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 (名醫) 잠자리에 들려고 이불을 펴고 있는데 누가 보건소 문을 요란하게 두드려댄다. 문을열고 내다보니 한 사내가 초조하게 서있다. 무슨사연이냐고 물으니 아내가 이틀전 출산을 했는데 아직 후산이 없고 열이 불덩이같이 나며 눈을 까뒤집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것이 꼭 죽을것만 같아 부랴부랴 의사선생님을 찾아 왔단다. 어이쿠 드디어 올것이 왔구나 하며 가슴이 덜컹내려 앉았다. 그러면 큰병원에 데려가야 될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읍내에 나가는 뻐스는 하루에 한번 들어오고 이런 밤중에는 택시를 불러도 오지를 않는다고 한다. 더구나 읍내까지 나가자면 몇시간이 걸리는데 그전에 꼭 죽을것만 같다고한다. 할수없이 주섬주섬 필요할만한 의료기구와 약품을 왕진가방에 대강 챙겨넣고 사내를 따라 나섰다. 밤은 교교하고 어두운데 반쯤찬 달빛이 주위를 제법 훤하게 비치고 있었다. 50미터쯤가니 신작로가 끊어지고 깎아세운듯한 절벽위로 철교가 있는데 내려다보니 아찔아찔하게 현기증이 날정도의 높이였다. 건너가자면 족히 이삼십분정도는 걸릴것 같은 긴 철교였다. 사내는 철교를 건너갈 심산인양 그위로 걸어올라간다. 그러다가 기차가오면 어떡할거냐고 물으니 그래도 급하니 어쩌겠냐는 눈치다. 다른길은 없냐고 물으니 강상류로 올라가면 물이낮은곳에 징검다리가 있는데 그리로 가자면 30분은 더 걸린다는것이었다. 나는 철교는 못건너 가겠으니 시간이 더 걸려도 돌아가자고 했다. 사내는 할수없다는듯 철교에서 내려서 제방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방은 고요하고 풀벌레 소리만 찌르륵 찌르륵 나는데 가끔가다가 후루룩하며 무엇이 지나가는 소리가났다. 소름이 오싹끼쳐 혹시 뱀이 아니냐고 물으니 이런밤중에 뱀은 없단다. 철면부지의 사내를 따라가다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지는것은 아닌가 겁도났다. 사내의 뒷발꿈치만보고 따라가자니 지난 며칠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어릴적 부터 친구인 松亭 李炳學 화백의 그림. 서울갔을때 송정 갤러리에들러 전시된작품들을 감상하다 그냥 들고 나왔다. 주인이 웃으며 보는 앞에서 들고 나온것이기 때문에 도둑질 한것은아니고 우정있는 탈취(?)였다. 다음날로 무의촌으로 내몰렸다. 정부는 오래전부터 계획한 일이라 하지만 파업에대한 보복임이 분명했다. 집에는 갓 돌을지난 딸아이가 있었고 아내는 쌍둥이를 임신하여 만삭인 몸이었다. 취프 레지덴트로 할일도 많고 보드시험준비도 해야 할때다. 며칠간의 말미도 주지않고 내일 당장떠나란다. 날벼락을 맞은듯 난감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정부관리들은 모든것이 다 준비되어있으니 여러분들은 몸만 가서 인술만펴면 된다고 했다. 여러분들같이 높은 의술을 가진분들이 현지에 도착하면 열열한 환영은 물론 모든 편의를 다 보아줄것이라고 했다. 다음날 옷가지와 이부자리를 싼 보따리를 챙겨들고 생전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오지 산골을 찾아갔다. 구세주가 온듯 환영을 받을줄로 생각했던 기대는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산산조각이 났다. 말단 지방공무원들의 관료주의, 불친절, 무관심은 서울 뺨칠정도였고, 환영은 커녕 그들에게 나의 출현은 도리여 한가지 귀챦은 일이 더 생겼을 뿐이며 아예 외면을 할려고 들었다. 임지에 도착하여서도 마찬가지였다. 주민들의 눈길이 당황할 정도로 차가왔다. 보건소라는 곳은 아무런 시설도 없고 약품도 없었다. 서울에서 가지고간 몇가지 약품과 의료기구가 전부였다 보건소앞 길건너에 파출소가 있었는데 그래도 이웃끼리 인사는 해야 될것같아서 찾아갔다. 지서장은 경찰관답지 않게 마음좋고 순하게 생긴 중늙은이었다. 그당시는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라 커피대접은 금기였고 손님이 찾아오면 박카스 한병씩 내 놓는것이 상례였다. 