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21 00:49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거의 매일 같이 뜰의 낙엽을 긁어 모으지 않으면 안 된다. 날마다 하는 일이언만, 낙엽은 어느덧 날고 떨어져서 또 다시 쌓이는 것이다. 낙엽이란 참으로 이 세상의 사람의 수효보다도 많은가 보다. 삼십여 평에 차지 못하는 뜰이언만, 날마다의 시중이 조련치 않다. 벚나무 능금나무 ..... 제일 귀찮은 것이 벽의 담쟁이다. 담쟁이란 여름 한철 벽을 온통 둘러 싸고 지붕과 연돌(煙突)의 붉은 빛난 남기고 집안을 통째로 초록의 세상으로 변해 줄 때가 아름다운 것이지, 잎을 다 떨어뜨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벽에 메마른 줄기를 그물같이 둘러칠 때쯤에는 벌써 다시 거들떠볼 값조차 없는 것이다. 귀찮은 것이 그 낙엽이다. 가령 벚나무 잎같이 신선하게 단풍이 드는 것도 아니요, 처음부터 칙칙한 색으로 물들어 재치없는 그 넓은 잎이 지름길 위에 떨어져 비라도 맞고 나면 지저분하게 흙속에 묻혀지는 까닭에 아무래도 날아 떨어지는 족족 그 뒷시중을 해야 된다. 벚나무 아래에 긁어 모은 낙엽의 산더미를 모으로 불을 붙이면 속의 것부터 푸슥푸슥 타기 시작해서 가는 연기가 피어 오르고, 바람이나 없는 날이면, 그 연기가 얕게 드리워서 어느덧 뜰안에 가득히 담겨진다. 낙엽타는 냄새 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낸 코오피의 냄새가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 때까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연기는 몸에 배서 어느 결엔지 옷자락과 손등에서도 냄새가 나게 된다. 나는 그 냄새를 한없이 사랑하면서 즐거운 생활감에 잠겨서는 새삼스럽게 생활의 제목을 진귀한 것으로 머리속에 떠올린다. 음영(陰影)과 윤택(潤澤)과 색채(色彩)가 빈곤해지고 초록이 전혀 그 자취를 감추어버린 꿈을 잃은 헌출한 뜰 복판에 서서 꿈의 껍질인 낙엽을 태우면서 오로지 생활의 상념에 잠기는 것이다. 가난한 벌거숭이의 뜰은 벌써 꿈을 메우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탓일까. 화려한 초록의 기억은 참으로 멀리 까마득하게 사라져 버렸다. 벌써 추억에 잠기고 감상에 젖어서는 안 된다. 가을은 생활의 시절이다. 나는 화단의 뒷바라지를 깊에 파고 다 타버린 낙엽의 재를 - 죽어버린 꿈의 시체를 - 땅 속 깊이 묻고 엄연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야기 속의 소년같이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전에 없이 손수 목욕물을 긷고 혼자 불을 지피게 되는 것도 물론 이런 감격에서부터이다. 호오스로 목욕통에 물을 대는 것도 즐겁거 니와 고생스럽게 눈물을 흘리면서 조그만 아궁이로 나무를 태우는 것도 기쁘다. 어두컴컴한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서 새빨갛게 피어 오르는 불꽃을 어린아이의 감동을 가지고 바라본다. 어둠을 배경으로 하고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은 그 무슨 신성하고 신령스런 물건 같다. 얼굴을 붉게 태우면서 긴장된 자세로 웅크리고 앉아 있는 내 꼴은 흡사 그 귀중한 선물을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막 받았을 때의 그 태고적 원시의 그것과 같을는지 모른다. 새삼스럽게 마음 속으로 불의 덕을 찬미하면서 신화 속 영웅에게 감사의 마음을 비친다. 좀 있으면 목욕실에는 자욱하게 김이 오른다. 안개 깊은 바다의 복판에 잠겼다는 듯이 동화(童話)의 감정으로 마음을 장식하면서 목욕물 속에 전신을 깊숙이 잠글 때 바로 천국에 있는 듯한 느낌이난다. 지상 천국은 별다른 곳이 아니라 늘 들어가는 집안의 목욕실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사람은 물에서 나서 결국 물 속에서 천국을 구하는 것이 아닐까. 물과 불 - 이 두 가지 속에 생활은 요약된다. 시절의 의욕이 가장 강렬하게 나타나는 것은 두 가지에 있어서다. 어느 시절이나 다 같은 것이기는 하나, 가을부터의 절기가 가장 생활적인 까닭은 무엇보다도 이 두 가지의 원소의 즐거운 인상 위에서기 때문이다. 난로는 새빨갛게 타야 하고, 화로의 숯불은 이글이글 피어야 하고, 주전자의 물은 펄펄 끓어야 된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코오피의 알을 찧어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는 내 모양을 어린애답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또 즐기면서 이것이 생활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싸늘한 넓은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제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활의 생각이다. 벌써 쓸모 적어진 침대에는 더운 물통을 여러 개 넣을 궁리를 하고 방구석에는 올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색전등도 장식할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이를 시작해 볼까 하고 계획도 해 보곤 한다. 이런 공연한 생각을 할 때만은 근심과 걱정도 어디론지 사라져 버린다. 책과 씨름하고 원고지 앞에서 궁싯거리던 그 같은 서재에서 개운한 마음으로 이런 생각에 잠기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다. 책상 앞에 붙은 채 별일 없으면서도 쉴 새 없이 궁싯거리고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하면서, 생활의 일이라면 촌음(寸陰)을 아끼고 가령 뜰을 정리하는 것도 소비적이니 비생산적이니 하고 경시하던 것이 도리어 그런 생활적 사소(些事, 사소한 일)에 창조적 생산적인 뜻을 발견하게 된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 시절의 탓일까. 깊어가는 가을이, 벌거숭이의 뜰이 한층 산 보람을 느끼게 하는 탓일까. |
2012.02.21 01:11
2012.02.21 01:34
'메밀꽃 필무렵'의 자가 이효석의 약력을 wikipedia에서 옮겨옵니다. 규정
이효석(李孝石, 1907년 2월 23일 ∼ 1942년 5월 25일)은 호는 가산(可山)이며,
강원 평창(平昌) 출생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단편소설 작가이다.
