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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사진(影幀寫眞)

                                                 연규호, M.D.

1. 뉴욕을 떠난 인천행 K여객기가 태평양 상공에서 몹시 흔들리자 한국인 스튜어데스는 안전벨트를 매고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으라고 큰 소리로 안내 방송을 하고 있다. 웬일인가? 오늘 따라 그녀의 목소리가 앙칼지게 유독 나를 향해 소리치며 화를 낸다고 생각 됐다. 차라리 더 흔들리다가 곤두박질쳐 태평양 바닷속에 빠져 죽고 싶은 내 심정을 그녀는 꿰뚫어 보고 있다고 나는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어짜피 우울한 마음을 견디지 못해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생각이 요 며칠동안 나를 괴롭히고 있는데. 내가 죽는 것은 괜찮지만 아무런 죄도 없는 다른 사람마저 덩달아 목숨을 잃게 된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어쨋거나 바다에 빠지든 산에 부딛쳐 이 세상에서 죽어 사라져 버린다면 뉴욕에 남아 큰소리치며 화를 내고 있을 아내에게는 큰 행운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찌보면 나만 큰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분하기도 하다.

“나쁜 것! 독한 것! 천벌을 받아 마땅하지. 아냐! 내가 죽는 게 편해.” 나는 아내를 향해 여러번 저주하며 울분을 토하다가 깜박깜박 선잠을 자면서 흔들리는 여객기 속에서 보낸 시간이 어느새 16시간이 됐다. 지루하다 못해 이젠 엉덩이가 아프며 허리가 빠지는 듯이 뻐근했다. 가끔 발목과 장단지에서 쥐가 나기도해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몹시 우울하다보니 모든 것이 귀찮고 피곤했다. 아니 정말로 죽고 싶었다.

내 나이 40세,-
1.5세 미국 이민자로 뉴욕과 한국에서 이름이 조금 알려진 예술 사진작가로 지난 2년 동안은 살만했다. 그런대 느닷없이 나의 발목을 잡고 흔드는 사람이 있는데, 다름 아닌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처갓집 식구들이었다.
8년 전에, 2살 연하인 아내와 어렵게 그러나 떳떳하게 결혼을 했는데, 신혼 때부터 티격태격, 예측을 불허하는 불안한 항해를 시작했다.

학벌도 좋고 돈도 많은 부모 덕분에 미국 제일의 아이비리그 대학을 졸업한 우리부부는 마치 우리가 잘나서 그런것 처럼 남들이 넘보지 못하는 자존심과 똥고집이 심해, 시도 때도 없이 맞부딧쳐 늘 불꽃 튕기는 다툼으로 갈팡질팡하며 힘들게 살아왔다.
결혼 생활 8년 차가 되면서부터 아내는 공공연하게 ‘별거와 이혼’을 들먹이더니 아예 3개월 전부터는 각방을 쓰는 신세가 됐다. 다행이 6살짜리 딸과 4살짜리 아들 덕분에 끊어 질듯이 늘어난 조청처럼 아슬아슬하게 겨우 결혼을 유지하고 있는데, 남들은 그래도 우리를 보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고 부러워 하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3주전, 그녀는 뉴욕지방 법원을 통해 두장 짜리 이혼 소송청구서를 내게 보내왔을 때 나는 심한 배신감과 우울증에 빠져 들었다.

-이기적이며 교만한 마음을 가진 남편과 대화가 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동물처럼 아내를 학대하다 못해 이젠 손찌검을 하는 남편과 결혼 생활을 더 지속하기가 힘들어 이혼을 결심했다-라는 이혼 사유를 읽어보면서 나의 불만도 이 내용과 너무나 똑같다고 생각하며 청구서를 확 꾸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손찌검을 했다고? 아니 접시를 던져 내 이마에서 피가 흐른 것은 뭐고? 잘 못했으면 눈이라도 멀었을 텐데..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욕한다고. 아휴 말도 안 되지!’ 나는 갑자기 허탈해 졌다.

