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뜸북새, 오빠 
                                       

                        
                               연규호,
M.D., Garden Grove, CA

1.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얄궂은 운명을 갖고 태어났기에 매사에 손해만 보고 살아야 할 바보같은 여자라고 부르며 아주 가엾게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러나 나는 가미사마(神)가 내게 내려준 준엄한 명령으로 생각하며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장애인인 시누이와  총상으로 인해 척추를 다쳐 절룩 거리는 남편을 포함한 네 명의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여가장(女家長)으로 당당하게 살아왔다.
 3년 전부터 가벼운 치매증상을 보이던 시어머니에게 극심한 우울증이 발병하자 정신과 의사를 매달 한차례씩 방문 해 약을 받아 온다. 어린애처럼 내 손을 잡고 따라다니는 시어머니의 인생이 어찌나 불쌍하고 가련한지 나도 덩달아 우울해진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되게 기쁜 날이었으며 운수 좋은 날이었다.
 
“김정선(金貞善) 할머니, 오늘은 뭔가 즐거운 일이 있나보죠? 웃으시는걸 보면.” 정신과 의사(강석호. 姜石浩)도 훤하게 덩달아 웃으면서 시어머니에게 물었다.
 시어머니는 수줍은 듯이 대답은 하지 않았으나 살포시 나비의 날개처럼 입술을 출렁거리는 것을 나는 똑똑히 곁에서 보았다.
 “의사 선생님이 우울증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한국가요를 집에서 들려 주라고 해서 여러 가지 테이프를 틀어 줬는데 , 며칠 전 부터 시어머니는 뜬금 없이 ‘ 뜸북뜸북, 뻐꾹뻐꾹’ 소리를 내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군요.”
 “하나꼬(花子)상? 한국말로 그건 새 소리입니다.”
 “새? 그럼 서로 다른 샌가요?”
 “예, 뜸부기는 여름에 논에서 우는 새로 다리가 길고 검누런 갈색으로 잘 날지 못하지요. 반면 뻐꾸기는 산이나 산림에 살며 훨씬 크고 초 여름에 남쪽에서 날아 오죠.
그런데 시어머니가 새소리를 내다니? 잘 관찰해 보소,  언제 그런 소리를 내는지. 하나꼬상!“
 우울병 환자가 음악을 듣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일시적으로 환청(幻聽)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정신과 의사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으면서 처방전을 써 내게 주었다.
 “약은 제 때 먹어야하며 잠은 충분히 자야 정신병은 좋아 집니다. 아시겠죠? 하나꼬상!”
 “예” 나는 90도로 목을 숙여 인사를 한 후 시어머니를 모시고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친정어머니(준꼬 다카하시)와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시누이(김선화,金善花)는 스파게티를 탁자에 가지런히 준비해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애인들이 만든 음식을 먹다보니 너무나 감동이 돼 눈물이 뺨으로 흘러 내렸다.
                           *
 나는 금년 50세가 된 간호사로 일주일에 3회, 집근처에 있는 K 신장 투석 센터에서 12시간 씩 일해 온지 어느듯 30년이 된다
                        *
 내가 남편 김선우(Steve Kim)와 결혼하게 된 것은 가미사마의 운명적인 명령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바보같은 여자라고 비웃었으며 일본 사람들은 ‘왜, 하필이면 한국 사람에게 손해 보는 결혼을 하느냐?’라고 거세게 항의를 하기도 했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된 것은 16년 전인 1999년 봄, 미국신문에 실린 서글픈 기사가 내 마음을 울렸기 때문이었다.
-신문에 소개된, 롱비치 경찰국 소속의 경사(Sergent), 스티브 킴(김선우)과 그의 가족에 대한 기사가 안타까웠었다.
