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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Essay] 막걸리 - 제 2장

2010.01.27 18:07

오세윤*65 Views:7033





         

                   막걸리 - 2장

                                                                    오세윤

         1973년 가을, 당시 전공의 3년차이던 나는 정부의 무의면(無醫面) 해소책에 동원되어 충남의 한 작은 면 보건지소에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며 혼자 지내고 있었다.

         마을엔 찻집과 주가 (酒家)가 각기 하나씩 있어 한 주일이면 서너 날씩, 일과를 끝내거나 저녁식사를 마친 동네 유지들- 우체국장, 파출소장, 농협지소장,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면장과 동네 어른 두엇- 이 다방에 모여 관내에 하루 일어난 일들, 해결해야할 문제들을 한담처럼 이야기했다. 한두 식경이 지나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이웃 주점으로 자리를 옮겨 막걸리 판을 벌렸다. 

         사십 이쪽저쪽일까 싶은, 아담한 키에 포실한 몸매를 한 주모는 알듯 모를 듯 다리 하나를 절었다. 하지만 보기 언짢을 정도도 아니었고 자신 또한 괘념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대여섯 번을 드나들고 나서야 나도 그녀가 정상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교통사고라고 했다.

        주점은 저녁시간에만 문을 열었다. 혼자 사는 주모는 낮엔 읍내 시댁에 가 있다 하교하는 아들을 맞아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고 난 뒤 들어와 가게를 열었다. 자정이 되면 어김없이 영업을 파했다.

         주모는 한결같이 한복차림을 했다. 바깥나들이를 할 때엔 조금 밝은 색상의 한복을 입었지만 가게에서는 대부분 짙은 남색치마에 치자색 저고리를 입고 일을 했다.

         여름한철 텃밭을 가꾸느라 볕에 그을린 얼굴에 보조개를 파며 주모는 누구라 할 것 없이 반갑게 웃으며 맞았다. 초면이고 자시고가 없었다. 그렇다고 수다를 떨거나 나부대는 편도 아니었다. 손님상에 끼어 앉아 대작을 하는 때도 월매가 아니라 향단이처럼 새물새물 웃기만 했다. 가끔 재미난 농담에 웃을 때면 실낱 눈썹 아래 반달눈이 초승달로 감겼다. 그래도 주모의 최상 매력 포인트는 역시 가슴이었다. 탁상에 몸을 숙여 음식을 차릴 때 언뜻 저고리 섶 사이로 보이는 살품이 분처럼 하얬다.

        첫 대면에서부터 주모는 낯설지가 않았다. 오래 알고 지내던 먼 전날의 이웃집 누이 같은 익숙한 느낌이었다. 전란 전 한 동네에 살던 사람이었나? 하지만 주모는 원래부터 이 고장 사람으로 여고를 졸업하고 대처로 출가했다 혼자되어 돌아와 주점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손님 어느 누구도 주모에게 하대하지 않았다. 주모도 모두를 이웃으로 대했다. 어느덧 나도 단골이 되어 주막을 드나들게 되었지만 혼자서는 어쩐지 쑥스러워 여럿과 어울릴 때여야만 발길을 했다.

         파견근무를 20여일 남긴 2월 초, 나는 몇 대 선조가 호조판서를 지냈다는 윤씨댁 열두 칸 고택에 왕진을 하게 됐다. 안방 깨끗한 금침위에 자리보존하고 누운 노마님은 기침이 심한데다 열이 높았다. 자세자세 청진을 했지만 다행히 폐렴으로까지는 진행되지 않았다. 며칠 동안 곡기를 거의 끊다시피 하신 터라며 아들이 영양주사를 원했다. 왼 팔뚝 혈관에 영양주사액을 연결하고 혹시나 싶어 항생제도 투여했다. 

         방에 들어서 인사를 드릴 때도, 문진에도 노마님은 눈을 감은 채 입을 거의 열지 않았다. 곁에 무릎을 꿇고 앉은 아들이 대신 증세를 이야기했다. 진찰할 때도 혈관에 주사침을 꽃을 때도 환자는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기력이 쇠하여 그런 건지 아니면 양반 댁 마님이라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익숙지 않아 그런 건지는 몰라도 아무튼 서늘토록 무감정했다. 혹시 말을 못하시는 건가.