“이것봐! 스티브? 확 집을 나가 여행이라도 하고 와! 여자란 남자가 없어봐야 남자가 중요하다는 것을 비로서 아는 거야! 쫀쫀하게, 병*신*마냥 집에서 그러지 말고..”
어르신의 충고에 따라 나는 제주도 여행을 하기로 마음 먹고 뉴욕 H-여행사에 신청을 했다.
“당신이나 혼자 가서 스스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아보고 그 대답을 가져와!” 라고 퉁명스럽게 내 밷고 아내는 바람처럼 허드슨 강 건너 뉴저지 친정집으로 사라져 버렸다.

뉴욕에서 시작된 여행은 본토 6시간, 그리고 태평양 횡단 13시간, 무려 하룻길이었다.
‘어쩌다 이지경이 됐나? 이혼이라니.’ 부끄러웠다.
-내 나이 9살 되던 해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뉴욕으로 이민 온 것이 어제 같았는데, 어느새 40이 됐다. 아버지는 몇 년전에 외과 의사 직에서 은퇴하고 롱 아일랜드집과 훌로리다 집을 오가며 골프치고 음악회 가며 최상급의 요리를 맛보며 인생을 즐기는데 만족하다고 했다.

그러나, 도리켜보면 나는 내 부모가 하라는 대로 하는 마마보이였다. 최고의 학교를 선호해 보스톤 근교에 있는 일류사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예일대학에 들어갔는데 아버지에게는 하바드에 입학 못한 것이 불만이었다.
“하필이면 예일이 대학이냐? 하바드에 갔어야지. 아휴, 병*신*같는 놈!”
그뿐인가, 법대나 의대에 들어가 변호사나 의사가 못 되고 엉뚱하게 미술학교에 들어가 사진을 전공한 것은 아버지에게 지독한 불효자였다.
“뭐시? 사진작가? 와! 내 친구에게 창피해서 말도 못하겠군..와, 너도 내 아들이냐?”
아버지는 아예 나에게 말도 걸지 않았으며 자식으로 생각도 않았다.

몇 년전부터 사진 개인전을 내고 미국신문과 한국 신문에 내 이름이 오르내리자 아버지는 뉴욕 시내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자주 찾아 와 꽤 많은 수표를 놓고 가기도 했다.
하바드 대학을 졸업한 아내는 시아버지로부터 환영받는 며느리이지만, 사진이나 찍으며 입에 풀칠하는 사진사, 사위를 맞은 장인에게는 귀한 딸을 도적질해간 염치 없는 강도가 된 셈이었다.
아들 낳고 다음해 딸을 낳았을 때, 아버지와 장인은 크게 웃지는 않았으나 얼굴을 찡그리지는 않았다.
말이 하바드 대학이지 전공이 고고학이다보니 아내는 도무지 미국에서 써 먹을 곳이 별로 없었다.

머리만 한 껏 부풀어 웬만한 대학은 학교로 보지 않는 아내는 의사인 시아버지와 사업가인 친정 아버지의 지갑만 처다 보다 거기서 떨어지는 콩가루를 주어 집으로 들고 오는 것이 유일한 재정 수단이었다. 덕분에 사진사(寫眞師)인 나는 큰 돈 안 벌고도 내가 좋아 하는 ‘사진 예술(寫眞 藝術)’에 몰두할 수가 있었다. 쩍하면 출사(出寫)한다고 기차타고 아니면 비행기 타고 멀리 가서 예술 사진을 찍어 오곤 했으니 나는 행운아였다.