 
당시 38세의 한국계(1.5세) 경찰관 ‘스티브’는 롱비치 시내에서 암 활약 하던 마약 갱단을 소탕 하던 중 날아온 총탄에 등 허리를 맞고 피를 흘리며 쓸어졌었다. 응급차에 실려 롱비치 병원으로 실려가 치료를 받았는데 안타깝게도 척추 깊숙한 곳에 실탄이 밖혀 있어 세 시간에 걸쳐 수술을 한 후 목숨은 건졌으나 다리가 마비돼 걸을 수가 없어 불구자가 됐다.  애처러운 것은 그의 누나는 뇌성마비와 루마치스성 관절염으로 인해 제대로 교육도 못 받고 어려서부터 휠체어에 의존해야 하는 중증 장애인이기에 스티브 경사는 결혼도 하지 않고 누나를 위해 그리고 어머니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살아왔다. 이런 형국에 그마저 총상을 입고 불구자가 됐으니 앞으로 이들 가족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니 누군가, 독지가의 도움을 기다린다고 신문 기사는 강조했다. -
 이 기사를 읽으면서 친정어머니가 가끔 한숨을 쉬면서 내게 들려준 말이 생각났다.
-내가 살리나스(Salinas)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꽃 농장을 하면서 온 가족을 먹여 살리던 외할아버지가 농장에서 사고로 인해 죽었을 때 우리 온가족은 어쩌지도 못하고 울기만 했었다.
외할아버지가 없으면 우리 모두는 굶어 죽는다고 생각 했었다.
 “그래도 같은 동족인 일본 사람들이 곁에 살고 있었기에 우리들은 목숨을 이어갈 수가 있었지. 그게 인연이 돼 우리를 도와준 ‘그 집 아들과 내가 결혼’을 했었지. 그게 바로 네 아버지(시게쓰 고바야시)였어. 불행이 오히려 우리를 살려준 셈이였지. 네 아버지. 고마웠지. 같은 동족이라는 것이 그토록 좋은 거 였어.”-라고.
                        *
 갑자기 불행의 늪에 빠진 스티브를 위로해주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나는 롱비치에 사는 스티브에게 ‘용기를 내라’, ‘희망을 잃지 말라’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은근히 그로부터 올 답장을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었다.
 나의 자존심이 상했으나 그보다도 답장을 보내지 않는 스티브의 근황이 더 궁금했다.
 ‘왜, 답장이 없을까? 편지를 못 받았나? 아니면 어머니 말대로 무식한 한국사람인가? ’ 나는 마음의 동요를 억제하고 또 다시 격려의 편지를 보냈다. 역시 답장이 없었다. 일본사람들이 흔히 하는 인사의 편지로 종이학을 접어서 여러차례 보냈다. 역시 답장이 없었다.
 ‘답장이 없네? 왜?’ 궁금증은 더 더욱 심해져 보내게 했다. 답장이 올 때까지....
생각해 보면 내가 롱비치 대학에 다닐 때, 잘생겼다는 소문으로 인해 수 많은 연애 편지를 남학생들로부터 받았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결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혼자 외롭게 사는 어머니와 평생 같이 살겠다고 맹세를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꼬? 너, 결혼도 하고 가정도 가져야지. 늙기 전에 결혼 하거라. 내 걱정 말고. 나, 혼자 살아도 돼. 너만 행복해 진다면.”
어머니는 여러차례 눈물까지 흘리며 충고했으나 나는 어머니와 죽을 때까지 같이 살려고 토렌스에서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았다.
 그런 내가 오늘 어쩌자고 총탄에 맞아 척추 장애자가 된 한국인 경찰관에게 답장도 없는 편지를 보내다니, 나 스스로가 미궁에 빠진 느낌이었으며 자존심이 구겨진 셈이었다.
 일 년이 돼도 답장을 받지 못하자 은근히 부화가 솟아 나는 엉뚱하게도 롱비치에 사는 그의 집을 예고도 없이 불숙 방문했다.
 내가 다닌 롱비치 대학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비교적 큰 집이었다. 집 앞에는 훌쭉 치솟은 야자 나무가 하늘을 찌를 것 같았으며 부채 같은 팜트리가 문 앞에서 부채질을 하는 듯했다. 지팡이를 집은 스티브 경관이 나를 맞았으나 반갑다는 말도 그동안 보내준 편지에 대해 별로 감사하는 표시도 없었다.