         모든 처치를 마치고 일어나는 나를 도로 앉히며 가늘게 눈을 뜬 노마님이 미리 준비를 해 놓았던 듯 베개 밑에서 빳빳한 지폐 두 장을 꺼내어 불쑥 내 앞에 내밀었다. “받아가시게.”

         졸지에 당한 예상치도 못한 일에 당황하며 노마님을 쳐다봤지만 그때는 벌써 노마님은 다시 눈을 감은 채 처음의 서느런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의사란 서얼이나 하는 중인계급의 직책이라더니 노마님에게는 아직도 ‘아랫것’으로 취급해 위엄을 보여야한다는 의식이 남아있어서였던가. 지긋한 연세와 종갓집어른이 갖춘 품위에 대한 존경심으로 특별히 더 정성을 다해 진료한 스스로가 문득 초라하게 느껴졌다. ‘선생님’이란 존칭을 받으며 기고만장하던 자부심이 급전 직하되는 고약한 기분이었다.

         밖에는 해가 아직 한 뼘이나 남아 있었다. 논둑길을 따라 너른 앞 들판을 멀리 돌아 땅거미가 진 다음에야 나는 불 켜진 주점으로 후줄근하게 들어갔다. 

         손님이 아직 들지 않은 가게에서 주모는 안방에 앉아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나를 본 주모가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냐 무슨 바람이 불었냐 호들갑을 떨며 반색해 맞는다. 불빛아래 내 얼굴을 본 주모가 웬일로 피부가 그리 까칠하냐며 대뜸 소매를 잡아끌어 불문곡직 경대 앞에 앉히더니 갑자기 누이라도 된 듯 자기가 바르던 크림을 손가락 끝으로 떠내 내 이마, 양 뺨, 코, 턱에 찍어놓고는 찬찬히, 부드럽게 문질러 넓게 펴 발라줬다.

         그날, 온 저녁내 나는 안방에 따로 앉아 막걸리를 한말이나 되게 들이켰다. 어느 사이 서창에 떴던 초승달도 지고 밤은 칠흑처럼 깊어갔다. 왜 손님은 그날따라 아무도 오지 않았을까. 어이없어라. 정신이 들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기우는 해의 햇살이 서창으로 가득 비쳐들고 머리맡에는 식어 차디찬 해장국이 소반위에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이불을 걷고 옷매무새를 살펴보았지만 어제 입은 그대로 딱히 흐트러진 곳은 없었다. 정녕 아무 일도 없었던 걸까. 그 뒤로 이웃들과 어울려 대여섯 번이 넘게 더 주점을 찾았지만 주모는 낌새를 챌만한 별다른 표정을 지어보이지도 않았고 비밀을 공유하는 두 사람 사이에만 통하는 고 달큼하고 은밀한 눈길도 건네지 않았다. 평시나 다름없이 웃고 다름없이 말했다. 나 또한 그날 밤 기억을 더듬어도 어렴풋 아련하기만 했다. 

         약간 거칠고 통통한 손가락을 주물럭거린 것도 같고, 저고리 섶에 꼬꾸라지듯 얼굴을 파묻은 것도 같고, 덤덤하게 마주 앉아 애꿎게 술잔만 비운 것도 같고- .

         어쩌자고 나는 그날 밤 혼자인 걸 기화로 안방에 느긋하게 자리 잡고 앉아 호기롭게 말술을 들이켰을까. 딴 마음이 처음부터 있었던 걸까. 주모를 본 첫 순간부터 내 가슴은 나도 모르게 끓고 있었던 걸까.

         주모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여전히 그 자리에서 영업을 하고 있을까. 떠나오며 써놓고 온 내 유치한 시를 정말 액자에 넣어 걸어놓고 초승달 애틋하던 그 밤을 떠올리고 있을까.


        각시 적 내님이 그린 실눈썹
        그 밤을 못 잊어 달로 떠올라
        구름자락 살짝 들어 한끝 내밀고
        이 밤도 정분(情分)내자 나를 부르네

        다복솔 가지런한 서산마루에
        그 저녁 지던 해가 붉었노라고
        수줍은 듯 구름자락  끌어안더니
        이 밤도 정분내자 나를 부르네

        밤 깊어 뒷산 숲 어둠 짙으면
        옹달샘 맑은 물에  얼굴 씻고서
        가지 끝에 올라앉아 꽃분 바르고
        이 밤도 정분내자 나를 부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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