그러나 아내의 눈에 뵈는 남편은 무능한 백수건달이었다.-
“백수 건달, 사진사하고는 결혼 못한다!” 라고 장인이 반대를 했을 때, 아내는 영국의 마가렛트 공주도 사진사 타운센트와 결혼해 애기 낳고 잘 산다고 우겼다.
나를 감싸주는 그녀가 나에게는 감동이었으며 성모 마리아처럼 보였었다. -
그렇던 우리가 이젠 보기도 싫다고 원수가 돼 이혼을 생각하게 됐으니, 눈시울이 찡하더니 닭똥같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여객기가 30분 내에 인천공항에 착륙한다는 방송이 나를 상상의 세계에서 현실로 나오게 했다.
창문 밖으로 내다 뵈는 인천앞 바다, 한강주변의 새벽경치는 마치 뉴욕 퀸즈, 케네디 공항 주변보다 더 인상적이며 감회가 깊었다.
‘나의 조국, 그리고 아버지의 조국에 왔다.’라는 잔잔한 감동이 내 마음 속에서 시냇물처럼 흐르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공항 수속 후 짐을 찾아 4월말의 싸늘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김포 공항으로 가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로 바꿔 타야 했다.

2. “스티브(Steve) 강! 제주도는 유네스코 지정 7대 세계유명 관광지이기에, 잘해 보소. 스티브! 당신 일생에 아주 훌륭한 사진 작품을 거기서 만들지 모르니까....”
관광사 직원이 뉴욕에서 제주도 관광을 추천하면서 해준 충고가 문득 떠 올랐다.
‘그래? 제주도에서 명 작품을 찾아낼 수 있을까? 사진전에 출품할. 아니 내 인생에 가장 자랑스러운 작품을.’
나 스스로 ‘힘들 거라고’ 대답하며 김포에서 떠난 비행기를 통해 밝은 아침의 서울을 바라다 보았다.

내가 지닌 짐이라고는 카메라 하나와 작은 가방이 전부였다.
2년 전에 구입한 디지털, 신형 카메라는 구형보다 가벼우나 여러 가지 기능이 있어 편리했기에 늘 지니고 다니는 내 몸의 일부였다.
‘제주도에 가면 누구를 만나게 될까?’
지정된 제주공항 대합실에 도착하니 ‘뉴욕에서 온 스티브 강 !’이라고 매직 펜으로 크게 쓴 종이를 들고 서있는 관광회사 직원을 만났다. 그와 악수를 하면서 비로서 같은 동족이 사는 땅에 발을 붙인 내 존재가 ‘디아스포라’임을 실감 나게 해 주었다.

생각보다 좋은 만남이었다. 남녀 합쳐 16명의 일행이 작은 버스를 타고 온화하나 바람이 부는 제주도 섬을 여기저기 집시처럼 다니게 됐다.
검은 안경을 쓰고 노란 모자를 쓴 안내원은 생각보다 밝고 해박한 중년의 남자였는데 그가 어디를 가든 나는 졸졸 따라 다녀야 했다. 아니면 국제 미아가 되기 때문이었다.
“젊은 이? 들고 있는 사진기가 좀 특이한데....사진을 좋아하는가?”
인상이 후덕해 뵈는 안경 쓴 70후반의 노인 부부가 버스에 먼저 타라고 부축해 주는 나에게 웃으면서 물었다.
“예. 저는 뉴욕에서 온 사진 작가입니다.”
“뉴욕에서? 내 동창의 아들도 뉴욕에서 사진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리고 각자 자리로 가면서 대화는 끊겼으나 웬지 이 노인부부에게 호감이 들었다.
소문대로 제주도는 아열대풍의 이색적인 섬으로 바람, 돌 그리고 여자가 많았다.
화산과 바람 그리고 바다가 만든 중문 대포 해안의 주상절리대에서 찍은 풍경은 나를 흥분케 했다. 바위를 칼로 자른 듯해 마치 비석들을 나란히 세워둔 듯했기 때문이었다.
일곱 선녀들이 별빛 영롱한 밤에 자주빛 구름다리를 타고 내려와 맑은 물에 미역을 감고 노닐다 하늘로 올라갔다는 천제연에서 나는 예술적인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만족스러웠다.
갈치 조림과 성게 미역국으로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활허회로 배를 불렸다.
정말 운이 좋았는지 4명씩으로 된 식탁에 나는 김 박사부부와 한조가 됐기에 그들과 친할 수가 있었다.