박카스를 컵에 따라 한모금을 마시고는 한다는 이야기가 이 마을에는 과거에 몇몇 공의가 있었는데 모두 월급만 타먹고 살기는 읍내에 살면서 마을에는 그저 한달에 서너번 정도만 들렀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돌팔이들이어서 병은 고칠줄도 모르고 자꾸 사고만내서 모두 쫒겨 났다며, “노선생도 엔간히 잘하지 않으면 힘들거요” 라고 은근히 겁을준다. 그러고 보니 마을사람들의 찬 눈길이 이해가 갔다. 부임후 몇일간 찾아오는 환자가 하나도 없었다. 정신과 레지덴트 4년차에 이제 아무도없는 시골에와서 이병저병 다 고쳐야하는 공의 (公醫) 노릇을 할려니 추상화만 그리다가 갑자기 초상화를 그리는것 같은 기분이었다. 제일 겁나는 분야가 산부인과였다. 인턴때 야간당직 레디덴트 옆구리를 쿡쿡찔러 밀어내고 내손으로 아기를 몇번 받아본 것이 내실력의 전부였다. 학생때 보던 산과책을 다시 꺼내서 그림만이라도 보며 기억을 되살리려 했다. 그런데 이 사내는 얼마나 급했으면 그렇게 인기없는 공의를 찾아왔는가? 첫번째 환자가 하필이면 내가 제일 자신이 없는 문제를 가지고와 나를 괴롭히려 하는가? 마치 나의 급소를 정확히 알고 정면으로 도전해 오는것 같았다. 갑자기 사내가 멈춰섰다. 이곳에 분명 징검다리가 있었는데 없어졌다며 지난 홍수에 떠내려갔는가 보다고 혼자 중얼거렸다. 사내는 바지를 걷어 부치더니 나더러 업히란다. 잠시 망서리다가 구두를 벗고 바지를 걷고 하는것이 번거러워 그냥 업혔다 다시 논두덩을 따라 한참가다가 언덕배기에 다다르니 쓸어져가는 초가집이 하나보였다. 희미한 등잔불이 새어나오고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는걸 보니 목적지에 도착한것 같았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컴컴한 방에 들어서니 산모는 반 혼수상태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이마를 만져보니 고열이 있었다. 그래도 격식은 갖추어야 될것 같아서 멸균 고무장갑을 끼고 진찰을 시작했다. 반쯤마른 태줄이 보였다. 조금 당겨보니 요지부동이다. 내진을하듯 손가락으로 입구를 조금 벌려보니 시커먼 공같은것이 보였다. 조금더 벌려보니 “퍽” 하고 물총쏘듯 검은 공이 튀어나와 하마터면 내 얼굴에 정통으로 맞을번 했다. 자세히 보니 태반이었다. 대강 식염수와 소독약으로 닦아주고 항생제를 주사 해주고, 해열제를 주고나니 위기를 면한것 같았다. 내 심장고동도 안정되어 가는것 같았다. 사내는 내가와서 채 일분도 않되어 후산을 했으니 감격하여 머리를 연방조아리며 고맙다고 한다. 조금 시간을 두고 상태를 보아야 할것같아 앉아 있는데, 사내는 자기 넉두리를 시작한다. 한참 이야기 하는데 결론은 자기는 소작농으로 지금이 제일 어려운시기다. 가을에 추수를 끝내야 품삯이 나오는데 왕진비는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단다. 나는 솔직히 왕진비같은것은 생각에도 없었고 다만 위기를 면한것만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아무때나 형편될때 내고 형편이 안되면 안내도 괜챦다고 얼버무렸다. 그러는 사이 열이 떨어 졌는지 산모가 눈을뜨고 의사선생님이 이 밤중에 이렇게 먼곳까지 와 주셔서 고맙다는 인사치례를 한다. 이제 임무는 완수됐다 싶어 일어나려고 했다. 사내는 잠시만 더 앉아계시란다. 아무것도 사례할것이 없으니 보신탕이라도 만들어 대접하겠단다. 그러고보니 아까 들어올때 툇마루앞에서 자다가 일어나 꼬리를 치던 강아지 생각이 났다. 질겁을하고 나는 보신탕은 못먹고 더구나 저녁을 다 먹고와서 전혀 아무생각도 없다고 하며 도망치듯 방을나왔다. 마을의 불빛이 보이는데 까지 와서는 혼자 갈수있으니 산모도 돌볼겸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궂이 보건소 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것을 쫓아보내다 시피 돌려 보냈다. 혼자서 시골 밤길을 걸어 오자니 어릴적 듣던 달걀귀신이 쫓아 오지나 않나 겁이나 뛰다시피 돌아왔다. 다음날 또 한 사내가 보건소에 헐레벌덕 찾아왔다. 자기 아내가 산고를 이틀씩이나 했는데 아직 아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제밤 죽을번한 산모를 단 몇분만에 살려낸 용한 의사가 여기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단다. 