 “받은 편지, 고맙기는 하나 부담이 됐습니다. 한국인 이민자로 불구자가 된 것도 남에게 말하기 힘들지요. 그런데 내게는 나보다 더 상태가 나쁜 장애인 누나가 있습니다. 평생 제가 보살펴야 할 누나입니다. 게다가 배우지 못하고 과부가 돼 근근히 살아 가는 어머니도 제가 책임지고 사는 주제에 한가로이 고맙다는 편지를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예 대답을 않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지요.“
 장애자인 누나와 능력 없는 어머니를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자립적으로 모시고 살겠다는 그의 생각은 나와 똑같은 생각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적극적으로 편지도 보내고 그의 집으로 찾아 가곤 했다.
 “더 오시면 안 됩니다. 하나꼬 고바야시 님. 그리고 아다시피 저는 한국인 1.5세입니다.” 그는 얼굴을 붉혔다.
 “저는 일본인 2세입니다. 그게 무슨 큰 이유가 되나요? 일본 사람은 안 되나요? 하나꼬 고바야시라는 이름이 싫으세요? 스티브씨? 저도 어머니를 모시고 평생 혼자 살려고 결혼도 않고 노처녀가 됐지요. 스티브씨 처럼.....”
 “........” 그는 대답이 없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어머니(쥰꼬)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하나꼬? 한국사람은 안돼. 우리 일본사람하고는 다른 사람들이여. 물과 기름같아. 그들은 예의가 없는 사람들이여. 우리 일본사람들이 겪었던 고통을 그들은 모른단 말야. 이차대전(대동아전쟁)중에 우리 일본 사람들은 강제로 잡혀 콜로라도 그라나다에 있는 아마체 수용소에서 3년간 온갖 고생을 했었지. 그때 너의 할아버지는 미군에 입대해 멀리 이태리 전선에 갔다가 겨우 목숨을 건져 살아왔었지. 물론 재산도 모두 압류 당해 살리나스로 돌아 왔을 때, 우리는 거지 꼴이었어.....
하나꼬? 한국 사람들은 기회 주의자들이었어. 살리나스에 남아서 우리 꽃 농장을 통째로 먹으려고 했었어.......“
 “어머니? 나는 한국사람들을 이해 하려고 해요. 그들은 일본으로부터 더 많은 고통을 받았다고  알고 있어요. 어머니...”
 “그래서 네가 그것을 보상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할 수 있다면. 나는 그들을 돕고 싶어요. 무조건.”

2.
 여자인 나는 정작 ‘여자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스티브는 비록 불구의 몸이었으나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 장애인 누나를 성심껏 도와주며 외삼촌이 경영하는 세탁소에 가서 막 노동을 하고 돌아오는 어머니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는 늘 웃음이 있었기에 집안이 밝았다.
 스티브가 어떻게 미국에 왔는지를 알게 됐다.
-한국, 여주에서 살다가 아버지가 죽으면서 집안이 기울기 시작하자 먼저 미국에 온 외삼촌이 이민 초청해 1979년 17세의 나이로 미국에 왔다고 했다. 비록 외삼촌이 도와 준다고는 하나 중년의 어머니는 세탁소에서 밤 늦게 까지 일을 하여 스티브를 학교에 보냈으며 누나는 특수학교에 보냈다고 한다.
 롱비치 대학과 경찰학교를 마치고 1984년 이후 스티브는 롱비치, 토렌스 가데나등지에서 경찰관으로 잔뼈가 굵었다. 1999년, 35세, 경사(Sergent)로 롱비치 경찰서에서 근무를 하던 중 흉추에 총탄을 맞고 장애자가 돼 정부에서 주는 연금과 누나에게 나오는 생활보조금 그리고 세탁소에서 받아 오는 적은 월급으로 세 식구는 근근히 살아왔다고 한다. 그래도 그가 사는 집은 방이 4개에 화장실이 4개가 딸려 있으며 집 입구가 평평해 휠체어가 들어오기 쉬웠다.-
                                   *
 “이젠 스티브의 집에 가지 마라!” 어머니는 마침내 제동을 걸었으나 오히려 기름에 물을 붓는 격이 됐다.