김 박사는 잘 나가던 외과 의사였는데 15년 전, 60세 초반에 갑작스레 얻은 중풍으로 인해 은퇴하고 집에서 별로 하는 일 없이 지내고 있었다고 하는데 뜻밖에도 미술과 사진 그리고 문학에 조예가 깊어 안내원이 미쳐 못한 설명을 추가 해 주었기에 1.5세인 나는 조국에 대해 더 잘 알게 됐다.
“내 동창의 아들이 뉴욕에서 사진작가로 활약하고 있는데, 아는지 모르겠군.”
“제 아버지도 외과 의사입니다마는...”
“아버지가? 그렇다면 아! 닥터.강! 닥터.강. 그렇다면, 그의 아들이로구먼. 알지! 알아. 벌써 30년 전에 서울에서 모인 동창회에서 본 기억이 나는구먼... 그런데, 자네가 그 아들이란 말야?”
“아-서로들 아시는군요?” 나는 반갑다 못해 부끄러워졌다. 혹시라도 이혼(離婚) 일보 전 인 것을 안다면 실망 할터이니까.....
참으로 묘한 두 가지 갈림길에서 혜어졌다 다시 만나는 아버지와 노 부부를 눈으로 보고 있는 듯했다.

한국에서 의사가 된 후 본국에 남아 고국을 위해 봉사한 김 박사와, 멀리 미국으로 짐 싸들고 나간 아버지와 180도 달랐지만, 나이 들어 늙은, 말년은 머리가 희고 허리도 구부정하기는 마친 가지이며 초라해 뵈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 보였다.
“아버지는 롱 아이랜드 와 훌로리다 비취에 있는 집을 오가며 은퇴 생활을 하시지요...”
“ 아 부럽군. 우리는 이렇게 제주도나 오는데.” 노인은 짧게 대답하고 호텔 방으로 들어 갔다.
“안녕히 주무시고 내일 뵙겠습니다.”
제주도의 첫날밤은 별이 무수하게 빛났으며 철석거리는 바닷 물에 나는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3. 이른 아침, 제주도 동쪽 성산 일출봉에서 본 동쪽 바다는 너무나 신선하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김박사 부부는 눈에 뵈지 않았다.
밤새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가? 마음이 조리며 궁굼했다. 아니 섬짓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게도 단순하며 아련한가? 그들을 만난지 겨우 하루인데 걱정이 되다니. 내게도 남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연결의 고리가 있음을 알게 됐다. 아! 노인들이 어찌 됐을까? 병이라도 생겼는지, 아니면 심장에 이상에 있는지?
남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렇다면 나는 내 아내를 나는 진정 사랑했던가? 아니 그녀를 안타깝게 기다려 본 적이 있었던가?-

“여러분 에코랜드에 왔습니다. 기차도 타고 사진도 찍으면서 즐기세요.”
에코랜드? 마치 디즈니랜드에서 본 장난감 기차에 사람들이 색색옷을 입고 어울려 앉자 웃고 있었다.
풀랫폼에서 장난감 같은 기차를 기다리는 노인들이 있었다. 김박사 부부였다.
“김 박사님, 여기에 계셨네요?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아냐! 스티브, 건강해. 보고 싶었어.”
반가움과 끈끈함이 나뿐만 아니라 노부부에게도 있음을 알게 됐다. 아니 그들의 마음속에도 어제 만나 알게 된 내가 자리잡고 있다니 아버지를 다시 만나는 기분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성산 일출봉에 가는 것은 두 노인에게는 무리였기에 호텔에서 쉬다가 택시를 타고 여기로 왔다고 하며 나와 같이 같은 칸에 타자고 했다.
지금까지 못해보았던 기차놀이를 아버지와 같이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아버지와 같이 디즈니랜드에 가본 기억이 없었다. 늘 최고가 되려고 좋은 학교나 찾아 다녔으며 ‘공부 그리고 공부’만 했었다.
“스티브? 자네 얼굴에 근심이 있어 보여. 활짝 웃어봐!” 김 박사는 내 손을 잡았다.
“박사님, 사실, 저 괴로워요.” 뜻밖에도 나는 나의 고민을 바보처럼 처음 보는 아버지의 동창에게 주책없이 흘리고 말았다. 아니 하소연을 하고 말았다.
기차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어깨를 마주대고 얼굴을 마주보고...
기차는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스티브, 사진 작가! 나, 비록 늙었지만 나, 사진 좀 찍어줘. 멋진 사진을, 웃는 모습을 말야.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처럼.” 김 박사는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웃는 모습을요? 미-륵-보오사-알...” 나는 그 단어를 알지 못해 우물거렸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라고 하지. 부처님이 해탈하면서 웃던 모습이야...”
장난감 같은 기차에서 그리고 기차에서 내려 그 기차를 배경으로 김 박사의 모습에 초점을 맞췄다.
모자를 벗고 웃고 있는 모습, 아내를 끌어 안고 있는 모습, 하늘을 보는 모습 등등, 여러 가지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김 박사는 어린아이처럼 즐거워 했다. 순간 내 아버지의 근엄한 얼굴이 대조적으로 보였다.