시골에는 소문도 빨랐다. 이번에는 진짜 마각이 들어나겠구나 생각하니 또 가슴이 방망이질을 했다. 그러나 할수없이 그 사내를 따라나섰다. 산모를 내진하니 자궁은 열렸는데 애기머리는 만져지지가 않고 무슨 조그만 것이 만져졌다. 자세히 드려다 보니 애기 발이 쏙내밀고 있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애기가 발부터 나오면 응급상황이라는것쯤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첫번 환자는 재수가 좋아서 위기를 면했지만 이번에는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것 같았다.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할 상황이었다. 제발 무사하기만을 기도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어깨가 나오고 턱이 나오고 그러더니 머리가 홀깍 빠져 나왔다. 우렁찬 애기울음소리에 벌떡 정신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는 마을사람들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졌다. 우리마을에 용한의사가 왔다고 소문이 쫙 퍼졌다. 거리에서 지나가다 만나는 사람마다 웃으며 인사를했다. 보건소에 환자들이 연일 바글바글 대었다. 내가 제일 실력없고 겁내던 분야에서 명의(名醫) 소리를 듣게된것이었다. 단지 닫혔던 문의 빗장을 열어주고, 위기에서 구해달라고 기도를 한것밖에 없는데 명의라니. 명의란 재수가 좋아 엉뚱한곳에서 엉뚱한 계기로 만들어 지는 것인가. 4년동안 심혈을 기우리던 후로이드 나 융 같은 정신분석학은 여기서는 돼지 발톱에 매니큐어 같아 보였다. |
2012.02.03 22:06
2012.02.04 03:04
I enjoyed reading the story, and
thank you for sharing it with others, Dr. Ro.
The story reminds us why many of us went to medical school in the first place.
And I wonder how many of us indeed have been carrying out the original commitment.
2012.02.04 07:52
2012.02.04 10:47
名醫란 최선을 다 하면 명의이지요.
의사가 아무리 천직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선생님들의 이러한 얘기를 들으면 저도 의사라는 입장을 떠나 숙연해지며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느닷없이 왕진을 청하면 낯선 그이를 쫓아갈 수 밖에 없는 저희들 의사들은 봉사로 일생을 끝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더라도 모든 사람이 자기 직업에 대한 충실함이 이와 같아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의사가 응급 상황에 놓인 환자나 장기적으로 치유불가능한 환자앞에서 성심껏 대하는 자세와 못지 않게 말이지요.
저희들 57년 졸업 기까지는 저희 서울대병원에는 인턴제도가 없었고( 이 해에 연세의대는 시작되었으나) 졸업하자마자 레지덴트 1년으로 들어가 당시에는 5년차를 끝내고 전문의 시험을 치뤘습니다. 그러나 저의 동기는 당시 6.25 휴전후 아직도 모든 질서가 안 잡혔던 때이어서 전원이 졸업하자마자 군 입대하여 군의관 육군중위로 임관하였습니다. 임관하자마자 육군에 복무하던 저의 동기의 얘기이었습니다. 군단장인가 사단장인가 높으신 분 사모님이 아기를 낳는데 delivery를 거들게 되어 그 댁에 왕진 가서 학생 임상실습에서 어깨 넘어 분만 광경을 보았던 것 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몇 시간을 발치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니 순조롭게 아기도 태반도 잘 나왔답니다. 분만이란 정상이다가도 출혈등 돌연 비정상 사태에 가는 상황도 많아 더구나 왕진 가서 일을 치룬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지요.