 “어머니? 아무래도 스티브네 식구들은 나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아요. 두 명의 장애인이 너무나 안타까워. 가엾어.”
  “뭐라고? 너는 안정된 직업을 갖고 있는데 뭐가 아쉬워서. 게다가 스티브는 장애자인데.
네 나이가 지금, 33살이야, 아직도 좋은 나이야, 그러니 안 돼!“ 어머니는 눈물로 나를 만류했다.
  “어머니? 나, 가끔 가미사마의 명령을 듣고 있어요. ‘누구든지 불쌍한 사람에게 물 한 컾을 주어도 나, 가미사마를 위해 한 것이니라.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라고요.”
 “그래도 안 돼! 하나꼬! 제발.” 어머니는 마침내 엉엉 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의 집을 찾은 지 1년 3개월, 나는 마침내 여자인 내가 남자인 스티브에게 먼저 청혼을 했다.
 “하나꼬 상? 지금 무어라고 했습니까? 결혼이요? 말도 안 되지. 나는 장애자요 수입도 없소. 게다가 내 누이는 중증 장애자로 더 많은 손이 필요한데. 안됩니다. 내가 돌봐야죠. 나, 당신의 동정을 받고 싶지 않아요, 하나꼬 상! 못들은 것으로 알고 그냥 친구로 대해 주소.”
 스티브는 여러차례 사양 그리고 또 사양했으나 집요하게 청혼하는 나와 마침내 말도 안 되는 결혼을 하게 됐다.
 “말도 안 되지. 죽 쒀 개를 주지. 한국사람에, 장애인에, 돈도 없고 게다가 누나마저 장애인인데. 이건 아냐! 하나꼬야? 네가 바보 멍텅구러기냐?.”
  어머니는 화가 나서 씩씩 거리며 숨을 몰아 쉬다 방바닥에 쓸어졌다.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로 가니 스트레스로 오는 홧병으로 휴양을 잘해야 산다고 하며 집으로 돌려 보냈다.
 결국 우리는 롱비치에 있는 작은 미국교회에서 ‘쉬쉬!’ 입을 막으며 가족들만 참석한 작은 결혼식을 올렸다. 식구들이라고 해봐야 장애자 누나,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그리고 외삼촌댁식구들 그리고 일본인 친구 몇 명이었다.
 내 친구들은 감정을 참지 못하고 바보처럼 손해를 보면 어떻게 하느냐고 울며불며 나를 붙잡고 일본말로 떠들면서 엉엉 울었다.
그러나 내게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불쌍한 어느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이 오히려 즐거웠다. 그 상대가 한국인 경찰관 스티브이기에 더 기뻣다.
 결혼 후 나는 아애 친정어머니를 데리고 롱비치 스티브의 집으로 이주했다.
역시 일본 어머니는 강했다. 처음에는 반대를 했으나 일단 결혼을 하자 친정어머니는 태도를 바꾸고 모든 것을 희망적으로 생각하며 대했다.
                        *
 결혼 후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장애인 스티브보다 시어머니와 어떻게 해야 좋은 관계를 가질지, 그것이 더 힘들었다.
 -과부로 홀로 살아 온 시어머니는 생각밖에 말이 적었으며 화를 내지 않았다.
매주 교회에 나가는 그녀의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같이 따라 갔다.  한국말로 하는 예배의 뜻을 알 수가 없었지만 ‘가미사마’가 ‘하나님’이라는 것은 알게 됐다.
 시어머니는 뜻밖에도 친정어머니와 잘 지냈다. 친정어머니를 마치 동생 대하듯이 했다. 시어머니가 특별히 내게 부탁한 것은 다름 아닌 “귀향(歸鄕)”이었다.
 “고향에 가고 싶어. 경기도 여주(麗州)라는 곳이지. 아주 아름다운 곳이야.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어. 내가 죽으면 꼭 그곳에 묻어 줘, 하나꼬! 부탁해.” 시어머니는 여러차례 반복해서 내게 부탁을 했는데, 정작 나는 여주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고 세월을 보냈다.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시어머니는 고향을 이다지도 그리워 할까? 내 친정어머니는 고향에 가고 싶다는 부탁은 안하는데.