‘같은 동창에, 같은 외과 의사인데 왜 이토록 다른가? 왜?’ 나는 혼동을 느끼고 있었다.
“스티브? 자네, 아내는 어디에 두고 혼자 다니나?” 마침내 김박사는 내게 아픈 부분을 묻고 있었다.
“.......”
“알겠어. 무슨 일이 있었구먼. 사내가 양보해야지. 지는 사람이 이기는 거여. 그래야 집안이 평안해. 마누라 이기는 놈은 병*신*이야!”
“........” 나에게는 더 이상의 변명도 없었다. 결국 그간 일어난 결혼 생활과 이혼소송에 말려 있음을 말해주면서 나는 눈물을 짓고 말았다.
“사내가 울긴...듣고 보니 자존심이 너무 강했구먼. 낮아져야지, 낮아져야지.” 김 박사는 강조했다.
‘낮아지다니? 콧대가 하늘처럼 높은 아내의 자존심을 꺽어야 하지. 나는 아냐. 나는 아냐.’
나는 아직도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쨋거나, 자네가 찍어준 사진, 정말 좋았어. 웃는 얼굴을 찍어 준 것이....
이 사진, 정말 내겐 귀중한 사진이 될거야. 내 인생을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보여주는 그런 사진말야!”
“인생을 보여주는 사진? 그게 뭔데요?”
“나도 몰라. 그런데 그렇게 될 것 같아. 스티브!”
김 박사는 아주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마치 어머니의 젖을 마음껏 먹은 어린 아이가 만족해 하는 모습이었다.

4. “여러분, 추사(秋史)김정희 선생을 아시죠? 조선 역사에서 정약용(茶山)선생과 자웅을 겨룰만큼 훌륭했던 추사가 나이 54세에 제주도로 유배와 9년간을 지냈던 초가집을 방문합니다.”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와 그림에 대해 다소 알고는 있었지만 이토록 오래된 초가집에서 9년을 살았으며 2-3회에 걸쳐 유배를 다녔던 것은 잘 모르고 있었다.

안내인이 김정희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했지만 나는 반도 못 알아 들었다. 그러나 그가 훌륭한 선비요, 정치가요, 서도가요 화가임을 알게 되었다. 조선 말기,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순조 헌종 철종에 걸쳐 벼슬을 한 김정희 선비는 거만하고 안하무인이었다고 한다. 어찌보면 하바드, 예일대학을 나온 백인 정치가보다 더 도도하였다. 그를 만나려면 좋은 선물을 들고 찾아와 며칠, 심지어는 몇 달을 기다려야 했다고 하니 그는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최고라고 생각했으리라.

