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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날 살고 싶게 하는 냄새들

                                 서갑숙

"엄마한테는 기분 좋은 냄새가 난다.
후텁지근한 부엌에서 된장찌개를 끓이신다.…
왜 나는 된장찌개 냄새를 맡을 때마다 가슴이 저려오는 걸까."

눈이 많이 왔다. 머슴애들 사이에 섞여 눈싸움을 했다. 병걸이 녀석이 치사하게 연탄재를 넣은 눈덩이를 날렸다. 눈앞에 불이 번쩍했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나려고 했다. 녀석은 도망갔고 나는 얼어붙어 엉망이 된 털스웨터를 털며 집으로 들어왔다. 엄마가 갑자기 방학숙제 검사를 하셨다. 종합문제집 풀이 답을 맞히시던 엄마 눈이 도깨비처럼 커졌다. 꾀를 부리느라 답을 엉터리로 13241로 써 놓은 것을 엄마가 알아버리신 거다. 회초리로 손바닥 열 대를 맞았다. 정통으로 눈덩이를 맞았을 때도 꾹 참았던 눈물이 뚝뚝 흘렀다. 다이얼 비누로 세수를 하고 앉은뱅이 책상다리를 펴고 앉아 방학숙제를 했다.

된장찌개 냄새가 난다. 나무 도마가 송-딱, 송-딱 두부를 썰고 착 착 착- 대파를 썬다.

엄마한테는 특히 여름에 아주 기분 좋은 냄새가 난다. 후텁지근한 부엌에서 된장찌개를 끓이시느라 유리알 같은 땀방울이 흐르면 다 끓여진 찌개 냄비를 부뚜막에 올려놓은 뒤 윗저고리를 벗고 세숫대야 목간을 하신다. 다이얼 비누로 거품을 내어 뽀드득 씻으시곤 자개로 된 경대 앞에 앉으신다. 엄마의 젖은 곱슬머리에서 물방울이 굴러 떨어진다. 매끄러운 콧등을 타고 투명한 우윳빛을 뿜어내는 젖가슴과 목덜미, 둥근 어깨 위로 미끄러진 물방울에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 알갱이들이 무지개를 만들어 낸다. 엄마는 주황과 금빛으로 어울린 코티 분갑을 열고 분첩으로 겨드랑이를 톡톡 두드리신다. 분가루가 온 방 안을 춤추듯 떠돌아다니면 나는 코를 킁킁대며 무릎으로 다가가 엄마 품에 얼굴을 묻고 그 향기에 취해 눈이 반쯤 감겨 칭얼댄다. "엄마 냄새 너무 좋아~." "와 이카노~ 간지럽다. 된장찌개하고 밥 먹자~."

 

왜 나는 된장찌개 냄새를 맡을 때마다 가슴이 저려오면서 턱밑이 뻐근해지고 앞이마가 당기면서 콧등이 시큰해지는 걸까? 어디에서 다이얼 비누 냄새와 코티 분과 어우러진 엄마 체취가 나는 걸까? 차가운 겨울과 뜨거운 여름의 냄새가 동시에 나면서 눈물이 나오는 걸까? 엉터리 숙제를 들켜 회초리 맞았던 손바닥의 얼얼한 느낌도 생생하다. 엄마 품에 파고들어 어리광부리며 맡았던 엄마의 살 냄새가 지금도 선명하다.

결혼을 해서 나도 두 딸의 엄마가 되었다. 이혼을 하면서 어린 두 딸과 3년 정도 떨어져 살았던 적이 있다. 헤어짐의 아픔을 겪으며 꿈에서도 잊지 못했던 것은 아이들의 오이 속살 냄새였다. 지금도 기억이 선연하다.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날 밤, 셋이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다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평온하게 잠든 아이의 가지런한 속눈썹을 쓸어 봤다. 이불 밖으로 나온 올록볼록한 발가락을 쓰다듬고 파란 핏줄로 그려진 어린 손등을 살며시 어루만져보았다. 따뜻한 살의 촉감과 함께 여린 숨결 사이로 그토록 그리웠던 오이 속살 냄새가 피어올랐다. 나는 딸들과 한 이부자리에 누워 오이 숨결을 맡으며 따뜻한 체온을 느끼면서 잠들 수 있는 바로 지금이 나의 가장 행복한 순간임을 알았다. 찰나에 전 생애를 다 살아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엄마의 체취와 나의 행복한 냄새, 아이들의 오이 속살 냄새가 한데 어우러져 모녀 삼대가 서로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흐르는 것이 세월인지 엄마의 젖무덤은 깊은 골짜기로 가라앉아 갔고 날카롭던 콧등은 잔주름으로 빛을 잃어가더니 2009년 봄이 오기도 전에 엄마는 유명을 달리하셨다. 우리에게 뒷모습을 보이며 이 세상을 등에 지고 저세상으로 떠나셨다. 이제는 더 이상 엄마를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쟁쟁한 목소리 들을 수 없고 엄마의 된장찌개를 맛볼 수 없다. 엄마를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냄새 맡고 싶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가슴 저림이 나를 휘저어 놓는다. 엄마의 향기를 사무치게 만지고 싶은 날이면 나는 된장찌개를 끓인다.

만약 인간에게 냄새를 맡는 후각의 기능이 없다면 과거를 추억할 때, 그때 그곳으로 온전하게 돌아갈 수 있을까? 이성에 저장된 기억만으로 그 시간을 기억해낼 수 있을까?

프랑스어로 '냄새가 난다'고 할 때 동사 '상티르(sentir)'는 '오감(五感)' 중에서 냄새를 맡는 후각만을 지칭하면서 더불어 감각적이거나 감정적인 온갖 종류의 지각인 '느끼다'라는 의미도 포함한다. 인지(認知)와 관련된 뇌의 영역, 그중에서도 감성을 관장하는 우뇌는 냄새 감각 신경 세포가 수집한 냄새 정보를, 기억을 담당하고 있는 '해마'와 사회적 상호작용과 감정적 반응을 담당하는 '편도체'에 전달해서 심리 반응을 일으킨다고 한다.

모르는 두 남녀가 처음 만났을 때 흔히 '첫눈에 반했다'라고 한다. 어쩌면 '첫 냄새에 반했다'가 맞을 것이다. 인간의 후각기능이 퇴화하였다고 하지만 500만개 이상의 냄새를 저장할 수 있고 3000여종의 냄새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세상에 태어나 엄마 품에 안긴 아기가 17일만 지나면 엄마의 냄새를 무한한 사랑의 냄새로 평생 무의식에 각인한다고도 한다. 첫 냄새에 반한 상대에게 느끼는 전적인 신뢰, 완전한 사랑에 대한 기대감은 온몸과 마음을 다 주고 싶은 맹목의 합일을 꿈꾸게 한다.

나는 소원한다. 첫 냄새에 반해 혈연에게 갖는 절대적 사랑의 냄새를 닮은 남자와 만나기를. 아이와 한 이부자리에 누웠을 때 따뜻한 체온과 오이 숨결을 느끼며 행복에 젖어 '아~ 이래서 홀어미가 남편 없이 살아도 충만할 수 있구나' 생각한 것처럼, 회초리로 맞아 얼얼한 손바닥을 호호 불어주시며 감싸 안아주실 때 엄마의 체취를 맡으며 눈물이 났던 것처럼, 평생 손잡고 나란히 누워 같은 꿈을 꾸며 살고 싶다고.

사진: 서갑숙 배우 (필자)
그림: 김현지 기자
출처: Unknown, Inte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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