 시누이를 통해 들은 한국 동요가 실감나게 좋았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 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곳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한국의 고향과 내가 어려서 살았던 북가주 살리나스에 펼쳐진 꽃 농장이 내 눈에서 영화처럼 떠오른다.
 -초여름, 줄을 지어 빨간 딸기를 따던 히스페닉(멕시코 사람들)이 10살 된 소녀인 나를 향해 손짓을 하더니 탐스러운 딸기를 한 웅큼 집어 준다. 일본 사람들이 주인이었기에 마치 아씨를 대하듯 했다.  입에서 군침이 돌았다.
 어찌보면 한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들은 아주 비슷한 정서 속에서 살아 왔다고 느꼈다.
 시어머니의 얼굴에 붉은 찔레꽃이 활활 타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어머니? 꼭 모시고 한국, 여주에, 아니 고향에 다녀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고맙다. 아가야. 너의 이름 그대로 네 몸에서 붉은 동백꽃이 피를 토하는구나. 고맙다. 하나꼬.....”
 시어머니는 모처럼 내게 감사의 표시를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반면 친정어머니는 그녀가 살았던 ‘살리나스’와 콜로라도‘ 보다,  멀리 일본 규슈 남단, ’가고시마’를  고향이라고 부르며 그리워 했다.
 파란 바닷물이 넘실대며 맞은 편 섬에 있는 사꾸라지마 활화산이 가끔 분출하던 가고시마가 멀리 미국 땅에서 더 인상적으로 그립다고 했다.
  한국말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으나 아주 간단한 단어들 뿐이었기에 속 깊은 말의 뜻은 모르고 살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무척 힘든 가정이었으나 조금 먼저 양보를 하니 즐거운 가정이 됐다.
남편의 사랑은 극진했다. 비록 척추를 다쳐 지팡이를 집고 다니긴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넉근히 해내었다. 그러나 바라던 임신은 되지 못했으나 그래도 사랑하는 마음을 주고 받는 것이 너무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결혼한 것을 조금도 후회 하지 않았다.
       *
 3년 전, 시어머니가 77세가 되면서 치매의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까운 기억은 밥 먹듯이 잊어버리고 오래된 옛 기억도 점점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감정의 조절이 약한지 자주 화를 내기도 했다. 더 무서운 것은 음식을 조리한다고 개스 불을 켜 놓고 깜빡하다보니 집안에 화재가 날 수도 있었다. 가끔 대 소변도 실례를 하는가 하면 음식을 해 주었는데 밥을 주지 않아 배가 고프다고 했다.
 “어머니가 치매 증세가 있어. 하나꼬상! 나도 알고 있소. 정말 미안해요. 이런 어려운 일을 당신에게 시키다니. 누나도 그렇고. 내가 혼자 해야 할 일을.” 남편은 정말 미안하다고 하며 안스러워 했다.
 엎친데 곂친 격으로 건강하게 잘 지내오던 남편이 갑작스레 가슴이 아프다고 하더니 응급차에 실려 롱비치 병원으로 갔다.
 관상동맥이 3군데 막혀 대 수술을 하였으며 맥박이 불규칙해 심박동기계를 가슴에 부착했다. 그의 나이 겨우 50세 내 나이 47세인데.
 결국, 내가 해야 할 임무가 갑절로 늘었다. 다행히 친정어머니가 음식을 마련해 주고 정부에서 보내주는 도우미가 아침 저녁으로 들려 주어서 우리는 살아 갈 수가 있었다.
 증세가 악화되어 시어머니를 모시고 정신과 의사, 강석호씨를 찾기 시작했다.
“치매가 꽤 진행이 됐습니다. 혈액검사, 뇌 MRI 그리고 신경과에서 뇌파 검사도 하세요. 그리고 이 약을 아침 저녁으로 드리고 매달 한 번에서 두 번은 들려 진찰을 받으셔야 합니다.”
 치매약을 복용하기 시작하자 시어머니의 병세는 많이 호전됐다.