추사 김정희는 당쟁으로 인해 그의 나이 54세 때, 제주도로 유배를 왔다. 비록 유배지에 와 있으나 추사를 만나려고 온 선비들은 구름 같았다. 그만큼 그는 명성이 자자 했었다. 그런데 해가 갈 수록 그를 찾아 오는 사람이 줄어 들더니 3년이 되니 아무도 찾아 오지 않았다. 권력에서 멀어지면 사람도 떨어지는 법이요, 남는 것은 외로움과 배신감이었다.
추사는 땅에 떨어지는 모멸감을 느끼며 한 껏 외로웠다.

그래도 잊지 않고 스승 추사를 찾아 온 제자가 있었다. 역관(譯官)이었던 이상적이 북경을 오고가며 수많은 신간서적을 수레에 실어 천리밖 외딴섬, 제주도에 규양와 있는 스승을 찾아왔으니, 추사 김정희 선생의 마음이 얼마나 감격했을까?
그가 그 답례로 그려서 제자에게 준 그림이 바로 세한도(歲寒圖)였다.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공자의 말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일체의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최소한의 먹만으로 빈집과 노송, 세 그루의 잣나무를 그렸다. 잎이 다 떨어져 겨우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듯한 노송과 잣나무는 말 그대로 황한소경(荒寒小景)그 자체였다.

자만했던 추사는 모진 역경을 통해 낮아 질대로 낮아진 겸손한 선비가 됐으며 그의 호마저 완당(阮當)이라고 바꿨다. 아주 겸손해 졌다.-
김 박사는 차근차근 나에게 추사에 대해 설명을 해주면서 나에게 격려의 말을 했다.
“조선 최고의 학자인 추사도 이토록 겸손해졌는데, 하물며 하바드, 예일 대학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교만을 버리지 못할까? 아무 소리 말고 스스로를 낮춰 보게나. 아내에게도 말여.”
“예, 어르신, 고맙습니다.” 나는 찡하게 머리를 스쳐가는 느낌이 있었다.
“자네? 세한도를 사려면 돈을 얼마나 줘야 하는지 아는가?”
“글쎄요? 10만 딸라?”
“10만 딸라? 이보게 일억 딸라를 줘도 못 구한다네......”
“와!” 나는 혀를 찼다.
“자네, 세한도 보다 더 좋은 사진 작품을 하나 만들어 보게. 기대 할게. 내가 사 주마.”
“아, 어르신? 농담도....”
“농담이 아냐. 큰 꿈을 갖고 사진을 찍게나. 목숨 내걸고 세한도 같은 작품을 만들게나...”

해가 누엿누엿 저물어 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제주도에서 1000년이 넘은 큰 고목들로 울창한 비자림(非訾林)에서 김 박사님부부와 같이 산책을 했다.
비자림 속은 온통 맑은 공기로 가득 찼으며 약초향기가 사람의 정기를 살리는 듯햇다.
비자림 속에는 어린 비자나무가 다시 살아나며 고목은 천지지변으로 죽고 없어지는 듯했다.
비자림 속에서 인간의 욕심과 무지함으로 인한 고통을 모두 잊어버리고 평안한 안식을 취하는 듯했다.
노을이 지는 속에 큰 비자 나무에 기대어 새롭게 태어나는 또 다른 생명인 작은 비자 나무를 바라보며 웃음을 짓는 김 박사의 모습이 신비로웠다. 마치 긴 인생의 고뇌를 이기고 인간의 평화를 알아내면서 웃음짓던 보살의 모습 같았다.
미륵보살이 살며시 웃는 모습이 잘은 모르지만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나는 상상해 보았다.

