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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사람: 외숙(外叔) 한만운(韓萬運)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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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 가신 나의어머니에게는 여동생  한분 과 막내남동생, 나의 외숙(外叔)(한만운 교수)이 계셨다. 외조부(外祖父)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홀어머님 밑에 자라셔서 남매간의 우애가 애뜻하셨다.

서울 대학과고려대학교 화학과에서 오랜 세월 교직에 계셨던 관계로, 서울 대학
화학과,의예과,고려대 화학계통 출신들로 외숙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칼날과 같은 행동,절제,깨끗한 외모등,  함부로 범접할 수 없었던 깐깐한 화학교수로 각인된 분이지만, 내게는 어머니의 막내동생, 그냥 “성북동 아저씨”였던 분이다.

집안어른들 간의 중매로 열 네 살이란 어린 나이에 ,한양조씨 댁 우리 아버님께 시집오신 나의 어머님은  여학교 다니며  애낳고  우리 6 남매 기르시고 5 대 제사,차례 모시고 일생을 시집살이 하시며, 한때는 4 대가 한 집에 모여 사는 큰 살림을 하셨다.

삶이 고달플 때 마다, 우리들  특히 누이들 불러놓고 늘 하시던 푸념이 있었다.

“만운”이가 제일고보(경기중학)에붙었는데  趙씨댁 눈치 보여, 연필 몇 자루 밖에 사줄수 없었다. 경성제국 대학 예과에 입학 했을때도 아무 것도 못 해주었다” 그리고는 옛날(추측하건데 1920 년대 중반)외숙이 교동 국민학교(초등학교)때 전국 수채화 경연대회 때 특상을 받고 조선일보 기자와 인터뷰 한 왜정시대의 기사 오려낸 꼬깆 꼬깆한 종이장을 꺼내 보시며, 눈물과 함께 신세 한탄을 하시곤 했다.

이제는 두분 다 아마 천국에서 애뜻한 혈육의 정을 나누고 계실 듯 하다.

나의 아버님은 일생을 주말도 없이 개업의로서 일하시며 모든 집안 대소사, 재정, 아이들 교육 까지 어머니에게  맡겨 놓으신 생활을 하셨다. 우리 6 남매들이 자라며 큰 결정, 진로,진학, 유학, 결혼에 이르기 까지 중요한 결정의 기로에 있을 때 아버님보다  더 무언, 유언으로 상의를 해주신 분이 외숙
이시다. 나의 세누이 중 둘이 여자로써  화학과 물리학을  전공하고 유학, 둘째 누이가 한국 여자로
최초의 물리학 박사가 된 과정에도 아저씨의 영향이 클 듯하다.

일생을 대학 교직에서 지났다는 표면상 내력, 그 보다는 일생동안 명동에 있던 한 양복점 
재단사 한 분에게서 만 양복을 맞추어 입으셨고, 종로에 있던 한명의 이발사에게 일생의 이발을 맡기시었고, 나는 외숙의 바지  주름이 구겨진 것, 머리가 부석하거나 헝그러 진 모습 을 한번도 뵈온 적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내 외숙의 내면을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판단에  잘못된 일을 보면 불호령이 내리는 성격이었지만 우리 6 남매 에게는 나의 외사촌들 보다도 더 그지없이 너그럽고 다정하셨다.

6.25 전쟁 전부터  60년대 초에 고려대 화학과를 맡아  옮겨 가시기전 까지,  서울대  문리대 화학과에서 물리화학, 주로 의예과 학생들의 일반화학, 물리화학 교육을 담당 하셨었기 때문에, 많은서울 의과 대학 선배들이 외숙을 기억하고 있다.

“야! 너의 외삼촌 참 무서우셨다”  전쟁 중 부산 피란기의 혼란 속 수업,문리대나  의예과의 학교수업 빼먹기가 만연했던 전통(땡땡이 전통)도 우리 외숙 앞에서는  꼼짝 못했고, 선배들이 한번도빼먹을 수 없었던 유일한 의예과 학과정(學科程) 으로 기억되고있다는 것을  많은 의과 대학선배들로부터 수없이 들었다. 

당시 육군 현역장교 학생으로 권총차고 교실 수업에 나타나곤 했다는 전설의 왈패(?)로 알려진  의대 신경과 고 명호진 교수도 생전에 그 시절 예과 학생으로써 우리 외숙에게 만은 꼼짝도할 수 없었다는 존경의 고백을 했다고 한다.

역사학, 언론,인문계에도 많은 교수 친구들과 교류하던 중 ,당시 이병도 교수밑에서 공부하던, 역사학자 Edward Wagner(후에하바드 대학 한국학과 창립)가  같이 교류하던 외숙의  친구,고교동기 최병우 코리아타임스편집장께서 대만 금문도 전투 사태 때 종군,순직한후, Wagner 교수가 나중에 최병우기자의 부인과 결혼하게 되는 인연의주변에 계셨다.

개인적으로는 나의대학진학 문과냐 의대냐 의 결정, 전공 결정 , 도미등의 결정 때도 조언을 주셨다.

60년 대 말 70 년대 초 암울하던 독재의 와중 속 “데모”와 “공부”, “일”에 대한 나의 고민,,운동권친구들에 대한 나의 미안함 등등에  대해 어느날 이렇게 길을 보여주셨다.

“우리 세대는 일본 치하에서는 일본 사람들에게 눌려서, 해방후의 혼란, 6.25 전쟁으로, 또 전쟁 후의 혼란으로 국가를 위해 별로 해놓은것이 없이 늙어가고 있다. 젊은 세대가 이승만 독재에 투쟁 데모해서4.19 나고, 또 장면 정권 때 무능하다고 데모로 세월 보내다,5.16 나고, 대일 협상 6-3 사태로또 데모로 몇 년 보내고, 3선 반대 데모로 몇 년 보내고ㅡ이제 또 박정희 독재 투쟁하느라 매일 데모하고있다. 그러나 이제는 데모 그만하고 각자가 실력을  길러서 나라 건설 할 때가 왔다.  해방후 20 여년 우리나라는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 너희 같은  젊은세대가 매일 데모만 계속 하다 보면 이 나라는 언제 누가 건설하느냐?”

투쟁하지 않는 자의 길을, 젊을 때 묵묵히 공부하고 실력을 쌓아햐 하는 당위성, 수많은 소위 애국자투사들의 불성실 등등에 대해서 조언을 하셨다.

70년대 초 서울대 외과의 신참 레지덴트로 한달에 한 두번 집에  갈 정도로 바쁜 생활을 하던 20대중반,  피로에 쪄들은 나에게 이건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라고 생각하고 견뎌야된다고 격려해 주시던 밤을  기억한다.

어머니 돌아가시던날 밤, 한밤 중에 몸소 노구로 운전하고 상현까지 오셔서 “누나, 이렇게 갔쑤?” 하시며 먼 곳 바라보시고 한참 계셨다.

벌써 외숙 돌아가신지도 10 여년.

요즈음도 나의 컴퓨터에 다운로드되어 , 파일 화면에 돌아가며 가끔 나타나는 외숙의 옛날 흑백 사진을 보면 생각에잠기게 된다.

 7대 3 으로짧게, 그리고 깨끗이  정돈된 머리 스타일, 크게 풍성하지 만은 않았을 대학 교수의 살림에서, 한국 최고의 재단사 한 사람 에게서 만 맞추어 입으시던 그 멋쟁이 양복, 언제나  칼날 같은 바지 주름, 먼 곳을 응시하시던 그 깨끗한 눈매에서 현대 한국의 한 선비를 본다.
 
  
by 조 중행(1969)  20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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