                            *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신장환자의 혈액 투석 근무를 하고 있는 데, 친정어머니로부터 내게 전화가 걸려왔다.
“하나꼬! 스티브가 갑자기 가슴이 아프다고 하며 쓸어졌어. 911 응급차를 불렀는데, 하나꼬! 스티브가 이미 죽었어.  빨리 롱비치 병원으로 가 보거라.”
 친정어머니의 다급한 전화에 이어 이번에는 롱비치 병원에서 온 전화였다.
 “하나꼬 고바야시, 킴? 당신의 남편 스티브 킴은 DOA(병원에 오기 전에 이미 죽음)로 검시관에게 넘겨져 부검을 하게 됩니다. ”
 “예? 죽었다고요?”
 “그렇소.”
나는 예견은 했었으나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예상 못했으며 죽기 전에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 마음 아팠다. 그리고 허망했다.
 롱비치 지방 신문에 남편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14년 전에 마약. 깽 단의 총격으로 척추 장애를 입었던 스티브 킴 경사가 오늘 관상동맥 질환으로 사망함.  일본인 아내의 헌신적인 간호로 그는 즐거운 가정 생활을 하였으며 그의 장례는 롱비치 경찰국에서 담당하기로 함.’-

3.
 남편의 장례식이 끝난 후 폭풍우처럼 들어 닥친 것은 시어머니의 우울증이었다.
치매로 아들이 죽은 것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밖으로 그녀는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말을 하지도 않았다.
 시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때로는 고향에 가자라고 외치기도 했다.
 “하나꼬상, 시어머니는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우울증이 생겼습니다. 아무래도 항 우울제를 같이 복용하십시다. 그리고 꼭 약을 챙겨 드리시고 심한 경우에는 양로병원으로 보냅시다.”
 “양로병원? 안됩니다. 내가 죽을 때까지 모시렵니다. 내 집에서....”
   
                 *
 남편은 죽었고 시어머니도 우울증으로 시달리다보니 시누이와 친정어머니도 덩달아 우울한지 가끔은 소리 없이 울곤 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 지 일 년, 우리가 결혼 한지 15년....
생각해 보면 길고 힘든 세월이었으나 내게는 짧고 빠른 세월이었다.
 강석호 정신과 의사의 권유에 따라 치매를 치료하는 방법중위 하나로 나는 한국가곡과 명곡을 구입해 조용히 시어머니를 위해 음악을 틀어 주었다.
좋은 음악이긴 하나 일본 사람인 나는 한국가사를 이해하기 힘드니 무료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나는 시어머니의 놀라운 행동을 감지하고는 의아해 했다.
말도 없던 그녀의 입에서 “뜸북 뜸북” “뻐꾹 뻐꾹”이라는 소리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시 어머니? 지금 무슨 소리를 했나요? 뜸북? 뻐국?, 그게 뭐죠?”
 “...............” 시어머니는 아이처럼 대답대신 피식 웃었다.
반대로 일본 민요와 일본 가곡을 틀어 드리면 친정어머니는 흥얼거렸으나 시어머니는 조용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
 한 달이 돼 정기적으로 찾아간 정신과 의사와의 면담에서 나는 뜻밖의 변화를 알려 주었다.
“아! 하나꼬상, 뜸북은 뜸북새가 우는 소리고요, 뻐꾹은 뻐꾹새의 우는 소리랍니다. 그런데 왜 그런 소리를 했을까?”
“제가 선생님의 말씀대로 한국음악을 틀어 줬습니다.”
“그렇다면 하나꼬상?  ‘오빠생각’이란 동요를 계속 틀어 주면서 시어머니를 관찰해 보시지요. 그리고 어떤 변화가 있는 지 내게 알려 주세요.”
 집으로 온 나는 ‘오빠 생각’이란 한국동요를 여러차례 틀어 주며 시어머니를 관찰해 보았다.
뜻밖이었다. 무뚝뚝하고 표정이 없던 시어머니의 얼굴이 상기되면서 눈을 지긋이 감고 노래를 따라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시어머니? 무슨 노래지요? 무슨 노래?”