안심스테이크요리를 먹은 후 호텔로 돌아왔다. 일정이 빡빡하다보니 피곤했기에 목욕을 한 후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웠다가 나는 퍼뜩 일어 났다.
오늘 찍은 사진들 중에서 웃고 있는 김 박사의 모습을 하나하나 사진으로 뽑아 내기 위해서 였다.
그 중,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김 박사의 모습이 여러장 있었다.
기차를 배경으로 서서 미소짓는 모습, 열차 칸에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 비자림 큰 나무에 기대서 작은 비자나무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모습도 좋았다. 그래도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역시 작난감 같은 기차 앞에서 일행을 바라보며 살포시 웃는 모습이었다.
밤 늦게서야 나는 웃고 있는 김 박사의 사진 열장을 만들어 하얀 봉투에 넣은 후 나는 늦잠에 들었다.
“낮아져라! 겸손하란 말야! 조선 최고의 학자 김정희 처럼..... 비자림처럼 말없이 묵묵히 1000년의 고통을 견뎌 내거라!” 김 박사의 말이 내 귀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다음날 일행과 같이 제주도 안의 작은 섬 우도를 방문한 후, 관광 일정이 끝나게 된다니 아쉬웠다.
우도에서 마지막으로 비다와 섬, 그리고 사람을 잘 배열해 아름답고 예술적인 사진을 몇 장 더 찍었다.
점심을 맛있게 먹은 후 일행은 각자 이별하게 됐다. 김 박사부부는 서울로 올라가 집에서 푹 쉬겠다고 하며 주소 전화, 이메일등을 적어 주었다.
“박사님, 여기, 제가 찍은 사진 10장을 만들어 왔습니다. 가셔서 제 생각하면서 사진을 보세요. 그리고 주신 이메일로 더 많은 사진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사진을? 기차에서 찍은 사진들? 웃고 있는 모습들 말인가? 좋지 좋아. 어쩐지 그 사진이 좋아.”
“예. 미륵보오살... 사진들...”
“고마워. 그리고 미국에 가면 꼭 부인과 화해하고 아버지에게는 내 안부를 전하게나. 잘 가게.”
그리고 김 박사부부는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사라졌다.
“박사님*, 아니 아버지!” 나는 김 박사를 향해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제서야 미국에 있는 아버지가 그리웠다.

다음 날 나는 서울로가 미국으로 가는 여객기에 몸을 실고 뉴욕으로 돌아갔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온 나를 본 아내가 심상궂게 샐쭉했다. 그리고 나를 피하려고 이층으로 급히 올라가려고 했다.
“여보! 당신 추사 김정희를 알지?” 나는 최대한 겸손하게 물었다.
“몰라!” 그리고 그녀는 윗층으로 올라 가 버렸다.
‘그렇겠지, 당신이 어찌 추사 김정희를 안담? 추사가 누군데. 하바드 대학보다 더 좋은 대학에서 수학한 조선 최고의 학자인데....‘ 나는 조국의 학자를 모르는 그녀가 가엾게 느껴졌다.
김박사의 충고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마음에 간직한 채 2개월 동안 나는 아내에게 아주 겸손하게 대했다.
“당신? 무슨 일이 있었어? 왜 그렇게 겸손해졌어. 이제야 본인이 나뻣던 것을 아는 모양이구먼...”그녀는 마침내 통쾌한 듯이 내게 물었으며 요즘 그녀의 얼굴도 많이 부드러워지고 있었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추사, 김정희와 김 박사에게서 배운게 있었어.”
“그게 뭔데?”
“몸을 낮추고 겸손하라는 가르침이었서...바닥으로 낮아지라는....”
아내는 내 모습에서 많은 변화가 있음을 감지했는지 이혼 소송을 잠시 보류한다고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5.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듯 하며 가정에도 평안이 찾아 오니 제주도에서 일어 났던 사건들도 점점 생각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약 3개월이나 됐을까?
서울 서초구 논현동에서 내게 온 편지가 한통 있었다. 김 박사의 부인이 또박또박 쓴 것이 인상 깊었다.
그동안 내가 안부도 전하지 않고 무관심했던 것이 큰 죄를 지은 듯 했다.

-사랑하는 스티브에게.
제주도에서 만나 같이 보냈던 3일은 우리부부에게는 마치 어린아이가 된 듯한 즐거운 시간이었어.
스티브가 준 사진을 김 박사는 아주 만족해 하며 매일같이 만져보고 또 바라다보았어. 뚫어지라고 말야. 특별히 기차 앞에서 웃으며 찍었던 독사진을 가르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웃음이라고 했어.
약 25도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고, 약간 옆을 바라보며 살며시 웃고 있는 모습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막 진리를 터득하여 해탈한 후 만족해 하는 보살의 아주 오묘한 웃음이라고 스스로 지칭하면서 얼마나 즐거워 했던지.