[편집] 생애
경성 제1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28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단편 《도시와 유령》이 발표됨으로써 동반자작가(同伴者作家)로
데뷔하였다. 계속해서 《행진곡(行進曲)》, 《기우(奇遇)》 등을 발표하면서 동반작가를 청산하고
구인회(九人會)에 참여, 《돈(豚)》, 《수탉》 등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가 된 후 《산》, 《들》 등 자연과의 교감을 수필적인 필체로 유려하게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1936년에는 1930년대 조선 시골 사회를 아름답게 묘사한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정작 이효석의 삶은 시골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양 영화를 즐겨 보았고, 서양에서
온 가수나 무용단의 공연을 보며 넋을 잃기도 했던 도시인의 삶이 그의 삶이었다. 그 후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장미 병들다》, 동성애를 다룬 작품으로 평가받는《화분(花粉)》 등을 계속 발표하여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새로운 작품 경향으로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당시 이태준·박태원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단편작가로 평가되었다.
1940년 부인 이경원과 차녀를 잃은 후 실의에 빠져 건강을 해치고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못하다가,
1942년 뇌척수막염으로 숨을 거두었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모친의 유골과 합장했으나, 1972년 영동고속도로 건설공사로 인해 용평면의
고속도로 변으로 이장하였다. 그러나 1998년 영동고속도로 확장 공사로 인해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동화경모공원으로 이장하였다.
주요 작품
이효석
《도시와 유령》
《돈(豚)》
《수탉》
《장미 병들다》
《산》
《들》
《메밀꽃 필 무렵》
《화분(花粉)》
《행진곡(行進曲)》
《기우》
2012.02.21 10:01
2012.02.21 18:34
시인들은 낙엽을 태우면서 피부에 밴 향기를 맡으면서 또 삶의 에너지를 받아들이시는군요.
이효석 작가는 짤막한 생애를 굵게 살으신듯, 그러나 너무 빨리 세상을 뜨셨습니다.
2012.02.21 19:00
2012.02.21 20:14
2012.02.22 00:14
좋은 말씀들에 감사드립니다.
집주위에 나무들이 많아서 가을이 되면 떨어진 낙엽들이 귀찮을
만큼 지천으로 깔려 있는데 애들이 자라던 옛날에는 떨어진
낙엽들을 일주일이 멀다하고 긁어모아 낙엽타는 내음을 즐기며
가을의 정취를 만끽한적도 있었는데----.
이제
애들은 제갈길로 가고 천식이나 만성 폐기관환자,앨러지 환자들을
위해 City ordinance가 바뀌어 낙엽도 태울수도 없고 떨어진 낙엽들은
lawn care하는사람들이 vacuum해가니 편리하기는 하나 옛날의
그 가을맛은 찾을수가 없네요. 만사가 그렇듯이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것 말입니다. 그리고 격세지감을 금할길 없습니다.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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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가을'은 지나고도 훨씬지났지만서도 마침 김창현 선생의 수필을
읽다가 문득 이 수필이 생각나서 옮겨봅니다.
Coffee를 '코오피'로 쓴 신토불이 이효석 선생에다 chanson의 대가
이브 몽땅의 '고엽'을 fusion시키니 어쩐지 갓쓰고 자전거 타는 기분
이기도 하지만 두 대가들의 fusion이라서인지 낙엽을 태우는 불길
만큼이나 우리마음에 닿아오네요. 즐거운 주들 되세요. 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