저도 40대 후반에 병리과 전공의 시절 '70년대 후반에 충청도 무의촌 6개월 근무할 때, 옥천에서 안남면이란 곳 보건지소에 버스로 출퇴근 했는데 어느날 왕진 가서 분만을 거들고 밤이 으슥한 산 길을 구비구비 버스가 끊어져 걸어서 몇 시간만에 옥천 숙소로 돌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이럴 때 호랑이 만나는 것보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무섭고 위험하다는 말을 떠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가 급하다고 하면 달려가서 보아주어야 하는 의무감도 있으므로 의사란 참 순수합니다.
추상화를 그리다가 초상화를 그려야만 하게 되었다, 4년 동안 심혈을 기우리던 후로이드나 융 같은 정신분석학은 여기서는 돼지 말톱에 매니큐어 같아~ 등, 참으로 재미 있게 읽었습니다.
그 위급하고 그 사나이를 으슥한 달밤에 험한 길을 쫓아가셨던 일들이 다 지난 과거이기에 그 순간들의 조바심을 배제하고 마음 편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것이지요.
정신과 의사는 생각도 많이 하시며 독서도 더 많이 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분야의 환자들은 약물치료도 좋겠지만 여건만 된다면 환자에 따라서는 그들과의 좋은 대화로 정신과 질환이 잘 improve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노영일 선생님,
그 산모는 그대로 좀 시간이 경과되면, 어쩌면 곧 sepsis로 이어져 사망했을 것 같습니다. 참으로 그 위기를 잘 넘기게 하시어 명의이십니다.
두번 째 증례, 산부인과 의사도 제대로 된 분만대에서도 긴장되는 breech delivery까지, 아무리 잘 빠져 나왔다고 하더라도 잘 하셨기에 결과도 좋았겠지요.
툇마루앞에서 자다가 일어나 꼬리를 치던 강아지 생각에 질겁을 하고 도망치셨다는 말씀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그 강아지가 언제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도 또 다른 생명을 구하셨군요. '하룻강아지만 못하다'고 인간의 도덕성에 대하여 아쉬워하는 말도 실감나게 강아지는 참으로 의리있는 동물이며 사랑이 갑니다.
의사로서, 구구절절 공감하게 되는 글, 잘 읽고 감사드립니다.
2012.02.04 13:54
2012.02.04 14:53
2012.02.04 17:00
2012.02.04 17:09
2012.02.04 17:35
위의 표창패 받으시러 서울에 올라가셨네요.
훈련 중 얼마나 좋은 기회이셨을까요.
사랑하는 가족들도 잠깐이라도 만나시고--.
평소의 열심한 생활의 모습을 자신도 알 수가 없지만 얼마만에 한번씩 타각적인 평가가 돌아올 때는 기쁘지요.
물론 삶이란 자기 스스로 잘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충실히 살게 되는 것이지만 사람이기때문에 남에게 칭찬 받으면 좋은 것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어릴 적과 마찬가지 입니다.
근무하신 보건지소 소재지, 1989년 원성군이 원주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1995년 1월 원주군과 원주시가 통합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무의촌 6개월을 집을 떠나서 다녀 온다는 것 누구에게나 전공의 과정 중 큰 일이었습니다.
노영일 선생님은 글 쓰는 것, 그림 그리시는 것, 모두 잘 하시니 행복하십니다.
2012.02.04 19:28
2012.02.05 01:36
그런 절대 절명의 순간에 전공도 아닌 분야에서 환자를 돌보아
주셨다는것 자체가 명의 아니겠서요.
우리의사로서 과연 환자의 치유가 의사에의 힘에 의한것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이곳에서도 많은경우에 '자연의 치유힘'을
보는경우가 많지요.
비록 노선생께서 산부인과적 도움은 별로 주지 않으셨어도 정신과
전공의로서 오래몸에 배었을 환자 가족을 헤아려 어루만져 주었을
것을 생각하면 노선생은 그시점에서 그환자나 가족에게는 명의중의
명의가 아니었을까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규정
2012.02.05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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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it's creation in 2008, sun-bae-nim.
Why?
1. It's our story in our profession when we were Firefighters
(going anywhere, everywhere, wherever Fire is, regardless
of time and place).
2. Courage to expose when we were Nobody but "Dol-p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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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man or not. If Steve Hartman, creator of "Everybody Has A
Story", sees this article, he might approach you without 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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