그런데, 놀라지 말게, 스티브! 김 박사님*은 얼마 전에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돼 2-3일 병원에 입원했다가 아주 평화스럽게 그 웃음을 띄면서 돌아가셨다네.
돌아가시면서 김 박사는 특별히 자네가 찍어준 그 사진을 가슴에 품고 “이 사진은 스티브의 걸작품이야. 평생의 걸작품이야.”라고 말했지.
그뿐인가 이 걸작품에 대한 보답을 크게 하라고 내게 지시했다네. 미륵보살반가사유상보다 더 비싼 값을 지불하라고 하셨다네.
“그리고 여보! 나 죽으면 이 걸작품 사진을 내 영정 사진으로 써 주소. 그리고....”
“그리고요? 또 뭐요?” 나는 울면서 물었지요.
“여보! 내 묘지, 비석에 이 사진을, 이 사진을 동판에 새겨 부쳐 주소....”
“묘 비석에도? 예... 그러죠.” 장례식 때, 그 영정사진은 큰 아들이 들었으며 천안에 묻힌 묘지 비석에 동판에 새겨 부착했다네. -

“뭐라고? 김 박사가 돌아가셨다고? 아버지가?”
나는 갑자기 내 눈 시울이 뜨거워 지더니 눈물이 주르르 흐르면서 마침내 엉엉 울고 말았다. 울고 있는 나에게 아내가 내려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곁에 놓인 편지를 떠듬떠듬 읽기 시작하면서 내게 물었다.
“당신이 찍은 사진이 걸작품이라는데?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미소라는데?”
“그래, 내가 찍은 사진 중에서 가장 잘된 걸작품이었어. 일억 딸라가 넘는...”
“뭐라고? 일억 딸라나? 말도 안 돼!”
“그렇다니까, 김박사가 말했어.” 나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내는 내게 온 편지를 다시 한번 읽더니 내게 전해 주면서 말했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미소를 우리도 같고 싶어....”

다음날 나는 밤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잘 다녀와 스티브. 그리고 돌아 올때 그 걸작품을 하나 가지고 오소!”라고 했다.
지루하고 먼 여행길이었지만 비행기가 흔들려도 죽고 싶지 않았다. 다리가 아프지도 않았다.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는 새벽 6시였다. 천안으로 가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아담한 공원묘지에 도착한 것은 아침 9시나 됐을까? 배가 고팠으나 김 박사를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었다.
안내원의 도움으로 마침내 김 박사가 묻힌 곳을 찾았다. 봉분이 없는 미국식 묘지에 만든지 얼마 안 되는 묘비가 서있었다.
“의학박사 김성진의 묘”에 아주 만족한 듯이 살며시 웃고 있는 김 박사의 사진이 동판에 새겨 있었다.
에코랜드에서 찍은 그 사진, 해탈한 후 느끼는 그 만족과 평화가 죽은 후에도 살아 있는 듯 한 걸작품이었다.
한국 이민 1.5세대, 사진 작가, 스티브 강의 대표작인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입술에서 조용히 흘러나오는 말이 있었다.
“스티브. 사내는 겸손해야해. 모든 것 다 내려놔야해. 스티브. 자네는 완당 김정희의 세한도 보다 더 훌륭한 걸작을 내게 선사했어. 고마워. ”

슬픈 마음을 마음 속 깊이 묻고 뉴욕으로 돌아오니 아파트 앞에 예쁜 카드가 한 장 놓여 있었다.
“사랑하는 스티브! 당신이 만든 걸작품을 내가 사겠어. 그 값은? 이혼을 철회하는 것으로 말야. 스티브, 내가 당신을 너무나 힘들게 했어. 좋은 아내가 될게. 용서해. 여보!

당신의 아내, 정선 드림.”

소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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