“어...고향. 고향. 오빠.....” 시어머니는 뜻밖의 말을 했다.
나는 이 사실을 강석호 정신과 의사에게 통보했다.

4.
 다음 토요일 아침, 정신과 의사는 예고도 없이 한국동요 CD를 여러 장 들고 불쑥 집으로 찾아왔다.
 “오늘은 시어머니에게 아주 특별한 날이 될 것입니다.” 그는 읏으면서 말했으나 은근히 긴장도 되는 표정이었다.
그가 하라는 대로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를 각자의 방, 침대에 누여 놓고 방 가운데에 CD 스피커를 장치 해 놓고 그가 직접 들고 온 한국동요 “오빠 생각”을 조용히 그리고 가끔은 강하게 틀어주기 시작했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국 뻐꾹새 숲에서 울 때,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나는 어린이 합창단, 바이올린, 하모니카 그리고 아코디온으로 연주된 오빠생각, CD를 반복해서 틀었다. 노래가 반복되면서 시어머니의 얼굴이 상기되더니, 아- 놀랍게도 동요를 따라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사르르 눈을 감았다.
 반대로 일본 사람인 친정어머니는 한국말을 이해 하지 못하기 때문인지 눈만 말똥말똥 뜨고 아무런 느낌도 없는지 천정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 때, 강석호 의사가 시어머니 옆으로가 손을 꼭 잡더니 조용히 물었다.
“김정선씨? 무엇이 보입니까?”
“예, 고향 땅, 여주, 여주가 보여요.”
“여주?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예. 세종대왕 릉이요, 그리고 7살 된 계집애들, 옛 친구들이요.”
“아직도 보입니까?”
“어-어-” 시어머니는 어 소리를 두 번 낸 후 조용히 잠이 든듯했다.
 -남한강 물이 북쪽으로 흐르는 곳 강 언덕, 절벽에 신륵사가 우뚝 솟아 있으며 강 아래로 나룻배가 여러 척 흘러가고 있다.  은은하게 절간에서 울려나오는 종소리가 애처러웠다. 낡은 기와집들과 초가집들이 여기저기에서 보였으며 7-8살 된 계집애들이 일렬로 서 소풍을 가는듯하다.
 세종대왕 능 앞에 곤룡포를 입은 대왕이 “조선사람을 위해 내가 훈민정음을 만들었노라”라고 선언하더니 이내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이들은 대왕이 사라진 방향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순간 일본순사들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야! 너희들 여긴 안 돼! 저리로 가라구! 너희들의 나라는 조선이 아니고, 대일본제국이야!”
계집애들은 순사들의 큰 칼에 놀라 무리를 져 남쪽으로 도망쳐 내려오다 보니 ‘명성황후의 옛집’이 보였다.
 “저기가 국모가 태어난 집이란다. 저리로 가자!”
그들이 그 집 앞에 이르니 집 앞에서 불이 타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야! 너희들 꺼져!” 일본 순사들이 언제 왔는지 역시 큰칼을 들고 눈을 부릎뜨고 후려 칠듯했다.
 “아! 국모가 불에 탄다. 불에......” 계집애들은 울기 시작했다.
순간, 아버지와 큰 오빠가 달려 나오며 큰 소리로 “정선아! 정선아!”라고 부르고 있었다.
 “아버지! 큰 오빠!” 정선은 소리 나는 쪽으로 달려 갔다.
 “너 거기 있으면 일본 순사한테 죽어. 집에 가자.” 아버지와 큰 오빠의 손을 잡고 집으로 달려갔다. 초가집 입구에 우물이 그대로 있었으며 버드나무가 그 옆에 크게 팔을 들어 그녀를 환영 하는 듯했다.
 1943년 6월이라고 붓글씨로 쓴 벽지가 눈에 띄였다.
 ‘1943년이라면, 내 나이 8살인데....’
