 훨씬 더 자잘하다. 성긴 가지 높직이 달려 올려보기 먼 때문만은 분명 아닌 듯, 아무래도 뿌리로 흡수하는 자양분이 전 같지 않으니 잎을 통한 수분의 손실도 보다 적어야 한다는 이치에 순응하는 듯 여겨진다.

    나무는 더 이상 열매도 맺지 않는다. 둥근 모양새로 보아 암나무가 분명하련만 내 이곳에 온 이래 단 한 차례도 열매 맺는 가을이 없었다. 이미 노쇠하였으니 당연하다 여기면서도 어쩌면 연산군의 일생을, 왕실과 개인의 흥망성쇠를, 인간의 영달과 욕망의 헛됨을 곁에 서 바라보며, 자손을 남기겠다는 원초적 의지마저 ‘부질없다’ 버린 건 아닐까 어지빠른 추측을 한다. 나이 들면 나무도 사람처럼 성별도 없어지고 욕심도 엷어지는가.

    산 자와 죽은 자와의 사이에 팔백여년을 서서, 한과 허망을 질리도록 겪어 오면서, 해마다 남김없이 벌거벗겨지면서 얻게 된 진정한 겸허를, 모든 세상적 욕망을 초월하면서도 원초적 생명의지만은 굳건히 지녀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 나무에서 나는 삶의 엄숙한 의지를 본다.

    그는 단지 하늘에다만 고개를 숙인다. 기세등등한 앞산에도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 허공을 차지하는 것도 자기를 나타내는 것도 되도록 적게 하려는 듯 보이는 나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팔백 여년을 살아 당당할 법도 하련만 더 자라기를 마다하고 하늘에 순명해 머리도 높게 치세우지 않는다.

    자신이 잘났다고 뽐내던 날이 왜 없었으랴. 열매를 많이 맺었다고 으스대던 날이 한두 해일까. 그러나 그는 지금 비쳐드는 햇살을 그 자체로 고마워하고, 시커멓게 구새 먹은 둥치에 꽂아주는 수액을 감사히 받고, 아직도 늙은 뿌리로 수분과 자양분을 섭취할 수 있음을 스스로 대견해한다. 가지사이로 맴돌아 드는 바람을 즐겨 보듬고, 까치가 가지 끝에 둥지 트는 것을 너그럽게 허락한다. 모진 겨울바람이 등줄기를 할퀴고 내닫는 것을 나무라지 않는다.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 더 이상 잎을 크게 피우지 못하는 나무, 더 이상 높게 자라지 못하는 스스로의 한계를 알고 그 한계 안에서 자족을 체득한 나무에서 나는 스승을 읽는다.

    1950년 10월, 부지불식간에 아내와 다섯 남매를 북에 남겨두고 남하하여 45년이란 긴 세월을 홀로 지내며 약속의 소중함을, 남자에게도 절의가 있음을 엄하게 보여주고 가신 의인義人. 대학병원의 교수직을 마다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인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탄생시킨 선각자.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설립 운영하던 무료병원 ‘복음병원’을 조합 산하 ‘청십자의료원’으로 키워 봉사의 외길을 걸으신 참 의사.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간肝의 대량 절제수술을 성공리에 집도한 외과의. 입원해 치료받던 춘원이 “당신은 성자가 아니면 바보”라고 감동했던 어진 의사. 영면할 묘지조차 마련하지 안했을 정도로 모두를 내어주고 간 진정한 무소유.

    습습하게 바람 불어드는 벤치에 앉아 나무를 바라보며 나는 이 아침, 봉사하는 참 의사로 의롭게 살다 간 스승의 겸허한 덕을 새롭게 되새김한다.

    2009년 9월 19일

     

    * 추기追記

    퇴고하여 ‘보령제약 의사수필문학상’에 응모한 서너 달 뒤, 나는 우연찮게도 이 나무의 정확한 수령이 872년이라는 것, 기실은 수나무로 3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마주 보고 섰던 암나무가 아파트를 짓느라 벌목되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로 하여 나는 아파트 경계 목책 안쪽에, 늙은 나무를 도열하듯 서 있는 10여 미터 높이의 네그루 어린 나무들이 혹시나 이들의 손인가 싶어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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