다음날, 어찌 된 셈인가? 아버지가 일본순사를 따라 집을 나가면서 “ 정선아! 아빠가 서울 갔다가 오는 길에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마. 엄마하고 집에서 잘있어야 한다. 알겠니?  ”라고 말했다. 그러나 가을이 되어 기러기가 기럭기럭 울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남양군도로 징용으로 끌려가셨다.’ 라고 어머니가 일러 주었으나 무슨 말인 줄 몰랐다.
 옆집에 사는 14살 중학생 언니도 일본순사에게 끌려 울면서 어디론가 가버렸다. 좋은 직장을 준다고 하면서...
‘정신대로 끌려갔단다.’라고 어머니가 말해 주었으나 역시 무슨 소린 줄 몰랐다.

그리고 다음해 역시 1944년 7월, 논에서 뜸북새가 울고 산에서 뻐꾹새가 울던 날, 여주고등학교에 다니던 17살 된 큰 오빠가 역시 서울로 간다고 하며 일본 순사를 따라 나섰다. 어머니는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정선아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올께”라고 말했으나 그해 가을 서리가 나릴 때 기러기가 기럭기럭 울었으나 서울 가신 큰오빠도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비단구두는 커녕......
 “아빠! 큰 오빠!” 정선은 큰 소리로 불러 보았다.
꿈을 꾸고 있었다. 옆에서는 하모니카로 부르는 ‘오빠 생각’이 계속 울려 나오고 있었으며 그녀의 얼굴을 측은 한 듯이 내려다보고 있는 정신과 의사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아버지와 큰 오빠를 만나셨군요?”
 “........” 시어머니는 대답을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때,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 노래는 계속 흘러 나왔다.
 -여주 땅, 남한강 기슭, 신록사 근처에도 대포소리가 들렸다. 1950년 6월말이었다. 이번에는 북한 인민군들이 남으로 몰려 내려왔다.
 남쪽으로 피난 갔다가 살아서 돌아오니 서늘한 가을이었다.
 어머니와 14살 처녀가 된 김정선 그리고 18살짜리 여주고등학생인 둘째 오빠가 우리집 식구의 전부였다. 남양군도로 징용 갔던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으며 일본군 학병으로  잡혀간 큰 오빠도 돌아오지 않았다.
 
기러기가 기럭기럭 울기시작 하니 날씨가 덩달아 추워지기 시작했다.
 국군이 북진하면서 여주고등학교 3학년, 둘째 오빠가 국방색 군복을 입고 다리에는 갚바를 차고 등에 배낭을 메고 학도병이 되어 서울로 가면서 “정선아! 오빠는 꼭 살아서 돌아올게. 비단구두 사가지고.”라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대열에 합류해 북으로 올라갔다. 눈이 오고 다음해 진달래가 피고 초여름이 돼 뜸북새가 논에서 울고 뻐꾹새가 여주 숲에서 울었지만 작은 오빠도 돌아오지 않았다.
기럭기럭 기러기가 울 때 혹시나 했으나 아버지, 큰 오빠 그리고 작은 오빠, 어느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웬 행운이란 말인가? 뜸북새 노래가 울려나오면서 서울 가신 아버지, 큰 오빠 그리고 작은 오빠를 한꺼번에 만나다니.....
 “아빠! 큰 오빠! 작은 오빠! 보고 싶었어요. 비단 구두, 없어도 좋아, 보고 싶었어요.”
정선은 크게 손을 내저으며 웃고 있었다.-
                             *
 “선생님? 시어머니가 왜 저러죠?”
 “하나꼬상, 그대로 두세요. 시어머니는 지금 최면요법을 통해 고향에서 오빠를 만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행복하십니다. 그냥 그 동요를 틀어 드리세요. 눈을 뜨고 스스로 일어 날 때까지.”
 정신과 의사는 갖고 온 동요 CD들을 선물로 드린다고 하며 집을 나섰다. 그리고 내 손을 꼭 잡으면서 속삭였다.
 “하나꼬상. 당신은 시어머니와의 약속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당신은 친딸보다 더 사랑스러운 며느리입니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청주 시립 아동 합창단, 어린이들의 노래가 집 밖으로 울려나오고 있었다.
 
소설 끝
 
한국 문인협회 계간지 계절 문학에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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